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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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작품등록일 :
2024.07.31 18:32
최근연재일 :
2024.09.0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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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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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7

DUMMY

화로의 연기가 뭉게뭉게 솟구쳐 천막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운유는 안장을 수선했고, 운린은 뼈바늘로 바느질을 했다.


“다 됐다. 자. 입어봐.”


운린이 운유에게 가죽 갑옷을 내밀었다. 가슴팍에는 목인족 우두머리의 시체에서 수거한 청동 거울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받아 입어보니 몸에 딱 맞았다.


“어때?”

“좋아. 너무 헐렁하지도 않고 너무 끼지도 않네.”


운린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청동 거울에 입김을 불더니 소매로 슥슥 문질러 닦았다. 누런 청동 거울이 그녀의 얼굴을 담아냈다.


“왜?”

“여기 핏자국이 조금 남아있길래.”

“아. 고마워.”


운린은 슬며시 운유를 올려다봤다. 고맙다는 소리를 듣는 게 낯간지러워서 그녀는 괜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 목인족들 잡으러 가서는 별일 없었어?”


운유는 고개를 까딱였다.


“아주 쉬웠어. 그놈들이 멍청하게 말을 타고 도망하려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 차라리 말을 버리고 숲속으로 도망했다면 훨씬 까다로웠을 텐데.”


운유가 단이족 청년들을 통솔하여 손쉽게 목인족 전사들을 사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목인족들보다 숲에 대해 더 훤히 알아서가 아니었다.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길을 더 훤히 알아서였다.


기마민족의 전사에게조차 생경한 숲속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일은 부담이었다. 하물며 목인족은 대여섯 살짜리 단이족 소년보다도 말을 못 탔다. 그런 목인족이 말을 타고 숲에서 달릴 수 있는 길은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운유는 그 극히 한정된 길을 살펴서 목인족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재수 없게 함정에 걸려버린 놈들이 있기야 했지만. 그쯤이야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너는?”

“나는 뭐?”


운린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무것도.”


운유는 한 박자 늦게 그 물음의 속뜻을 이해했다.


“아. 다친 데 없냐고 물은 거였어?”

“아니야.”

“너한테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라서 바로 이해 못 했어.”

“아니라고.”


운유는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손이 살짝 까진 것 같기도 하네. 여기 긁힌 상처도 있고 말이야.”

“아니라니까? 안 궁금해. 말하지 마.”

“호 하고 입바람 불어주면 아픈 거 금방 날아갈 것 같은데.”


그는 운린이 입술을 깨물고 째려보자 그제야 시답잖은 장난을 그만두었다. 운린은 속내를 들킨 게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목인족들이 보복하러 오면 어떡할 거야? 분명 살아서 도망한 것들이 있을 텐데.”


운유는 고개를 까딱였다.


“거의 다 잡아 죽였으니 간신히 살아남은 몇 놈들만으로는 우리를 도모할 수 없을 거야. 아마 주위의 다른 동족들에게 빌러 갔겠지.”


다른 목인족 촌락들이 적어도 두셋쯤 힘을 합해서 원한을 갚아주러 올 터. 목인족들의 습성을 꿰고 있는 운유는 그 시기를 대강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식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목인족은 토인족보다 오히려 더 자주 사냥해봤으니까.”



+++



초원의 기마민족이 이 숲에 들어섰던 적은 예전부터 꽤 빈번하게 있었다.


그중에는 별다른 마찰 없이 얌전하게 숲을 지나간 부락도 있었고, 난폭한 본성으로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싸움을 일으킨 부락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변치 않은 진실은 한 가지였다. 이 숲은 그들의 땅이었고, 그들의 땅에서 그들을 존중하지 않은 이민족들은 항상 따끔한 맛을 보며 쓰라린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조상들에게 물려받아 지켜온 숲.


이 숲을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앞으로도 세세토록 그러할 것이다. 틀림없이.’


뼈대가 굵고 몸이 다부진 장년의 촌주[村主]는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좌우를 돌아봤다. 소식을 듣고 숲 곳곳에서 찾아온 여러 촌락의 촌주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까지 걸음을 해주어 다들 고맙소. 우리가 이렇게 한날 모인 까닭은 바로 초원의 이민족 때문이오. 이미 들으셨다시피, 놈들이 우리 숲의 마을 하나를 불 지르고 사람들을 죽였소.”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낸 장년의 촌주는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와라!”


그러자 몇 명의 전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지 입은 전사들. 핏발 선 눈으로 온몸에 잿가루를 뒤집어쓴 전사들이었다.


“파괴당한 촌락의 전사들이오.”


촌주들은 굳은 얼굴로 그 전사들을 바라봤다.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촌주들은 그들이 어느 촌락의 전사들인지 쉽게 알아봤다. 바지 덕분이었다. 이 숲에서 목인족 전사들에게 기마민족의 옷을 입히는 촌락은 하나뿐이었으니까.


혼혈아를 촌주로 모시던 촌락.


자기네가 말을 탈 줄 안답시고 어지간히도 밉살스럽게 거들먹대더니만, 진짜배기들한테 된통 깨져 망해버렸구나. 쯧쯔. 꼴이 참으로 말이 아니로다.


촌주들은 혀를 차며 바지 입은 전사들을 흘겨봤다.


“내 그 더러운 혼혈아가 언제고 기어이 이리될 줄 알았소. 이민족이 오는 족족 안 가리고 싸움을 걸어대니 반드시 실수하는 때가 올 수밖에.”


어느 촌주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다른 촌주들도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 꿇고 있던 전사들의 몸이 들썩였다. 자기네 촌주가 모욕당한 게 분했던 모양이었다. 한 전사가 고개를 치켜들고 항변했다.


“그 찢어 죽일 이민족들이 우리 숲에 와서 행패 부린 게 어디 한두 번이더랍니까? 우리가 앞장서서 그것들 기를 꺾어줬기에 숲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옆의 전사도 거들었다.


“촌주님들께서 지금 몸에 차고 있는 청동과 금 장신구들, 다 우리와 거래하여 얻은 게 아닙니까? 우리가 그것들을 다 어찌 얻어 촌주님들께 팔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촌주들은 코웃음을 쳤다. 말이야 바른 말이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대신 무시했다.


다른 촌주들을 불러모은 장년의 촌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이놈들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보복은 해줘야 하오. 감히 이민족이 우리의 숲에서 마을을 노략질하고 불태웠는데, 몸 성히 빠져나가게 둘 수는 없지.”


촌주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오.”

“나도 그렇소.”


동족이든 이민족이든 이 숲에서는 그들에게 공손해야만 했다. 만약 손님답게 공손하지 않다면, 본때를 보여줘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얕보이고야 마니까.


만장일치의 찬성. 빠르게 뜻을 모은 촌주들은 계책을 의논했다.


놈들이 곯아떨어졌을 새벽에 기습하여 죽일까? 냇물에 독을 타서 죽일까?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한꺼번에 활을 쏴서 죽일까?


“좋은 계책을 내려거든 먼저 놈들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소?”


장년의 촌주가 전사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뭔가 도움이 될 법한 얘기를 들려다오.”


촌주의 질문에 전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이야기를 토해냈다.


“초원 놈들의 말 타는 재주야 다시 이를 것도 없습니다마는 우리 숲에서 아주 쓸 만하지도 않습니다. 말을 타고 지날 수 있는 길이 한정되어있는 까닭입니다.”

“한데 그놈들은 그동안 우리가 싸워봤던 이민족들과 달랐습니다. 숲에서도 말을 자유자재로······.”

“아니,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놈들은 길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만 알고 다니던 길을요! 말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처음에는 그럭저럭 침착하던 전사들의 목소리는 나중으로 갈수록 점점 격앙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도 따라서 허황해졌다.


“괴물이 있었습니다. 그놈은 마치 한낮의 해처럼 불타는 눈으로 함정을 간파하더니, 온 숲에 어둠을 드리우며 우리 머리 위에 벼락처럼 내려왔습니다······.”

“촌락에서 둘째가면 서러울 용사들이 수십이었는데 그 괴물 하나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입에서 불을 뿜으며 누런 검과 붉은 도끼로 사람을 풀잎처럼 베었습니다!”

“그 괴물은 일부러 우리를 천천히 가지고 놀다가, 재미가 다하고 나서야 하나씩 하나씩 잔인하게 사냥을······.”


슬기로운 촌주들은 전사들이 횡설수설하며 떠들어대는 괴담을 적당히 걸러서 들었다. 아무렴 촌락이 파괴당하고 가족과 친지가 학살당한 마당에 이들이라고 제정신일 리가 있겠는가.


아마 경황과 충격 탓에 당시의 상황을 잔뜩 부풀려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과장되었음을 고려해도 그 이민족들을 만만히 봐서는 안 될 듯싶었다.


촌주들은 최고의 함정을 준비하기로 했다.



+++



이틀 뒤면 드디어 이 넓은 삼림지를 벗어날 것 같았다. 한데 목인족들의 습격은 그간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줄곧 매복을 경계하던 단이족들도 차츰 긴장이 풀려버렸다.


“겁을 단단히 먹어서 보복할 작심도 못 하는 건가.”

“하기야 그런 허접스러운 것들에게 용기가 있을 리 없지. 그것들 말 타는 꼴을 보고 내가 충격이 참 컸는데.”

“과연 그 말이 몹시 옳아.”


목인족들의 습격이 없는 이유를 명료하게 규명한 단이족들은 마음을 푹 놓고 껄껄대며 웃었다.


운유는 단이족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습격 시기를 가늠해보았다.


‘올 때가 진즉 지났는데. 꽤 신중하게 구네. 사냥감이 방만해질 때까지 인내하겠다는 건가.’


그는 건조한 눈으로 좌우를 훑어봤다. 목인족은 저 울창한 수풀과 낙엽 아래 어디쯤의 땅굴에서 그들을 훔쳐보고 있을 터였다. 분명히 그러했다.


운유는 병장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병장들이 당황하여 반문했다.


“노래를······ 말입니까? 여기서요?”


내내 목인족의 습격을 경계하도록 주의 주던 운유가 노래를 부르게끔 하자, 병장들은 그 속뜻을 고민했다. 방만하게 왁자지껄하고 웃는 이들을 완곡하게 질책함일까?


병장들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뭘 꾸물대느냐는 운유의 닦달에 병장들은 각자의 병대로 가서 얼른 군장의 분부를 하달했다.


곧이어 단이족들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초원의 민요를 부르며 씩씩하고 떠들썩하게 나아갔다. 긴장감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노랫가락을 흥얼대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해 저물 무렵이 됐다.


운유는 둔치기 좋은 장소를 찾도록 하고자 병장들을 불렀는데, 그 부름이 무색하게도 때마침 둔영을 치기 좋은 장소가 길목에 떡하니 나타났다.


“대인. 저곳이 하룻밤 숙영하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입니다.”


운유는 대꾸하지 않고 주변의 지형을 둘러봤다. 그리고 병장들을 향해 물었다.


“너희가 보기엔 어떠냐?”


맥락 없는 질문에 병장들이 눈을 깜빡였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너희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겠냐?”


병장들은 운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장소를 보고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냥 둔치기 좋은 곳이······ 아닙니까?”

“둔치기 좋게 손질된 곳이지.”

“아아······. 이해했습니다.”


병장들의 이해 못 한 표정을 보고 운유가 부연했다.


“이곳은 그 자체로 거대한 함정이다. 큰길 위에 둔치기 좋은 곳이 있는데 그 뒤로 작은 길이 가려져 있으니 과연 야밤에 덮치기 적합한 지형이 아니냐.”


그제야 몇몇 병장들이 그 이치를 깨닫고 탄성을 터뜨렸다. 물론 여전히 이해 못 한 병장들도 있었다.


“하오나 군장 대인. 저 장소에는 도무지 작위적인 느낌이 없습니다.”


눈썰미 있는 어느 병장이 말했다. 운유는 그 타당한 지적에 흡족해했다. 그가 일부러 병장들과 문답한 이유는 병장들의 안목을 길러주기 위함이었기에.


“그 까닭은 둘인데, 하나는 목인족들의 손재주가 잘나서요 또 하나는 우리만을 위해 급조한 함정이 아니라서다.”


이같이 거대한 작업은 금방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개 촌락이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이 삼림지의 목인족 촌락들이 예로부터 합심하여 만들어온, 외지의 강력한 적을 사냥하기 위한 함정일 터였다.


“내가 지금부터 계책을 주겠다. 너희는 잘 듣고 그대로 따라라.”



+++



좌우를 살피는 기색은 터럭만큼도 없음이요 한껏 풀어져 시끌벅적 노래를 불러대니, 그처럼 들떠 있는 사냥감이 함정에까지 의심 없이 걸려들었다. 오늘 밤에 들이치면 반드시 다 죽이고도 남음이리라.


이민족의 동태를 염탐하던 전사가 달려와 보고한 바였다. 둥글게 앉아 마주한 여러 촌주들은 그 보고를 듣고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내 끝에 사냥의 시기가 도래한 듯싶었다.


벌떡 일어선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눈앞에 늘어선 전사들을 바라봤다.


몸에 물감을 바른 전사들은 가죽과 나무 갑옷을 입고 뼈와 돌을 갈아 만든 무기를 꼬나쥔 채, 살기등등하게 투지를 내뿜고 있었다.


“이민족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그놈들이 함부로 날뛴 이 숲이, 누구의 땅인지 보여주자!”


짤막한 독려. 그것으로 족했다.


용기를 북돋워 주는 풀즙을 한 그릇씩 마신 전사들은 요란한 함성과 호응 대신 묵묵한 걸음으로 화답했다.


숲에서 나고 자란 목인족 전사들은 곧 숲의 어둠에 녹아들어 사냥터를 향해 움직였다.


그들은 쾌활하고도 은밀한 걸음으로 머잖아 사냥터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함정을 보고도 함정인 줄 모르고 스스로 죽으러 들어간 사냥감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참말이었군. 하, 저놈들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길래······.”


전사들은 이민족의 둔영에서 울려 퍼지는 북이며 피리 따위의 악기 소리에 헛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무슨 잔치마저 벌이는 것인지 기름 냄새가 짙었다.


한 차례 크게 숨을 마셨다가 내뱉은 촌주들이 저마다의 병장기를 번쩍 들었다.


“모두 가자! 건방지기 짝이 없는 저 이민족들을 남김없이 쳐 죽여라!”


흰 달 아래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전사들은 풀즙의 기분 좋은 광기에 몸을 맡긴 채 이민족의 둔영을 향해서 거침없이 돌진해나갔다.


“우와아아아아악!”

“원수를! 원수를 갚자! 원수르으으으으을!”

“다 죽여버리자! 죽여버려!”


그렇게 미치광이처럼 손에 쥔 무기를 휘두르며 둔영 한복판까지 뛰어들자, 고작해야 열댓 명에 불과한 이민족들이 보였다.


그들은 마구 북을 때리고 피리를 불던 도중이었는데 목인족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즉시 말을 타고 부리나케 달려 떠나버렸다.


“······어?”

“아······? 아?”


눈이 뒤집힌 채 달려왔던 목인족 전사들은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간담이 서늘해지며 풀즙으로 들떴던 가슴이 쿵 가라앉았다.


아직 이쪽의 상황을 모르는 뒤쪽에서는 여전히 전사들의 함성이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텅 빈 둔영의 광경을 확인한 전사들 사이에서는 소름 끼치는 적막이 감돌았다. 피가 식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민족은······? 이민족들은 어디를 간 거지······?”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치 그 혼잣말을 신호 삼은 것처럼, 뒤쪽에서부터 불길이 치솟더니 목인족 전사들의 함성이 비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혼란에 빠진 목인족 전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나마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한 전사가 외쳤다.


“우리가 역으로 함정에 빠졌다! 놈들이 우리를 함정으로 유인한 거야!”


그 냉정한 전사 덕분에 다른 목인족 전사들은 혼란에서 빠져나와 공포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한순간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해버린 전사들은 완전히 투지를 상실하고 각자도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작이었다. 뒤쪽에서부터 번지던 불길과 비명은 눈 깜짝할 새에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닥쳐왔고, 또 그와 더불어 거대한 괴물들이 그들을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발굽으로 짓밟고 들이받으며, 손에 쥔 쇠붙이로 머리를 쪼개고 목을 자르는 괴물들. 발굽 짐승의 몸통에 사람의 몸통을 붙여놓은 듯, 악몽처럼 기괴한 형체의 괴물들.


저것들은 그저 초원에서 넘어온 이민족일 뿐이라고, 말을 타고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일 뿐이라고, 힘을 합쳐 대항할 수 있노라고, 감히 그렇게 말하는 자는 없었다.


저토록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것이 어떻게 한낱 사람이란 말이더냐. 저것이 괴물이 아닐 리가 없잖으냐. 저런 괴물과 싸우라니, 어떻게······.


목인족 전사들은 아이처럼 엄마를 찾아 울며 달아났다.



+++



날이 밝고 간밤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연기와 탄내 자욱한 그 한복판에서, 철마에 탄 장이족 소년은 고적하게 존재했다.


“군장 대인.”


병장들이 다가와 운유에게 예를 올렸다.


“의복이나 무기 따위의 수거할 것들은 모두 챙겼습니다.”

“수레에 물건을 더 실을 데가 남았나?”

“수레는 다 꽉 차버렸습니다.”


운유는 맥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곧바로 이동한다. 더는 습격을 경계할 필요가 없으니 속도를 높여서 오늘 내로 이 숲을 벗어난다.”

“예!”



그날 비로소 그들은 숲을 벗어났다.


삼림지를 통과하고 나자 지평선이 보이는 구릉지가 펼쳐졌다. 내내 목인족의 습격을 경계하느라 지쳐 있던 단이족들은 구릉지를 보고 기운이 샘솟아 환호했다.


“목초가 풍부하고 말을 달리기 좋을 땅입니다. 군장 대인께서는 바로 이곳을 찾으셨음입니까?”


단이족들이 들떠 물었다.


그러나 운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서 남쪽을 가리켰다.


단이족들은 묵묵히 그 지시에 순종했다. 말머리가 남녘을 향하고, 수레의 바퀴가 다시 굴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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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3

  • 작성자
    Lv.87 as******
    작성일
    24.08.05 18:55
    No. 1

    재밌네용~~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31 모래쌩쌩
    작성일
    24.08.05 18:55
    No. 2

    철마처럼 달려왔습니다

    찬성: 8 | 반대: 0

  • 작성자
    Lv.79 비단연꽃
    작성일
    24.08.05 19:35
    No. 3

    재밌어요!!

    찬성: 6 | 반대: 0

  • 작성자
    Lv.50 Mr.배즙
    작성일
    24.08.05 21:55
    No. 4

    내달리는 재앙이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미요프
    작성일
    24.08.05 22:01
    No. 5

    아주야무집니다 잘보고가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양마루
    작성일
    24.08.12 10:43
    No. 6
  • 작성자
    Lv.86 연참무새1
    작성일
    24.08.15 07:23
    No. 7

    헤카림 누가키웟냐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황혼의검
    작성일
    24.08.24 18:14
    No. 8

    옛날 책 때문에 고대 시대로 1회 회귀해서 기마민족으로 정주민 정복했다가 역사가 바껴서 다시 역사를 바꾸러 간 대역이 생각나네.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99 도수부
    작성일
    24.08.26 20:31
    No. 9

    건필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2 풍훈탑
    작성일
    24.08.27 12:09
    No. 10

    폭군의 결자해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k9******..
    작성일
    24.08.27 15:31
    No. 11

    7편 =졸라 이상하다….? 목인족들은 분명 단인족들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인족들이 움직이면 그 정보가 목인족들에게 전달이 되어야 해서 … 7편의 주인공의 전술은 불가능하며 … 밤에 숲쏙에서 목인족들과 싸우는 것은 사실상 주인공쪽 부하들또한 엄청난 피해가 생겨야 하는 것이 정상인디? 목인족들은 나무뒤나 풀숲에 숨어있다가 단인족들이 오면 창을 던지거나 해서 기습해서 공격할수도 있고 여러 마을이 힘을 합친거면 쪽수도 더 많을 거고…초원도 아니고 숲쏙에서 기마병들이 돌진한다고 목인족들이 쪼는게 말이 됨? 뭐 목인족들은 다 겁쟁이 인가?

    [정리]
    아무리 기습을 한다 한들
    1:밤의 숲쏙에서는 활을 잘 사용하지도 못하고
    2:목인족들은 평생을 숲쏙에서 살아오며 싸워왔으며
    3:기마병들이 그리 이질적이지도 않음..이미 몇번이나 기마병들을 이긴 전사들임
    4:숲쏙에서의 기마병은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으며
    5:병력의 숫자까지 목인족이더 많은 상황
    6:말은 덩치가 커서 말을 공격하기도 쉽고
    7:상대의 숫자와 상대를 감시하기 위한 감시병들이 존재함 상대의 절력을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기에 겁을 먹을 이유가 없음

    나의 생각으로는 이런 근거로 목인족들이 주인공의 부하들에게 털리는게 이상하다는 거임…네가 보기에는 그냥 그거였음

    적은 병신이고
    주인공은 대단해~~ 이런 느낌
    뭐 그정도 까지는 아니였지만
    다음 전투에는 이런 느낌이 아니기를 조금더 치열하고 조금더 현실성 있기를 그게 나의 취향이니깐

    *추가 그냥=전부더 생각했는디 아무리 주인공이 강해도 결국 군대가 이김 활로 수십발을 쏘면 사람은 초인적인 실력으로 화살을 칼이나 방패로 막는다고 해도 말은 어떡해? 말의 온 몸을 철갑으로 보호하지 않는 이상 결국 말은 죽는게 정상임
    단인족들은 대부분이 명사수라고 했잖아? 그럼 말할것도 없지….그 덩치큰 말을 사각지대를 못 맞추면 그게 명사수야?

    찬성: 1 | 반대: 3

  • 작성자
    Lv.81 pa******
    작성일
    24.08.27 23:20
    No. 12

    새로워요
    너무 기대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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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9 트리플럭
    작성일
    24.08.30 12:37
    No. 13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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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약탈하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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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바람이 이는 곳-27 +17 24.08.30 7,776 311 11쪽
26 바람이 이는 곳-26 +20 24.08.29 7,864 319 13쪽
25 바람이 이는 곳-25 +28 24.08.28 8,323 366 13쪽
24 바람이 이는 곳-24 +37 24.08.27 8,674 365 12쪽
23 바람이 이는 곳-23 +11 24.08.26 8,888 354 12쪽
22 바람이 이는 곳-22 +10 24.08.26 8,701 317 13쪽
21 바람이 이는 곳-21 +41 24.08.23 10,514 412 14쪽
20 바람이 이는 곳-20 +25 24.08.22 10,424 422 12쪽
19 바람이 이는 곳-19 +26 24.08.21 10,549 439 11쪽
18 바람이 이는 곳-18 +21 24.08.20 10,867 458 11쪽
17 바람이 이는 곳-17 +24 24.08.19 11,201 457 12쪽
16 바람이 이는 곳-16 +25 24.08.16 11,562 437 13쪽
15 바람이 이는 곳-15 +17 24.08.15 11,068 40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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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바람이 이는 곳-8 +13 24.08.06 13,921 451 16쪽
» 바람이 이는 곳-7 +13 24.08.05 15,050 48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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