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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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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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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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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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29

DUMMY

가마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연검은 머리를 식히고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둔덕에 올라선 그는 냉정히 상황을 판단해 보았다.


“······.”


진짜로 덤비려는 건가?


겨우 이삼백 남짓으로 일만의 전사들한테?


화가 가라앉고 나자 약간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처음이다 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을 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읍주였던 때부터 유읍은 이미 암강 이남에서 으뜸가는 읍락이었다.


일만의 전사로 이름이 높아진 뒤부터는 감히 덤벼오는 자들이 없었고, 간혹 버금가는 다른 읍락과 부딪혀도 피 흘리며 싸우지는 않았었다.


일만의 전사를 불러 모아서 함성 몇 번 질러주고 나면 반드시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으니까.


연검은 우선 일만 전사를 전진시켜 보기로 했다.


둔덕 위에서 북을 치고 악기를 연주하여 신호를 보내자, 촌주들이 각기 촌락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출발이 어느 쪽에서는 빠르고 어느 쪽에서는 늦었다.


연검은 둔덕 위에서 그로 말미암은 형세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몇 걸음 걷자마자 곧바로 어지럽게 흐트러져 버리는 전사들.


어느 쪽에서는 빨리 걷고 어느 쪽에서는 천천히 걷다 보니 앞줄이 전혀 반듯하지 않았다.


이에 촌주들이 서로 줄을 반듯하게 맞추고자 나름대로 속도를 조절했는데, 하필이면 그 합이 어긋나 버려서 마치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멈······ 멈춰라! 멈춰! 다시 돌아와라!”


연검은 그 위태로운 형세에 허겁지겁 분부를 내렸다.


하지만 그 분부 역시도 마음처럼 재빨리 전달되지 못했다.


나아가기 시작한 순간부터 일만의 전사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다. 멈추고 싶다고 해서 바로바로 멈출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앞사람이 멈추어도 뒷사람은 이를 모르고 계속해서 나아가니, 결국 앞사람도 그에 떠밀려 다시 나아가야만 했던 까닭이었다.


둔덕 위에서 미친 듯이 북과 징을 쳐대도 일만의 전사들이 내는 소음에 파묻혀 버렸고, 용케 악기 소리를 듣는다 해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신호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결국에 연검은 사람을 보내서 촌주와 장로들한테 분부를 전해야 했는데, 일만 전사들을 헤치고 들어가서 어디에 있는지 모를 촌주와 장로들을 찾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그렇게 간신히 분부를 전해도 촌주와 장로들이 다시 전사들을 멈춰 세우는 데에 또 한참이 걸렸다.


결국, 그리 정신없는 와중에 사고가 벌어졌다.


유난히 걸음이 빨라서 앞으로 툭 돌출되어있는 한쪽의 전사들이 급하게 속도를 늦추다가 그만 발이 꼬여 와르르 넘어져 버린 것이었다.


앞줄에서 전사들이 넘어지자 뒤에서 따라오던 전사들도 거기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멈추고 싶어도 뒤에서 끝없이 떠밀어대니 불가피한 결과였다.


넘어진 앞사람 위에 뒷사람이 엎어지고, 그 뒷사람이 또 엎어졌다.


그나마 날쌘 자들은 앞사람의 등을 밟고 올라타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무게가 아래에 깔린 사람들을 깔아뭉개고 짓눌렀다.


가장 밑에 깔린 전사들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터져서 죽어버렸다.


그 위에 층층이 깔린 전사들은 좀 더 멀쩡한 꼴로, 그러나 좀 더 긴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층층이 깔린 전사들은 등과 가슴이 눌려 숨을 쉬지 못했고, 팔다리를 바둥거릴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천천히 질식했고, 때로 부러진 갈비뼈에 폐를 찔린 경우는 스스로의 피에 익사해버렸다.


수백 명의 전사가 그리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본 운부의 부민들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두려움마저 완벽하게 사라졌다.


부민들은 폭소를 금치 못했다.


“크하하하하하하!”

“저놈들은 걷는 법도 모르는 건가?”

“엄마한테 가서 걸음마부터 다시 배우고 오너라!”


병장들이 운유에게 말했다.


“대인.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토인족들이 뒤엉키고 있는 저곳을 한꺼번에 들이친다면······.”


운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곳은 아니다.”

“토인족의 돌팔매질을 주의하시는 까닭입니까?”

“그래.”


병장들은 납득했다. 그들도 이미 여러 차례 토인족들과 싸우며 그 돌팔매질하는 솜씨를 겪어봤기에.


“지금 들어가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기마민족이 남녀노소 활을 잘 쏘듯 토인족은 남녀노소 돌을 잘 던졌다.


유읍의 토인족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돌팔매질을 잘했다.


운유는 문득 회상했다.


‘이백 보 밖에서 멧돼지 머리통을 깨버리는 토인족도 있었지.’


비록 모두가 그만한 솜씨를 지니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무튼 운유는 토인족들의 돌비를 무릅쓰며 돌격을 감행할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슬슬 움직여 볼까.’


그는 앞으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세 개의 병대에 견술을 더하여 이루어진 첫 번째 무리가 운유를 뒤쫓았다.


동시에 호루라기를 불자 스물다섯 개의 병대로 이루어진 두 번째 무리가 벌판을 오른쪽으로 크게 우회하기 시작했다.


운유와 첫 번째 무리는 벌판을 가로질렀다.


둔덕 위에서 이를 지켜본 연검은 전사들이 넘어지고 있는 곳으로 마귀자들이 들이닥쳐 오리라 짐작했다.


넘어지고 뒤엉킨 자기네 촌락 전사들을 수습하던 촌주도 그와 똑같이 짐작했다.


그래서 연검이 굳이 분부하지 않아도 스스로 대비를 했다.


촌주는 돌팔매질 잘하는 전사들을 가려 뽑아서 앞으로 내세웠다.


다른 촌주들도 마귀자들의 움직임에 비슷하게 대처했다. 저마다 촌락에서 돌팔매질 잘하는 전사들을 뽑아 앞세웠다.


돌은 화살과 달리 곡사가 불가했다. 게다가 무릿매를 돌리기 위해서는 활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하여 돌팔매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극히 일부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체가 일만 명쯤 되면 그 극히 일부조차 적잖은 숫자가 되는 법이었다.


운유는 토인족의 돌멩이가 날아올 수 있는 거리를 가늠했고, 그 거리 부근까지만 접근했다.


그리고 연검의 짐작과 달리 토인족들이 넘어진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토인족들이 넘어진 곳은 왼쪽이었는데, 첫 번째 무리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오른쪽의 끄트머리에 가까운 곳이면서 아울러 다른 곳들보다 좀 더 돌출된 곳이었다.


운유와 첫 번째 무리는 그곳을 마주 보며 알짱거렸다.


이에 그곳의 토인족 전사들이 무릿매를 빙빙 돌려 돌멩이를 던져댔는데, 거리가 멀고 첫 번째 무리의 숫자가 워낙 적어서 아무도 맞추지 못했다.


운유와 첫 번째 무리는 아예 말에서 내려 토인족들을 마주 보았다.


“돌멩이를 돌려줘라.”


첫 번째 무리는 운유의 분부대로 토인족들이 날린 돌멩이를 주워다가 무릿매에 넣고 던졌다.


그들은 굳이 표적에 겨누어 던지지 않고 하늘을 향해 던졌다.


하늘 높이 날아간 돌멩이들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토인족들이 우글거리는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딱! 따아악! 머리통 깨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렸다.


아무렇게나 돌을 던져도 토인족들이 족족 맞고 쓰러지자 첫 번째 무리는 신이 났다.


반면 토인족 전사들은 마귀자들의 짓거리가 얄미워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자연히 첫 번째 무리와 마주한 곳의 토인족들은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첫 번째 무리는 뒷걸음질 쳐서 좁혀진 만큼 다시 거리를 벌렸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토인족들이 속도를 높였다.


첫 번째 무리도 따라서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말을 타지 않고 고삐를 잡아끌면서 가볍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뒤돌아 돌멩이를 날려 주었다.


“이······! 이이······! 이 쥐새끼들이이이!”


참다못한 토인족들이 마침내 폭발했다.


촌주와 장로들부터가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첫 번째 무리와 마주한 곳의 토인족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그제야 첫 번째 무리는 말에 올라탔다.


운유가 손짓했다.


첫 번째 무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나팔과 피리를 힘껏 불고, 구리 종을 흔들어댔다. 가지고 있는 모든 악기를 써서 최대한 크고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도발에 긁혀 달려 나온 토인족들의 이목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도망치는 첫 번째 무리에게 완전히 집중되었다.


이때 둔덕 위에서 지켜보던 연검은 한쪽 촌락의 전사들이 제멋대로 달려나가자 당황하고 있었다.


‘돌아오게 해야 하나?’


하지만 그 분부가 먹힐 리 없었다. 보아하니 촌주와 장로들부터가 앞장서서 달려나가고 있었으므로.


‘차라리 이게 옳은 방법일 수도 있겠군. 일만의 전사가 한꺼번에 움직이면 통제가 안 되니, 일부만 움직여서 싸우게 하고 나머지는 그 뒷받침을 해주는 게······.’


연검은 점점 꼬여가는 듯한 상황을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납득시켰다. 그러지 않고서는 가슴속에 싹트는 불안감을 숨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즈음 연검의 시야 한구석에서 두 번째 무리가 나타났다.


스물다섯 개의 병대로 이루어진 두 번째 무리는 벌판을 크게 우회해 토인족들의 시야에서 잠시 벗어나 있다가 첫 번째 무리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두 번째 무리는 첫 번째 무리를 쫓느라 길쭉하고 느슨하게 흩어져 있는 토인족들을 향해 질주했다.


스물다섯 병장이 외쳤다.


“우리의 군장을 위해!”


스물다섯 병대가 이어 외쳤다.


“목숨 바치리!”


극에 달한 기세가 토인족들의 옆구리를 때렸다. 돌풍처럼 휘몰아쳐 도끼처럼 꽂힌 스물다섯 병대는 그대로 토인족들의 살을 가르고 지나갔다.


첫 번째 무리에게 눈과 귀가 쏠려 있었던 토인족들은 변변한 대응조차 못 하고 속절없이 쓸려나갔다.


돌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쓰러져서 신음하는 토인족들이 즐비했다. 눈 깜짝할 새에 허리가 잘려버린 토인족들은 충격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그리고 우왕좌왕하는 토인족들을 향해 첫 번째 무리가 선회했다.


“······.”


운유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왕좌왕하고 있으나 여전히 많은 숫자의 토인족들.


반백 어림의 기마전사만으로 달려든다면 그보다 무모한 짓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철마를 탄 천손은 부수기 위해 태어난 존재.


부서지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맥.”


그는 반추했다.


고꾸라진 삼천의 전사를.


꺾여버린 삼십 철혈용사의 깃발을.


끝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한 쇳빛의 군마를.


“이번에는 끝까지 달려보자고.”


철마의 호흡과 심장의 박동이 감응했다.


말발굽이 땅을 찍는 박자에 몸을 맞췄다.


발굽이 땅을 찍는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길들인 발굽 짐승의 막강한 힘이 온몸의 피를 타고 흘렀다.


자신의 발바닥이 땅을 밟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고.


하늘 끝까지라도 달려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는 눈을 떴다.


누런 창끝은 햇살처럼 뻗어 나가, 개미 떼처럼 벌판을 시커멓게 물들인 토인족들을 가리켰다.


기마전사들의 눈길이 그 창끝을 따랐다.


끔찍이도 많은 숫자의 토인족들.


숨이 턱 막혀올 만큼 많은 숫자의 토인족들.


한겨울에도 기마전사들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이긴다 한들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람으로서 불가피한 두려움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기마전사들의 두려움을 느끼며 되뇌었다.


한 가닥의 용기를 활시위에 화살처럼 놓았다.


“기뻐해라.”


그는 죽음의 꽃밭을 피워내는 자.


그는 매캐한 재와 연기를 안개처럼 두르고 다니는 자.


“내가 너희를 가호한다.”


검은 평원 최강의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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