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약은 신중한 입질
아주 약은 신중한 입질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길을 쉴 새 없이 달렸다.
어둠은 그에게 방해꾼이 되지 못했다.
잘 닦인 대로가 아닌 산길 속을, 들짐승이 내어놓은 길을 따라 달렸다.
이곳에 터전을 잡은 늑대 무리가 야간 사냥에 이용하는 길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채취가 늑대무리의 냄새에 묻히도록 이 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누가 자신을 추적하더라도 절대 찾지 못하도록, 흔적을 지우는 마법까지 사용했다. 그가 지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마력의 흔적은 아예 지워 버리는 마법이다.
이런 마법은 베틀 워락이 마녀의 추적을 피하고자 사용하는 특별한 그들만의 기술로 알려져 있다.
사내가 오르는 북쪽 길은 리브하르트로 통하는 길이다.
말로 달리면 아침에 출발해 점심쯤에 닿는 거리다.
사내가 리브하르트에 닿았을 때 아직 새벽이 밝으려면 한 참 남은 시간이었다.
그는 조용한 마을 거리의 어느 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교묘하게 움직이는지 암살자 뺨치는 수준이었다.
사내는 한 건물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호흡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철저하게 살폈다. 이윽고 그는 창문 앞 나무 베란다로 소리 없이 뛰어내린 후 품속에서 작은 호루라기 같은 것을 꺼내 입에 물고 불었다. 그 소리는 밤 부엉이 소리와 아주 똑같았다.
이곳 마음에서는 흔히 듣는, 야밤의 적적함을 달래는 익숙한 소리다.
-달칵
베란다의 문이 살짝 열리자 사내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준비는 다 되어 가는가?"
"쉿! 조용히 합시다."
"뭐야? 내가 미행이라도 달고 온 것 같은가?"
"마교를 얕잡아 보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요즘 그들의 움직임이 살벌합니다."
"이 정보만 전하면 우리 임무는 끝이야. 마지막 남은 일만 처리하면 자유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신중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녀석의 일은?"
"문두스로 보냈습니다. 확실히 하기 위해 실제로 일을 진행 시킨 겁니다. 녀석의 어머니는 천천히 회복될 겁니다. 약을 많이 쓰면 의심받기 때문에 표시 나지 않을 정도만 사용했습니다. 대장 아렌도르에게 미리 말해놨습니다. 셈이 어머니 간호로 자릴 비운 대신 타리스 삼촌이 대신 경비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좋아, 준비 대로군. 오늘 아침부터 출근하면 되는 거지?"
"그래야겠죠. 대신,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경비 중에 마교 인물이 섞여 있습니다. 동쪽 첨탑 경비는 하루 2교대로 돌아갑니다. 파트너 얼굴부터 익혀 놓고 말을 터놓으십시오. 셈의 어머니가 일어나기까지 보름 정도 시간이 있습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는 품속에서 작게 접힌 종이 하나를 꺼내 건넸다.
"셈의 가족 사항과 대략의 성격들. 당신이 연기해야 할 타리스의 정보를 기재해 두었습니다. 재수 없으면 파트너로 마교인이 걸릴 수도 있으니 실수 한 번이면 끝이란걸 아시고 날 밝을 때까지 한 글자 빠지지 말고 전부 다 외우도록 하십시오."
리브하르트 가의 성에는 경비가 약 오백 명 정도 근무한다. 드폴이 문두스에 내려올 때 성의 경비 전부를 데리고 왔었기에 마을 사람 외에 피해는 거의 없었다.
드폴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였기에 마을 사람들은 리브하르트 가에 적대적인 감정은 없었지만, 소수의 사람은 아직도 자신을 버리고 문두스로 간 리브하르트 가문에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다.
레스틴은 마을 사람의 충성심을 고취하고 생업에 빨리 복구할 수 있도록 리브하르트 가문 소속의 직속 경비 2천 명을 내보내 마을이 안정될 때까지 돕게 했다.
외성 경비 4백을 제외하고 내성 경비 백 명 중 내성 성벽은 20명이고 나머지는 내성 내부와 지하를 집중적으로 경비하고 있다.
특히 제라드의 조사로 내성 지하에서 마력이 흔적이 상당수 발견되어 위험 지역으로 간주하여 24시간 철저하게 감시하는 중이다.
레스틴 백작과 람베르트 단장도 제라드를 크게 신뢰하고 있어 그는 아무런 제약 없이 성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특이나 꼼꼼한 제라드 성격 덕분에 성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의 눈길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다.
아침이 밝자 사내는 말끔한 경비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그는 태연히 교대하는 다른 경비 틈에 섞어 들어갔다.
그의 행동은 어딘가 어눌했고 제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등 사람들 눈에 확 띄었다.
"어이, 자네. 못 보던 얼굴인데?"
경비대장은 사내를 불러 세웠다.
"저기 혹시 셈이라고 아십니까? 어머님이 큰 병이 나서 큰 도시로 옮기셨는데 차도가 없어서 셈이 모시로···."
"아, 자네가 셈의 삼촌 되는?"
"네, 맞습니다. 타라스라고 합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네. 그 녀석 참 손재주가 좋은 친구인데 어서 어머님이 건강해지셔야 할텐데 말이지. 듣기로 자네도 한때 검 좀 만졌다고 들었는데? 어떤가?"
"네, 과거에 잠시 오군단에서 1군단에 몸을 담았었습니다."
"오? 그래? 1군단이면 정예 중의 정예가 아닌가?"
"아이고. 뭐, 한때는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는데 오크 전쟁 때 좀 다치는 바람에···. 아시잖습니까? 쓸모가 없어진 병사는 후임에게 빨리 자리를 물려 줘야 하는 법이죠."
"알고 있네. 알고 있어. 그래도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고 하던데. 어떤가? 아침 훈련 때 살짝 대련해 봐도 좋지 않겠나?"
"아이고 이거 검이나 제대로 뽑을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겸손이 과하네. 자네 눈빛만 봐도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이는 것 같네.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난 느낌이라고 내 몸이 말하고 있어. 컬컬."
오후가 되어 교대 인력이 오자 타리스는 성을 나와 마을로 들어왔다. 오늘 처음 경비 업무를 시작한 타리스는 위해 몇몇 동료가 한턱을 내게 되어 저녁 늦게까지 진득하게 술잔을 걸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어땠는가?"
"일이 쉽게 풀린 것 같아. 경비대장 아렌도르와 검술 시합을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이겼어. 그는 꽤 감탄하더군. 몇 년 만에 자신을 이긴 사람은 처음이라고 말이야. 어쩌면 빠르게 내성 경비로 투입될 수도 있겠어."
"그래? 일이 너무 쉽게 풀려도 문제야. 절대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두 번 말하면 입 아픈 소리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없어.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야. 조금 늦어지더라도 신중함이 먼저라는 것을 명심해." "그렇게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특히 제라드 그자는 정말 조심해야 해. 아예 부딪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아. 여기 마교인은 모두 각성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잖아. 가장 무서운 놈들이라고. 지금까지 들키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움직임을 최소로 한 거고 점조직으로 운영했기 때문이지. 꼬리가 길면 언젠가는 밟히게 돼."
"지금이 가장 위험한 고비라는 것은 알고 있어."
"보라고 철저하게 계획되었고 전혀 문제가 없던 우리 계획을 단 한 놈이 모두 내려 앉혔어. 마교의 모그룩 그자의 행방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고! 그자가 사라진 직후 마교 교구가 여길 방문했어.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야.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자네도 알고 있잖아."
"알고 있다고 알고 있어."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아렌도르가 날 더러 내성 근무로 가라고 하더군."
"그래? 너무 빠르지 않나?"
"오늘도 훈련 때 날 불러내더군.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검술 시합했어. 아슬아슬하게 내가 이기도록 했지."
"아렌도르가 자네에게 빠진 모양이군."
"문두스에서 연락은 없나?"
"교주는 션사인 회관에 머물고 있고. 에시턴도 함께야. 나머지 마교 사람 전원 위치 파악해 놓고 있어. 문두스에는 제라드를 포함 열 명이야. 한 명 한 명 위치 파악은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주일 뒤.
"파트너가 정해졌어. 원래 셈과 함께 하던 놈인데."
"그럼 레이커네."
"어. 그놈 맞아."
"레이커면 내성 경비 일 텐데 잘하면 동쪽 내성 경비를 설 수도 있지 않겠나?"
"아직 확정 난 것은 아니니까. 자네 레이커에 대해 좀 알아보겠나?"
"이미 끝내놨어. 그의 가족들도 감시 대상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로부터 이주가 더 지났다.
"어제 처음으로 내성에서 근무했어. 낮 근무라 아쉽긴 하지만. 그쪽 경비를 보니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더군. 그럼 사흘 정도면 동쪽 첨탑 경비에 투입될 수도 있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 셈 어머니에 약을 좀 더 썼어. 반 달 정도는 더 벌어 놨으니 기회를 확실하게 잡자고."
사흘 뒤
"타라스 저기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무슨 일입니까?"
"저기 좀 곤란한 일이긴 한데···."
"말씀하십시오. 하하, 곤란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렌도르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저녁은 풀로 뛰어야 해. 인원이 빡빡하게 돌아가서 말이지. 자넨 정식으로 우리 소속이 아니라 미안하긴 한데 수고 좀 해주겠나?"
"아이고. 연장 근무 말씀입니까?"
"미안하네. 어쩔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서라고. 하필 제라드 일행이 마을에 나가는 때라서···."
"그게 경비랑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 자네 아예 듣지를 못했구먼. 레스틴 영주님도 함께 하지 않는가? 여긴 최소한의 경비만 남기고 다 호위로 나가는 거라고." "아, 그렇군요."
"소속 경비는 전원 그날 하루 대부분 연장 근무를 해야 할 참이야. 물론 수당은 곱으로 나갈 걸세."
"그 말을 들으니 의욕이 넘치네요."
"하하, 그럼 결정한 것으로 알겠네."
"네, 그럼 맨 레이커랑 함께 하면 되는 거네요?"
"그렇지. 당연히 같이 연장 근무하면 되네. 뭐, 사실 사람이 거의 다 빠져나갈 테니 알아서 하면 되네."
"대장님도?"
"영주님이 나가시는 데 물론이지. 나도 호위 경비로 차출이네."
"아이고 여기 많이 적적해지겠네요."
"그럼 수고 부탁하네."
다음날
타리스는 레이커와 함께 동문 두 번째 첨탑 경비에 배정이 되었다.
날이 저물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형님, 셈은 언제까지 있는 겁니까?"
타리스가 나이가 많으므로 셈의 친구 레이커는 그를 형님이라 불렀다.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어. 저번에 들은 바로 차도가 있다고 하니까 얼추 한 달 정도면 복귀할 것 같네."
"자식 광부 하기 싫다고 여기까지 와서 근무하더니."
"지가 광부는 죽어도 싫다고 하잖아. 어쩔수 없는 거지. 아스펠 가의 가드 나이트 시험에 떨어지고 낙담한 표정으로 집에 오던 때가 생각하는군. 하하."
"슬슬 날이 저무네요. 형님부터 식사하고 저하고 교대하죠."
"서두를 것 없잖아? 어차피 식당에 사람도 없는데 배고프면 그때 교체하자."
"형님 좋으실 대로."
날이 완전히 떨어졌다.
"아우 그럼 나 먼저 후딱 먹고 오겠네."
"네 형님 저도 배가 고파지네요."
"알았네. 알았어. 난 그리 배고프지 않으니 간단히 빨리 먹고 오겠네."
타리스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 안에는 세 사람인가 식사하고 있었다.
"자네들 이제 식사하는가?"
"네 그렇죠. 뭐. 우리 쪽은 돌아가면서 식사하다 보니."
"뭐야? 요리사도 다 나간 거야?"
"영주님 행차 아닙니까? 그리고 마을 사람을 위해 베푼다고 성내 요리사는 다 불려 나갔습니다."
"크, 그래서 감자 스튜와 빵 한 덩이뿐인가?"
"하하 드시고 싶으시면 빵은 더 드셔도 됩니다. 스튜는 데워 드시고요."
"푹푹 찌는 날씨네. 뱃속에 뜨거운 것을 넣고 싶진 않네."
타리스는 식당을 나와 영주의 방 근처를 슬쩍 기웃거렸다가 제라드가 묶고 있는 방도 지나쳤다. 성은 말 그대로 텅텅 비어 있었다.
"이보게 자네 차롈세."
"형님 적적하지 않게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시야에서 레이커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작은 호루라기 같은 도구를 꺼내 입에 물고 불었다. 새소리인 듯 소리는 밤하늘 위로 길게 사라졌다.
식사를 마친 레이커는 동쪽 성문을 향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가 막 성문 아래에 도착했을 때였다. 큰 성문 옆 작은 견막문에서 누군가 빼꼼 내다보는 것이다.
"뭐야? 누구냐?"
레이커는 다른 경비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커가 다가갔을 때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앞으로 푹 쓰러졌다. 그가 땅에 쓰러지기 전에 튀어나온 사내는 레이커의 옆구리를 양손으로 끼고 견막문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잠시 뒤 레이커가 다시 문밖으로 나왔다.
동쪽 성벽을 올라가 첫 번째 첨탑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두 사람을 지나치며 말했다.
"수고들 하세요."
"레이커냐? 너도 고생해라."
"고생해."
레이커는 두 번째 첨탑에 왔다.
그는 타리스를 확인한 후 투구를 벗었다.
나타난 사람은 레이커가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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