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소련 빨갱이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다우라니
작품등록일 :
2024.08.27 17:08
최근연재일 :
2024.09.16 13:42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29,834
추천수 :
711
글자수 :
183,596

작성
24.09.02 06:20
조회
851
추천
19
글자
11쪽

1919년 3월 1일

DUMMY

1919년 3월 1일.

볼셰비키 적군이 도주하는 일본군을 쫓아 하얼빈에 입성한 날.

압록강 너머 일제의 어느 식민지에서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그 날의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의 무단 통치 아래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억압받고 있었다.

일본 육군 헌병이 경찰권을 쥐고 시행한 헌병 경찰 제도는 조선인들의 모든 자유를 철저히 억압했다.

거리마다 헌병들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람들을 감시했고, 조선인들은 집회는커녕 작은 모임조차도 감히 꿈꿀 수 없었다.


이 억압의 손길은 학교라는 공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육의 전당이어야 할 학교는 이제 또 다른 억압의 장소로 전락했다.

교사들은 군복을 입고 칼을 찬 채 교단에 서서 조선인 학생들을 무력으로 억압했다.

아이들은 조선의 역사가 아닌 일본의 역사를 배우며, 식민지 백성으로 길러졌다.

그들은 미래를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조선인들은 토지의 소유권을 해당 관청에 신고하라! 만약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않으면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없다!”


“신고 기간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라! 허위 신고는 강력히 처벌할 것이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의 생명줄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특히 이 사업은 조선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조선인들은 토지를 신고하라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교묘한 함정이었다.

신고하지 않으면 땅을 빼앗겼고, 신고를 하더라도 일본이 원하는 대로 결과가 조작되기 일쑤였다.


일본은 지주의 권리만을 인정하고, 소작농들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했다.

이로 인해 조선인 소작농들은 언제든지 땅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했고, 그럴 때조차 항의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일본에 큰 흉년이 들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조선에서 쌀을 대량으로 공출하면서 조선인들의 민생고는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 내 쌀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1917년 기준으로 10원 중후반대였던 쌀값이 2년 만에 40원 중반대로 폭등했다.

조선총독부는 이에 대해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무능함만 드러냈다.


쌀값의 폭등은 조선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들은 쌀값 상승으로 이득을 볼 수 없는 구조였기에 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조선인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졌고, 삶의 희망을 잃어갔다.

결국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절망 속에서 조선을 떠나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해갔다.


“미국 대통령이 파리에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고 하네. 열강들도 이에 동의하며 회의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하니 자네가 조선의 민족대표위원으로서 파리 평화 회의에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오게.”


“맡겨만 주신다면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돌아오겠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 평화 회의에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14개조 평화 원칙 중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여운형은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창설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는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조선 민족대표위원으로 임명하여 파리 평화 회의에 파견했다.

김규식은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국제 사회에서 조선의 자주적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뿐만 아니라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은 평등하며,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민족은 자치정부를 구성하며, 원한다면 독립까지도 보장한다.’라며 민족의 자결권을 강조하자 조선의 독립운동가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뭐라고? 이태왕(고종)이 뇌졸증으로 쓰러졌다고? 갑자기 왜?”


“건강하셨던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승하하시다니? 이는 일본의 독살이 분명하다!”


“일본이 이완용을 시켜 황제 폐하를 독살했다! 황제 폐하의 커피에 독을 탄 게 틀림없어!”


이처럼 일본의 만행이 거듭되고 독립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는 가운데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조선이 멸망한 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고종은 여전히 조선인들에게 큰 상징성을 지닌 군주였다.


더욱이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었다.

아들인 순종보다도 건강했던 고종이 돌연 사망하자, 일본인들조차 고종의 독살을 의심했다.


조선총독부는 급히 언론을 통해 독살설을 부인했지만, 고종이 불미스러운 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문은 이미 민중들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민심은 극도로 격양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천도교의 수장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했다.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선 그들이 주목할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네. 우리 천도교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일으켜보세.”


처음에는 옛 조선의 양반 계층과 연대를 시도했다.

그들은 여전히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이끌어갈 주요한 동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양반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손병희는 방향을 전환하여 개신교와 불교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당시 개신교는 105인 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잔혹한 탄압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병희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히 접촉한 끝에 만세 시위에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특히 이승훈 장로가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일으키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이로써 개신교와 천도교의 강력한 연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불교계 또한 한용운을 중심으로 일제의 탄압에 대한 저항 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천도교의 최린은 한용운과 접촉해 불교계의 연대를 성사시켰다.

한용운은 불교가 조선의 전통과 정신을 수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에 따라 불교계도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천도교, 개신교, 불교의 연대로 대규모 만세 시위가 계획되었다.

최남선이 초안을 잡아 작성된 독립선언서가 천도교 측 인쇄소에서 3만 5천 부 인쇄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은 고종의 국장 이틀 전인 3월 1일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황제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인파가 너무 많습니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억압된 상황에서, 수많은 조선인이 공원에 모여들면 일본 헌병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일본 헌병들의 강경 진압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다칠까 우려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유혈사태로 번질 수도 있겠습니다. 만세 시위를 무사히 진행하려면 장소를 변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태화관에서 만납시다.”


3월 1일 만세 시위를 계획한 민족대표들은 시위가 폭력 사태로 이어질 위험을 우려했다.

그들은 원래 계획했던 탑골공원이 너무 눈에 띄는 장소라는 판단하에, 기생요릿집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급히 변경했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만을 기다리던 학생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크게 반발했다.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이 시위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에 학생들은 민족대표로부터 독립선언서만 받아내 독자적으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오천 년 역사를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조선 독립 만세!"라는 외침이 우레와 같이 울려 퍼졌다.

그 함성은 공원을 넘어 한양 도심까지 메아리쳤다.

학생들은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하늘 높이 던지며 열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염원을 담은 함성이었다.


처음에는 학생들만 모였던 탑골공원이었지만, 독립선언서 낭독이 진행되면서 그 소란을 들은 한양 백성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어느새 공원은 사람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뜨겁게 피어올랐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온 태극기를 꺼내 들었다.

학생들이 태극기를 높이 치켜들자, 군중들 사이에서는 더욱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학생들을 선두로 수만의 군중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시작했다.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고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상경한 이들까지 가세하여 수십만 인파가 모여들며 시위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시위대는 한편으로는 보신각을 지나 숭례문 쪽으로 향하며 행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덕수궁 대한문 쪽으로 향했다.


“이 시위는 명백한 불법 시위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해산하라!”


“조센징 놈들아! 당장 각자 집으로 가지 못할까!”


일본 헌병들은 조선인의 집회 소식을 전해 듣고 신속히 진압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너무 많은 군중이 밀집한 나머지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를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상황이 악화되자 강경 대응을 결정했다.

헌병들이 서울 전역의 주요 거점에 배치되었고, 기마부대까지 동원하여 폭압적인 진압 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시위대의 행진 경로를 차단하고, 밀집된 인파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기마부대를 동원해 군중이 모여 있는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헌병들은 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한 집중적인 단속을 벌였다.


조선총독부는 오후 6시에 이르러서야 겨우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본 헌병대는 만세 시위가 종료된 즉시 이를 주도한 학생들과 시위 참가자를 연행했는데 그날 하루에만 무려 1만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의 열기는 꺾이지 않았다.

만세 시위는 빠르게 조선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조선팔도 전역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며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머리 소련 빨갱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합니다. +3 24.08.27 739 0 -
36 신경제정책과 누진세 +7 24.09.16 497 25 11쪽
35 조선 소비에트 공화국 +2 24.09.13 671 27 12쪽
34 외무장관 페치카 +6 24.09.12 687 28 12쪽
33 소비에트 연방 설립 +2 24.09.11 739 23 11쪽
32 열병식과 적기훈장 수훈 +1 24.09.10 763 24 11쪽
31 철군과 몽골 혁명 +4 24.09.09 812 22 11쪽
30 조선인 이주계획 +4 24.09.08 807 19 11쪽
29 평양 강화 회의 +3 24.09.07 824 23 12쪽
28 한반도 해방 작전 +6 24.09.06 841 14 11쪽
27 개성 방어선 +6 24.09.05 805 23 11쪽
26 평양 전투 +3 24.09.04 819 19 10쪽
25 조선 진군 +4 24.09.03 862 23 12쪽
» 1919년 3월 1일 +3 24.09.02 852 19 11쪽
23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 +1 24.09.02 811 18 11쪽
22 시베리아 임시정부 +2 24.09.01 809 15 11쪽
21 남러시아 백군 +1 24.09.01 778 15 11쪽
20 볼셰비키-폴란드 전쟁 +2 24.09.01 783 17 11쪽
19 볼셰비키 적군 +2 24.09.01 767 18 11쪽
18 독일 혁명 +1 24.08.31 785 16 12쪽
17 러시아 내전 +3 24.08.31 820 17 11쪽
16 시베리아 출병 +1 24.08.31 810 16 11쪽
15 스탈린과 친구들 24.08.30 854 16 11쪽
14 모스크바 천도와 조선의 맛 +2 24.08.30 855 19 12쪽
13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1 24.08.30 831 17 11쪽
12 독립운동가 최재형 +1 24.08.30 846 19 11쪽
11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3 24.08.30 827 16 11쪽
10 레닌의 초대 (2) 24.08.29 851 18 11쪽
9 레닌의 초대 +1 24.08.29 822 17 12쪽
8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1 24.08.29 831 19 12쪽
7 볼셰비키 혁명 +2 24.08.29 853 26 11쪽
6 적위대장 페치카 +1 24.08.29 869 21 11쪽
5 레닌의 러닝메이트 +3 24.08.28 917 20 11쪽
4 볼셰비키 입당과 트로츠키 +3 24.08.28 948 19 11쪽
3 나는 소비에트를 지지한다 +1 24.08.28 993 21 11쪽
2 러시아 제국군 대위 최운학 +3 24.08.28 1,064 23 11쪽
1 수저가 없는 아이 +1 24.08.28 1,123 19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