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소련 빨갱이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다우라니
작품등록일 :
2024.08.27 17:08
최근연재일 :
2024.09.16 13:42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29,839
추천수 :
711
글자수 :
183,596

작성
24.08.31 18:20
조회
785
추천
16
글자
12쪽

독일 혁명

DUMMY

독일의 공세로 보르도를 제외한 프랑스의 영토 대부분이 함락되며 서부전선이 위기에 빠지자, 미국은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기로 결정하고 징집을 서둘렀다.

그 결과, 미군은 역사보다 3개월이나 앞당긴 시점에 프랑스에 상륙할 수 있었다.


1918년 5월부터 미군이 하루에 만 명씩 프랑스에 상륙하자 협상국은 서부전선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했다.

프랑스의 임시수도 보르도에서 협상국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필리프 페탱, 미군 총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이 모여 회의를 나누었다.

협상국 최고사령관 회의에서 페르디낭 포슈 총사령관은 순간적인 공세와 신속한 해방을 결합한 일련의 해방 공세 계획을 발표했다.


“영프연합군은 프랑스 북서부의 도시 낭트 해방을, 프랑스의 주력군은 유럽 3위의 항구도시이자 프랑스 제2의 도시 마르세유 해방을, 미군은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 해방을 목표로 진군하라!”


대반격의 서막은 영프연합군이 끊었다.

목표는 프랑스 북서부의 도시 낭트.

이는 프랑스 서쪽 해안을 수복해 앞으로 계속될 영국군과 미군의 상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뒤를 이어 프랑스의 주력군이 공세를 이어갔다.

목표는 유럽 3위의 항구도시이자 프랑스 제2의 도시 마르세유.

이는 남프랑스를 해방하여 프랑스의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미군도 공세를 이어갔다.

목표는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

이는 독일의 점령지 수복과 협상국 이탈리아와의 육로 연결을 위함이었다.


페르디낭 포슈 총사령관이 구상한 해방 공세의 첫 번째 공세는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단 한 차례의 공세로 협상군은 프랑스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을 해방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 서쪽 해안과 남쪽 해안을 해방함으로써, 향후 대규모 공세를 펼치는 데 있어 병참 문제에서 한결 수월해졌다.


“프랑스를 해방하고 독일의 방어선을 벨기에까지 밀어내자! 영국군은 프랑스 북서부의 해안도시 브레스트 해방을, 프랑스군과 미군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 해방을 위해 전진하라!”


1918년 6월, 협상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는 두 번째 공세 계획을 발표했다.


영국군은 프랑스 북서부의 해안 도시 브레스트를 목표로 진격했다.

영국군의 진격은 독일이 파놓은 운하 때문에 부교를 건설하느라 잠시 지연되기도 했지만.

고전 끝에 부교 건설에 성공한 영국군이 운하를 건너 독일의 방어선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군과 미군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 해방을 목표로 진격했다.

그러나 독일의 파리 방어선은 굳건했고, 프랑스군과 미군은 과도한 병력 손실을 우려하여 공세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협상국의 두 번째 공세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 해방 지역은 늘어났으나, 가장 중요한 목표인 파리 해방에는 실패했다.


이에 협상군은 대대적인 재정비에 돌입했다.

최전방 병력의 교체, 대포의 전진 배치, 철도와 도로의 정비 등을 통해 전력을 강화하고, 다시 한번 파리 공세를 준비했다.


“이번에야말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해방하자! 전선을 독일 내부까지 밀어붙여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자!”


1918년 7월, 협상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는 세 번째 공세 계획을 발표했다.


재정비를 마친 협상군은 파리를 향해 일제히 공세를 퍼부었다.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이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자 독일은 파리 방어선에서 후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벨기에 방어선으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처럼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수뇌부는 현실을 외면한 채 승리의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은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고자 독일 해군 대양함대에 특명을 내렸다.


“독일 대양함대를 총동원하여 영국 해군에게 손실을 강요하라!”


독일 해군의 모든 함선이 결전을 위해 빌헬름스하펜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미 전황은 협상국에게 유리하게 기울고 있었다.

독일 대양함대의 규모로는 아무리 노력해봐도 영국 해군을 이기기에 역부족이었으므로 이 명령은 사실상 자살 특공 임무나 다름없었다.


“영국 해군과 전면전을 치르라니?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있냐!”


“죽음을 불사하며 싸우라고? 그냥 우리보고 다 죽으라는 소리잖아!”


수병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수병들 사이에서는 독일 수뇌부가 이미 패배한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는 수병들의 반란과 파업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평화를 염원한다. 군부는 즉각 강화 협상을 개시하라!”


“평화롭게 빵 한 조각을 뜯고 싶다! 이제 순무는 지겹다!”


수병들의 반란은 빌헬름스하펜에서 시작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7척의 전함에서 반란이 발생했고, 심지어 작전의 기함이었던 바덴 함에서도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소식에 놀란 독일 수뇌부는 급히 작전을 취소하고 빌헬름스하펜에 집결한 함대를 해산했다.

그러나 수병들의 반란은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킬 군항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작전 취소로 빌헬름스하펜에서 킬 군항으로 귀항한 함선의 수병들도 킬 군항의 반란에 동참했다.


“황제는 물러나라! 소비에트에게 권력을!”


“노동자와 농민과 병사들은 일어나 혁명에 동참하라! 융커들을 몰아내자!”


킬 군항의 수병들이 일으킨 반란은 독일 전역으로 번져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해군기지로 몰려가 수병들과 함께 소비에트를 구성하고, 킬의 지방정부를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혁명의 기세는 킬에서 시작되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노동자들은 기지와 공장에서 일손을 놓고 혁명에 동참했으며, 농민들은 융커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업 공동체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도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다.

베를린의 노동자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예시로 들며 무장봉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볼셰비키와는 달리 독일 사회민주당은 무장봉기에 반대하고 나섰다.


“무장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러시아가 지금 어떻게 되었나? 혁명파와 반혁명파의 내전에 휩싸여 혼란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과격한 소비에트 운동은 독일의 혁명을 망치는 길이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즉시 소비에트를 해체하고 의회민주주의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이었지만, 산업화가 극도로 발달하였을 때 비로소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이론에 따라 폭력적인 활동을 지양했다.

이들은 제도권 진출을 통한 사회주의 성립을 추구했는데, 세계적인 사회주의 확산을 주도하기보다는 내부에서 사회주의 기반을 갖추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독일 사회민주당의 행보에 카를 카우츠키는 ‘우리 당은 혁명적이지만 혁명은 하지 않는다’라며 냉소적인 표현을 하기도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 수행을 위한 독일 국채 발행을 지지하며 독일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는데.

이는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을 위배하는 행위였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을 위배하고, 국제주의보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제국의회 원내 1당이 될 수 있었다.

원내 1당이 된 사회민주당은 무장봉기가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도 독일의 정권을 장악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무장봉기 반대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결국 독일 제국은 들끓는 민심을 식히기 위해 황제 빌헬름 2세의 퇴위를 발표했다.


“나는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며 프로이센의 왕위와 그에 따른 독일 제국 황위를 영원히 포기한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황위를 포기하고 중립국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에 따라 독일 제국은 붕괴하고 독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국민의회는 사회민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독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에베르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즉시 협상국과 휴전에 합의했다.


항복 직전의 독일군은 굶주림에 시달려 협상군 참호를 습격하여 음식을 약탈해 먹을 정도였다.

후방의 민간인들은 더욱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는 전시 계획경제 아래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치중하느라 식량 생산을 비롯한 기본적인 요소가 부족해진 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애당초 독일 경제 전체가 한계에 도달한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

오히려 독일 관료들의 유능한 식량 배분 정책으로 인해 부족한 식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가용한 모든 식량을 소진할 때까지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독일보다 압도적인 농업생산력을 지닌 프랑스조차 식량이 고갈되어 미국의 식량 원조로 위기를 넘겼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독일군은 배후의 적에게 당했다!”


“항복이 무슨 소리냐? 우리는 아직 지지 않았다!”


식량 배분을 아무리 효율적으로 잘하더라도 없는 식량을 창조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따라서 독일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독일 수뇌부의 정보통제와 프로파간다로 1차대전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믿었던 독일인들은 자국 영토가 유린당하지 않은 채 패배한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군주정이 무너지자마자 항복을 수락한 공화정을 외세와 손잡고 조국을 배신한 세력이라 비난했다.


한편, 협상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한 독일 공화국은 본격적으로 소비에트 운동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과격한 소비에트 운동은 폭동이다! 공화국 정부는 폭동 진압을 거부한 베를린 경찰청장 에밀 아이히호른을 해임한다.”


“노동자 여러분. 저는 시위의 강경 진압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임당했습니다. 사회민주당은 노동자를 배신했습니다!”


해임당한 경찰청장 에밀 아이히호른의 호소에 응하여 노동자들이 항의 시위에 나섰다.

정국에 불만을 품은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고 베를린 도심으로 진입하였다.

시위는 점차 무장봉기로 변질되었고, 이들은 베를린 경찰청, 기차역, 주요 신문사 등을 점령했다.

무장봉기 세력은 경찰청 본부에 모여 임시혁명위원회를 결성했다.


임시혁명위원회는 베를린의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50만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으며, 일부는 무장봉기 세력에 가담했다.

베를린의 혁명은 마치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만큼이나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독일이 러시아보다 못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지금 당장 밀고 들어가 독일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웁시다!”


“독일과 러시아는 다릅니다! 독일은 충분히 제도권 내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임시혁명위원회 내부에 알력 다툼이 벌어졌다.

무장봉기를 통해 완전한 독일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는 세력과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세력이 대립했다.

설상가상으로 베를린 주둔군을 혁명 세력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자유군단에 일시적인 면책권을 부여하겠소.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소비에트를 몰아내 주시오.”


“맡겨만 주십시오. 조국을 위해 저 거지 떼를 몰아내고 돌아오겠습니다.”


독일 공화국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1차 대전 참전자들로 구성된 민병대 자유군단에게 무장봉기를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자유군단은 시가전에 돌입했고, 베를린 혁명 세력은 이에 맞서 처절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전쟁 경험이 풍부한 독일군 출신 참전자들로 구성된 자유군단을 노동자들이 막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유군단은 1주일 만에 베를린 혁명 세력이 점거했던 시설들을 모조리 수복했고, 무장봉기를 주도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머리 소련 빨갱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합니다. +3 24.08.27 740 0 -
36 신경제정책과 누진세 +7 24.09.16 497 25 11쪽
35 조선 소비에트 공화국 +2 24.09.13 671 27 12쪽
34 외무장관 페치카 +6 24.09.12 687 28 12쪽
33 소비에트 연방 설립 +2 24.09.11 739 23 11쪽
32 열병식과 적기훈장 수훈 +1 24.09.10 764 24 11쪽
31 철군과 몽골 혁명 +4 24.09.09 812 22 11쪽
30 조선인 이주계획 +4 24.09.08 807 19 11쪽
29 평양 강화 회의 +3 24.09.07 824 23 12쪽
28 한반도 해방 작전 +6 24.09.06 841 14 11쪽
27 개성 방어선 +6 24.09.05 806 23 11쪽
26 평양 전투 +3 24.09.04 819 19 10쪽
25 조선 진군 +4 24.09.03 862 23 12쪽
24 1919년 3월 1일 +3 24.09.02 852 19 11쪽
23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 +1 24.09.02 811 18 11쪽
22 시베리아 임시정부 +2 24.09.01 809 15 11쪽
21 남러시아 백군 +1 24.09.01 778 15 11쪽
20 볼셰비키-폴란드 전쟁 +2 24.09.01 784 17 11쪽
19 볼셰비키 적군 +2 24.09.01 767 18 11쪽
» 독일 혁명 +1 24.08.31 786 16 12쪽
17 러시아 내전 +3 24.08.31 820 17 11쪽
16 시베리아 출병 +1 24.08.31 810 16 11쪽
15 스탈린과 친구들 24.08.30 854 16 11쪽
14 모스크바 천도와 조선의 맛 +2 24.08.30 856 19 12쪽
13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1 24.08.30 831 17 11쪽
12 독립운동가 최재형 +1 24.08.30 846 19 11쪽
11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3 24.08.30 827 16 11쪽
10 레닌의 초대 (2) 24.08.29 851 18 11쪽
9 레닌의 초대 +1 24.08.29 822 17 12쪽
8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1 24.08.29 831 19 12쪽
7 볼셰비키 혁명 +2 24.08.29 853 26 11쪽
6 적위대장 페치카 +1 24.08.29 869 21 11쪽
5 레닌의 러닝메이트 +3 24.08.28 917 20 11쪽
4 볼셰비키 입당과 트로츠키 +3 24.08.28 948 19 11쪽
3 나는 소비에트를 지지한다 +1 24.08.28 993 21 11쪽
2 러시아 제국군 대위 최운학 +3 24.08.28 1,064 23 11쪽
1 수저가 없는 아이 +1 24.08.28 1,123 19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