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소련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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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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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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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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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정책과 누진세

DUMMY

내가 소련 외무장관에 취임한 후.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서열 5위 안에 드는 자리에 취임했다고 좋아했지만.

사실 소련에서 정부 서열은 큰 의미가 없었다.


소련의 정책은 정부가 집행하는 것이 맞지만, 모든 결정은 결국 볼셰비키 당의 감독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당은 언제든 정부의 정책에 왈가왈부할 수 있었고, 정부는 늘 당의 눈치를 보며 국가를 운영해야 했다.

사실상 정부는 당의 정책을 실행하는 행정 기관에 불과했다.


그래도 레닌 시대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레닌은 "당은 당, 정부는 정부"라는 원칙을 어느 정도 존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레닌의 권력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당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놈의 유사국가에서는 정부에 해당하는 인민위원회보다 당의 회의인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훨씬 더 권위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나는 그 중앙위원회에서 단 7명뿐인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며, 당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블라디미르 레닌 동지, 레온 트로츠키 동지, 이오시프 스탈린 동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동지, 레프 카메네프 동지, 니콜라이 부하린 동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표트르 페치카 동지가 당원들의 투표에 따라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볼셰비키 혁명 당시 단 4명이었던 최고위원은 소련 성립 이후 7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 중 말석으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최고위원에 선출된 7명을 돌아보자.

먼저 블라디미르 레닌.

소련 공산당 볼셰비키의 창시자이자 초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그는 두말할 것 없이 볼셰비키 서열 1위의 절대권력자다.

만인의 존경을 받는 혁명가인 레닌은 최고위원 선출 투표에서도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으며, 2위인 트로츠키와는 엄청난 득표 차이를 보였다.

그만큼 레닌은 볼셰비키 내에서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다음은 레온 트로츠키.

영구혁명론의 이론가이자 자타공인 볼셰비키 서열 2위의 트로츠키는 오만한 성격 탓에 적도 많았지만, 그 성격을 매력으로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그는 확고한 신념으로 거침없이 세계 혁명을 추구하며 수많은 지지자를 끌어모았다.

그의 영구혁명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로 불렸고,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트로츠키는 최고위원에 선출될 수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캅카스 남부의 소수민족 조지아인으로, 농노 출신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탈린은 어린 시절부터 빈곤과 싸워야 했는데, 이러한 스탈린의 배경은 그의 아주 큰 지지기반이 되었다.

먼저 캅카스 남부의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점으로 수많은 소수민족 출신 혁명가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농노 출신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라는 점도 스탈린의 차별점이었다.

볼셰비키가 노동계급의 혁명을 추구하지만 실상 볼셰비키 지도자 중에서 노동계급 출신은 거의 없었다.

볼셰비키의 창시자 레닌은 러시아 제국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영구혁명론의 트로츠키도 부유한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다.

그 외에도 최고위원에 선출된 이들은 모두 중산층 이상의 안정적인 가정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고, 농노 출신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라는 최하급 계층 출신은 스탈린이 유일했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

당의 원로 취급을 받는 고참 볼셰비키로, 볼셰비키 혁명 당시 이를 비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볼셰비키 내에서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나 싶다.

아마도 고참 볼셰비키라는 점으로 인한 콘크리트 지지층이 존재하나 보다.


니콜라이 부하린.

러시아 제국 최고의 대학이었던 모스크바 대학 출신의 뛰어난 경제학자다.

그의 저작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는 레닌의 저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 깊이 반영될 정도로 중요한 저서로 평가받았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경제적 자유와 권리를 강조했는데, 이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나, 표트르 페치카.

열강의 식민지 출신이자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볼셰비키 혁명 직전에 당에 가입했다.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볼셰비키 지도자로 성장하며, 러시아 내전에서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군부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렇게 선출된 7명의 최고위원은 소련 인민위원회의 모든 정책을 감독할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시끄러운 주제는 소련 인민위원회에서 시행한 신경제정책이었다.


“동지들, 우리는 신경제정책을 통해 기근을 극복하고 경제를 회복해야 하오. 내전과 전후의 혼란이 경제를 완전히 무너뜨렸소. 시장 경제와 소규모 사유 재산을 허용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오. 신경제정책은 자본주의로의 회귀가 아니오. 오히려 우리가 공산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오. 우리는 혁명의 성과를 유지하면서도 인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하오.”


신경제정책은 러시아 내전과 전후 혼란으로 파탄 상태에 빠진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도입한 소련의 경제정책이다.

이 정책은 경제의 국유화와 계획 경제의 엄격한 규제에서 벗어나, 제한적인 시장 경제와 사유 재산을 일부 허용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신경제정책의 핵심은 농민들에게 자율적으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 소규모 기업과 상업 활동을 허용하여 생산성과 경제 효율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볼셰비키 혁명 시절의 실책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정책이었는데, 레닌은 옛 제국 시절 관료들의 자문을 받아 이 정책을 시행했다.

레닌은 스스로 행했던 개혁이 너무 일렀다는 점을 인정하고, 아직은 공산주의가 뿌리내릴 기반이 부족함으로 임시로 자본주의를 일부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레닌 동지가 시행한 신경제정책은 혁명의 후퇴입니다! 동지는 지금 자본주의 요소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일부라도 받아들이는 순간 혁명의 불씨는 사그라들 것이며, 그들이 다시 권력을 잡으려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러시아의 혁명을 지키는 것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혁명을 확산시키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정책은 혁명의 본질을 훼손할 뿐입니다!”


당연하게도 자본주의 체제를 일부 받아들이겠다는 신경제정책은 볼셰비키 내에서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트로츠키의 반대가 엄청났는데 그는 신경제정책은 곧 혁명의 후퇴라며 지랄발광했다.


“레닌 동지, 저도 신경제정책에 반대 의견을 내고 싶습니다. 우리는 혁명을 통해 자본가 계급을 청산했는데, 이 정책은 분명 그들을 다시 성장시킬 것입니다. 소규모 상인과 농민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은 곧 그들이 자본주의적 야망을 키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혁명적 원칙에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의 철저한 통제 아래 계획 경제로 나아가야 합니다.”


스탈린도 웬일로 레닌의 정책에 반대 의견을 펼쳤는데, 그는 신경제정책으로 인해 개혁으로 청산했던 자본가 계층이 다시 성장할 것을 염려했다.

빈민층 출신의 스탈린은 진심으로 자본가 계층의 등장을 원치 않았다.


“동지들의 우려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를 일부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의 이상이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의 경제적 상황을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의 이상은 공허해질 것입니다.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경제정책은 필요합니다. 농민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면 이것 또한 혁명의 성과일 것입니다.”


반면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부하린은 신경제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 어느 정도의 자본주의는 필요악임을 인정했다.


미래인의 관점에서 신경제정책은 매우 성공한 정책이다.

이 정책으로 소련은 곡물 생산량이 늘어나 성공적으로 기근을 극복했고, 빠른 속도로 경제를 회복하여 장차 세계 2강으로 발돋움할 기본 체력을 키웠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을 한계는 끝내 자본가 계층의 탄생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도입은 필연적으로 빈부격차를 만들었고, 이에 수많은 볼셰비키 당원들은 신경제정책이 혁명을 무위로 되돌렸다고 여겼다.

이로 인한 볼셰비키 당내에서 계속된 논쟁과 반발로 인해 20년대 후반 스탈린 집권 시기에 신경제정책은 폐지되었다.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으로 부를 축적한 부농들을 대거 숙청하고 효율적인 식량 생산을 목표로 대대적인 농업집산화를 강행했다.

그러나 자영농들은 자기들이 힘들여 일군 농사의 열매들이 자기들이 아니라 집단농장으로 넘어가게 되니 당연히 반발했고, 이에 따라 곡물의 생산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는 결국 약 300만이 굶어 죽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이에 대한 대책은 있을까?

물론 이미 다 생각해놨지!

지금이 바로 미래용사 페치카가 나설 차례인가?


“레닌 동지와 부하린 동지의 말씀도 이해 가고, 트로츠키 동지와 스탈린 동지의 우려도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신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동시에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세금 정책으로 누진세 도입을 제안합니다!”


“누진세?”


“그렇습니다. 소규모 상인과 농민들이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게 된다면, 그때는 그들의 이익에 대해 더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다면 자본의 집중을 막고, 경제 회복을 촉진하면서도 혁명의 원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우 세금을 좀 더 걷는 걸로 자본주의의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애초에 자본주의를 일부라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혁명에 대한 배반이라고!”


“트로츠키 동지, 누진세는 겨우 세금을 좀 더 걷는 것이 아닙니다. 소득이 늘어나면 세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이는 일정한 수준에서는 경제적 자율성을 허용하면서도 지나친 자본의 집중을 방지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본가 계층의 성장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습니다.”


“페치카 동지의 제안은 충분히 혁명적인 사상이라 여겨집니다. 이야말로 경제적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혁명적 이상을 지키는 훌륭한 균형점이 아니겠습니까? 신경제정책을 도입하면서도 지나친 부의 축적을 누진세로 제어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혁명의 이상에 적합할 것입니다.”


“좋소. 누진세를 통한 제어 방안, 그럴듯하오. 페치카 동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경제정책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누진세라는 것을 검토해봅시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유연성이 필요하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에 맞게 우리의 정책을 조정해야 할 때요.”


누진세로 수익에 따라 최대 90%까지 세율을 때려버리면?

자본가 계층 퇴치 쌉 가능!


자본주의 국가가 들으면 뒷목잡을 법안이지만 우리는 누구?

노동자가 주인인 국가, 이름하여 소련!

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이 정도면 순한 맛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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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전쟁 이후의 세계 NEW +3 9시간 전 291 13 11쪽
» 신경제정책과 누진세 +8 24.09.16 638 28 11쪽
35 조선 소비에트 공화국 +2 24.09.13 713 27 12쪽
34 외무장관 페치카 +6 24.09.12 711 28 12쪽
33 소비에트 연방 설립 +2 24.09.11 761 23 11쪽
32 열병식과 적기훈장 수훈 +1 24.09.10 784 24 11쪽
31 철군과 몽골 혁명 +4 24.09.09 832 22 11쪽
30 조선인 이주계획 +4 24.09.08 827 19 11쪽
29 평양 강화 회의 +3 24.09.07 844 23 12쪽
28 한반도 해방 작전 +6 24.09.06 862 14 11쪽
27 개성 방어선 +6 24.09.05 828 23 11쪽
26 평양 전투 +3 24.09.04 837 19 10쪽
25 조선 진군 +4 24.09.03 888 23 12쪽
24 1919년 3월 1일 +3 24.09.02 868 19 11쪽
23 극동 소비에트 공화국 +1 24.09.02 828 18 11쪽
22 시베리아 임시정부 +2 24.09.01 825 15 11쪽
21 남러시아 백군 +1 24.09.01 798 15 11쪽
20 볼셰비키-폴란드 전쟁 +2 24.09.01 802 18 11쪽
19 볼셰비키 적군 +2 24.09.01 784 19 11쪽
18 독일 혁명 +1 24.08.31 803 16 12쪽
17 러시아 내전 +3 24.08.31 838 17 11쪽
16 시베리아 출병 +1 24.08.31 833 16 11쪽
15 스탈린과 친구들 24.08.30 875 16 11쪽
14 모스크바 천도와 조선의 맛 +2 24.08.30 875 19 12쪽
13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1 24.08.30 852 17 11쪽
12 독립운동가 최재형 +1 24.08.30 865 19 11쪽
11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3 24.08.30 848 16 11쪽
10 레닌의 초대 (2) 24.08.29 871 18 11쪽
9 레닌의 초대 +1 24.08.29 843 17 12쪽
8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1 24.08.29 853 19 12쪽
7 볼셰비키 혁명 +2 24.08.29 874 26 11쪽
6 적위대장 페치카 +1 24.08.29 892 21 11쪽
5 레닌의 러닝메이트 +3 24.08.28 941 21 11쪽
4 볼셰비키 입당과 트로츠키 +3 24.08.28 972 2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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