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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히트
작품등록일 :
2024.08.06 21:13
최근연재일 :
2024.09.0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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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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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DUMMY

16



헬리콥터인지 뭔지 하는 것이 회이던과 발롬니 공을 품고서 하늘 높이 떠올랐다.


검은 기체는 두둥실 떠올라 밤하늘의 새까만 침묵 속에 녹아들었다. 광택 없는 표면의 재질은 달빛을 반사하지도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온 대지가 엿보였다. 하늘 나는 새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 아래 붉은 도시가 참 작았다.


유리창 밑에는 동판 같은 게 달렸고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단추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것들 모두 시퍼런 빛을 내뿜었다.


이 모든 낯섦이 전근대적인 사고관에 심대한 위협을 가했다. 회이던은 질색하며 벽에 등을 기댔다. 옷감 너머로 닿는 시퍼런 감촉마저 이질적이라 몸을 한 차례 떨어야만 했다.


“발롬니 공, 지금 제 세계관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임계에 달하기 직전이니 뭐라도 좀 말씀해 주시죠···.”


발롬니 공은 뭔지 모를 조작을 모두 마친 뒤에야 뒤돌아섰다.


죽음으로부터 귀환한 그의 얼굴은 익숙한 그대로였다. 억양과 성조도 익숙한 그대로였으며, 한쪽 눈꺼풀을 반만 뜬 것도 영락없이 스승의 모습 그 자체였다.


다만 낯의 빛깔이 기이할 정도로 창백했다. 햇빛을 쬔 적 없는 사람마냥 주름살도 적었고, 머리카락은 잘 정돈되어 있으나 해괴망측한 모양이었다.


“공의 목이 잘린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교화소 지하에 쳐들어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단 말입니다.”


“미안하네.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데요.”


회이던은 아버지가 임종을 맞을 당시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꽉 붙든 손에 스르륵 힘이 풀리니 볼에 낯선 온도가 느껴졌더랬다.


오래간 눈물 없는 사람으로 지내어 그 감촉이란 게 너무나 까마득했던 탓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편안한 얼굴로 떠났다. 해후를 즐기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게 결말을 준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덕에 슬픔은 회이던의 옆을 지킬 뿐, 그를 잠식하며 잡아먹으려 들지 않았다.


발롬니 공의 경우는 달랐다. 집행실 문짝을 부수고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몸뚱이에는 얼굴이 달려 있지 않았다. 대신 벽 아래 턱에 보란 듯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살갗의 빛깔은 색이 바랬다. 그것을 바라보는 회이던의 시야도 바래져서, 그 뒤로는 세상이 흙빛으로만 보였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뭐였더라. 발롬니 공 목소리가 어땠었지.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 정신 차려보니 옆에 성직자들은 몸이 반이나 그 이상으로 갈라져 죽어 있고, 뭐 그랬다.


아버지 때와는 달리 눈물도 나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거세져서 온몸을 뒤흔들 뿐이었다. 갈비뼈 안쪽이 마구 간질거리는데 긁을 방도도 없고, 도저히 진정할 수 없어 가로막는 사람들은 죄다 베었다.


“진정하게, 진정해.”


회이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발롬니 공은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하늘 아래서 지내던 적에는 볼 일이 없는 표정이었다.


“우선 심호흡부터 하게나.”


“예? 아뇨.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과장하지 마시죠.”


그 즉시 정강이에 발길질이 가해졌다. 회이던은 외마디의 탄성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농을 익숙하게 받아치는 솜씨를 보면 과연 발롬니 공이 맞았다.


“안쓰러움을 품었던 마음에 사악한 살의가 치솟는구먼. 역시 자네는 배려가 과분한 작자야.”


“과찬이십니다. 하여튼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신묘한 마법을 부리신 건가요?”


“그래, 그래···. 말해 줘야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발롬니 공은 뒷짐을 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도 머릿속을 정리할 때의 버릇이었다. 조금 고민하는가 싶던 그는 이내 얼굴을 들어 회이던 쪽을 바라보았다.


“음, 이렇게 설명하도록 할까. 그간 자네와 함께 숱한 나날을 보냈던 발롬니는 진정한 내가 아냐. 나를 본딴 인형에 지나지 않네.”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이해를 아득히 초월하는 말이 나올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그게 이렇게 정신 나간 소리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넹?”


그리하여 혀 꼬인 목소리로 멍청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롬니 공은 쇠퇴해 버린 회이던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걱정 말게. 그 인형이 나와 별개의 존재는 아니야. 자네와 함께 보낸 즐겁디즐거운 나날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 그러면···.”


“정신과 사상, 기억을 담은 그릇이 있다고 생각해 보게나. 거기 담긴 것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은 것에 불과하네. 지금 자네 앞에 서 있는 나는 그간 자네의 스승이었던 인형과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야.”


“그럼 교화소에서 목이 잘려 죽은 것은···.”


“인형의 몸뚱이일세. 소모품이 기능을 다한 것에 지나지 않지. 그러니 엄밀히 하자면 나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는 거라네.”


그 말을 들은 뒤에야 경직된 마음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회이던은 내내 기도를 틀어막고 있던 숨을 그제야 모조리 내뱉을 수 있었다.


“다행··· 입니다.”


발롬니 공의 잘린 목, 지긋이 감은 눈이 아른거렸다. 그런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목은 어깨 위에 정상적으로 붙어 있다. 멀쩡히, 아니, 한쪽은 반만 뜬 눈을 깜빡이기도 하면서 목소리 내어 말하고 있다.


발롬니 공의 목소리가 맞았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자네, 사람 패는 실력이 출중하군. 나를 자네 아버지께 데려다주겠나? 영감은 또 뭡니까. 혹시 줘 터지고 싶으십니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화들짝 놀란 발롬니 공이 잽싸게 다가와 부축했다.


“괜찮은가?”


“공의 잘린 목을 보고서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그냥 눈앞이 시꺼메져서···.”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이 살육을 갈망하던 것도 비로소 멈추었다. 혈액의 순환이 급격하게 완만해지자 이마 부근이 욱신거렸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지금에 와서야 근육을 적신 피로를 인지할 수 있었다.


“미안하네. 자네에겐 정말로 미안하게 되었어.”


“미안하다니요.”


“내 자네의 안위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네. 내 죽음이 자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리 생각해야만 했어. 창창한 자네 앞날에 먹물을 끼얹어 버리고 말았군.”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창창한 자네 앞날이라니, 창창함과는 거리가 가장 먼 인생일 것이다. 갖가지 기상천외한 까닭으로 사람들 불태워 죽이는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창창하다는 수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하···.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저도 언젠가 불타 뒈질 운명이었을 겁니다.”


“알고 있네. 자네 성격이 어지간히 더럽잖나.”


“일이 이렇게 된 덕에 추기경 대가리도 자를 수 있었죠. 얼마나 고대했는데요.”


회이던이 웃으니 발롬니 공도 소리 죽여 웃었다. 선내가 워낙 조용하니 소리 죽인 웃음도 제법 큼직하게 들렸다.


그렇게 두 남자는 잠시간의 해후를 들이마셨다. 멍하니 팔짱을 낀 발롬니 공의 눈동자는 적막했다. 회이던이 입을 뗀 것은 조금의 고요함이 그를 진정시킨 뒤였다.


“자, 더 말씀해 주시죠. 공께선 대체 누구이십니까? 이 하늘 나는 어항은 대체 뭐죠?”


“흐음. 어려운 이야기가 될 걸세. 이해하기에 다소 벅찰 게야.”


“평소 건네시던 말씀부터 그랬지요. 솔직히 그중 반절은 뭐라는지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알아들은 척하면서 고개 끄덕인 것이었습니다.”


“그래 보이더군. 자네는 배려받을 자격이 없는 작자이니 굳이 배려할 생각은 없네. 그러니 적당히 잘 알아듣게나.”


“노력해 보겠습니다.”


발롬니 공은 회이던을 구석의 의자에 앉혔다. 회이던의 생애 전체를 통틀어 가장 푹신한 의자였다. 얼마나 푹신한가 하면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순수한 환희라 할 수 있겠다.


이제 나머지 인생이 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앞으로는 그 어떤 의자나 침대로도 만족할 수 없는 정신적 망자의 삶을 살게 되리라.


괴이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탄성을 내지르는 모습을 발롬니 공은 황망한 낯으로 바라보거나 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뗐다.


“자네 이해시키는 것이 목적이니 다소 불경한 어휘를 빌리겠네.”


“아, 불경함을 추구하는 건 우리들의 취미였죠.”


“나는 이쪽 세계의 사람들 기준으로는 신과 같은 존재야. 처음부터 그랬네.”


“···미치셨나?”


“말뽄새가 왜 그 따위인가. 정수리에 곤봉을 쑤셔 박고 싶게 만드는군.”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방금에 이어 한 번 더 내뱉는 발롬니 공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술 냄새는 전혀 풍기지 않았으며 노망이 난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단호했기에 더 미치광이처럼 보였다.


“어디까지나 자넬 납득시키고자 빌려온 단어일 뿐이니 확대해석하진 말게. 신이라 하여도 저 아래 미개한 종교쟁이들이 섬기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야.”


“그럼 뭡니까?”


“함양한 지식과 지닌 기술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걸세.”


발롬니 공은 느닷없이 선내의 벽면을 탕탕 두들겼다. 그 어떤 재질의 금속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일례로 이 탈것을 들 수 있겠지. 하지만 이 기계는 내가 떠나온 세계를 대변하지 못해. 이깟 탑승물 따윈 편린의 편린, 그 너머에 있는 편린의 조각 정도를 대변할 뿐이라네. 나의 고향 문명이 이룩한 발전은 이보다 훨씬 웅대한 것일세.”


“자랑하시는 겁니까?”


“그냥 이대로 문 열고 자네를 떨궈버릴까?”


회이던은 농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고개를 돌리며 기체를 둘러보았다. 처음 탑승했을 때에는 정황이 없어 세부적인 부분을 찬찬히 살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나같이 너무나 반듯하고, 하나같이 너무나 날카로웠다. 외계의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각종 기물들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현 인류의 지식과 기술력으로는 조금이나마 비슷한 것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이 영문 모를 고철은 지금 창공에 떠 있다. 거기다 벼락을 뿜어 교회 기사와 검은망토를 고깃덩이로 만들기까지 했으며··· 회이던의 뇌는 이 모든 정보를 적재하고 처리하기엔 애처로울 만큼 비루했다.


그래서 그냥 신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더 편할 것이다. 과연 발롬니 공의 혜안이로군요.


“저 지금 머릿속이 표백되는 느낌입니다. 어지러운데 누워서 이야기 들어도 됩니까?”


“엄살 부리지 말게.”


“넵.”


발롬니 공은 유리창 앞에 섰다. 한때 그가 살았던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높은 하늘에는 도시의 소음이 닿을까. 알 길 없었다. 차폐된 이 안쪽엔 귀에 낯설게 울리는 이명만이 가득했으며 그 이외의 음성은 가끔의 발자국 소리 뿐이었다.


다만 붉은 색깔을 띤 불길함이 스멀거리며 하늘의 어느 아래까지 피어오를 뿐이었다. 회이던은 발롬니 공의 등 뒤에다 대고 말을 붙였다.


“떠나온 세계 어쩌구··· 말씀하셨죠. 편의상 신들의 땅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럼 그 땅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바다 건너에 있나요? 아니면 북부의 얼음땅 너머?”


“바다 건너···. 자네, 마음속 축척이 굉장히 소박하구만.”


콧방귀를 뀌는 발롬니 공은 당치도 않다는 눈치였다.


“거시적일 필요가 있네. 우주의 장막은 서책의 낱장과 같아서 수많은 차원이 얇게 중첩되어 있지. 그 숱한 낱장 가운데 가장 발달한 차원이 나의 출신지일세. 바다 너머보다는 멀게 느껴지지?”


“차원···. 아, 예. 그렇군요.”


“본래 직업은 역사학자였다네. 자네 눈에는 하는 일 없이 풍류나 즐길 뿐인 늙은이로 보였겠지만 말야.”


미친 소리가 또다시 장황하게도 작렬했으나 회이던은 이제 얼떨떨하지도 않았고 별 감흥도 떠오르지 않았다.


음, 그렇군. 발롬니 공의 정체는 다른 차원에서 파견된 역사학자로구나. 그런 위대한 분의 제자인 나 자신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기특하다, 이러면서.


“고매한 차원의 학자분이셨군요. 그런데 학자들을 불태워 죽이는 이 똥통엔 대체 무슨 볼일이십니까.”


“연구 목적일세.”


“연구요?”


“차원의 관측자들은 자료를 원했다네. 눈으로 직접 본, 코로 직접 맡은, 피부로 직접 체감한 생생한 자료 말일세. 그리하여 나는 이 세계로 내려와 터전민이 되었지. 귀족 발롬니로서 말이야.”


“이상하네요. 이런 똥통 같은 곳에 연구할 만한 게 뭐가 있다는 겁니까?”


회이던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아득하고 멀게 느껴져 이해하기 힘든 게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극히 발달한 차원이라 하면 빈대도, 냄새나는 침대도, 오염된 수원지도, 악마도, 사람 불태워 죽이는 성직자도 없을 것이다. 대체 왜 그런 안락하고 이상적인 장소를 뒷전에다 놓고 고름투성이 땅을 궁금해한단 말인가.


그런가 하면 인형 육체에 관한 것은 서서히 납득이 되었다. 그 어떤 사회도 그들의 지식인이 멀리 떨어진 객지에서 불의의 고를 당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지식인들을 무척이나 귀중히 여길 것이다···.


“똥통 같은 곳이기에 연구할 가치가 있는 걸세. 발전의 양상 말이야. 자네 세계를 예로 들어 보지. 악마들의 존재로 대표되는 악의의 물결이 노골적으로 파도치며, 결국 광신이 도덕의 기준점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가 그들 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을 강구하는 길이란 무엇인가··· 하는 걸 탐구하겠단 거지.”


회이던은 푸핫 소리 내며 웃고 말았다. 비웃음 바깥으로 빠져나온 타액의 향연이 발롬니 공의 얼굴에 거나하게 튀었다.


지금 정확히 그 반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번번이 신의 뜻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이 성직자들의 일이었다. 그 어떤 신이 사람 불태워 달라 청하겠나···.


한편 눈썹 아래로 타액이 흘러내리는 발롬니 공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는 건 제법 유쾌했다.


“선반에 곤봉이 하나 있다네. 그것은 사람 대가리를 부수는 용도로 개발된 것이지. 꺼내 올까?”


“아, 죄송합니다. 푸흐흐···. 하여튼, 그 극복이란 것이 점차 멀어지고 있잖습니까. 위기를 타개하긴커녕 차츰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데요.”


“알아. 나도 꽤나 오랜 기간동안 이 세계의 일부였단 말일세. 내 인형이 목 잘린 까닭이 뭐라 생각하나?”


“그랬죠. 그랬었죠. 하지만 공께선 신과 같은 존재이니···.”


계속 실실대던 회이던의 얼굴이 돌연 변했다. 그 위에 더없이 진지한 낌새가 덧씌워졌다.


“그러니깐 권능을 부려서 뭐라도 해 주시죠. 아니, 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자기파괴의 행렬이 계속된다면 멸망은 코앞입니다. 이러다 다 죽어요. 지옥문 뚫고 악마들 빠져나와서 군중들 학살하건, 미친 교단 놈들이 기어코 죄다 번제의 희생양으로 삼건, 어찌 되건 둘 중 하나가 될 거라구요.”


발롬니 공은 회이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그는 다시 한번 뒷짐을 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크게 고심하는 것이었다.


회이던은 못내 답답했다. 고심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는가. 벼락을 쏴 재끼는 이 헬리··· 뭐시깽이가 발롬니 공의 출신 문명을 대표하지도 못한다.


실로 웅대한 뒷배경을 지니고 있는데, 그와 같은 권능을 영락하는 세계를 구원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쓰임새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코를 더 효율적으로 팔 수 있게 되기라도 하나.


“죄 없는 사람들마저 죄의 불길에 잠식되도록 내버려둘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나 역시 반지성의 제 살 깎아 먹기에 대해선 아주 신물이 나. 하지만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네.”


“그건 또 뭔 소립니까? 해주실 수 있는 게 아주 많아요. 이대로 아무 지옥문이나 찾아서 그 안쪽으로 쳐들어가죠. 안에서 벼락 쏴 재껴서 죄다 죽이고, 내친김에 마왕인가 뭔가 하는 것도 찾아내 갈가리 찢어버립시다.”


“잘 들어. 회이던 섬칼리고드. 내 말 잘 듣게. 그럴 수 없네.”


“그럴 수 없다니, 대체 무슨···.”


발롬니 공은 회이던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주름투성이의 까끌까끌한 무게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짓눌렀다.


그러는 발롬니 공의 표정에는 짙은 상념이, 회이던의 어깨를 누른 것보다 더한 무게를 짊어진 피로가 실려 있었다. 그 눈빛만으로 회이던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를 비롯, 숱한 차원으로 파견된 관찰자들의 원칙은 명확하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세계의 자주적인 흐름에 개입하지 말 것. 어떠한 이론과 사상도 퍼뜨려선 안 되며,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 정치에 끼어들어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 군사를 일으켜 봉기하는 것 모두 엄금되어 있어.”


“어째서입니까?”


“외압에 의해 강제로 뒤틀린 세계는 관측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겠지. 관측자들이 바라는 것은 세계의 부흥이 아닐세. 그들에게는 흥망성쇠 자체가 중요한 것이야. 설령 사멸해 가는 세계라 할지라도··· 사멸하는 것 자체에 관측의 가치를 두는 것이겠지.”


그리하여 발롬니 공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지식들,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들을 가둬 놓은 채 이 땅 위를 살았다.


생산적인 활동은 일체 금지당한 채, 어쩌다 돈이 많은 집안에 태어났을 뿐인 귀족을 연기했을 것이다. 말하는 발롬니 공의 얼굴은 참담함과 지긋지긋함이 뒤섞여 있었다.


회이던은 그를 더는 다그칠 수 없었다.


“과연 신들답군요.”


“신은 방관하지.”


회이던은 회의주의자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부정하기까지 했다.


그 어떤 신이 세계가 불타는 것을 가만 바라만 볼까. 맹목에 눈 가려져 사람들 불태우는 성직자들을 어떤 신이 가만 바라만 볼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참담함을 갖춘 발롬니 공의 얼굴을 마주하자 마음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은 무력하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자의로 해석된 교리로 인해 학살이 벌어지더라도 이를 가만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악의가 신의 도량을 뛰어넘는다. 신이 되기는 너무나 어렵다···.


발롬니 공은 고개를 슬쩍 돌려 유리창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이 밖보다 밝았기에 유리창에 공의 얼굴이 비쳤다.


빳빳한 주름살이 일그러지며, 그 희미한 낯에는 혐오가 실려 있었다. 회이던은 발롬니 공이 저렇게 노골적인 얼굴을 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네도 방금 전 교회 기사놈이 뭘 하는지 봤지? 빌어먹을, 찬미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던가. 조금이라도 이해를 벗어난다면 숭배하거나 죄악시하거나 둘 중 하나지. 날이 갈수록 지성의 반대편으로 도약할 뿐인 세태가 너무나 지긋지긋해.”


“견디기 힘들어지셨나 보군요.”


“그래. 한계에 달했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말았어. 이 땅의 신실한 작자들은 죄다 벌레 새끼들이야. 그놈들이 권력을 내세워 압제를 펼치는 방식도 역겨우며, 민중을 계도하긴커녕 꼬랑지 내밀고 똥이나 받아먹는 귀족 놈들도!”


온화하던 발롬니 공이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기소된 까닭도 불경한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오히려 회이던은 마음이 잠잠하게 가라앉아 마치 물결 없는 표면처럼 되었다.


“저는 그런 내막도 모른 채, 속으로는 공께서 위선자 혹은 겁쟁이에 불과하다면서 많이 비난하고 경멸했습니다.”


“···정말인가?”


“아뇨.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거짓부렁입니다.”


발롬니 공은 대뜸 선내를 가로질렀다. 선반에서 무언가 뒤적거리며 꺼내는데, 그것은 묵직한 곤봉이었다. 서슬 퍼런 기세로 회이던을 향해 다가오는데 금방이라도 패 죽일 기세였다.


“너를 죽이겠다.”


상완과 허벅지에 회초리질이 가볍게 가해졌다. 회이던은 그것을 받아내며 웃었다. 발롬니 공도 따라서 웃었다. 조금의 장난질로 공의 격앙된 마음이 다소 풀린 것 같았다.


이후 곤봉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마저 잇는 발롬니 공은 한층 담담한 말투였다.


“그래서 그냥 질러 버렸네. 추기경 앞에 서서 일장 연설을 토했지. 그런 내 모습이 어찌나 불경했는지 얼굴이 울긋불긋 보랏빛으로 물들더군. 자네도 봤어야만 해.”


“장관이었겠군요. 하지만 제게도 부러움 살 만한 건 하나 있습니다. 추기경 놈 뒈지기 직전 얼굴 말예요. 오줌을 참는 것처럼 어찌나 다급한 낯짝이던지···.”


“하하···. 그거 나도 봐야 했는데 말야. 그땐 목이 잘린 상황이라 보질 못했구만.”


두 사람은 높은 하늘 위에서 함께 웃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떠나기 전처럼, 악마들이 지금보다는 덜 출현했으며 교단이 이 정도로 미쳐버리기 전, 그나마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절처럼 함께 웃고 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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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 24.08.12 24 0 23쪽
8 8 24.08.11 30 0 19쪽
7 7 24.08.10 37 0 16쪽
6 6 24.08.09 35 0 26쪽
5 5 24.08.08 35 0 18쪽
4 4 24.08.07 52 0 23쪽
3 3 24.08.06 64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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