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모
태모
당연히 적과의 대결이었다면 세렌은 죽어도 벌써 죽었다.
세렌이 노린 것은 승패가 아니라 단지 테츠의 옷자락을 잡기만 하면 되니까. 그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테츠도 세렌이 이토록 저돌적으로 들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세렌은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도록 맞으면서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만 노렸다.
당연히 테츠가 피해 물러나거나 했다면 세렌은 절대 테츠의 옷자락을 붙잡지 못했을 거다.
세렌은 어떤 기대감이 찬 눈으로 테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육체적 고통보다는 테츠의 한 마디가 더 중요했다.
"쩝, 약속은 약속이니까."
"으아악! 만세."
칼멘은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트리스탄도 덩달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호들갑 떨지 말아라. 완벽히 용서한 것은 아니니까."
세렌은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무려 각성자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테츠의 한 방 한 방은 엄청났다.
"세렌 너에게 마지막 임무 하나만 맡겨 보고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난 너와의 인연을 영원히 끊겠다."
"···. 목숨을 걸고 완수해 내겠습니다."
"얼마 뒤 얼굴에 철가면을 쓴 라울 몬테네라는 아이 한 명이 올 것이다. 그를 전담하여 가르쳐라. 무공은 전혀 모르는 아이다. 기초적인 무공은 메모라이즈로 기억시켜 놨고 일단 4성의 내공을 가지고 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네가 스승이 되어 녀석을 완벽하게 탈바꿈시켜 놓아라."
"교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너에게 내릴 마지막 임무가 되지 않도록 해."
"이번에 또 실패하면 저 스스로 자결해 버리겠습니다."
"당연하다. 그럴 각오로 임해야 할 거다. 라울은 윈드러너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애다. 너와 성격이 잘 맞을 테니 가르치는 것에는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한가지 주의 준다면 그놈 얼굴을 보려 하지 마라. 얼굴에 관한 관심은 보이지 않은 것이 좋을 거야. 매우 흉측하니까."
어느새 다가온 칼멘이 말했다.
"그래서 가면을 쓰고 있는 겁니까?"
"칼멘." "네."
"넌 노력을 너무 게을리하는구나. 라그 때문이냐?"
칼멘의 얼굴이 또 굳어졌다.
"그건 아니고···."
"라그에 목표 의식을 심어줘. 라그에 무공을 가르쳐 볼 생각 없느냐?"
"제가요? 저도 아직 부족해서 누굴 가르칠 입장이 못 돼. 악!"
칼멘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내 질렀다.
"제 주제를 알긴 아는구나. 너도 라그 때문에 수련을 방해받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같이 수련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트리스탄."
"네 스승님."
"인간 사회에 끼어들기가 만만치 않을 거다. 내 말 알지?"
"네."
"너희 종족은 많은 탄압과 고초를 당할 거다. 지금 세대에서는 꽃을 피우기 힘들어도 너희가 초석을 닦아 놓으면 네 아들과 네 손자는 큰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고통은 너희 세대에서 끝내도록 해야 해."
"알겠습니다."
"오크도 이제 사회성을 익혀 나가야 해. 지켜야 할 법률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도록 강요해야 하며 어기는 자는 엄한 벌로 다스려 경각심을 심어 주도록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물론 나는 네 결정을 존중할 거야. 네가 인간과 화합하지 않고 무력적이든 뭐든 인간과 경쟁한다고 해도 반대할 생각은 없어. 오크는 오크 종족대로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해. 네가 십만 오크를 대변하는 자리에 있으니 너를 존중해 의향을 제시한 것뿐이야. 알지?"
"알고 있습니다."
"난 네 부모를 죽인 원수라는 것도 잊지 말고."
"···."
칼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트리스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
"네가 십만 오크의 위에 있다고 그들의 고충을 다 안다고 하지 마라. 오크 중에서 너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놈도 있을 것이고 아직도 인간을 먹이로 생각하는 부류도 있음을 안다. 상처를 도려낼 때는 확실하게 도려내야 해. 멀쩡한 새살도 일부는 잘려 나가겠지. 말했잖아. 이 모든 불합리함은 너희 세대로 끝내는 것은, 오직 너에게 달려 있어."
"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봐."
"마교라면 오크를 전멸시킬 수도 있었을 겁니다. 스승님은 처음부터 이 같은 생각을 하시고 오크를 엠버스피어에 가둬 두신 겁니까?"
"그래, 솔직히 널 만나기 전에는 오크는 단순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를 만나고부터 생각이 좀 바뀌었지. 결정적으로는
아르마할을 오크인 아울의 몸에 넣고 난 다음부터다. 너 혼자는 솔직히 힘들다고 봤어. 그런데 아울이 도와준다면 이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 이제 내가 길을 놓아주었으니 그 사람 다음부터는 너 하기 달렸어. 처음에는 모진 굴욕과 인간 노예 이하의 취급을 받을 테지. 마음의 상처는 물론 절망이 새겨진 영혼까지 품어야 해. 자유는커녕 희망의 빛조차 무색한 비참한 삶이 너희를 감쌀 수도 있겠지. 차별과 억압을 견뎌야 해. 오크의 존엄성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거다. 남은 것은 비참함과 절망뿐이겠지. 하지만 너희 세대에서 그 쇠사슬을 끊어 내야 해. 그건 희생에서 나오는 거다. 인간으로부터 존중과 인격적 대우를 받기 위해서 너희가 치러야 할 희생은 상상 이상일 거다. 그래도 그 길을 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트리스탄은 이미 결정을 내린 모양새로 포권지례를 해 보였다.
"마교가 도움을 준다면 저희는 훨씬 좋은 길로 갈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스승님이 절 괜히 겁주시는 것도 압니다. 마교가 닦아 놓은 길을 저희 오크가 좀 빌리겠습니다."
"넌 언제부터 그렇게 영악하게 변했냐?"
"아울이 좋은 스승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쩝, 간사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칼멘, 라그는 만나 보러 가자꾸나."
칼멘은 어깨를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
테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라그의 외모는 충격 그 자체였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구나."
테츠가 놀란 것은 일단 외모다.
아름답다. 세상 모든 수컷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 같은 고혹적인 아름다움이다.
오래된 숲의 신비로운 향기를 풍기며, 창문 너머로 들어온 달빛에 은은히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는 마치 황금 강처럼 우아하게 흐르는 긴 머리카락으로 휘감겨 있었다.
그녀의 몸은 그림 같은 곡선과 섬세한 신체로 가득 차 있었으며, 얼음처럼 맑고 아련한 눈동자는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찬란한 보석과도 같았다. 손끝에서 시작해 어깨 곡선 이르러서는 환상적인 선율이 피어나며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본 남성이라면 잊을 수 없는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일 거다.
테츠조차도 잠깐 흔들릴 정도로 절대적 미인의 외모를 가진 라그다.
다만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며 눈앞의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실로 놀랄만한 아름다움이구나. 내 평생 많은 여인의 보아왔지만, 라그처럼 경이로울 정도의 아름다움은 처음이다."
"네, 네, 그럴 것 같아서. 그녀를 본 남성은 아울과 레노번뿐입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갈수록 그 아름다움이 빛을 더하고 있어요."
테츠가 다가가자 그녀는 방 모서리에 등을 대고 괴이한 소리를 내며 쏘아 보았다.
"아, 남자가 다가가면 저래요. 레노번은 근처에 있지도 못하고 아울도 요즘 다가가지 못해요. 저와 세렌 언니만이 그녀를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죠."
-스~~~~스~~~~스~~압!"
흡성대법으로 당기자 그녀는 버티지 못하고 딸려 나왔다.
테츠는 그녀의 정수리에 오른손바닥을 대고 소울 슬립을 사용했다.
다른 생명체에게 소울 슬립은 치명적이지만 태모에게만은 유일하게 소울 슬립이 작동하지 않았다. 아마 모든 마족과 연결된 태모의 신경망이 소울 슬립보다 월등히 앞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태모와 연결된 테츠는 서로의 지식과 생각을 공유했다. 마족이 어떻게 인간을 학살했는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마족과 인간 사이에 벌어졌던 처절한 경쟁의 역사를 라그에 알려 주었다.
테츠는 그녀에게 상생과 공생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손을 뗐다.
라그의 눈빛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테츠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손으로 맞은 편을 가리켰다.
라그는 고혹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의자에 앉았다.
"마족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서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서로에게 존중의 의미가 있다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도 있지. 이 제국은 넓어. 인간의 땅이라고 누가 못 박은 것도 아니고 들어와 산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 다만 과거의 경험을 무너뜨리는 것이 힘들 뿐이지. 그게 아마도 큰 숙제가 될 거지만." "우리 마족은 번식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알아, 케이사르라는 놈이 그 방법을 제시했겠지···."
"그래요."
"너 속은 거야. 그렇게 태어난 마족은 한심한 지적 수준을 가진 채로 살아가겠지."
"이해했어요."
"네가 너에게 인간의 윤리 의식을 주입한 것은 직접 인간과 함께 생활하며 몸으로 익히라는 의미였어. 하지만 마왕이 죽는 바람에 그 의미가 퇴색되긴 했지만."
"아뇨 상당한 도움이 됐어요. 저희 마족이 인간을 핍박하고 멸종 위기까지 몰고 갔으니까요. 우리는 공생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인간은 미숙한 존재며 우리의 먹잇감 정도였으니까요." "인간이 미숙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야. 마족에게 인간은 시들어가는 잔디와도 같아서 어느 곳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보는 거겠지. 인간의 존재는 저속하고 열등한 것과 같아서 이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이지. 결국 마족은 그런 인간들에 의해 영원한 어둠 속으로 추방당했어."
"알아요. 모두 저희가 저지른 행동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죠? 이해해요. 그런데도 당신은 마족과의 공존을 생각하시나요? 지금 다크 시럼 포션으로 인간이 마족과 같은 신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죠. 치명적인 단점을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그래, 알고 있어. 내가 원하는 것은, 다크 시럼 포션 따위로 각성한 각성자가 아닌 순수한 인간으로서 마족과 대등하고 서고 싶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저희는 새로운 방법의 번식으로 이 땅 위에 제대로 설 거예요."
"멍청이. 케이사르가 어떤 놈인데 너희에게 그런 멋진 행운을 줬을 거로 생각해? 너희는 번영이 아니라 몰락의 길을 걷고 있어. 말라키의 지식은 인간의 지식인 아닌 신 니알라토텝의 지식이야."
테츠는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있으면 싫어도 알게 될 거다. 너희가 걷는 길은 번영의 길이 아닌 멸종의 길이라는 것을."
라그는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테츠에도 그런 그녀의 모습은 하늘 위 여신이 인간계로 내려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엄청나서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이는 18세 정도였다. 그러나 정확히 따지면 태어난 지 아직 2년도 지나지 않는 상태였다.
칼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저렇게 유창하게 인간과 대화 할 수 있게 된 거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으르렁거리는 것이 전부였는데?"
"아, 역행성 퇴행에 걸린 거야. 일반적으로 뇌의 기능이 감소하거나 악화는 상태를 말해. 그게 케이사르가 건 저주지. 소울 슬립으로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인격과 지식을 주입한 거야. 물론 살아가면서 제대로 자신에 맞는 성격을 만들어가겠지만 말이야."
라그가 눈을 떴다.
"지금은 당분간 여러분과 함께 생활하고 싶어요. 좀 더 인간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 기분은 알겠지만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엄청 귀찮아질 거야."
"어떤 의미죠."
칼멘이 웃으며 말했다.
"밖의 멍청한 남자들이 네 모습을 보면 밤마다 잠을 설쳐 댈 거야."
"인간은 미적 아름다움을 번식의 우선순위로 보는가 보죠?"
칼멘의 입술이 삐쭉했다.
"그게 아니란다. 발정한 새끼들은 그런 생각도 못 해." "음, 라그의 외모는 너무 특별해. 그녀의 아름다움은 자신의 것이지만 남들에게 내보일 때는 조심해야 해야겠어."
"가면이라도 씌울까요?"
"아니라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만들면 되겠지."
그때 밖에서 누군가 접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주님 아울이 뵙고 싶어 합니다. 긴밀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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