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소련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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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라니
작품등록일 :
2024.08.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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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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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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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초대 (2)

DUMMY

“그러다가 독일이 동부전선을 먼저 정리하겠다고 나서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혁명 이후로 우리 러시아의 군사력은 사상 최악입니다. 독일이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러시아를 침공해오면 동유럽 전부가 전화에 휩싸일 겁니다.”


“독일이 바보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하겠나? 우리가 독일을 공격하지 않으면 독일은 모든 전력을 서부전선에 쏟아부을 수 있게 되는 거야. 즉, 양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독일의 부담이 확 줄어든다는 소리지. 그러니 굳이 강화 조약을 맺지 않아도 독일이 먼저 나서서 우리를 공격할 일은 없어!”


그래, 원역사에서는 이 생각으로 끝내 강화 협상을 거부했구나?

이 오만한 놈은 지금 세상이 다 제 손아귀 안에 있는 것 같지?

정말 모든 것이 제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거야?


내 눈엔 지금 트로츠키가 빠진 함정이 빤히 보였다.

똑똑한 놈들이 쉽게 빠지는 착각.

모두가 자기처럼 이성적이라 생각하는 거다.


“그러면 우리 러시아는 바보라서 세계대전에 휘말렸습니까? 이 전쟁이 발칸 반도의 조그마한 충돌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던 사건이 전 유럽이 전화에 휩싸일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을까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분쟁으로 그쳤어야 할 사건이 어째서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었겠습니까?”


사라예보 사건.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인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극우 민족주의 비밀조직 단체 ‘검은 손’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의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는 분명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무려 한 국가의 황태자 부부가 타국인의 손에 암살당한 사건이었으니까.

그러나 과연 이 사건이 전 유럽이 전화에 휩싸일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을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강력한 제제를 요구하며 최후통첩을 날렸고 세르비아는 러시아를 등에 업고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이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지하며 러시아를 압박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 관계에 따라 군대를 동원했으며 영국은 벨기에 중립 보장과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에 따라 참전했다.


만약 러시아가 참전할 줄 알았다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했을까?

만약 독일이 참전할 줄 알았다면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선포했을까?

만약 프랑스와 영국이 참전할 줄 알았으면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지했을까?


물론 이래저래 얽혀있던 군사동맹도 한몫했지만 유럽 국가들의 비이성적인 선택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거나 다름없다.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개인은 이성적일 수 있어도 국가는 이성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즉, 강화 협상 없이도 독일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주장은 개인의 소망에 불과하다.


“페치카 동지. 이번엔 나 레닌이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레닌 동지.”


나와 트로츠키의 충돌을 슬슬 중재하고자 했던 것인지 레닌이 끼어들며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갔다.

나도 계속 트로츠키와 싸워서 감정이 나빠질 이유는 없으니까 레닌의 중재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트로츠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 했어.


“우리가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민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군부의 반발 때문이라네. 전직 장교로서 대답해주게. 군부가 강화 협상에 이토록 반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뭐야, 레닌은 또 나한테 왜 이래?

오늘 둘이서 나 담그기로 작정한 거야?

이건 뭐 정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잖아.


레닌의 질문 속에 숨겨진 요지는 이렇다.

군부는 인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내가 만난 병사들은 하나 같이 전쟁을 끝내길 원하고 있었어.

근데 왜 군부는 강화 협상을 반대하는 거야?


“그야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옛 귀족 세력이잖습니까. 그들의 귀에 인민의 목소리가 들리겠습니까?”


레닌도 군부가 반발하는 이유를 정말 몰라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닐 거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한 징검다리겠지.

아니나 다를까 레닌은 바로 걱정거리를 토로했다.


“바로 그게 문제라네. 군부에는 아직도 옛 제정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참 많지 않은가? 자칫하면 강화 협상을 계기로 대대적인 군사쿠데타가 일어날까 걱정이라네.”


뭐야, 볼셰비키는 지금 군부의 군사쿠데타를 걱정하고 있는 거야?

따지고 보면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계기도 육군 참모총장 코르닐로프의 군사쿠데타였으니까.

절대 과한 걱정이 아니긴 하다.


근데... 솔직히 내가 군부의 옛 귀족 계층이라도 제정이 그리울 만한데?

혁명이 일어나고 지금 쟤네들한테 뭐가 남았냐?


봉건제 유물을 일소한다며 가문의 토지도 모조리 뺏겼어.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킨다며 사업체도 모두 국유화했어.

신분제도 폐지했으니 하루아침에 평민이 되어버렸네?

실로 황제가 그리울 만도 하다.


“그래도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만큼은 확실히 잡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노동자들의 지지만 있으면 그 어떤 어려움도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불안감을 느끼신다면 강화 협상을 최대한 질질 끄시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인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면 하루빨리 강화 협상을 마치고 종전을 선언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화 협상을 질질 끌어서 우리 볼셰비키 혁명정부에 좋을 게 뭐가 있나?”


“외부의 적은 내부를 단결케 합니다. 강화 협상을 질질 끌며 독일의 위협을 강조한다면 군부는 대대적인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군부의 힘을 빼는 겁니다.”


볼셰비키 입장에서야 귀족이란 놈들은 모조리 봉건제의 유물이요 적폐 그 차제이지만.

내가 보기엔 최소한 군부의 귀족들만큼은 애국심이 충만한 참 귀족들이었다.

그러니까 볼셰비키 혁명정부가 개혁이랍시고 집안의 가산을 모조리 몰수해가는데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전선을 지키고 있는 것 아니겠어?


솔직히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도 전선이고 뭐고 일단 정권부터 잡고 보자는 생각으로 저질렀으면 성공했을걸?

전선을 유지하면서 정예병만 빼돌려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소비에트의 공작에 당한 거지.

아, 이 세계선에서는 내 공작에 당한 건가?


어쨌든 이러한 군부 귀족들의 애국심을 이용해 강화 협상을 최대한 질질 끌고 그동안 현재 진행하고 있는 군대 동원 해제를 마무리하면?

비록 장교 개개인의 반 볼셰비키 세력 합류는 막을 수 없더라도, 최소한 정예 부대가 통째로 반 볼셰비키 세력 합류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다.


“강화 협상을 질질 끌다 보면 우리의 사정을 눈치챈 독일이 더 무리한 조건을 요구할 수도 있잖나. 최악의 경우 아까 페치카 동지가 말했던 것처럼 이참에 동부전선을 먼저 정리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고 말이야.”


“아까 트로츠키 동지의 주장처럼 우리만큼 아니, 어쩌면 우리 이상으로 강화가 급한 쪽이 독일입니다. 우리가 강화 협상을 대놓고 결렬하지 않는 이상 저들이 먼저 강화 협상을 결렬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엔 화끈하게 독일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고 강화 협상에 타결하면 그만입니다. 어차피 독일이 패망하고 조약 무효화를 선언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말이죠.”


강화 협상을 질질 끄는 방법?

그건 뭐 어렵지 않다.


역사에서도 꽤나 오랜 기간 러시아와 협상을 이어갔던 독일이다.

혁명 없이 전쟁의 종결 따위는 없다는 러시아의 비협조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번에 독일의 요구 조건을 전부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협상할 때마다 조금씩 양보해가면 강화 협상에 진전이 있다고 여기며 협상을 이어나가겠지.

그러다가 협상 끝에 독일이 조금이라도 더 양보하면 좋은 게 좋은 거고.


최대한 강화 협상을 질질 끌려는 러시아.

한시라도 빨리 강화 협상을 마무리하고 동부전선을 정리해야 하는 독일.


이러한 그림이라면 러시아가 조금이라도 외교적 우위를 가지고 협상에 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페치카 동지는 독일로부터 무엇을 양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배상금 지불 시기를 늦춰야 합니다. 많이 늦출 필요도 없습니다. 딱 1년만 늦춰도 독일은 패망하고 혁명이 일어날 겁니다. 트로츠키 동지의 영구혁명론처럼 말이죠.”


트로츠키의 이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쟤가 나름 이 시대의 알아주는 천재 중에 천재라니까?


지금부터 약 10개월만 지나면, 전쟁에 지친 독일 전역에 혁명의 바람이 불며 곳곳에서 소비에트가 구성될 거다.

마치 러시아 혁명 시기처럼 말이다.

이를 계기로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선포된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다른 점이라면 독일이 공화국 선포 직후 소비에트 운동을 성공적으로 억압한다는 점이다.

독일 공화국 정부는 민병대를 조직해 혁명 세력을 진압하고, 독일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처형한다.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던 트로츠키에겐 참 안타까운 결말이야.


이때, 독일 공화국 정부는 협상국과 휴전을 합의하는데 협상국은 이를 독일의 항복이라 간주하고 독일 국경을 돌파해 라인강 지역까지 추격한다.

심지어 영국 해군은 독일 항구에 기뢰까지 부설한다.

어휴, 누가 원조 혐성국 아니랄까 봐.


휴전 협상을 하러 나온 독일 공화국은 협상국의 사실상 항복 요구에 반발하지만 이미 항구에 기뢰까지 부설하고 압박해 오는 것을 뭘 어쩌겠냐.

결국 전쟁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는 독일 공화국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수용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베르사유 조약이다.


즉, 앞으로 1년만 버티면 배상금이고 뭐고 아무 것도 내어줄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배상금을 받는 주체인 독일 제국이 이미 멸망하고 없으니까.


이러한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레닌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며 내 의견을 물어왔다.

어느새 꽁해 있던 트로츠키도 다시 이야기에 끼어들었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오랜 세월 쌓아놓은 자신들의 혁명이론을 바탕으로, 나는 현대인의 지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밤늦게 시작된 우리의 토의는 밤새 이어져 다음날 해가 뜨면서 마무리되었다.


“페치카 동지. 덕분에 우리 러시아가 강화 조약에서 얻어야 할 것을 알 수 있었네. 그 외에도 우리 볼셰비키 혁명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여러 정책에 대한 페치카 동지의 고견도 매우 인상 깊었고 말이야. 앞으로도 종종 이런 유익한 시간을 가지면 좋겠네.”


“나도 마찬가지야. 페치카 동지, 꽤 하는걸? 오늘부터 페치카 동지는 나 트로츠키가 인정하는 진정한 혁명가야! 영광으로 알라고!”


레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아 다행이었다.

볼셰비키 내에서도 동양인의 이야기를 이토록 선입견 없이 들어주는 이는 레닌밖에 없을걸.

역시 레닌은 민족, 국가, 인종을 뛰어넘은 진정한 빨갱이다.


아, 트로츠키 이 쫌생이 자식의 화가 풀린 것도 다행이고 말이다.


“저 또한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레닌 동지, 트로츠키 동지. 앞으로도 종종 불러주신다면 즉시 달려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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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러시아 내전 +3 24.08.31 820 17 11쪽
16 시베리아 출병 +1 24.08.31 810 1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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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의 초대 (2) 24.08.29 851 18 11쪽
9 레닌의 초대 +1 24.08.29 822 17 12쪽
8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1 24.08.29 831 19 12쪽
7 볼셰비키 혁명 +2 24.08.29 853 26 11쪽
6 적위대장 페치카 +1 24.08.29 869 21 11쪽
5 레닌의 러닝메이트 +3 24.08.28 917 20 11쪽
4 볼셰비키 입당과 트로츠키 +3 24.08.28 948 19 11쪽
3 나는 소비에트를 지지한다 +1 24.08.28 993 2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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