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소련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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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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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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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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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 적군

DUMMY

볼셰비키 혁명 이후 적위대는 꾸준히 성장하여 1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부대로 거듭났다.

10만 명 규모의 집단군은 보통 육군 중장이 지휘한다.


30대 초에 벌써 육군 중장급이라고?

내가 출세하긴 출세했구나.


적위대는 단순히 규모를 확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투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군수품의 보급 1순위는 당연히 적위대였다.

이처럼 적위대는 빵빵한 보급을 바탕으로 훈련과 실전을 거듭하며 정예부대로 거듭나고 있었다.


“공격은 방어보다 어려운 법이다. 특히, 기관총, 참호, 철조망의 삼중 방어망은 공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독일은 어떻게 이 삼중 방어망을 뚫고 영국과 프랑스를 몰아붙일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병사가 있나?”


나는 집단군 사령관보다는 부사관학교를 운영하는 마음가짐으로 적위대를 운영했다.

당장 러시아 내전이 한창인 상황에 무슨 부사관 양성이냐고?

볼셰비키가 곧 대규모 징병제를 시행할 예정이거든.

징병제가 시행되면 적위대에서 훈련받은 병사들이 최소 분대장 역할은 해줘야 한다.


볼셰비키는 일찍이 동원령을 해제하고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바가 있었다.

이는 레닌의 혁명이론을 실천하기 위함이요, 군부의 힘을 빼서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로 대대적인 군사쿠데타는 막았을지언정 러시아 전역에서 우후죽순 일어나는 반혁명 세력을 제압할 군사력이 부족해졌다.

결국 볼셰비키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 내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각종 개혁을 중단하고 전시체제를 선포했다.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겸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트로츠키는 혁명의 수호를 명분으로 징병제를 도입했다.

볼셰비키 당의 군대였던 적위대는 대대적인 동원령을 통해 볼셰비키 적군으로 재편되었다.


“18세 이상의 남성은 모두 징집 대상이다. 노동자, 농민을 가리지 말고 모두 징집하라!”


볼셰비키는 직접 통치하고 있는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시행했다.

징병제에 대한 반대는 무력으로 억눌렀다.

탈주자는 재판 없이 즉결 총살되었고, 탈주한 병력이 발생한 부대는 고대 로마에서도 드물게 집행된 10분의 1형을 선고받았다.

10분의 1형이란 병사 10명 중 1명을 무작위로 처형하는 비인도적인 형벌이었다.


“국방장관 동지. 마르크스주의 정신에 따라 혁신적인 작전으로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닥쳐! 전쟁 경험도 없는 자가 무슨 혁신적인 작전을 구상할 수 있단 말이냐!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검증된 전술을 활용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부족한 군사적 역량을 보완하기 위해 과거의 행적을 따지지 않고 구 제국 장교들을 대거 영입했다.

그 결과, 대전쟁에서 실력을 쌓은 군사전문가들이 합류하면서 볼셰비키 적군의 전투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영입한 구 제국 장교들을 볼셰비키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각 부대에 정치장교로 파견하여 병사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을 가르치고 지휘관들이 반란에 동참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라. 정치장교의 결제가 없는 모든 명령은 무효다.”


트로츠키는 구 제국 장교들을 감시하기 위한 정치장교 제도를 도입했다.

이제 적군의 모든 명령은 정치장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정치장교 제도는 지휘권의 이원화로 인해 신속한 작전이 불가능해지는 심각한 단점이 존재했다.

그러나 정치장교의 감시를 통해 지휘관의 반란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훨씬 컸기 때문에, 모든 부대에 정치장교가 배치되었다.


“나 트로츠키가 경고한다. 만약 어떤 부대라도 허가 없이 전선을 이탈할 경우, 다음과 같은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첫째, 해당 부대의 정치장교는 즉결 처형될 것이다. 둘째, 지휘관도 즉결 처형될 것이다. 셋째, 용맹한 병사들이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될 것이다. 겁쟁이, 이기주의자, 반역자들은 결코 처형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볼셰비키 적군은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군대로 변모했다.

역설적이게도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군대가 세계에서 가장 반동적인 군대가 된 셈이었다.


징병제를 도입한 볼셰비키는 트로츠키의 주도 아래 첫 달에만 100만 명의 적군을 징병했다.

트로츠키는 영입한 구 제국 장교를 그대로 채용하고, 내가 키워놓은 적위대 출신 병사들을 부사관으로 삼아 그 아래 새롭게 징병한 병사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절한 인사를 정치장교로 파견하면 끝.


이렇게 조직된 볼셰비키 적군은 모스크바와 가장 가까운 전장부터 투입되었다.

공세를 책임질 최고 정치장교로는 볼셰비키 서열 3위 스탈린이 선임되었다.

그렇게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방면으로 볼셰비키 적군이 쏟아져 들어갔다.


“혁명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를 위해! 전진하라! 우라!!!”


가장 먼저 독립이 좌절된 민족은 벨라루스였다.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은 볼셰비키 적군의 개입 이전에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볼셰비키 적군이 쏟아져 들어오자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은 순식간에 멸망했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서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기가 휘날렸다.


인구 600만의 벨라루스가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진 것엔 벨라루스인들의 독립 의지가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에서 기인했다.

벨라루스에서 민족의 독립을 희망한 이들은 일부 교육받은 지식인 계층뿐이었다.

다수의 농민 계층은 러시아에 대한 애착과 동질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에 회의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는 통역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비슷했다.


거기에 볼셰비키의 주요 정책이 바로 노동자, 농민을 위한 개혁이지 않은가.

벨라루스의 농민 계층은 볼셰비키가 지주 계층을 쫓아내고 벨라루스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줄 것이라 기대했다.

민스크를 점령한 볼셰비키는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벨라루스의 독립 시도는 막을 내렸다.


벨라루스에 이어 독립이 좌절된 민족은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였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의 경우 벨라루스와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에스토니아인과 라트비아인은 러시아인과 민족적 구분이 확실했다.

이에 따라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독립은 민족의 확실한 지지 아래 선포되었다.


에스토니아 공화국과 라트비아 공화국은 있는 힘껏 볼셰비키 적군의 공세에 대응했다.

이들은 독일 제국이 지원한 70문의 야포와 230문의 기관총으로 볼셰비키의 진격을 막아섰다.


그러나 은근슬쩍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지원하던 독일 제국이 패망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독일 제국의 지원이 사라지자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볼셰비키의 진격을 막을 탄약을 구할 길이 없어졌다.


두 민족의 부족한 인구도 문제였는데 에스토니아인과 라트비아인은 각각 100만 정도의 인구를 지녔다.

그런데 볼셰비키가 서방 공세에 동원한 적군이 100만에 달하지 않던가.

각자의 인구만큼 몰려오는 볼셰비키 적군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가 자력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벨라루스에 이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까지 수복한 볼셰비키 적군은 다음 행보를 고심했다.

이 시점은 딱 독일에서 막 소비에트를 설립하며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였다.


“드디어 세계혁명의 때가 왔다! 이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 옳았던 거야! 볼셰비키는 지금 당장 독일 혁명을 지원해야 하오!”


독일에서 일어나는 소비에트 운동에 러시아의 국방장관 트로츠키가 미쳐 날뛰었다.

트로츠키는 드디어 때가 왔다는 말을 반복하며 볼셰비키는 독일 혁명을 지원해 세계혁명을 완수해야 함을 외쳤다.


그러나 독일 혁명은 역사상 실패할 혁명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볼셰비키가 독일 혁명에 진심일 필요가 있을까?


지금 당장 더 중요한 것은 세계혁명의 완수가 아니라 러시아 내 반혁명 세력 섬멸이다.

러시아 내전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볼셰비키가 지금 타국의 혁명을 지원할 여력이 어디 있냐.


“세계혁명도 좋지만 러시아 혁명 수호를 우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볼셰비키 적군을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진군시켜 하루라도 빨리 내전을 종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적위대가 적군으로 재편되면서 자연스럽게 적위대장에서 퇴임하고 군사혁명위원회 부위원장 겸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국방차관으로 취임한 상태였다.

즉, 이는 국방장관의 주장을 국방차관이 전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어찌 보면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짓이긴 하지만 뭐 어쩌겠냐.


“페치카 동지의 주장은 혁명에 대한 배신이야! 우리에겐 전 세계에 혁명을 수출할 의무가 있지 않나! 독일 제국도 멸망했거늘 누가 있어 혁명의 진군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인민의 외침을 외면하지 말게!”


“트로츠키 동지야말로 우크라이나 인민의 외침이 들리지 않습니까? 우크라이나는 현재 볼셰비키 적군, 인민 공화국의 독립군, 아나키스트 계열 흑군, 남러시아 백군까지 온갖 세력의 각축장이 된 상태입니다. 우크라이나 인민의 안정된 삶을 위해 어서 이 각축장을 끝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만 자존심 덩어리인 트로츠키가 가만히 물러날 일은 없었다.

나와 트로츠키의 논쟁은 볼셰비키 내에서 가장 뜨거운 가십거리가 되었다.


사실 적위대장을 거쳐 국방차관에 역임하면서 권력의 중추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나를 얕잡아 보는 혁명가들은 많았다.

유색인종 주제에 줄을 잘 서서 성공했다는 뒷담화에, 육군 장교 출신이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냐는 깔봄은 기본이었다.


근데 그런 내가 트로츠키와 이토록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고?

이번 일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나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리라.


결과적으로 트로츠키의 외침은 여러 볼셰비키 혁명가들에게서 철저히 외면받았다.

특히 스탈린을 비롯한 러시아 내 소수민족 출신의 혁명가들이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볼셰비키 적군의 행보는 내 주장에 따라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결정되었다.


“우크라이나 인민들이여! 우크라이나를 해방하여 지주와 자본가를 몰아내자!”


“혁명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를 위해! 전진하라! 우라!!!”


스탈린이 이끄는 볼셰비키 적군이 대대적으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공격해 들어갔다.

수도 키예프(키이우)는 1달 만에 볼셰비키 적군의 손에 들어왔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기가 휘날렸다.

이에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서우크라이나 갈리치아 일대로 도주했다.


다만 스탈린도 도주하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뒤쫓아 완전히 멸망시키진 못했는데, 스탈린이 이끄는 볼셰비키 적군의 남하에 맞서 안톤 데니킨이 이끄는 남러시아 백군이 북상했기 때문이다.

이제 볼셰비키 적군과 남러시아 백군이 남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충돌했다.

볼셰비키 적군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남러시아 백군은 위대한 러시아를 재건하기 위해 양측의 물러설 수 없는 대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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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볼셰비키-폴란드 전쟁 +2 24.09.01 784 17 11쪽
» 볼셰비키 적군 +2 24.09.01 768 18 11쪽
18 독일 혁명 +1 24.08.31 786 16 12쪽
17 러시아 내전 +3 24.08.31 820 17 11쪽
16 시베리아 출병 +1 24.08.31 810 16 11쪽
15 스탈린과 친구들 24.08.30 854 1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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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볼셰비키 혁명 +2 24.08.29 853 26 11쪽
6 적위대장 페치카 +1 24.08.29 869 21 11쪽
5 레닌의 러닝메이트 +3 24.08.28 917 20 11쪽
4 볼셰비키 입당과 트로츠키 +3 24.08.28 948 1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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