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이주계획
영국과 미국은 이번 협상 중재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용납하기 싫은 감정은 둘째치고,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이 애초에 영국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라도 도의상 일본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미국은 다른 입장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서 드러난 팽창주의를 경계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일본이 아시아에서 더욱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이 보여준 야심과 침략성은 태평양에서 미국의 이권을 위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양국은 조선 문제에 있어 더욱 균형 잡힌 중재안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 대사, 낭림산맥을 국경으로 삼아 조선과 만주를 잇는 평안도와 황해도는 일본에 돌려주고 러시아의 영토와 붙어 있는 함경도는 러시아에 넘겨주는 중재안은 어떻습니까?”
“영국 대사의 중재안이 매우 합리적이긴 합니다만, 러시아와 일본이 이 중재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까? 양측 모두 조선 문제에 대해서 물러설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차라리 다른 부분에서 보상을 제시합시다. 가령 일본의 산둥반도 진출을 용인하면 일본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국과 미국은 낭림산맥을 경계로 삼아 러시아와 일본의 국경을 긋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중재안은 전쟁당사자인 전쟁 당사자인 러시아와 일본 모두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일본에 너무 유리한 중재이지 않습니까?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은 결코 이 중재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영토를 한 발자국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정당한 영토입니다!”
이 중재안에 따르자면 러시아는 힘겹게 점령한 평양을 비롯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전역을 일본에 반환해야 할 판국이었다.
일본은 일본대로 적지 않은 투자를 해놓은 함경도가 아까웠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당사국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은 낭림산맥 중재안을 강행했다.
어차피 이 문제에 대해서 러시아와 일본 모두가 만족할만한 중재안은 없었고, 영국과 미국이 여기기에 이보다 합당한 중재안은 없었다.
영국과 미국은 차라리 낭림산맥 중재안을 강행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다른 이권을 제시하여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본 중재안을 따른다면 영국은 일본의 산둥반도 진출을 지지하겠습니다. 일본이 중국에 강요한 21개조 요구를 모두 수용하진 못하겠지만, 독일이 지니고 있던 산둥반도에서의 권익을 일본이 승계하는 것만큼은 확실히 지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부 조항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독일의 이권을 승계하는 정도라면 미국도 용인하겠습니다.”
“영국과 미국이 산둥반도의 이권을 확실히 보장해준다면 일본은 본 중재안을 따르겠습니다.”
과거, 일본은 서구 열강이 세계대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21개조 요구를 강요한 전적이 있었다.
이 요구는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담고 있었고, 이에 영국과 미국은 강하게 반발하며 일본을 비난했다.
결국, 일본은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부 조항을 삭제한 14가지 조항을 중국에 강요했고, 당시 중국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일본과 맞설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만행은 유럽이 전쟁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 시도했다는 점에서 서구열강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위였고, 세계대전이 마무리되자마자 서구열강의 극심한 반발에 시달렸다.
특히 시베리아 출병에서 일본의 야심을 경험한 미국은 가장 앞장서서 일본을 견제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완전히 철회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함경도를 포기하는 대가로 21개조 요구의 핵심인 산둥반도 이권을 보장했다.
원래 역사에서 일본이 끝내 산둥반도의 이권을 모두 상실한 것을 생각하면, 산림지대인 함경도와 경제적 가치가 높은 산둥반도의 이권을 맞교환하는 제안은 일본에게 충분히 이득이 되는 제안이었다.
일본이 산둥반도의 이권을 보장받고 낭림산맥 중재안에 동의한 후, 이제 영국과 미국은 러시아의 동의를 얻고자 나섰다.
“영국은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이 본 중재안을 받아들이길 기대합니다. 대신 이에 따른 극동 공화국의 요구사항이 있다면 최대한 고려해보겠습니다.”
“미국도 영국의 중재안에 지지를 표합니다.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은 점령지 일부를 포기하는 대가로 원하는 요구를 제안해주십시오.”
나는 일본이 낭림산맥 중재안에 동의한 시점에서 이 협상이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협상을 깨고 전쟁을 재개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전쟁을 재개하는 것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나의 입장을 존중해주던 스탈린조차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강할 것이 분명했다.
이에 나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인을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빼돌릴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의 시작은 볼셰비키 적군에 입대한 청년들과 그 가족이었다.
“볼셰비키 적군에 입대한 조선인 청년들은 가족과 함께 기차역으로 모이십시오. 평안도와 황해도가 다시 일본의 품에 넘어가면 일본이 여러분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정부는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여러분께도 충분한 농지가 분배되도록 하겠습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볼셰비키 적군에 입대한 청년들이 약 20만.
그들의 가족까지 합하면 약 20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이주행렬에 올랐다.
러시아 극동지방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아 주인 없는 빈 땅이 매우 많았다.
그렇기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토지분배 대상으로 지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조선인 이주행렬은 평양에서 출발해 신의주, 봉천, 장춘, 하얼빈, 만저우리를 거쳐 극동 공화국의 수도 치타로 향했다.
치타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다시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러시아 극동지방 최대도시 하바롭스크로 향해 거기서 극동지방 곳곳으로 흩어질 예정이었다.
“지금이 러시아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 이 땅은 다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다시 일본의 억압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반면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이 곧 나라의 주인입니다. 조선에 남아 노예의 삶을 자처하겠습니까? 아니면 러시아로 이주해 주인된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러시아는 각 민족의 소비에트 공화국 건설을 지원합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등이 독립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국했습니다. 우리 조선인도 극동지방에서 조선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웁시다. 함께 조선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국하여 조선인의 나라를 가집시다!”
나는 한인사회당을 동원해 평안도와 황해도 곳곳에서 러시아 극동지방 이주를 독려하는 연설을 펼쳤다.
사실 조선인들은 아무 방해 없이 한인사회당원들의 연설을 듣는 것 자체가 감흥이 남달랐다.
왜냐고? 조선인들에겐 집회의 자유가 없었으니까.
조선인이 조선인을 상대로 자유롭게 연설하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조선인들은 다시 예전의 삶에 돌아가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이에 각지에서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굳이 러시아 극동지방까지 이주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강화 조약으로 러시아에 넘겨질 예정인 함경도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조선인 이주 계획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둔 후, 영국과 미국과의 협상을 재개했다.
“러시아 제국이 과거에 누렸던 북만주와 몽골에서의 이권은 당연히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이 승계할 것입니다. 이는 본 중재안 동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동의합니다. 그러면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이 본 중재안을 동의하는 대가로 원하는 요구는 무엇입니까?”
“과거 일본은 간도협약을 맺어 남만주철도의 연장과 광산채굴권을 대가로 조선의 정당한 영토인 간도를 중국에 팔아넘긴 바가 있습니다.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은 간도협약이 조선을 배제하고 일본과 중국이 일방적으로 체결한 불법적인 협약임을 선언합니다. 본 중재안을 동의하는 대가로 조선의 정당한 영토인 간도를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의 조선인에게 돌려주십시오.”
간도는 조선 후기부터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지역으로, 그 위치는 현대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생각하면 된다.
간도 분쟁은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은 백두산정계비가 송화강의 지류에 세워졌다는 점을 근거로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라 주장했고, 청나라는 이는 당시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관원의 실수일 뿐이라며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분쟁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청나라가 만주땅에 대한 봉금령을 해제하며 격화되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봉금령 해제 소식에 질세라 월강금지령을 폐지하여 간도에 적극적으로 자국민을 이주시켰고, 간도 관찰사를 파견해 청군과 전투까지 불사하며 간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렇게 서로 물러섬 없이 대치하던 간도 영유권 문제는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제멋대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하며 종료되었다.
나는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간도협약이 불법임을 주장하며, 평안도와 황해도를 일본에 돌려주는 대가로 간도를 요구했다.
영국과 미국은 간도협약의 당사자인 일본과 논의 후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영국과 미국은 간도협약을 부정하고, 간도는 조선의 정당한 영토임을 인정합니다.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이 본 중재안에 동의하는 대가로 간도는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의 조선인들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로써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과 일본의 평양 강화회의가 종료되었고, 영국과 미국의 중재 하에 평양 조약이 체결되었다.
평양 조약.
1.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과 일본 제국은 이들 사이에 전쟁이 중단되었음을 선언한다.
2. 일본은 남사할린과 낭림산맥 동쪽의 영토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포기한다.
3. 평화조약이 체결되는 즉시, 양측은 모든 군대를 철수한다.
4. 양측은 전쟁포로들을 석방하고 본국으로 안전한 귀환을 보장한다.
5. 일본은 전쟁 비용에 대한 보상, 전쟁 수행에 대한 공공 지출, 전시 손실에 대한 보상,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 국민에게 초래한 모든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금 500톤을 배상한다.
6. 조약 당사국들의 외교 및 영사 관계는 평화조약의 비준에 따라 즉시 재개된다.
7. 영국과 미국은 중재국으로서 이 조약을 보장한다.
8. 이 조약은 러시아어, 일본어, 영어, 조선어로 기록한다.
9. 1919년 8월 15일에 평화조약을 발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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