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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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히트
작품등록일 :
2024.08.0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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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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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DUMMY

14



조날루 헤티치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초점은 제 주인이었던 것에 황망히 맞추어져 있다.


부서진 얼굴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구석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참담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조날루의 시각에 맞춘 서술로, 회이던은 실로 통렬하다 느낄 따름이었다.


“빠아악!”


“아, 알겠다. 조용! 조용!”


“할당량의 기준선을 충족하셨습니다! 당국이 그대의 봉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조용!”


전기톱이 점수의 지급을 알렸다. 그 기이한 전자음에 조날루의 공허한 눈동자가 천천히 들려 올라갔다.


“봉사라, 그 봉사는 누구에게 향합니까? 당신이 헌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인가요?”


“나야 잘 모르지. 원래 뜻 여럿 있는 단어라 해도 교단 앞에선 하나만 남잖아. 다른 뜻은 죄다 발라내어 신에게 바치는 의미만 남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잘 모릅디다.”


하지만 전기톱이 운운하는 봉사 역시 제대로 된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항상 당국 어쩌구를 곁들여 말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교단 못잖게 제정신이 아녔다.


고작 전자 헛소리에 기어코 반응을 해 주니 이렇게 영양가 없는 생각도 떠오르고 그랬다.


“섬칼리고드. 당신의 목적은 뭡니까?”


“목적이라니. 무슨 목적.”


“세계를 저버리고, 신을 부정하면서까지 위하고자 하는 것이 뭡니까? 당신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뭐죠?”


뭘 노리고 묻는 건진 모르겠다만 이것 역시도 상당히 영양가 없는 질문이다.


존재의 까닭에 대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삶과 신앙의 공생에 대해 상기시키려는 모양인데, 그런 건 일말이나마 독실함 품고 있는 사람에게만 통한다.


“그런 것 없다만.”


무심히 던진 대답과 함께 톱날도 조날루의 목에 들이밀렸다. 늙은 시종은 체념하였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미련이 남지 않은 깨끗한 얼굴이다.


물론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광대뼈 부서져 있고 얼굴에 흐른 혈액 하며 몹시 엉망이다.


“인간다운 것이란 없습니다. 거룩함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만이 인간의 삶을 인간의 삶으로 만들죠. 그렇다면 섬기는 이 없는 당신은 무엇인가요?”


“하하, 나를 악마라 매도하고 싶은 거 맞지? 그런데 악마들도 마왕이라는 저들만의 받드는 이가 있잖아. 그러니 나는 악마만도 못한 존재야.”


레버 위에 손가락이 올라갔다. 군데군데 갈라지고 찢긴 천장 곳곳에서 지친 햇빛이 들어왔다.


드리운 음영 곳곳에 점박처럼 볕이 박혔으나, 회이던의 얼굴만은 여전히 그림자투성이였다. 그 가운데 눈동자만이 음험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정말로 이상하지. 나의 대척에 서 계신, 고귀하디 고귀하신 횃불의 사도께서는 마음에 어떤 어둠을 품으셨던 것일까.”


줄곧 공허함만이 들어차 있던 노인의 눈에 힘 있는 매서움이 실렸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이지? 하지만 신학을 공부해 본 적 없으며 신앙자들 사이에 속해본 적도 없는 나는 해답을 내놓을 수 없겠군. 그러니 생각은 당신 몫으로 남겨 놓을랜다.”


손가락은 레버 위에 살며시 놓여만 있을 뿐 회전을 가하진 않았다. 회이던은 전기톱을 거두어 자신의 등 뒤에 메었다.


“자비를 베푸는 것 같진 않군요. 무엇이 저에게 더 큰 고통이 될지 알고 계신 모양입니다.”


“교단의 개가 훼손된 가치관을 붙든 채 반죽음의 나날을 보낸다니, 상상만 해도 너무 좋아. 매 순간 만끽하며 죽을 때까지 고통받으십쇼.”


제 주인이 내내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 시종의 매서운 눈동자 속에서도 불씨가 지펴졌다. 아직은 뜻 모를 것이었다.


”어차피 당신 인생은 끝났어.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까닭이건, 혹은 입막음을 위해서건 교단은 당신을 죽이려 들 거요. 쫓기는 감각이란 건 당신 생각보다 훨씬 각별해. 즐기라고.”


“당신을 쫓을 겁니다.”


“오, 부디. 다음번에는 아무런 방해 없이 서로의 자웅을 겨루어 보자고.”


회이던은 사도의 사체, 그리고 사체나 다름없는 노인을 등 뒤에 놓은 채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조날루 헤티치오는 계속 그 자리에 앉은 채 주인의 시신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계단 올라가니, 가옥은 거의 반파되어 있었다. 곳곳에 커다란 짐승이 지나간 듯 갈퀸 흔적이 남았고, 벽면이 뒤틀린 방향을 따라 지붕도 내려앉았다.


부스스 떨어지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문 바깥으로 나가니 공기가 찼다. 아래서 내내 축축했던 회이던의 몸이 으슬거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여자애는 마침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주변은 더 모질게 추웠다. 회이던은 다 끝났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자애는 자기 어깨를 어루만지더니 회이던을 가리켰다. 참격을 가로막으며 난 생채기를 걱정하는 듯한데 피는 이미 멎었다.


“별거 아니야.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


소녀는 눈 깜빡이는 빈도가 확연하게 줄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발병자들의 흉측한 모습을 보아도 덤덤했다.


사실은 덤덤한 것이 아닐 테지만, 더 적합한 단어를 떠올리기에 회이던의 뇌는 아직 덜 냉각된 상태였다.


마차 앞에는 몸이 반으로 갈라져 죽은 도적단 수괴의 사체가 있었다. 그의 손은 검지를 뻗어 무언가를 가리키는 모양으로 빳빳하게 경직된 채였다.


광경이 대충이나마 눈에 그려졌다. 저 마차입니다. 저 마차에 놈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검에 속절없이 베여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어쩌구.


회이던은 여자애를 뒷칸에 올려놓은 뒤 마부석에 올라탔다. 다행히 말들에게는 아무런 해코지도 가해지지 않았다.


고삐를 당기자마자 기다렸단 듯, 녀석들은 발굽에 박차를 가했다.



***



근래는 무상으로 싸우는 사람이 되긴 했다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회이던은 사람을 유상으로 패던 사람이었다.


물욕이 드물어 보상에 연연치 않는 성격이긴 하다만, 어째 점점 싸움의 기쁨 그 자체를 보상 삼는 모양새라 보기에는 심히 불쾌하다.


그러나 지금이라고 해도 마냥 무상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전기톱 때문에 그러하다.


“빠아악!”


“아악, 왜 또 지랄이냐!”


뒷칸에 등 기대어 앉아 있던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들썩였다. 물 마시고 있었는데, 콧구멍으로 물방울이 빠져나오며 켁켁거리고 눈물을 흘리고 아주 난리가 났다.


“가장 최근에 처치한 반동자는 우두머리급으로 사료되는 바입니다! 그대의 봉사에 당국이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진짜 반문명의 잔재 같은 소리를 하는구만···.”


“당국을 위해 불철주야 살육을 벌이는 그대의 선행에 보답하고자, 고급 기능이 개방되었습니다!”


“거기엔 너의 입을 닥치게 하는 기능도 포함되어 있니?”


소녀는 못 알아들을 해괴한 말만 내뱉는 물건을 꺼림칙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제아무리 신에게서 수여받은 물건이라 해도 그렇지, 말하는 뽄새가 너무 괴악하다. 슬슬 마검이라는 세간의 시선에 굴복해야 할까 싶은 나약한 생각이 회이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그 뒤로 고급 기능에 대한 설명이 특유의 장황하고 과잉된 전자 말투로 쭈욱 이어졌다.


우두머리급 반동자··· 대체 반동자가 뭘 의미하는 것인진 모르겠다만, 하여튼 그 굉장한 거부감이 드는 이름의 소유자들을 처치하길 독려하기 위해 당국으로부터 허가받은 기능이랜다.


이러한 특례를 허용한 명예로운 당국에게 감사의 박수를 아끼지 마십시오. 우리가 넉넉한 식량과 포근한 취침 자리, 그리고 몸을 데울 수 있는 온기와 같은 호사를 누리는 것은 당국의 바다 같은 자비 덕입니다. 당국의 앞날에 빛나는 미래만이 있으라 오오 당국 비바 당국 빠모스 빠모스.


뭐 그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들이 괴이한 구호와 함께 3분가량 이어졌다. 회이던의 몸이 들썩거리기 시작했으며 그럴수록 여자애의 얼굴은 더 새파래졌다.


여하튼 분노와 인내의 값진 시간 끝에 고급 기능에 대해 본격적인 설명이 시작되었다.


기존에 점수를 차감하여 해금할 수 있었던 기능들은 전기톱의 쓰임새 범주 내에 국한되어 있었다. 위치 추적이야 그렇다 쳐도··· 톱날의 모양을 변화무쌍하게 바꾼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고급 기능은 굳이 전기톱일 필요가 없는, 본래 쓰임새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는 기능의 집합이라 한다.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뭔 소리여?”


회이던은 멍청한 표정으로 멍청한 목소리를 내었다. 전기톱과 대화를 나누는 회이던을 바라보는 여자애도 그 못지않게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것은 예시입니다!”


갑자기 톱날이 덜걱 소리를 내며 두 갈래로 벌어졌다. 갈라진 톱날 사이에 푸른 빛의 전기가 웅웅거리기 시작하며, 손에 붙든 전기톱 몸체의 진동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무언가 석연찮고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려 했다. 회이던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즉시 강대한 섬광과 폭음, 그리고 반동이 일며 그의 몸이 붕 떠밀렸다.


“으아악! 뭐야!”


회이던은 마차에서 떨어져 바닥을 데굴 굴렀다. 말들은 마구 날뛰며 그를 자리에 내버려둔 채 달리기 시작했다.


욕지기를 내뱉으며 몸을 일으킨 회이던은 눈앞에 놓인 광경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근처 숲의 나무 몇 그루가 밑동의 아주 작은 부분만 남긴 채 분해되어 있었다. 불붙은 나뭇잎들이 팔랑거리며 그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회이던은 우선 말부터 쫓아 달렸다. 그런 그에게 전기톱이 뭐라 가증스럽게 뇌까렸다.


“방금은 고급 기능 가운데 하나인 전자빔입니다! 발당 200점이 차감되며, 400점을 추가로 차감할 시 필중 기능을 더할 수 있습니다!”


“당국은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었기에 이런 해괴망측한 걸 허가해 준 거냐···?”


“방금 발사한 전자빔 체험판에 대해서는 본래 지불액의 절반인 100점만 차감하겠습니다!”


“뭐라고? 이거 미친 새끼 아냐.”


소녀는 마부석으로 옮겨 앉더니 능숙하게 고삐를 잡았다. 질주하며 멀어지던 말들은 점차 속력을 완만하게 하더니 멈추었다.


“너, 말도 잘 다룰 줄 아는구나!”


도로 마차 뒷칸에 옮겨타는 소녀는 걱정스레 회이던을 쳐다보았다.


괜찮냐고 묻는 표정이긴 하다만, 그 못지않게 크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 소동으로 인해 온전히 회이던 걱정에만 주의를 기울여 놓을 수 없는 것 같았다.


회이던은 여자애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다시 마부석에 올라타 앉았다. 두 갈래로 갈라진 톱날은 어느새 다시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계속 일회성 기능만 소개받고 있는데··· 영구적으로 적용되는 기능은 없나? 나 계산과 돈 관리에는 젬병이야.”


“정보 약자들을 위한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일반 기능을 제한 없이 사용해 보세요! 대가는 매일 빼먹지 않고 당국의 적 200명분을 도륙하는 것입니다!”


“제발 묻는 말에나 똑바로 대답해 주겠니?”


“귀하께서는 본 머더소우 모델 47을 끈에 묶어 매고 다니시더군요! 당국의 은혜는 무척이나 영광된 것이지만, 식료품점이나 탁아소를 방문할 때에는 한 손에 들기 버겁죠! 나노 입자화 기능을 해금하시면 일상의 불편함을 한층 덜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해금에는 3500점의 차감이 필요합니다!”


“나노··· 뭐?”


그렇게 회이던은 3500점을 차감하여 나노 뭐시깽이를 해금하였다.


지옥문 안쪽에서 악마들의 악몽으로 도래하였던 지난 나날을 통해 딱 그만치의 점수가 쌓여 있었다. 이제 잔여한 점수는 17점에 불과하다.


“좋아. 꺼져.”


“당국에 봉사하는 정신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손에 들린 전기톱은 스르르 허공으로 흩어지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는 정말 마검이라는 오인에 구구절절한 변명으로 회답하는 게 추접해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기톱과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애의 표정도 어찌 형용할 수 없었다.


회이던은 거기다 대고 뭐라 구구절절하게 변명을 내뱉어 봤지만, 어째 추접함의 굴레 속으로 추락하는 느낌은 금할 수 없었다.



***



늦은 오후, 적막한 하늘이 다시 다른 색깔로 물드는 시간이 되었다.


하루의 시작이 너무나 요란했지만 정오 이후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낯선 사람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회이던은 마차를 모는 내내 소녀에게 이것저것 말을 건네었다. 너 몸은 좀 어떤 것 같니, 너 마음은 좀 어때, 아침에 겪은 일 때문에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진 않니,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휘젓는 것으로 간략히 대답할 수 있는 것들···.


“추위는 타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따스함이 너를 불편하게 하니?”


그 질문에는 애매한 표정이 돌아왔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다시 저었다.


회이던은 섶에 달라붙은 작은 불길을 후후 불며 바닥에 모닥불을 일으켰다.


남은 식재료를 적당하게 냄비에 부어 넣어서 끓일 생각이었다. 이렇게 소모되기에 너무나 값비싼 포도주는 또다시 잡탕찌개의 국물로 전락하는 비참한 꼴을 면하지 못했다.


회이던은 냄비의 뚜껑을 덮은 뒤 소녀의 옆에 앉았다. 완전히 끓어서 먹을 만한 상태가 되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내내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던 말을 꺼내려는 것이었다.


“너 데려다 놓을 장소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한 군데밖에 떠오르지 않더군.”


코멜루가 향하던 그곳, 척파크 구릉지의 가니티 성채를 말하는 것이다.


소녀는 별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사실 그 어디라도 내킬 리 없을 것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차악 가운데 최선을 선택하는 것뿐일 테다.


“나 그곳 성주 되시는 잘포로스 공과는 면식 없다. 그런데 내 은사께서는 그분과 면식이 있으셨지. 교단을 대놓고 거스르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아주 많이 품으신 분이라 하더구나.”


여자애 표정에서 뜻이 읽혔다. 그런 실낱같은 접점으로 귀족이나 되시는 분께서 식객을 한 사람 더 감내하겠냐는 물음이었다.


게다가 그냥 식객도 아니고 꺼림칙한 마법 실험의 대상자이다. 어떤 사람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까. 회이던이야 알지 못한다. 가 봐야 아는 일이다.


“떠오르는 곳은 거기밖에 없어. 그 이상 나아가면 너무나도 거친 야지다. 널 그 무렵까지 데려갈 순 없어. 그게 우리 둘 모두에게 최선이야.”


벽지의 감시요새, 교단의 손길마저 옅은 그곳이야말로 도망자가 몸을 맡기기 가장 좋은 곳일 터이다. 어쩌면 코멜루와 뻘쭘한 재회를 가질 수도 있겠거니 싶다.


“물론 맨입으로 널 맡길 순 없을 거다. 내가 맨입만으로 마음의 충족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언변가도 아니고 말이야. 그분께서 돈이 아쉬운 사람은 아닐 테니 육체적 노동을 지불해야겠지. 내가 대가로 바칠 수 있는 것은 저기 실린 좋은 포도주와 거머쥔 실력뿐이니깐.”


소녀는 자기 자신을 가리킨 뒤 어깨를 으쓱했다. 표정에는 어쩐지 북받침 같은 게 읽혔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신에게 왜 이런 혜택을 베푸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왜긴 왜야. 네가 나에게 돈을 줬잖아. 액수도 꽤 많으니 이 정돈 해야지. 돈 받았으면 받은 만큼은 해야 해.”


소녀의 마음 편하게 하려고 얼버무린 말이었다. 그만큼 많은 액수는 아니었다.


조날루 헤티치오의 앞에선 스스로를 악마만도 못하다 자조하긴 하였다. 그럼에도 인정이라는 것은 그의 취약한 부분인지라 물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이던은 소녀의 울적한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겹쳤다. 비슷한 과거 때문에 그녀의 처지에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노라 자기최면을 걸면, 실제로 그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랬다···.


문득 과거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바닷가의 작은 소도시 회이던의 아름다운 고향에서 시작해 잔부스에 달하기까지, 그 모든 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잔부스에서는 짐승보다 나은 삶을 살았다. 자기 소유의 가옥과 침대가 있었고, 심지어 그것들은 과분하게도 질이 좋았다. 그때의 삶이 까마득했다.


그 순간과 현재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을까. 망설임 없이 지금이 더 낫다고 대답하는 게 교과서적이다.


그런데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다. 잔부스에서의 삶 역시 어느 지점에 달하기 전까지는 매우 충만했다.


그나마 그립진 않다는 말을 덧붙이기라도 한다면 냉소적인 방점을 찍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다. 가끔은 그리웠다.


“네 이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구나.”


회이던은 그릇에다 소녀 몫의 건더기를 퍼 올리며 말했다.


“글 쓰거나 읽는 법은 아니?”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적당히 괜찮은 이름들을 나열해 보마. 임시로 너를 칭할 이름이야. 마음에 안 들면 고개를 젓고 마음에 들면 고개를 끄덕이렴.”


회이던은 이름들을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했다. 여자애는 계속해 고개를 저었다.


부슬거리며 떨리는 이파리 아래 고즈넉한 연기가 솟아오르고 빛은 풍성했다. 날이 저물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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