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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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히트
작품등록일 :
2024.08.06 21:13
최근연재일 :
2024.09.0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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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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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DUMMY

32



잘포로스 공 집무실의 위치는 탑의 꼭대기 층이었다.


올라가는 계단은 사각의 벽면을 둘러 오르는 나선 형태로, 그 옆을 훑는 석벽에는 뚫린 창 이외의 것이 없었다. 감춰진 지하실 속 문화의 보고와는 대비되는 삭막함이었다.


“나의 부끄러운 집무실이라네. 들어오게나.”


문 안쪽도 푸근함과는 거리가 먼 광경이었다. 짐승의 털가죽을 최소한만 가공하여 제작한 양탄자, 오래된 무구 등 무인의 강단과 베짱이 느껴지는 장식물들부터 눈에 띄었다.


다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집무실 이곳저곳에 배치된 종교적인 상징물들이었다.


엄혹한 분위기에는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 수가 너무나 과했다. 과잉된 신앙이란 없다며 무제한의 맹신을 촉구하는 교단이 좋아할 법한 내부 기물들이다.


“지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군요.”


“잘포로스 가문은 대대로 교단에 충성하는 번견이었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네.”


교단은 가장 독실하며 절개 있는 가문에게 금역과 맞닿아 있는 땅을 하사하였다. 그것은 포상이 아닌 족쇄였으나 잘포로스 가문은 이를 영광스레 여겨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다.


그들은 세대를 걸쳐 교단의 번견으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금역의 동태를 감시하였으며 또한 금역으로부터 문명 세계를 감시하였다.


금역에서 넘어오는 뭔지 모를 존재에 대비하여, 그리고 금역으로 넘어가려 시도하는 이단자에 대비하여.


“의무는 불어났네. 현재에 다다라선 비단 금역만이 아닌 얼어붙은 지옥불의 도시들 역시 감시의 눈길 아래 놓아야 하지. 공교롭게도 가나티의 위치는 그 폐허들이 교차하는 중앙 지점의 부근에 위치해 있다네.”


“폐허들 가운데 한 군데서만 악마들이 쏟아져 나와도 성채의 운명이 풍전등화 아닌가요.”


“그럴지도.”


잘포로스 공은 벽가의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더니 회이던과 카에키에게도 각자 의자 하나씩을 권하였다. 두 사람 모두 착석하였다. 카에키는 여전히 전신에 담요를 꽉 두르고 동여맨 채 그대로였다.


“집무실, 성채, 땅과 더불어 신앙심 역시 대를 이어 내려온 것에 포함됩니까?”


“성주에 사제를 겸하고 있다네. 하지만 선친들의 투철함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에 지나지 않지. 그저 횃불께서 난세를 구원해 주시길 새벽마다 기도할 뿐이라네.”


그의 말에서는 교단의 전횡과 개인의 신앙심을 별개로 놓는 유보적인 태도가 엿보였다.


“성벽에서 경비를 서고 계신 분들 가운데 한 분은 발롬니 공의 성함까지도 알고 계시더군요. 가솔분들께서도 귀공과 뜻을 함께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신앙의 방식뿐만 아니라, 은밀히 행하시는 활동의 관여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네. 입은 무거우며 마음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일세. 그들 모두 나의 가문이 아닌, 나에게 은혜를 입은 일족의 구성원들이야."


이상의 질문들은 침묵을 깨기 위해 툭툭 내뱉는 것이 아니었다. 잘포로스 공을 떠 보는 모양새가 된 것은 죄스러우나, 회이던으로선 카에키를 이곳에 정착시켜도 좋을지에 관한 확신이 필요했다.


감히 누추한 정신적 빈민 주제에 하해와 같이 고귀한 분을 평가하려 든단 말인가···. 이런 미친···. 그러나 어찌 되었든 대답의 내용만이 아닌, 말을 전하는 태도와 목소리의 높낮이에서마저 현인의 차분함이 느껴졌다.


괜찮겠다는 확신이 아른거리며 피어올랐다. 하지만 거듭 돌이켜 봐야 하는 것은 회이던의 괜찮음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단 거다.


중요한 건 잘포로스 공의 괜찮음이지, 정신적 빈민인 회이던 따위가 미리부터 다 된 양 뿌듯한 마음을 품으면 그거야말로 따귀가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례를 무릅쓰고 한 가지 청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이 성채를 찾아온 주된 목적입니다.”


슬슬 혀끝에 시동이 걸렸다.


“한 번 말해 보게나. 발롬니 공은 나에게 많은 조력을 베풀었지. 그의 제자에게 똑같이 베푸는 것으로 부채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길 바라네.”


회이던은 잘포로스 공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였다.


“카에키, 슬슬 담요를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조금 망설이는가 싶던 카에키는 이내 하라는 대로 하였다. 미약하게나마 보관되어 있던 냉기는 여과 없이 내뿜어지며 잘포로스 공의 피부에 섬뜩하게 닿았다.


회이던은 그녀 어깨에 한쪽 손을 얹었다. 시선만은 잘포로스 공에게 고정해 놓은 채였다.


“이름은 카에키라 합니다. 임의로 붙여준 이름으로, 본명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금역 가는 길 도중 사악한 마법사에게 붙잡혀 있던 것을 구해 주었지요.”


노인의 강건한 얼굴과 소녀의 떨리는 얼굴이 똑바로 마주쳤다.


잘포로스 공의 조금은 무심해 보이는 눈빛 이면에서는 일말의 호기심과 연민이 복합적으로 읽혔다. 그러나 카에키는 이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똑바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였다.


회이던은 그녀 어깨에 얹어 놓은 손바닥에서 다소의 저항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자네의 딸이 아니었군.”


“다른 사람과 정분나는 것은 관심 바깥이라서요···. 카에키, 잠시 문 바깥에서 기다릴 수 있겠니. 그래 주면 고맙겠는데.”


카에키는 싫다는 듯 고개를 한 번 젓고 말았다.


“긴밀히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부탁한다.”


묵묵부답, 조금 난처했다. 어쨌든 그녀가 겪었던 심적 고통들을 잘포로스 공에게는 모두 열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사자를 떡하니 옆에 둔 채 그 모든 사항을 일일이 늘어놓았다간 심대한 고통을 재차 상기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묵묵부답이다. 결국 별수 없이 최대한 축약하여 전하기로 하였다.


“사냥꾼이신 아버지와 함께 벽지에 정착하여 살던 녀석입니다. 하지만 아이 아버지는 되도 않는 죄목으로 교단 것들에게 살해당하였지요.”


잘포로스 공의 눈썹이 다시금 뒤틀렸다.


“잔혹한 운명 놀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녀석을 구출한 것은 어느 숲속으로, 불법 마법사의 정체 모를 실험장이었죠. 그놈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진 모르겠다만, 그 여파로 체질이 다소 이질적으로 변했습니다.”


그 이질적인 변화란 것에 대해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듯하였다. 잘포로스 공 역시 유별난 이 추위가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발산되는지쯤은 눈치챈 낌새였다.


“사냥꾼의 딸, 마법 실험의 피해자. 그러나 교단 것들은 그저 천진한 소녀로 바라봐 주진 않겠죠. 연좌의 법칙이 작용하리라는 게 훤히 보이는바, 그냥 좌시할 순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의인이군.”


“과찬이십니다. 입맛 맞는 경우에만 의로움을 흉내 내는 호로 새끼에 더 가깝죠.”


“발롬니 공도 가끔은 그렇게 천박한 어휘를 사용했지···. 자네와 카에키 둘 모두 같은 종류의 상실을 공유하고 있군.”


잘포로스 공은 집무실의 아무런 의미 없는 한 구석에다 시선을 대어 놓았다.


시선 향한 곳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눈길이 향하는 종착점 너머, 과거의 어느 순간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카에키, 아버지께 벌어진 비극적인 일은 무척이나 유감이구나.”


이름 불린 소녀는 슬쩍 고개를 들어 잘포로스 공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 노인의 두 눈은 무심한 듯 간결한 빛을 여전하게도 발하고 있었다.


넌지시 보낸 조의의 말이 그녀 귀에 무척이나 따스하게 들렸다. 몸에 들러붙은 냉기는 무척이나 시린데도 온기가 따스했다. 담요를 쥔 채 꼬물거리던 카에키의 손가락에 힘이 꽉 실렸다.


“···드리고 싶은 청이란 것은 말씀드린 지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관망하던 회이던의 입이 열렸다. 이윽고 거두어진 잘포로스 공의 시선은 말이 들리는 곳을 향했다.


“저는 일급 현상범입니다. 가는 곳마다 역병처럼 재앙을 뿌리고 다니지요. 언제까지고 이 아이를 그 한복판에 대동할 순 없습니다. 카에키를 품을 수 있는 장소는 제가 아닌 다른 어딘가예요.”


어깨가 움찔거렸다. 잘포로스 공은 그 미세한 반응을 눈치채었다.


“카에키를 가나티에 정착시키고 싶은 것이로군.”


“정확히 알아채셨습니다.”


어깨를 조금씩 파들거리기 시작한 카에키는 고개를 틀어 회이던을 응시하였다. 눈길이 제법 간절했다. 하지만 회이던의 눈길은 잘포로스 공에게 꽂혀 있을 뿐, 되돌아오지 않았다.


“제가 향하는 길 앞으로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저 역시 알지 못합니다. 카에키의 안전을 대가로 지불할 수는 없어요. 무른 마음에서 비롯한 상냥함이 때로는 독이 되곤 합니다···.”


회이던의 팔뚝이 덥썩 잡혔다. 그제서야 눈길이 카에키를 향하였다.


소녀는 입을 우물거리며 뭔가 말하고 싶어 하지만, 회이던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 눈동자 이면에 실린 것은 냉정함이었고, 어쩌면 무심함으로 읽혔을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


카에키는 붙든 회이던의 팔뚝을 뿌리치더니 문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발자국 소리가 회이던으로부터 급격히 멀어졌다.


미처 닫히지 못한 문짝 너머로 가나티의 권솔 한 명이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 조금 뒤에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가는 소리가 뒤이었다.


여전히 두 손에 붙잡힌 듯 어색하게 들려 있는 팔은 천천히 내려앉으며 무릎으로 되돌아왔다. 집무실을 감싸고 있던 냉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대신하여 침묵이 공간을 사로잡았다.


조용함을 깨뜨린 것은 문 바깥 쩔쩔매는 목소리였다.


“나, 나으리! 요청하신 그림은 여기에다 놓고 가겠습니다요!”


“아아! 수고했네! 식사할 때가 다 되어 가니, 아래서 기도를 드리고 있게나!”


“예에엡!”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다시금 뒤따랐다. 다시 고요가 들이닥쳤다.


잘포로스 공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쓰다듬거나 하며 회이던을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입성하였을 때처럼 영혼을 꿰뚫는 듯한 눈빛이었다.


“식사 생각은 있나?”


“잘 모르겠네요. 아마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카에키는 자네에게 아버지의 잔상을 투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그 말이 조금은 섬뜩했다. 질색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 없군요.”


“아이는 아버지를 두 번이나 잃게 되는 것이지.”


잘포로스 공이 말한 바가 카에키의 본심이라면, 더더욱 그녀를 옆에 두어선 안 되었다.


전우라면 얼마든지 옆에 둘 수 있었다. 전우 된 관계란 죽음으로부터 필연과 우연 그 어느 사이에 놓여 있다.


전우의 죽음을 목도한다면 몹시 슬플 테다. 하지만 이미 발생하였다면 그것은 필연에 의한 것, 결국은 등 뒤에 놓은 채 나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어떨까. 바닷가의 소도시 아름다운 고향에서 물질을 하시던 아버지, 머나먼 우주에서 이 이상한 세계까지 찾아온 데브루인.


숲속에 붙잡혀 있던 꽁지머리 소녀도 그에 준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바람 없는 공간에서 촛불 떨리는 정도로만 흔들리던 회이던의 마음은 확고해졌다. 카에키를 옆에 두어선 안 된다.


“요 얼마간 데리고 다니면서 정을 붙이긴 했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죽음의 경계선 위에서 외줄 타도록 방치해 놓을 순 없습니다.”


“그런가.”


“간곡히 청을 드리겠습니다. 카에키에게 안전을, 사람들의 온기를 제공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대가는 필요 없네. 내 카에키를 거두도록 하지.”


잘포로스 공은 표정도 바꾸지 않으며 응하였다. 앉은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던 회이던은 그 상태로 몸이 굳었다.


“···넹?”


그만 얼간이 같은 목소리를 내뱉고야 만 것이다. 긍정이 필요 이상으로 시원시원하여, 일순간 마음의 얼빠짐을 제어할 수 없었다.


“자네의 청을 받아들이겠네. 말했잖나. 발롬니 공이 나에게 베푼 만큼, 자네에게 베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냐. 카에키를 가나티의 식구로 받아들이겠네.”


결국 발롬니 공, 데브루인은 관찰자의 규율을 철저히 어겨버리고 말았다. 그가 잘포로스 공에게 행한 베풂은 문화재 보존이라는 결괏값에 국한되지 않았다.


인본의 개화, 사람다움이란 것을 여기 인간성 결여된 공허의 언덕 물결 위에다 꽃피워 놓았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다···.


잘포로스 공은 앉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회이던은 여전히 반쯤 일어선 자세 그대로였다. 몸의 균형이 엉덩이 쪽으로 과하게 쏠려 다리 후들거릴 법도 한데 조각상처럼 굳어 있다.


“가솔들 가운데 카에키 또래도 있습니까?”


“카에키 나이가 몇인가?”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이 총 다섯, 그중 카에키 또래는 둘이라네.”


“아이들은 짓궂은가요?”


“카에키의 체질 탓인가?”


“거기에 더해, 정신적 충격이 워낙 큰 탓인지 말하는 법도 잊었습니다. 짓궂은 녀석들이 괴롭히며 못살게 굴까 걱정이 되는군요.”


“내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지.”


“그리고 술은 실수로라도 먹여선 안 됩니다. 한 모금만으로 얼굴이 벌게지더군요.”


“명심해 두지.”


“마지막으로, 활쏘기에 무척이나 탁월한 재능 가진 녀석입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것도 백발백중이지요. 수비의 책무를 그 아이 어깨에 덜어 주십시오. 얹혀사는 식객이 아닌, 어엿한 가나티의 구성원이라 스스로를 여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알겠네.”


회이던은 그제서야 허리를 완전히 폈다. 그러나 이내 직각으로 굽어졌다. 그의 정수리가 잘포로스 공을 향했다.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카에키의 가족이 되어 주십시오.”


“나 역시 감사하네. 그 오랜 걸음 끝에 이 척박한 성채에 도달한 것을, 은인을 애도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어 감사하네.”


무인의 강골을 지닌 손아귀가 회이던의 양측 상완을 붙잡아 세웠다. 힘 있는 기상이 느껴졌다.


가까이서 눈을 마주한 잘포로스 공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회이던의 등짝을 툭 두드리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곧장 떠날 생각인가?”


“곧바로 떠나는 게 좋을 듯하군요. 저는 역병 뿌리는 존재나 다름 없어서, 빨리 떠날수록 가나티에 득이 됩니다.”


“말을 너무 축약해서 전했군. 내 말은, 카에키를 다시 만나지 않고 곧장 떠날 거냐 묻는 걸세.”


말이 내리박혔다. 움직임이 멎었다. 회이던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모든 것은 끝났고, 이제는 작별의 방식만이 남았다. 여전히 더 여린 쪽이 결정하도록 두는 게 맞는 것일까.


다음에 다시 보자, 이런 말을 면전에 남기는 것이 옳지 않은 것 같았다. 일이 완전히 틀어지지 않는 하에야, 다시 만나게 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헛된 희망을 품도록 유도하는 말이다. 윤리 측면에서는 한참을 그릇되었다. 차라리 곧장 떠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회이던을 향해 배신감을 느끼며, 치를 떨도록 두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



“여기 있었구나.”


카에키는 건물 뒤편에 홀로 앉아 있었다.


포장된 한 폭 그림이 손에 들린 회이던은 느린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림을 벽면에 비스듬히 세워놓은 뒤 얼굴을 살피니 우울한 기색이 만연했다.


회이던은 그녀 옆에 앉았다.


“좀 어때.”


어떻고 자시고, 그를 바라보는 눈시울이 촉촉했다. 그렇게 잠시 침묵에 잠겼다. 여러 번의 침묵을 맛보는 날이다.


회이던은 장갑을 벗은 뒤 손바닥을 카에키에게 내밀었다. 내밀었을 뿐 그 밖의 말은 덧붙이지 않아 당최 어쩌라는 것인가 싶지만, 회이던은 묵묵하게 비언어를 채택하였다.


조심스레 바라보던 카에키는 그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얹었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줄까?”


카에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너를 아주 좋은 친구라 생각해. 우리는 말이 안 통하지만 대화는 아주 잘 통하거든.”


회이던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자신의 것보다 작은 손바닥을 꽉 쥐었다.


알싸한 냉기가 그의 손바닥에 어린 체온을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살얼음이라도 끼는 듯 굳은살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네가 고작 술 한 모금에 취한 밤 있지. 그것만으로 만취해서 얼굴이 벌게져 있을 때 정말로 걱정이 되더구나. 다음날 숙취가 장난이 아닐 텐데 하면서 말야. 그런데 한편으론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했다.”


회이던은 고개 틀어 카에키와 눈을 맞추었다.


“활짝 웃을 땐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하고 말야.”


촉촉한 눈가는 그보다 약간 더 그렁그렁해졌다. 송골거리며 맺힌 냉기의 김이 눈앞을 더 흐리거나 하진 않을까.


“시간이 흐르면 술 취하지 않은 채로도 그런 표정이 나오려나 싶기도 했지. 그러길 바랐지. 그런데 난 그때가 올 때까지 네 옆에 있어선 안 되거든···.”


이번엔 카에키 쪽의 손바닥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녀 손목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지만 별로 아프진 않았다.


어쩌면 냉기에 의해 감각이 다소 죽어,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널 친구로 여기게 되었으니깐 말이야. 그건 내게 있어 두려움이야. 내 말이 뭔지 잘 알 거다. 잘포로스 공 말대로 우리 둘 모두 비슷한 상처를 지녔지.”


엄밀히는 그렇지 않다. 회이던의 아버지는 병환으로 천수를 다하였다. 발롬니 공은 교단 것들에게 살해당한 줄로만 알았으나, 실은 다른 우주에 멀쩡히 살아 계신다. 어쩐지 카에키의 아버지를 이용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그리 편치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 아버지가 발롬니 공과 같이, 우주 어딘가 다른 공간에서 이따금 그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라면 회이던의 말을 용인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도 딸의 안녕을 바랄 것이며, 더 자주 웃길 바랄 것이다.


“날 위해, 그리고 네 아버지를 위해 여기서 살아 주길 바란다. 그리고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고, 더 자주 웃는 얼굴이 되어 주길 바라.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날 위해서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기쁠 것 같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은 일부러 누락하였다. 그렇게 가만 카에키를 바라만 보았다. 이제 이별의 방식을, 회이던보다 더 여린 그녀가 결정할 차례이다.


카에키는 어깨를 뻗어 회이던을 꽉 끌어안았다. 차가운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회이던은 그녀의 등에 자신의 나머지 팔을 살포시 올려 놓았다. 자신의 온기가 카에키의 몸에 닿아 느껴지길 바랐다.



***



“어디로 향할 생각인가?”


“여기서 더 북단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여기서 더 북단이라면··· 금역을 말하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잘포로스 공은 그 까닭을 묻진 않았다. 막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자신은 그저 금역의 감시자일 뿐, 파수병은 아니라는 것이려나 싶었다.


회이던은 애당초 가나티 성채에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성채의 구성원 그 누구도 그가 금역을 향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비단 잘포로스 공만이 아닌 그 옆의 수행원 역시 그와 같은 얼굴이었다.


오직 카에키, 이제는 가나티의 식구가 된 그녀만이 구태여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기억이 축적하고 또 축적되기를, 그리고 회이던을 추억 속의 아른거리는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기를.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랐다.


“그럼, 안녕히.”


“잘 가게, 발롬니 공의 제자여.”


카에키에게는 작별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 눈동자만을 전하였다. 그 안에 많은 것을 담아 전했다. 회이던에게 말 남길 수 없는 그녀를 위해 그러했다.


회이던은 마부석에 올라탔다. 더는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뒷칸에는 잘포로스 공이 베푼 그림 한 폭이 실려 있다. 그리고 식량도 여럿 실렸다. 야채를 절인 것, 고기를 절인 것, 닭의 알, 뭔지 모를 새의 알, 우려낼 수 있는 찻잎···.



고삐를 당기자 두 필의 말이 푸르릉거렸다. 이윽고 바퀴를 굴러가게 했다.


“제···!”


내측 성벽의 문을 통과할 때였다. 회이던의 뒤통수에 짧은 목소리 하나가 박혔다.


“제···!”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그러나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회이던은 마차의 속도를 늦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잘포로스 공 옆에 서 있는 카에키의 입이 벌어져 있었다. 맺힌 눈물이 결국 속절없이 흘러내리고야 마는 그 얼굴은, 나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짜내듯 간절했다.


“제 이름···!”


회이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에키가··· 맞아요···!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제 이름··· 카에키가 맞아요···!”


눈물이 한 방울 타고 흐르는 볼살은 들썩이며 올라가 있었다. 밤의 어스름 속, 모닥불의 희미한 빛을 쬐며 발하였던 그 미소가 만개했다.


카에키는 마침내 활짝 웃으며 머리 위로 치켜든 손을 마구 흔들었다.


잠시 뜨내기처럼 멀뚱거리던 회이던도, 이내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작가의말



비축분은 여기까지입니다. 뒤에도 짧게 쓴 글이 더 있지만, 완결성이 없어 싣지 않기로 했습니다.


여러 현실적 요건으로 [전기톱 소드마스터]는 이 이상 이어 나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도 몰랐던 것이, 회이던이라는 캐릭터에게 많은 정을 쏟고 있었나 봅니다. 어째 마음이 허하네요.


여건이 허락된다면, 언젠가 회이던의 여정은 꼭 마무리 지어주고 싶네요. 그럴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부족함 많은 글임에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 _ _ )


그리고 하루의 일부분을 제 보잘것없는 글에 할애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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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6 24.08.19 19 1 21쪽
15 15 24.08.18 22 1 28쪽
14 14 24.08.17 21 1 17쪽
13 13 24.08.16 20 0 19쪽
12 12 24.08.15 18 0 18쪽
11 11 24.08.14 19 0 18쪽
10 10 24.08.13 22 0 20쪽
9 9 24.08.12 24 0 23쪽
8 8 24.08.11 30 0 19쪽
7 7 24.08.10 37 0 16쪽
6 6 24.08.09 35 0 26쪽
5 5 24.08.08 35 0 18쪽
4 4 24.08.07 52 0 23쪽
3 3 24.08.06 64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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