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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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작품등록일 :
2024.07.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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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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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9

DUMMY

표인이 철마를 몰아 나는 듯이 달려왔다. 맥보다 크고 무거운 철마가 토끼처럼 날쌔게 뛰니, 발굽이 땅을 차고 나갈 때마다 깊은 자국이 생기며 흙먼지가 치솟았다.


저돌적인 질주. 그 무게감과 속도감이 절절하게 전해졌다.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일지도 쉽게 가늠되었다. 부딪힌다면 조약돌처럼 튕겨 날아가 버릴 게 자명했다.


그러나 철마를 탄 장이족은 부딪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수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고, 부서지기를 마다하지도 않았다.


운유는 다리로 맥의 옆구리를 차며 신호를 줬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우리보다 더 크고 무거운 저놈들을 향해 힘껏 달려보자는 운유의 요청을 맥은 거부하지 않았다.


서슴없이 질주가 시작되었다.


쌍방의 기마는 맹수를 방불케 하는 흉악한 기세를 폭력적으로 발산하며 저마다의 발톱과 송곳니를 드러냈다. 창검과 도끼. 누런 청동과 붉은 구리가 번쩍였다.


그리하여 서로가 급격히 가까워진, 그러나 아직 병장기가 닿을 만큼 가깝지는 않은 거리에서, 표인이 선공을 취했다. 그는 안장에 걸려 있는 투창을 던졌다.


나무를 깎아 만든 꼬챙이가 바람을 가르며 운유에게 날아들었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 투창. 운유는 허리를 숙여 가볍게 피해냈다. 연이어 날아온 두 번째 투창은 청동검으로 쳐냈다.


두 번째 투창을 청동검으로 쳐냈을 때, 쌍방의 기마는 비로소 병장기가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근접한 표인이 창을 내리쳤다. 필살의 의지로 내리친 일격은 아니었다. 수준을 한번 가늠해보겠다는 탐색의 의도가 다분한 일격이었다.


그럼에도 그조차 받아내기가 벅찼다. 구리 도끼로 막아낸 운유는 몸이 짓눌려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벼운 의도였음에도 무거운 위력이었다.


운유는 배에 힘을 주며 버팀과 동시에 절묘하게 표인의 창을 흘려냈다. 필부였다면 이번 한 합으로 승부는 벌써 끝났을 것이었다.


표인도 그것을 알았기에, 운유가 버텨내자 감탄을 금치 않았다.


“호오!”


그는 탄성을 내며 다시 창을 휘둘렀다.


방금 받은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닥쳐오는 연격. 고통스러웠으나 운유는 내색하지 않고 청동검으로 막았다. 엄청난 충격이 청동검을 타고 손으로, 어깨로 전해져 왔다.


하마터면 청동검을 놓칠 뻔했던 운유는 어금니를 깨물며 손아귀에 힘을 줬다.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는 변함없는 무표정으로 표인을 응시했다.


비록 힘을 빼고 휘둘렀다고는 해도, 이렇게 쬐깐한 어린애가 자신의 창을 두 차례나 받아내자 표인은 정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표인은 아주 조금 더 힘을 실어서 연격을 가하고자 했다.


왼팔 오른팔이 전부 마비되다시피 한 상태였던 운유는 병장기를 들어 그것을 방어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운유는 옆구리를 조여 맥에게 신호를 줬다.


운유를 곤경에서 구원하고자 맥이 앞다리를 번쩍 들며 뒷다리로 우뚝 섰다. 위협적으로 울며, 앞다리로 표인을 내리찍고자 했다.


이에 표인의 철마가 날렵하게 몸을 돌렸다. 맥의 앞다리가 애꿎은 땅을 내리찍었고, 표인의 철마는 뒷다리를 쭉 내뻗었다. 그대로 운유를 걷어차 버리려는 행동이었다.


운유는 안장에 매달려 몸을 옆으로 극한까지 눕혀서 아슬아슬하게 뒷다리에 걷어차이는 꼴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겨를 따위는 없었다. 표인이 다시 창을 휘둘렀고, 운유는 그럭저럭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팔로 검과 도끼를 교차해서 힘겹게 연격을 막아냈다.


막아낸 운유의 몸이 속절없이 뒤로 젖혀졌다. 맥에게까지 그 위력이 전해져서, 주춤주춤 뒷걸음질할 정도였다. 그래도 맥이 뒷걸음질하며 약간의 간격이 생겼다. 운유는 빠르게 호흡과 자세를 가다듬었다.


표인은 운유가 회복하길 두고 보다가 투창을 던졌다.


운유는 첫 번째,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투창도 가볍게 피하며 맥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맥이 껑충 뛰며 표인에게 돌진했고, 운유는 구리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표인은 응수하여 창을 휘둘렀다.


그리고 구리 도끼가 산산이 깨져 나갔다.


“아앗! 대인!”


지켜보던 병장들이 운유의 위기인 줄 알고 다급히 달려왔다. 그러자 표부의 측근 전사들도 똑같이 달려오려 했다.


운유와 표인은 동시에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며 외쳤다.


“멈춰라!”


달려오던 양측은 군장들의 호령에 급히 멈춰섰다. 그러나 더이상 말을 몰아 달려오지 않았을 뿐, 경계하길 관두지 않고 살에 시위를 먹였다. 허튼짓과 낌새가 보이면 언제든 쏠 태세였다.


“활을 거둬라.”


표인은 측근 전사들에게 활을 거두도록 분부했다. 운유 역시도 운부의 병장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렇게 양측이 활을 거둔 뒤에야 표인은 창을 거둬 해칠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고 운유에게 다가왔다.


“훌륭한 용사들을 데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군. 계책을 쓴 것도 아니었어······.”


만면에 미소를 띤 표인이 다가오며 말했다.


“나와 몇 번이나마 합을 겨룰 수 있는 용사조차 근래에는 드물었는데, 하물며 이같이 어린아이라니. 더 나이를 먹으면 정녕 나와 천 합도 나눠볼 수 있겠어. 하하하.”


극찬에도 불구하고 운유는 심드렁한 얼굴이었으나, 표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표인은 운유가 압도적인 강자를 겪어보고 긴장해서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받아라. 구리 도끼의 값은 이것으로 족히 갈음할 테지.”


표인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화살집을 통째로 운유에게 건넸다. 화살집에는 화살이 한 묶음 꽂혀 있었는데, 그 화살촉이 무려 청동이었다. 돌도, 뼈도, 심지어 철도 아닌 청동.


운유는 고개를 까딱이며 무덤덤하게 화살집을 건네받았다. 그런 다음 자기가 어깨에 두르고 있던 털가죽을 끌러 표인에게 내밀었다.


“답례인가. 하하, 드디어 예의를 배웠군.”


청동 화살에 비하면 턱없이 값싼 털가죽이었지만, 표인은 기꺼워하며 받았다. 선물은 무엇을 받느냐보다 누구에게 받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었으므로.


될성부른 떡잎을 만나 즐거웠던 그는 내친김에 호의를 좀 더 베풀어서, 여러 가지 요긴한 것들을 넌지시 알려주기까지 했다. 가령 검은 평원의 지리라든가, 부락과 이민족들의 권역이라든가 따위의 것들에 관해.


운유는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이더니 말머리를 돌려 운부의 행렬로 돌아가 버렸다.


“한결같은 녀석이군. 그래도 오만할 자격이 있는 재능이니······. 마음에 들었다.”


옛적의 스스로를 보는 듯하여 표인은 다시 한번 웃었다. 그런 그에게 측근 전사들이 다가왔다. 검푸른 눈빛의 전사들. 표인에게 철혈을 하사받은 용사들이었다.


“군장 대인. 무척 즐거워 보이십니다.”

“너희가 보기에도 그러하냐? 하하하하. 저 나이에 저 실력이면 장래가 어떨지 능히 짐작되니 그럴 수밖에.”

“그래 봐야 대인에 비하면 저런 풋내기 따위는······. 어?”

“대인, 어깨에 그건······?”


표부의 철혈용사들이 돌연 눈을 크게 뜨더니, 일제히 그의 어깨를 쳐다봤다. 이에 표인은 전사들의 시선을 따라 자기 어깨를 돌아봤다.


어깨에 걸친 표범 가죽. 그 아름다운 점박이 무늬의 가죽이 길게 갈라져 있었다. 검에 베인 듯 아주 깔끔하게.


“······.”


표인은 손으로 그 갈라진 곳을 만져보았다. 절묘하게도 표범 가죽만이 갈라져 있었을 뿐, 그 안의 옷과 살갗은 멀쩡했다. 스친 흔적조차 없었다. 우연치고는 과했다.


불현듯, 운유가 건네줬던 털가죽에 눈길이 가닿았다. 그저 답례인 줄로만 알고 받았던 털가죽. 이제야 드디어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벌써 저만치 멀어진 운부의 행렬 속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적당히 싸운 게······ 나뿐만은 아니었다는 건가.”


교만하기 그지없었던 소년의 언사가 어째서인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터무니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그는 전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



운유가 운부의 행렬로 돌아오자, 숨죽인 채 그의 일기토를 지켜봤던 부민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표부의 군장은 한눈에 봐도 강력한 전사임이 자명했는데, 그런 강력한 전사와 단기로 접전을 벌여 분투하고 인정받기까지 했으니 부민들은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속에서 운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사이에 백 년은 늙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운유가 무사히 돌아와 준 게 고마우면서도 이처럼 가슴 졸이게 만드는 게 원망스러워서 샐쭉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왜? 할 말 있어?”

“······아니.”


운유는 부민들이 공손히 내민 물과 마른 천으로 목을 축이고 얼굴의 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겨우 이런 일로 야단 떨지 마라. 계속해서 이동한다. 활의 시위는 이제 풀어둬도 좋다.”


강력한 전사와의 결투조차 별것 아닌 일 취급하는 운유의 대범함에 부민들은 더욱더 환호했다.


그렇게 부민들은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로 이동을 재개할 채비를 했다. 활시위를 풀어두고, 가축들을 몰아서 수레를 따르게 했다.


그러는 동안 운린은 수레를 몰아 운유의 옆으로 쫓아오더니 물었다.


“방금 만났던 그 표부의 군장, 혹시 네가 아는 사람이었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런 것 같던 눈치길래.”


운유는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일별했다. 별로 티를 내지도 않았는데 용케 알아챘구나 싶었다.


“눈썰미가 좋네. 내가 잘 아는 녀석이야.”

“어떤 사람인데?”

“최강.”


운린은 눈을 땡그랗게 뜨고 운유를 쳐다봤다.


운유는 건조하게 덧붙였다.


“내가 없는 검은 평원의.”


운린은 멍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점차 그녀의 얼굴색이 사색으로 변해갔다.


“그, 그럼 지금의 너보다 한참 강한 거 아니야?”

“맞아.”

“근데 왜······ 대체 왜 그런 사람하고 싸운 거야?”

“그 녀석이 덤볐으니까. 너도 다 봤잖아.”


그녀는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물론 나도 봤지. 네가 일부러 헛소리로 도발해서 싸움을 걸었잖아. 저쪽은 고이 보내줄 요량인 성싶더니만.”


운유는 낮게 웃었다.


“실은 반가워서 그랬어.”

“반가워서 목숨 걸고 그렇게 싸웠다고? 그러다 만약 다치거나 죽었으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어. 표인 그 녀석은 은근히 동족을 아끼는 성격이라.”


운유는 문득 회상했다. 검은 평원에서 고난만이 거듭하여 덮쳐오던 무렵, 한 번의 큰 위기에서 그를 건져줬던 표인을.


그는 또한 회상했다. 삼천 전사를 거느리고 내키는 대로 떠돌며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다닐 무렵, 그를 막아섰던 표인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운유는 뒤를 돌아봤다. 벌써 저만치 멀어진 표부의 전사들, 그 속에 있을 표인을 바라봤다.


‘어차피 또 만나게 될 테지.’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운부의 행렬은 하염없이 남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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