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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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히트
작품등록일 :
2024.08.0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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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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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DUMMY

17



헬리콥터는 어느 어두운 숲속에 착륙했다.


두 줄기로 뻗은 빛이 흙 위에 살짝 덮인 어둠을 비추었다. 해당 광선 속에서는 밤의 안개가 너울거렸다. 그 옆에 서 있는 얼굴들에도 굴곡진 음영이 드리웠다.


“규율을 왕창 어겨버리셨군요. 개입하지 말 것. 왕창 개입해 버리고 마셨잖습니까.”


“추기경을 면전에다 놓고 사상을 떠벌린 것부터가 중징계감이야. 거기다 더해 무허가로 차원을 항해하고 토착민들을 쏴 죽이기까지 했으니 더한 징계가 기다리고 있을 걸세. 위원회에 회부되는 것은 피할 수 없겠지.”


“목이 잘리고 마는 것은 아니겠죠?”


“나 사는 곳에 그런 야만은 존재하지 않네. 기껏해야 일선에서 물러나 어디 연금되는 것으로 끝나겠지. 말인즉슨···.”


발롬니 공은 말을 한 번 끊었다. 이파리가 가려 달빛도 내려오지 않는 밤안개 속 묵묵함이 내려앉았다. 회이던도 끊긴 말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걸세. 우리가 얼굴 맞대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뭔지 모를 애수 같은 게 회이던의 가슴에 일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허망하게 죽어 있던 얼굴 앞에선 제대로 작별도 고하지 못했다. 이렇게 살아있는 얼굴 앞에서 작별의 말을 주고, 또 받을 수 있음을 감사히 여겨야 할까.


스승, 혹은 신, 그 이전에 제2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어느덧 발롬니 공의 눈빛에도 마찬가지로 애수가 서려 있었다.


그는 정말로 신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회이던이 정신 나간 횡설수설함에 멍청하게 고개 끄덕인 것이 아니라면야 정말로 그러할 것이다.


그리 드높은 존재가 한낱 양아치, 길거리에서 싸움이나 일삼던 폐품 언저리 존재에게 애틋함을 느낀다는 것인가.


역시 공은 미친 게 분명하다. 회이던은 속으로 되뇌었다.


발롬니 공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시선은 어디에도 두고 있지 않았다. 멀쩡히 뜬 한 쪽 눈과 반만 뜬 다른 쪽 눈의 초점은 사물이 아닌 허공의 대기에 맞추어져 있었다. 밤인데도 그의 동공은 작았다.


“마왕의 존재를 믿나?”


다시 내뱉어진 발롬니 공의 목소리는 한층 더 적막했다. 묘하게 들어차 있던 감정들은 모조리 절제되어, 산새 우는 소리 하나 없는 숲의 분위기에 기이할 정도로 들어맞았다.


다만 괜찮은 작별 인사말을 생각하고 있던 회이던에겐 조금 뜬금없는 말이었다.


“믿고 자시고, 있다고 생각해야죠.”


“흐음. 어째서지?”


“안 그러면 미쳐버립니다.”


회이던은 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지언정 마왕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깊게 의심해 본 적 없었다.


어쩌면 그것도 신앙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발판이다.


회이던 시각에 교단 것들은 원래부터 살짝 미쳐 있었지만, 어쨌든 예전에는 지금보다야 훨씬 온건했다.


그러나 지옥불의 공세가 노골적이게 된 현재에 이르자 배교자 몰이는 일상이 되었고 사람 사는 곳이면 무릇 사람 살 익는 냄새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그 원흉 된 존재가 모든 악마들의 숭배를 받는 마왕이다. 인간들 광기를 집필하고,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등을 떠밀었으며 아기 손 닿는 곳에 맹독 사탕 놓아둔 존재가 마왕이다.


그러니 믿어야 했다. 신이 없다면, 혹은 무심한 존재라 한다면 마왕의 존재만이라도 분명해야만 했다.


마왕마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학살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짓거리 촌극이 되고 만다. 그냥 인간들끼리 아무것도 없는 허공 손가락질하며 발화하다가 잿더미로 멸망하는 게 된다.


“관성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성을 통해 생각해 보게나. 마왕이 실존한다 생각하나?”


발롬니 공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며 재차 물었다. 비슷한 논조의 질문들이 과거 역사 속에도 수 차례 있었다.


그래서 마왕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 죄악스러운, 아니, 죄악 자체인 존재가 반생명을 추종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교단은 제기되는 모든 의문에 모호한 답변으로만 일관하였다.


마왕은 지옥불의 도가니 너머, 유황과 뼈를 굳혀 만든 죄의 왕좌에 앉아 멸망을 기다리는 존재. 또한 저주투성이의 덩어리이며 악의를 머금은 광대로다. 그것은 나약한 인간들의 머릿속에 침범하여 횃불에 대한 불신을 심어 놓는다. 그러니 그에 대해 탐구하려 들지 말라···.


마왕의 죽음이 곧 성전의 종식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성전은 어느 위치에 서 있습니까? 시작과 끝, 둘 중 어느 지점에 가장 가깝지요? 무언.


거기에 대해선 일정한 대답 내뱉는 사제가 없었다. 외려 불편하다는 듯한 눈빛 혹은 이만 떠나 달라는 헛기침이나 돌아올 뿐이었다.


그리고 회이던도 해당 물음에 무언으로 답하였다. 관성에 따라 내뱉게 될 답변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애당초 깊게 탐구해 본 적도 없었다. 외려 뭔가를 알고 있는 마냥 단정 지은 어조의 발롬니 공에게 되물을 뿐이었다.


“공께선 무언가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진실을 깨우치신 건가요?”


“내가 뭔가 알고 있기에 묻는 말이 아닐세. 자네의 의지가 어떠한지 가늠해 보고 싶을 뿐이야.”


“무엇에 대한 의지 말씀이시죠?”


“삶에 대한 의지. 목적 없는 삶은 쉽사리 무너지기 마련이네. 한데 이 앞으로 펼쳐질 자네 삶의 목적은 오로지 생존뿐일 것이야. 교단의 사냥으로부터, 척박한 환경과 기후로부터 말일세.”


“괜찮게 들리는군요.”


“아닐세. 목적의 완수와 새로운 목적의 충당이야말로 삶의 의지를 지탱할 수 있어. 종막 없는, 오로지 죽음만으로 완수할 수 있는 목적이란 언젠가 의지를 바래어 짓밟고 말 거야.”


“그러니 마왕을 제 삶의 의지 되는 존재로 삼으란 말씀이신가요? 이거 원, 오늘만 해도 수 차례의 불경을 저질렀는데 이제는 마왕 숭배를 권유받고 있네요.”


“그 재간 넘치는 말재주를 자제하지 않으면 자네 대가리에 무언가 비극적인 일이 닥치고 말 거야···.”


회이던의 정수리에 몽둥이가 살포시 놓였다.


의지 운운의 골자는 마왕 숭배 권유가 아님을 회이던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왕 타도는 삶의 의지를 결부시키기엔 끝없는 생존과 다를 바 없이 막연하기만 하다.


발롬니 공 역시 그 사실을 간과하지 않은 듯 적막한 말을 덧붙였다.


“마왕이 자네 삶의 의지되는 존재가 되리라는 게 아닐세. 마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네 삶의 의지가 되리라는 것이지.”


“···마왕이 실존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마왕은 개념적인 존재가 아니야. 실제 육신을 지녔고, 이쪽 우주 어딘가에 숨어 있어.”


회이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숱한 성직자들이 명백한 답 내놓기 꺼려 한 주제를 눈앞의 노인이 단순하게 일축하고 있었다. 마왕이 실존한댄다.


“그 존재는 세계에 해악을 끼칠 방법을 궁리하고 획책하며 악마 군세를 움직이지. 죽일 수 있는 실체 지닌 존재이건만 교단은 마왕을 정녕 죽이고 싶어 하는지 의문이군. 아니, 찾아내려는 시도를 하는지조차 의문이야.”


“그러면, 제가 마왕을 죽여 없애길 바라시는 겁니까?”


헬리콥터의 두 눈깔이 발하는 섬광 속, 그것을 등져 하나의 그림자 뭉텅이로 서 있는 노인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서성거리며 광선을 뿌옇게 투과하는 안개는 밤의 추위 탓인지 엄혹한 냉기처럼 보였다.


어째 그 모든 것으로부터 광기의 자국이 느껴졌다. 놓여 있는 헬리콥터의 존재부터가 초현실적이다. 하지만 안개 속으로 물씬하게 스며든 광기는 눈에 보이는 광경이 아닌 귀에 들리는 말에서부터 기인하였다.


칼질을 남들보다 잘할 뿐인, 그것 말고는 쥐뿔도 없는 회이던 따위가 무슨 수로 마왕을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는 ‘이 세상’을 등지기로 한 것이지, ‘세상’ 그 자체를 등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을 아예 저버린 사람은 굳이 힘들게 추기경을 살해하거나 하지 않아. 오히려 그 대머리 개자식이 세상 욕보이는 걸 가만 방치하며 느긋이 바라보기나 하겠지.”


“그건 또 뭔 말씀이십니까? 계속 빙빙 돌려 말씀하시니 제 아둔한 대가리가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정수리 온전함을 보존하고 싶으면 말 좀 끝까지 들어···. 나 지금 자네에게 촉구하고 호소하는 걸세. 자네 이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않을 것 아닌가. 자네 이 세상이 그냥 콱 멸망해 버리길 바라나?”


“아뇨.”


“그럼 손 놓고 가만있어선 안 되네. 힘 갖춘 자라면 무릇 나서야만 해. 그러길 택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고한 다수를 향한 범죄나 다름없어. 그런데 우연히도 자네는 마왕에 대적할 만한 혈기와 솜씨를 지녔군.”


힘과 격려가 되는 말입니다. 그래요,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고, 그럴 힘을 갖춘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겁니다. 까짓거 한번 해 보죠. 기다려라 마왕 이 쌍놈아. 이 세상 양대 쌍놈 중 하나인 회이던 섬칼리고드가 간다···.


실제로 그런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보다는 뭔가 양심을 쿡쿡 찌르며 은근한 강요를 가하는 논조라 마음이 조금 떨떠름했다.


사실 회이던은 각지의 교회를 급습해 파괴 행위나 일삼으며 공포주의를 확산시키고자 하는 비교적 소소한 전망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마왕 토벌의 과업이라니, 일개 개인에게는 규모가 너무 방대한 것 아닐까.


“···방금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 지금 좀 상태 이상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머리가 정상이 아니신 것 같아요.”


“자네도 남들 보기엔 적잖게 미친놈이라네. 하지만 옳은 게 뭔지 판단할 능력을 갖춘 미친놈이지. 언제까지고 냉소적인 농이나 던지며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려 하는 게 가증스럽긴 하다만.”


회이던은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떨떠름하긴 하나, 그래도 못할 건 없었다.


언제까지고 교단 것들에게 추적을 당하다가 남루히 죽음 맞는 것이나, 마왕의 강대한 권능에 맞서다 볼품없이 불타 죽는 것이나, 결국엔 죽는다는 점에서 그게 그거였다.


그럼 차라리 박진감 넘치는 쪽을 택하리라. 최소한 머리에 피가 몰려 벌게진 상태로 죽을 순 있을 것이다.


“까짓거 한번 해 보죠. 어디로 가야 합니까? 마왕은 어디에서 죽일 수 있죠?”


“금역을 향하게. 북풍의 장벽을 넘어 진정한 북방을 지나 금역에 달하게나. 그곳에서 자네가 원하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걸세.”


“금역이요? 이로움을 행하기 위해 번번이 금기를 범해야만 하네요.”


“새삼 정신 나간 세상이로군.”


북방이 죄다 북방이지 진정한 것과 상대적 미흡한 것을 왜 굳이 가르냐고 할 수 있다. 비옥한 토지 드넓은 남부 거주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북방이란 지리학적인 명명이 아니다.


잔부스에서 한참을 위로 가면 북풍의 장벽이라 불리우는 산맥이 나타난다. 어깨동무한 거인들처럼 떡하니 서서 땅덩어리를 분단하는 대자연의 위용이다. 그 너머가 진정한 북방이다.


단순 방향 측면에서만 북방이라는 게 아니다. 엄혹한 불모, 문명 바깥의 변두리, 그 성질로서 진정한 북방이다.


한때 눈과 얼음으로 문화를 꽃피웠던 도시들은 악마들의 공세에 가장 먼저 쓸려나갔으며 그 자리엔 인간 두개골로 자갈탑 쌓는 악마들이 있다.


지금은 그저 성전의 고된 최전선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곳에 광신을 품지 않은 사람은 얼마 없다.


그런가 하면 금역은 진정한 북방 끄트머리에 위치한 눈과 얼음뿐인 황야이다. 그곳을 향하는 것조차 속죄가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대죄이다.


교단의 광기가 지금의 지경에 달하기 전에도 금역에 대한 탐구는 즉결 처형으로 다스렸다. 당시에는 신성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단순 호기심이 죄악으로 치환되는 유이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공고하였던 왕실의 권위마저 그 집행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까닭은 알 수 없다. 때문에 금역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한데 발롬니 공은 마왕과 금역을 결부시키는 말을 하였다.


“마왕은 금역에 있습니까?”


“아니. 그렇진 않네.”


“교단이 그 오랜 세월 동안 감추고자 한 게 마왕의 거처였나요?”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 그럼 뭡니까?”


드디어 회이던 대가리에 몽둥이 타격이 한 차례 가해졌다. 발롬니 공의 능숙하지 않은 폭력을 피하는 것은 회이던에게 몹시 쉬웠다.


발목에 구두코가 닿아 바닥에 넘어질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회이던은 더러운 흙바닥을 뒹굴며 굳은 낙엽을 부수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일어나게.”


“네엡.”


“내 말을 신탁이라 여기게나. 신탁은 목적지의 존재만을 읊을 뿐, 그 과정과 맥락은 모두 도려내어 놓지. 전부 말해줄 수는 없어. 자네 인생을 낱낱이 예견해 주고 싶지 않네. 삶의 의지는 목적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에서도 기인하거든. 난 자네 정신의 복지를 챙기고 싶어.”


“저를 이렇게 챙겨 주시는 분은 정말로 공뿐입니다. 그 모든 언어 폭력과 육체적 폭력에도 감사할 따름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마왕 토벌의 맹세는 세계의 명운이나 개인의 영달이 아닌 회이던의 정신을 위한 복지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순간이 사서에 기록될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조금 많이 우스울 것이다···.


“아, 한 가지 더, 척파크 구릉지의 가나티 성채에 기거한 잘포로스 공에 대해 들어 봤는가?”


“들어는 봤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미움받는 분이시라 하던데요.”


“나와 은밀히 친분 나눈 사람일세. 반복되는 노숙에 심신이 지치는 날이 온다면 그를 찾아가 내 이름을 대게나. 친절히 맞이해 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발롬니 공은 뭐라 말을 더 이을 것처럼 운을 떼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해당 주제에 대해 할 말이 전부 떨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회이던은 뭐라 농이라도 던져 급격히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어볼까 했다.


그런데 발롬니 공의 얼굴이 지나치리만치 딱딱했다. 할 말이 떨어진 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해야만 하는 말이 있는 것일 테다.


슬슬 때가 왔다. 복지에 관해 심층 있는 논의를 하느라 다소 유예가 있었지만, 그 전에 예비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는 이제 가야만 하네. 그런데 이대로 안녕을 고하기에, 자네를 내 만용에 끌어들여 평생 쫓기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영 편치 않아. 그리고 검 한 자루로 불지옥의 운명에 대적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고 말이지.”


“그럼 가시는 곳에 저도 데려가 주시죠.”


“제발 산통 깨지 말고 입 닥치게나. 잠깐만 기다려 보시게.”


발롬니 공은 헬리콥터의 매끈하고 흠결 없이 검은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회이던이 따르려 했다. 하지만 발롬니 공은 손바닥을 들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을 완곡히 전하였다.


회이던은 시동 걸리는 소리와 함께 하늘 멀리 날아가 버리는 헬리콥터를 상상했다. 바깥에 작별 입에 담지 못한 회이던을 남기고서 말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발롬니 공 역시 작별의 순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를 수 있다.


회이던은 그런 생각을 했다. 작별의 방식을 정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더 나약한 존재라고 말이다. 더 굳센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도 작별에 후회 없이 대처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나약한 존재의 방식에 맞춰 주어야만 한다.


다만 회이던 자신이 발롬니 공보다 더 강인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회이던은 그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야 추기경을 벨 수 있었다. 하지만 발롬니 공은 결국 참지 못하였으며, 회이던보다 먼저 추기경의 면전에다 대고 분노를 터뜨렸다···.


“왜 그리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나?”


“공께서 절 내버려두고 떠나시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뭔 소릴 하는 게야. 잡생각은 집어치우고 내 손에 들린 이걸 보게.”


끙끙대는 노인의 두 손에는 웬 톱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톱이긴 톱이되, 톱날 아래 거추장스런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이상한 모양새다. 굉장히 비효율적인 형상인지라 사용처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일단 전투용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발롬니 공은 그것을 회이던에게 건네었다. 뭔지 모를 생김새에도 두 개 달린 손잡이만은 분간할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손잡이가 두 개나 달려 있어, 기이한 무게 배분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뭐 하는가. 애당초 생겨먹은 게 비효율의 극치인데···.


“뭡니까, 이건?”


“아아, 그건 전기톱이라고 하는 것이다. 거기 달린 쇠줄을 한 번 당겨 보게.”


손잡이 부분의 거추장스러운 부속에 쇠줄 꼭지가 빼꼼 고개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회이던은 영 께름칙한 기분으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손잡이 아래 거추장스러운 부분에서 덜덜거리는 배기음이 내뿜어졌다. 회이던은 마검을 처음 마주한 소작농처럼 화들짝 놀라 어깨 들썩이고 말았다.


손에 들린 것이 노한 곰의 심장처럼 힘차게 맥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미지를 향한 공포는 아니다.


무언가 바라듯 벌벌 떨어대는 전기톱의 몸체가 손바닥 맞닿은 면에 진동을 전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눈에 띄게 흔들리는 회이던 눈동자만은, 이 알 수 없는 미지에 대한 해명을 발롬니 공에게 구하고 있었다.


발롬니 공은 그런 그에게 대고 말을 하나 더 덧붙였다,


“자네 오른손에 붙잡힌 손잡이에 레버가 하나 달려 있을 걸세. 힘을 주어 눌러 보게나. 톱날 나한테 향하지 말고.”


회이던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발롬니 공의 말대로 하였다. 그 즉시 톱날이 굉음을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닿는 그 무엇이든 갈아 분쇄해 버리겠다는 기세로 분노를 토해내는데,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금속의 냄새로부터 폭력의 향이 코를 푹 찔러 왔다.


회이던은 주변 두리번거리더니 나무 등치에다 회전의 힘을 가져다 대었다. 도끼질 십 수번에 잘려야 정상인 두께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톱날을 쉽사리 허용하였다.


나무가 우지끈 소리 나며 무너져 내리기까지, 조심스레 가져다 댄 것만으로 5초가 덜 걸렸다.


나뭇가지 으깨지고 망가지며 나뭇잎 휘날리고, 나무가 통나무 되어 바닥에 일으킨 막대한 소리 전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톱 소음이 그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망할, 전기톱이라 했나요? 그냥 마검 아닙니까? 오늘 모독을 몇 번이나 범하는 거야.”


“마검 아닐세.”


“마검 아니라구요? 이게?”


“누가 묻거든 성검이라 둘러대게나. 사실 마검에 더 가까운 물건이긴 하지. 내 살던 우주의 오랜 옛날 유물이야. 우리 기준으로는 부끄러운 문명의 잔재라 할 수 있다네. 그러고 보면 내 조상들도 부끄러운 일을 참 많이 했군 그래···.”


그 뒤 전기톱이란 것에 대한 설명이 뒤따랐다. 영구기관으로 작동한다.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동력원에 반응하여 자가 발전하도록 되어 있다. 도중에 멎는 일이 없을 것이다···.


회이던은 열거한 것들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표정 살펴 대충이나마 해독할 뿐이었다.


“자네 솜씨 감안하자면, 사람 잡아먹는 맹수에게 날개까지 달아 준 격이 되겠구만. 그 힘에 너무 취하진 말게나. 힘에 취해, 이 땅의 나머지 존재들과 같이 호로새끼가 되는 것은 지양해 주게나.”


“걱정이 되실 법도 합니다. 저 같은 호로 쌍놈에게 맡기기엔 사악함에 가까울 정도로 위험한 무기인데요. 이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라 하지 않으셨나요? 이건 개입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만.”


“이미 규칙은 한 번 어겼어. 처음 범하는 과오는 어렵지만, 거기에 하나 더 얹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지. 청문회에서의 문책이 특별히 더 강한 논조가 되진 않을 걸세. 아니,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발롬니 공은 회이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약간 넋을 놓고 있던 회이던은, 그의 두텁고 강인한 손바닥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바닥에는 그 형태 갖춘 데서 느껴지는 질량,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발롬니 공의 눈빛에 담긴 것과 같은 것이다. 회이던은 그게 뭔지 정확히 파악하려 했다.


자랑스러워하는 것인지, 혹은 이미 생지옥이 되어버린 세상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야만 하는 비관인지, 둘 다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다른 의미가 더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이 정도밖에 못 해주는 게 아쉬울 따름이야. 그러나 동시에 충분하리라고도 믿네. 자네의 검술 솜씨를 당해낼 자는 이 나라에는 없어. 어쩌면 내 고향에도 없을 테고 말야.”


“과찬이 심하십니다. 평소에도 이렇게 과찬해 주셨다면 저도 어깨 좀 으쓱대며 다녔을 텐데요.”


“제법 괜찮은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 계속 망발을 휘두르며 산통을 깰 셈이야?”


회이던은 다시 몽둥이가 날아오진 않을지, 눈매를 얍삽하게 했다.


하지만 발롬니 공 손에 실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헬리콥터 안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그저 신뢰와 애수가 섞여 묵직한, 그런 손아귀로 회이던의 어깨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회이던은 어깨에 놓은 발롬니 공의 손을 거두게 했다. 그리고는 조금 뒷걸음질 치더니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요. 인간 발롬니, 귀족 발롬니 공, 그리고 신으로서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제 인생을 바꿔 놓으셨어요. 폐품 회이던 섬칼리고드를 인간 회이던 섬칼리고드로.”


“공이 뭔가. 목 잘리는 순간부터 작위는 박탈당했네. 데브루인, 본명으로 부르게나.”


“데브루인? 이상한 이름이네요. 하나도 경건함이 없는데요.”


“닥치시게. 이제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자네의 그 콧대 높은 자들 앞에서도 허울없는 반골적 기질을 썩 통쾌해했어도, 정작 그게 날 향할 때면 마음이 무척 불편했었어.”


“그렇군요. 하지만 이런 제가 그리워지실 겁니다.”


“닥치라고 하지 않았나. 자, 이리 오게. 우리 마지막으로 포옹 한 번 나누고 헤어지도록 하지.”


발롬니 공이 먼저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와 회이던을 꽉 끌어안았다. 회이던도 그의 등에 두 손을 슬며시 올렸다.


문득, 발롬니 공이 눈물을 흘리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얼굴 정면은 회이던의 귀 옆을 지나쳐 있어 보이지 않았다.


등짝이 조금씩 떨린다거나, 혹은 콧물을 삼키는 소리도 없었다. 포옹을 마친 뒤 보인 얼굴도 그저 멀쩡했다.


“우실 줄 알았는데요.”


“울 줄 알았다고? 하, 전혀. 이 똥통만도 못한 개판을 벗어날 수 있는 게 속이 시원하기만 하네.”


“그럼 저도 좀 데려가 주시죠.”


그것은 언제나처럼 일부러 허울없는 말을 던진 것이었다.


하지만, 일순간이었다. 아주 짧은 새 발롬니 공의 얼굴에 슬픈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말없이 눈빛만으로 그가 뱉고 싶어 하는 문장을 알 수 있었다. 귀에 들리는 듯했다.


회이던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다만 다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전했다.


헬리콥터는 아래에 난 풀을 휘저으며 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안개를 휘감고 먼지를 비추던, 신의 군마의 두 눈깔은 서서히 내뿜던 빛을 소등하였다.


유리창을 통해 발롬니 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바라본 유리창은 그저 시꺼멀 뿐이었다.


무너져 내린 나무 옆 나란히 선 회이던은 스승, 아버지, 그리고 신이 떠나는 것을 가만 쳐다만 보았다. 헬리콥터는 높게 떠오르더니 소리만을 흘릴 뿐, 결국 밤하늘의 색깔과 똑같이 녹아들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슬퍼해야 하는 걸까.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발롬니 공, 데브루인은 죽은 게 아니다. 그저 만날 수 없는 다른 우주의 어딘가에서 계속해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떠나보낸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가 살아 있는 것을 알고, 또 계속해 살아가리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과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리라는 것을 알기에 슬픔은 적었다.


고향에선 부디 잘 사십쇼. 근심 없이, 그리고 애석할 정도의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일 없이 잘 사셔야 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발롬니.


“저기다! 저기에 서 있다!”


“미친놈, 방금 그 괴성은 네놈이 낸 거냐?”


그렇게 계속 감상에 빠져 밤공기를 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잔기톱의 굉음이 멀리 있던 검은망토들의 주의를 끈 모양이었다.


산통을 깬 불청객들은 각종 외설적인 목소리를 외치며 회이던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좀 애상에 젖어 있으려 했는데···. 뭐, 좋아. 실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저놈 손에 이상한 게 들렸다!”


미약한 달빛 아래 뭉텅이처럼 보이는 검은망토들이 소리를 꽤액꽤액 내질렀다. 경건한 순간 직후에 접한 그들 목소리가 어째 돼지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영문 알 수 없이 웃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멎지도 않았다.


“하하··· 하하하···!”


“웃는다! 저 미친놈이 웃는다고!”


“하하하하하···!”


“마검에 뇌를 지배당했나, 계속 웃는다!”


“좆까!”


회이던은 혀를 쭉 내밀며 무한동력 전기톱의 쇠줄을 확 잡아당겼다.


즉시 숨을 토해내는 전기톱은 피를 갈구하며 울부짖었다. 전기톱의 소드마스터가 사라져 가는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들에게 돌진했다.


길게 울리는 굉음에 검은망토들의 비명이 뒤섞였다. 메아리는 울리지 않았다. 높이 솟은 나무, 바람을 속삭이는 가지들 사이로 휘발했을 뿐이다. 하지만 전기톱의 우렁찬 포효는 얼마간 더 지속되었다.


그것을 진혼가 삼으려 하였다. 그렇게 발롬니 공의 세월은 무거운 밤에 멈추었으며, 검성이자 신성 모독자이자 악마 숭배자이자 추기경 살해자이자 반역자이자 기사 학살자인 남자는 새벽을 비추기 위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밤은 깊었고 구름 한 점 없었다. 하늘엔 만월 아닌 달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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