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처량한날
작품등록일 :
2024.07.31 18:32
최근연재일 :
2024.09.06 18:3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383,407
추천수 :
13,109
글자수 :
176,932

작성
24.08.09 18:30
조회
12,535
추천
400
글자
13쪽

바람이 이는 곳-11

DUMMY

흙먼지가 차츰 가라앉고, 갈가리 찢겨 나뒹구는 늑대와 핏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맥은 죽은 늑대의 배에 머리를 처박고 그 내장과 고기를 파먹었다. 소의 넓적다리뼈도 부수는 튼튼한 이빨과 강한 턱으로 늑대의 가죽을 뜯어 벗기고 연한 속살을 씹어먹었다.


운유는 맥이 식사하기 편하게 땅에 내려왔다. 단이족 청년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아직 숨이 붙어있는 늑대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있었다.


절뚝이며 도망하던 늑대가 활에 맞아 고꾸라지는 장면이 시야에 담겼다.


운유는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별안간 번개처럼 손을 움직여 활을 잡더니, 뒤돌아서면서 살 먹인 시위를 당겼다.


흙먼지 속에서 엎드려 있던 커다란 늑대가 그를 향해 도약해왔다.


운유는 무심한 표정으로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늑대가 그를 덮쳤다. 운유와 늑대는 한 덩이가 되어 땅바닥에 쓰러졌다.


“대인!”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병장이 아연하여 달려왔다. 병장은 운유를 구하기 위해 창을 찌르려 들었다.


그런데 병장이 창을 내지르기 직전, 운유를 덮친 늑대의 몸이 들썩이더니 옆으로 밀려났다.


“대, 대인. 괜찮으십니까?”

“그래.”


운유는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서더니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제야 병장은 안심하며 운유를 덮쳤던 늑대를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다른 늑대들보다 반 배쯤 커다랗고, 눈가에는 흉터가 아로새겨져 있는 늑대. 아무래도 이 늑대 떼의 우두머리였던 성싶었다.


“화살이 눈을 파고들어 뇌를 꿰뚫었군요.”


병장은 화살을 뽑아서 철촉에 묻은 피를 닦은 후, 운유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너 가져라.”

“예, 대인!”


운유의 쾌척에 병장은 소소하게 기뻐하며 답했다. 청동촉만큼은 아니어도 철촉 또한 뼈와 돌을 갈아 만든 화살촉보다 월등히 귀한 것이었다.


“맥. 다 먹었으면 슬슬 가자.”


간만에 늑대 고기를 포식한 맥이 그의 부름에 총총 달려왔다. 펄쩍 뛰어 안장에 오른 운유는 늑대 소탕을 마무리하고 이동을 속행하도록 분부했다.


운부의 부민들은 행렬을 정돈하고 수레와 가축을 몰아서 다시금 나아갔다.



+++



꽃은 화려할 때 지고, 열매는 떨어진 뒤에야 싹이 트는 법.


다채롭던 가을의 빛깔도 서서히 황량하게 시들어갔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에는 벌써 북녘의 한기가 스며 있었다. 한풍이 불고 나면 털가죽을 두른 가축과 사람은 모두 몸을 움츠렸다.


선명하게 체감되는 겨울. 검은 평원은 하얀 초원 못지않게 추운 겨울을 앓을 듯했다.


운유는 말안장 위에서 말린 고기를 씹었다. 다른 부민들도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요기하고 있었다. 식사 시간까지도 아껴가며 속히 이동하고자 함이었다.


“음?”


짭짤한 육포를 먹고 갈증을 느낀 운유는 말안장 뒤쪽에 걸려있는 가죽 자루에서 물주머니를 꺼냈다. 양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를 흔들어 보니 비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운린이 타고 있는 수레 옆으로 가서 물었다.


“마실 것 좀 남았어?”


운린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주머니 하나를 던져 주었다. 받아보니 말젖으로 담근 술이 빵빵하게 채워져 있었다.


마유주는 별로 독한 술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모금 마시자 몸이 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입가에 묻은 술방울을 소매로 닦은 운유는 문득 부민들을 돌아봤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운부의 행렬은 체감하기에 다소 굼떠져 있었다.


그러나 부민들의 안색을 살펴보면 아직 체력에 여유가 있는 듯이 생생했다.


다들 한창 팔팔한 청년 처녀들이었고, 또 이와 같은 고된 여정은 살면서 익숙하게 겪어왔던 까닭이었다.


기마민족은 눈보라와 비바람,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항상 말을 타며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런 여정을 흔히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나 가축이나 굶주림과 목마름을 참고 이동하는 게 낯설지 않았다.


운유는 앞으로 남은 거리를 어림잡아 가늠해보았다.


그들은 검은 평원 동북부에 소재해 있는 표부[豹部], 호부[虎部]의 권역을 진작에 지나서, 서남부에 소재해 있는 견부[犬部], 랑부[狼部]의 권역 태반을 가로지르고 있는 도중이었다.


견부, 랑부의 권역마저 지나고 나면 그다음으로는 산과 강을 건너야 했다.


다만 산과 강을 건너고부터는 평지가 쭉 이어져 있었고 또 그곳의 이민족들은 기마민족을 접해본 적이 드물어 썩 위협적이지 않았으니 여정이 매우 순탄해질 터였다.


그렇게 운유가 헤아려보고 있는데, 병장 한 명이 다가와 보고했다.


“대인. 보고드립니다. 지금 십여 남짓한 정체불명의 기마가 이곳으로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한데 그 곡절이 조금 특이합니다.”


운유는 병장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읊어보라는 뜻이었다.


“척후가 말하길, 정체불명의 기마들은 한 소년을 추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척후가 소년과 기마들을 발견했을 때, 소년 또한 척후를 발견했더랬다. 그리하여 소년이 척후를 따라 말머리를 돌렸고, 소년을 추격하던 기마들도 덩달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우리한테 구원을 청할 요량이군.”

“그렇습니다. 다만 그 소년이 천손이라······.”

“천손?”

“예.”


운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만약 단이족 소년이 정체불명의 기마들에게 추격당하는 상황이었다면 그는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장이족의 소년이 추격당하는 상황이라면 잣대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운유는 동족 소년의 사정에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오게 둬라. 무슨 일인지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


접근해오는 기마들은 수십에 불과했던바,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허허벌판 한 귀퉁이 언덕의 능선에서 먼지가 일며 십여의 기마가 나타났다. 눈이 밝은 운유는 멀리서도 먼지 속의 상황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십여의 기마는 척후의 보고대로 한 소년을 추격하고 있었다. 추격당하는 소년의 귀는 소처럼 길고 뾰족해서, 장이족임이 틀림없었다.


“철마는 못 길들였나 보네.”


운유가 중얼거렸다. 장이족 소년이 타고 있는 마필은 한눈에 봐도 훌륭한 준마임을 알 수 있었으나, 철마는 아니었다.


그의 혼잣말에 운린이 딴지를 걸었다.


“당연한 소리를. 저 나이에 길들였을 리가 없잖아. 몸도 한참 더 자라야 하는 애 같아 보이는데.”

“난······.”

“너는 별종이고.”


쩝 하고 입맛을 다신 운유는 팔짱을 낀 채 장이족 소년과 십여의 기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장이족 소년이 워낙 필사적으로 질주하고 있었던지라 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들의 면면이 한층 자세하게 보였다. 장이족 소년은 상처투성이였고, 소년이 탄 마필은 입에 거품을 물며 탈진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장이족 소년이 절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는 견부군 견융의 아들, 견술입니다! 형제자매의 상쟁으로 지금 저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인자하신 대인께서 저를 구해주신다면 절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운유는 이미 소년의 사정을 궁금해하고 있었기에 병장들에게 손짓했다. 이에 다섯 명의 병장들이 각자의 병대에서 청년들을 통솔하여 장이족 소년을 마중하듯 달려나갔다.


그러자 장이족 소년을 추격하던 정체불명의 기마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우리는 견융 대인의 전사들입니다! 우리는 견융 대인의 분부를 받들고 있는 전사들입니다!”


추격자들은 견융의 이름을 거듭하여 들먹였다. 그 이름만으로도 운부의 전사들이 물러나리라 숫제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견융이 이 근방에서 제법 위맹한 부락의 군장인 듯싶다고 눈치껏 짐작한 병장들은 멈칫하며 운유를 돌아봤다.


운유의 표정은 냉담해졌다. 남의 이름 앞에서 주저하는 병장들의 행태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불쾌하다.”


그는 탁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두 번 다시 내 뜻과 남의 이름을 저울질한다면 목을 베겠다.”


남의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하고 또 강력한 자의 이름인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부하가 살펴야 할 유일한 것은 그의 뜻뿐이었다. 그가 싸우라면 싸우는 것이었고, 죽이라면 죽이는 것이었다. 그의 뜻이 이미 내려졌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한없이 사소하고 하찮을 뿐이었다.


병장들은 저도 모르게 운유의 눈을 피해 고개를 조아렸다. 운유의 읊조림은 실로 오만의 극치 그 자체였으나, 그들은 감히 마음속으로조차 비웃을 수 없었다.


삭월이 뜨는 밤처럼 고요한 눈빛은 병장들의 마음을 에고, 끝을 알 수 없는 공포를 자극했다.


회색 산맥을 넘으면서부터 줄곧 운유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위엄을 느껴온 병장들이었지만, 이 순간 느껴지는 위엄은 그야말로 격이 달랐다. 여유롭던 분위기는 공허해졌고, 나른하던 목소리는 섬뜩해졌다.


병장과 전사들은 더이상 한시도 지체하지 못하고 맹렬히 박차를 가하여 달려나갔다.


추격자들에게 돌격한다기보다는 운유에게서 도망한다고 해야 더 올바를 모양새였지만, 모쪼록 그 기세만은 극렬하여 추격자들은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부의 병장과 전사들이 추격자들을 적절히 견제하여 더이상의 접근을 차단하자 운유의 표정이 풀렸다. 운린을 비롯한 좌우의 사람들은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한순간이나마 검은 평원 제일 용사의 칭호가 어떠한 의미인지를 절절히 실감한 운린은 창백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뗐다. 그녀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운부의 병장과 전사들은 추격자들을 철저히 견제했고, 위기를 모면한 장이족 소년은 운부의 행렬로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서 달려왔다.


그런데 그때, 여태까지 장이족 소년을 사로잡을 심산으로 추격하면서도 활을 쏘지 않았던 추격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활을 꺼내 당겼다.


앗차 하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활을 꺼내 당겼던 터라 근처에서 견제하던 운부의 전사들은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활은 쏘아지지 못했다. 운유의 응수 때문이었다.


운유는 멀리서 관망하고 있었던 덕에 근처에서 주시하며 견제하던 운부의 전사들보다 시야가 넓었다.


하여 그는 추격자 가운데 누군가가 활을 꺼내는 동작을 즉시 포착할 수 있었고, 오히려 추격자보다도 먼저 응수하여 활을 쏠 수 있었다.


시위를 당겨 장이족 소년에게 겨냥하던 추격자는 별안간 활시위가 끊어지며 얼굴을 때리자 비명을 질렀다. 추격자는 엄청난 고통에 낙마해 버렸고, 다른 추격자들은 경악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거리에서 화살로 시위를 끊다니!’


터무니없이 정밀한 저격이었다. 개나 소나 활쏘기의 명수인 기마민족 중에서도 이 같은 솜씨는 드물었다.


운유의 활솜씨를 목격한 추격자들은 주눅이 들었다.


추격자들은 결국 멀어지는 장이족 소년을 손 놓고 멀뚱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활을 쏴서 저격하려 하면 방금처럼 요격당할 게 뻔했고, 머릿수가 열 배 넘게 차이 나는 상황에서 돌파하려 하면 그냥 개죽음만 당할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다 잡은 사냥감을 놓쳐버린 추격자들이 처량하게 제자리를 맴도는 동안 장이족 소년은 무사히 운유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소년은 헐떡이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운유에게 연거푸 고개 숙였다.


운유는 말없이 소년의 호흡이 정돈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배려에 소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으며 가쁘던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리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네 사정이 궁금해서 잠시 저들을 막아줬을 뿐, 계속 막아주지는 않을 거니까.”

“······예?”


운유는 소년의 호흡이 회복되자 우선 그의 착각부터 바로잡아주었다. 살았다는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뀌며 그 낙차만큼 소년의 표정이 참담해졌다.


“너는 내 호기심을 풀어주고, 나는 네가 잠시 숨 돌릴 겨를을 주는 거다. 싫으면 그냥 떠나도 되고.”

“······.”


소년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간청하고자 했다. 그러나 운유의 무정한 태도에 아무리 빌어봤자 소용없을 것을 직감한 듯, 결국 고개를 푹 떨궈 버렸다.


남의 흥밋거리를 위해 자신의 사연을 팔아야 하는 처지가 비참해서 소년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체념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망치느라 한계에 달한 체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천하를 약탈하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중단 공지 +47 24.09.07 2,495 0 -
공지 세계관 설정(2024-08-23 갱신) +2 24.08.17 6,603 0 -
공지 평일 18:30분 연재됩니다 24.08.07 9,215 0 -
32 바람이 이는 곳-32 +24 24.09.06 4,670 258 11쪽
31 바람이 이는 곳-31 +12 24.09.05 5,509 267 13쪽
30 바람이 이는 곳-30 +18 24.09.04 5,896 330 14쪽
29 바람이 이는 곳-29 +13 24.09.03 6,394 296 12쪽
28 바람이 이는 곳-28 +23 24.09.02 6,971 298 13쪽
27 바람이 이는 곳-27 +17 24.08.30 7,776 311 11쪽
26 바람이 이는 곳-26 +20 24.08.29 7,864 319 13쪽
25 바람이 이는 곳-25 +28 24.08.28 8,323 366 13쪽
24 바람이 이는 곳-24 +37 24.08.27 8,674 365 12쪽
23 바람이 이는 곳-23 +11 24.08.26 8,888 354 12쪽
22 바람이 이는 곳-22 +10 24.08.26 8,700 317 13쪽
21 바람이 이는 곳-21 +41 24.08.23 10,514 412 14쪽
20 바람이 이는 곳-20 +25 24.08.22 10,424 422 12쪽
19 바람이 이는 곳-19 +26 24.08.21 10,549 439 11쪽
18 바람이 이는 곳-18 +21 24.08.20 10,867 458 11쪽
17 바람이 이는 곳-17 +24 24.08.19 11,201 457 12쪽
16 바람이 이는 곳-16 +25 24.08.16 11,562 437 13쪽
15 바람이 이는 곳-15 +17 24.08.15 11,068 406 11쪽
14 바람이 이는 곳-14 +16 24.08.14 11,186 372 16쪽
13 바람이 이는 곳-13 +15 24.08.13 11,694 371 13쪽
12 바람이 이는 곳-12 +18 24.08.12 12,055 384 12쪽
» 바람이 이는 곳-11 +14 24.08.09 12,536 400 13쪽
10 바람이 이는 곳-10 +10 24.08.08 13,341 394 13쪽
9 바람이 이는 곳-9 +15 24.08.07 13,691 440 11쪽
8 바람이 이는 곳-8 +13 24.08.06 13,921 451 16쪽
7 바람이 이는 곳-7 +13 24.08.05 15,049 481 18쪽
6 바람이 이는 곳-6 +22 24.08.04 15,844 48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