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처량한날
작품등록일 :
2024.07.31 18:32
최근연재일 :
2024.09.06 18:3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383,400
추천수 :
13,109
글자수 :
176,932

작성
24.08.22 18:30
조회
10,423
추천
422
글자
12쪽

바람이 이는 곳-20

DUMMY

앞쪽에서 정찰하던 척후들이 낯선 기마들과 같이 달려오자, 병장들은 습격을 받은 줄 알고 활을 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운유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척후와 낯선 기마들이 소리쳤다.


“토인족들이 오고 있습니다!”


토인족이 오고 있다는 얘기만으로는 무슨 사정인지를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척후들이 습격받은 상황은 아님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낯선 기마들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멈췄고, 척후들은 운유에게 가까이 왔다.


척후들은 낯선 기마들을 가리키며 사정을 설명했다.


“저들이 갑자기 달려오길래 처음에는 습격인 줄 알고 맞서려 했습니다. 한데 저들이 곡절을 말하길, 토인족을 사냥 나가던 길에 도리어 매복에 당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했으나 곧이어 이민족들이 몰려왔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더라고 척후들은 말했다.


“그 이민족들은 몸에 피가 묻어 있었고, 몇몇은 단이족의 머리를 잘라서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나무활을 쏘고 투창과 돌을 던지며 저희를 쫓아왔습니다.”


척후들의 보고는 약간 두서가 없었지만, 이해하는 데에 별 지장이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운유는 차분하게 물었다.


“숫자가 얼마나 되었지?”

“숫자를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눈에 보인 것은 수십이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평야와 달리 산중에서는 장애물이 많았던 탓에 척후들은 토인족의 머릿수를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


운유는 낯선 기마들을 불러오게 했다.


“대인! 저희는 운부군 운형 대인의 전사들입니다.”


낯선 기마들이 운유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너희는 토인족을 사냥하러 간다더니만. 뭘 어쩌다 도리어 매복에 당한 거냐?”


운부군 운형의 전사들은 몹시 분해하며 답했다.


“저희가 토인족을 사냥하러 갈 때면 늘 지나는 협곡이 있는데, 오늘 그 협곡에 들어서자 위에서 토인족들이 돌과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하필이면 군장께서 바위에 깔리시는 바람에 저희는 손 써볼 틈도 없이 그만······.”


운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 오늘 운부군 운형이 토인족의 매복에 당한 불행은 자초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토인족들은 아마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모르고 있겠지. 알았다면 너희를 쫓지 않았을 테니까.”


척후들을 일별한 운유는 삼십 명의 병장들 가운데 절반에게 분부했다.


“이 녀석들을 쫓아 이곳으로 오고 있을 토인족을 요격해라. 토인족들은 기세가 올라 있겠지만, 동시에 방심하고 산만한 상태일 것이다. 단숨에 덮쳐서 어지럽게 휘젓는다면 능히 무찌를 수 있겠지.”


분부받은 열다섯 명의 병장들이 전사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설욕을 간절히 원했던 운부군 운형의 전사들도 거기에 함께 끼어서 갔다.


나머지 병장들은 운유를 따라 대기했다.


휘오오오오!


겨울바람이 얼굴을 따갑게 때렸다.


나무가 흔들리고, 가지에 쌓여 있던 눈더미가 후두둑 떨어졌다.


추운 바람이 불자 운유는 귀까지 덮는 털모자를 푹 눌러썼다.


창을 가슴에 안고 팔짱을 낀 그는 고개를 숙여서 옷깃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 깃털 속에 부리를 파묻는 새처럼.


운부의 부민들도 저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전사들이 토인족을 무찌르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추위와 싸워야 했다.


“근데 이러면 죽은 운부군의 부락은 네가 거두어도 좋은 것 아냐?”


운린이 돌연 떠오른 생각에 운유에게 물었다.


운유는 잠든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로 대꾸했다.


“부락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 해봐야 여자, 아이, 노인이 대다수일 거야. 그걸 거두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지겠지.”

“아. 맞아. 그걸 생각 못 했네······.”


군장과 전사들이 떼죽음을 당했으니, 그 부락에 남겨진 사람들의 앞날이야 뻔했다.


“사람은 놔두고 물자만 털어올까?”


문득 운유가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운부군 운형과 그의 전사들이 죽었으니, 그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비축해둔 물자를 아주 손쉽게 털어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병장들에게 수레에 짐을 얼마나 더 실을 수 있겠느냐 물어봤다.


“대인. 수레에 빈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병장들이 아쉬워하며 답했다.


“물론 그 부락에서 수레를 빼앗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운유는 고개를 저었다. 수레가 더 늘어나면 이동하는 속도가 너무 느려졌다.


그들은 다시 침묵 속에서 추위를 견뎠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운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법 오랫동안 기다렸음에도 전사들이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전사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복귀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 역시 이에 의아해하는 기색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인지 알아봐야 하잖겠습니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을 상정해야 합니다. 토인족들이 또 무슨 계략을 썼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병장과 전사들이 술렁였다.


운유는 병장 한 명에게 전사들을 데리고 가서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한데 그 병장과 전사들이 출발하기 직전, 토인족과 싸우러 나갔던 전사들이 복귀했다. 그들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있었는데, 고양된 안색과 조마조마한 안색이 혼재해 있었다.


“군장께 보고드립니다! 분부대로 토인족을 무찌르고 돌아왔습니다!”


한 차례 숨을 고른 병장들은 좀 더 소상하게 보고했다.


“토인족은 그 머릿수가 몹시 많아서 실제로는 수백을 가뿐히 넘었습니다. 대인께서 분부하신 대로 기세등등하여 산만하게 달려오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 엄청난 숫자에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풀씨를 길러 먹는 토인족은 천하의 여러 민족을 통틀어 그 번창함이 단연 제일이었다.


촌민이 수천여 명인 촌락도 심심찮았고, 수백 명의 건장한 남자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토인족은 그 엄청난 숫자와 별개로 실속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갑자기 나타나자 마주 달려가자 그들은 큰 공포와 혼란에 빠졌고, 저희는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활을 쏘며 달려가 무기를 휘두르자 토인족들은 우왕좌왕하며 변변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더랬다.


“저희는 도주하는 토인족을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죽였는데,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를 셀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운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병장들이 나무랄 데 없이 그의 분부를 완수했으니 칭찬해줌이 옳았다.


“잘했네. 그게 끝인가?”


그의 물음에 조마조마한 안색이던 병장들이 나서서 답했다.


“그 뒤로 저희는 즉시 복귀하고자 하였습니다. 한데······.”


병장들은 운부군 운형의 전사들을 힐끔 흘겨보며 말했다.


“저들이 그대로 여세를 몰아서 협곡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희가 거절하자 자기들끼리만이라도 가겠노라 하며 그대로 달려갔지요.”


이에 그들을 따라가야 하느냐 이대로 돌아가야 하느냐 병장들끼리 의견이 갈렸고, 결국에는 따라가게 되었다고 했다.


“협곡에 당도하자 전사들의 시신에서 전리품을 수거하는 토인족들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저희를 보고 허둥지둥하며 달아났고, 저희는 그대로 쫓아갔습니다.”


협곡을 벗어나서까지 추격이 계속됐고, 어느 낭떠러지에 이르게 된 토인족들은 그 아래로 몸을 던져 모두 죽어버렸다고, 병장들은 그렇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였나.’


비로소 전사들의 복귀가 늦어진 이유와 일부 병장들의 안색이 조마조마했던 이유를 알게 된 운유는 턱을 긁적였다.


그는 토인족을 무찌르고 온 열다섯 명의 병장들을 둘러보았다.


고양된 안색의 병장들은 협곡까지 가서 토인족을 크게 무찔렀음에 뿌듯해하는 이들이었고, 조마조마한 안색의 병장들은 협곡까지 가서 불필요한 위험을 무릅썼음에 자책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운유의 칭찬 혹은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장들은 장차 수십 수백의 전사를 통솔하게 될 수도 있다.”


다소 뜬금없는 운유의 발언에 병장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오늘처럼 다른 병장들과 함께 싸우러 나가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많은 전사를 데리고 싸우러 나가겠지.”


운유는 삼십의 철혈용사를 손발처럼 부려 삼천의 전사를 통솔했던 한때를 회상했다.


“분명 그때가 되면 또 다른 협곡이 결단을 강요할 것이다. 협곡까지 가야 할까. 가지 말아야 할까. 다른 병장들과 상의하지 못하고 혼자서 판단해야만 할 것이며, 혼자서 책임을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병장들은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나치게 신중하다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지나치게 과감하다면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그러니 너희는 서로의 신중함과 과감함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병장들은 일제히 예를 표하며 엄숙하게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인!”



+++



운부의 행렬은 토인족의 시체가 뒤덮인 곳을 지나 협곡에 이르렀다.


협곡에는 바위에 깔리고 화살에 맞아 죽은 기마전사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그중 유난히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래로 흘러나온 피가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운유는 큰 바위에 깔려 덧없이 죽었을 동족을 상상했다.


운부군 운형을 따라 사냥을 나왔던 전사들 가운데 요행히 목숨을 건진 전사는 스물 남짓에 불과했다.


“너희는 어쩔 테냐?”

“저희는 대인을 섬기고 싶습니다.”


살아남은 전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어 절하며 간청했다.


“너희 아내와 아들딸을 받아주겠다. 너희 부락을 지키기 위해 남겨둔 전사들이 있을 테지? 그들과 그들의 처자식도 받아주겠다. 그 밖의 다른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받아주지 않겠다.”


부락에 남은 여자, 아이, 노인들은 곧 죽은 전사들의 가족들이었다. 그들을 버려야 한다는 뜻인즉 전사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여자, 아이, 노인들까지 받아주십사 청할 만큼 염치없는 전사는 그중 없었다.


“···예!”


잠시간 주저하던 전사들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냉혹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냉혹한 땅이었다.


새로 거둔 전사들이 가족을 데리러 다녀올 동안, 운유는 토인족들을 몰아넣어 죽였다던 그 낭떠러지를 가 보았다.


낭떠러지 아래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하얀 눈밭 위에 파묻혀 있는 토인족들이 보였다.


그는 불현듯 병장들을 돌아보았다.


“운부군 운형의 불행은 필연과도 같았다. 그의 실책을 말해봐라.”


한 병장이 앞으로 나서서 답했다.


“사냥꾼은 짐승이 다니는 길에 덫을 놓는 법입니다. 매번 협곡을 지났기에, 토인족들은 그 길을 알고 매복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를 더 말해봐라.”


다른 병장이 나서서 답했다.


“척후를 쓰지 않았습니다.”


운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곡은 함정을 파기 좋은 지형이었다. 그처럼 위험한 지형은 일단 피해야 했고, 불가피하다면 경계를 철저히 해야 했다.


그런데 운부군 운형은 협곡을 피하지 않았으면서 경계를 철저히 하지도 않았다.


일찍이 운유의 척후가 운형의 전사들을 정탐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운형이 정찰에 태만했기에 운유의 척후가 운형의 전사들을 정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위험한 장소를 피하고, 위험한 장소에서 조심히 처신하는 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병장들은 운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깊이 이해하고 마음에 새겼다.


얼마 후 새로 거둔 전사들이 가족을 데리고 합류했다. 덕분에 지난번 약탈자들과 싸우며 죽은 전사들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


운부의 행렬은 첩첩산중을 지났고, 큰 강에 이르렀다.


운유가 그 강의 이름을 일컫건대 암강[暗江]이라 하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천하를 약탈하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중단 공지 +47 24.09.07 2,494 0 -
공지 세계관 설정(2024-08-23 갱신) +2 24.08.17 6,603 0 -
공지 평일 18:30분 연재됩니다 24.08.07 9,214 0 -
32 바람이 이는 곳-32 +24 24.09.06 4,669 258 11쪽
31 바람이 이는 곳-31 +12 24.09.05 5,509 267 13쪽
30 바람이 이는 곳-30 +18 24.09.04 5,895 330 14쪽
29 바람이 이는 곳-29 +13 24.09.03 6,394 296 12쪽
28 바람이 이는 곳-28 +23 24.09.02 6,971 298 13쪽
27 바람이 이는 곳-27 +17 24.08.30 7,776 311 11쪽
26 바람이 이는 곳-26 +20 24.08.29 7,864 319 13쪽
25 바람이 이는 곳-25 +28 24.08.28 8,322 366 13쪽
24 바람이 이는 곳-24 +37 24.08.27 8,674 365 12쪽
23 바람이 이는 곳-23 +11 24.08.26 8,888 354 12쪽
22 바람이 이는 곳-22 +10 24.08.26 8,700 317 13쪽
21 바람이 이는 곳-21 +41 24.08.23 10,514 412 14쪽
» 바람이 이는 곳-20 +25 24.08.22 10,424 422 12쪽
19 바람이 이는 곳-19 +26 24.08.21 10,548 439 11쪽
18 바람이 이는 곳-18 +21 24.08.20 10,867 458 11쪽
17 바람이 이는 곳-17 +24 24.08.19 11,201 457 12쪽
16 바람이 이는 곳-16 +25 24.08.16 11,562 437 13쪽
15 바람이 이는 곳-15 +17 24.08.15 11,067 406 11쪽
14 바람이 이는 곳-14 +16 24.08.14 11,186 372 16쪽
13 바람이 이는 곳-13 +15 24.08.13 11,693 371 13쪽
12 바람이 이는 곳-12 +18 24.08.12 12,055 384 12쪽
11 바람이 이는 곳-11 +14 24.08.09 12,535 400 13쪽
10 바람이 이는 곳-10 +10 24.08.08 13,341 394 13쪽
9 바람이 이는 곳-9 +15 24.08.07 13,691 440 11쪽
8 바람이 이는 곳-8 +13 24.08.06 13,921 451 16쪽
7 바람이 이는 곳-7 +13 24.08.05 15,049 481 18쪽
6 바람이 이는 곳-6 +22 24.08.04 15,844 48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