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놀기
혼자 놀기
탈로스는 기지개를 켜며 상체를 일으켰다.
"녀석들 정보망도 형편없군. 다섯 개 다 부실 동안 누구 하나 정찰온 놈이 없었으니. 하긴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소수의 인원이 가장 좋겠지만, 이렇게 한 번 들켜 버리면 치명적인 단점으로 변하지."
탈로스는 영혼 구슬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계속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 영혼 수확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거고. 녀석들이 기를 쓰고 소울 크리스털을 충전하려는 이유도 있겠고. 또다시 도전하려 하겠지···."
그동안 모은 정보를 정리해 보면 녀석들은 스케이븐을 활용하여 오군단과 리전을 한꺼번에 소탕할 계획이다. 엘스칼라 유적을 선택한 이유는 역시 영혼 수확을 활성화하기 위해서고···.
"아무리 서둘러도 스케이븐은 막는다는 것은 힘들어 역시나 우리 쪽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방법밖에 없겠네."
탈로스는 비밀통로를 통해 아칸 공동묘지로 나왔다. 그리고 단숨에 리전으로 간 후 포탈을 타고 엠버스피어로 넘어갔다.
세렌은 한 참 라울과 대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윈드러너 사건 이후 테츠에 심하게 잔소리를 들었다. 윈드러너를 책임지고 지키라 했는데 그 잠깐 마족과의 싸움 사이 놓쳐 버리고 말았다.
늘 일이 꼬인다.
테츠가 명령한 것을 제대로 완수한 일이 드물 정도다. 뭣만 하면 일이 꼬여 버리니. 그것도 죄다 자신의 실수 때문이니까 환장하고 기막힌 노릇일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칼멘은 열성적으로 라그를 돌본다. 라그는 칼멘을 친언니 이상으로 잘 따르며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잘 묻곤 하는데 이상하게 세렌에게는 거리감을 둔다.
에르제베트는 라그가 세렌에서 죽음의 냄새 즉 살기를 느껴서 그렇다고 했다.
태모이기에 정신 감응 능력이 뛰어난 라그는 세렌에서 뿜어지는 천살성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다.
세렌은 라울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 거의 라울에 빠져 있다.
테츠의 명령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윈드러너 같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아예 라울을 감시하다시피 하며 생활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심지어 라울의 방도 자신의 바로 옆방에 배치했다.
온종일 라울과 함께했다.
라울도 제대로 된 인간의 생활을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세렌의 지독한 관심을 오히려 반가워했다.
수십 년 동안 인간과 대화 해 본 적이 없는 라울이기에 세렌의 관심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무공이라는 것을 수련할 수 있으니 더 없는 즐거움이었다.
알프레드가 혀를 내두를 만큼 라울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태어날 때부터 임독양맥이 타동 된 채로 태어난 천양신맥이기에 내공의 운용과 그 증량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거기다 테츠가 먹인 다크시럼 포션 때문에 천양신맥의 능력 운용이 훨씬 쉬워졌다. 애초에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든 천양신맥인데 다크시럼 포션을 마시고 죽음을 극복했다.
다만 몸속의 열기가 너무 극심해 의복을 제대로 착용할 수 없어 불사왕과 같이 상체는 늘 알몸으로 다닌다.
뭉개진 얼굴에 콤플렉스가 있어 엠버스피어에 온 이후 자신이 만든 철가면을 한 번도 벗은 적이 없다.
두 사람은 이렇게 어울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훈련에 몰입하니 천양신맥의 재능과 결합해 라울의 배움 속도는 메말라 바닥이 보이는 저수지에 폭우가 쏟아져 내려 단 하루 만에 다 채워질 정도의 빠르기였다.
테츠가 라울에게 천마수라검을 메모라이즈로 각인시킨 것도 세렌을 고려해서 한 일이다.
세렌은 라울이 마교 제자로서의 규정을 어기지 않도록 먼저 매화와 태청을 가르쳤고 알프레드가 심사하여 정식 마교 제자로 인정되었다.
그 이후 구화마검과 구유참인도법을 익혔고 내공은 자신과 같이 천마심법을 기본 내공 단련으로 하였고 파천수라장과 천마수라검까지 가르쳤다.
천양신맥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테츠가 라울을 절세의 기재라고 칭찬해 마지않았으니 그의 무공 배움이 빠르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는 칼멘보다 월등히 빨랐다.
칼멘은 한 번 전개하면 그대로 흉내는 내지만 내공 수위가 부족해 위력이 조금 달렸다. 그에 비해 라울은 테츠가 신경을 써 준 덕분인지 내공 수위도 탄탄해 배우는 족족 그 위세가 칼멘을 가뿐히 능가했다.
더욱이 칼멘은 무공에 대한 집중력이 라울보다 약했다. 그것은 목적의식 때문인데 라울은 가족의 복수에 불타올랐고 무공을 배워 능력을 키워야 고위 귀족과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집중력의 차이가 칼멘과는 천지 차이였다.
칼멘은 엄청난 재능을 가졌는데 그것은 거의 테츠와 동급에 가까울 정도의 수준이다. 대신 노력이 조금 게으른 스타일이다. 반면 라울은 재능 면에서는 칼멘에 살짝 떨어지지만, 노력과 집중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으니 라울의 무공은 눈을 뜨면 달라 보일 정도였다.
"열심히 하는구먼."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세렌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뒤에 누가 이토록 가깝게 접근했는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세렌은 보지도 않고 인사부터 했다. 자신을 속이고 이처럼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기에.
그제야 다른 사람의 고개도 모두 세렌 뒤쪽에 나타난 테츠에 쏠렸다.
칼멘과 라그, 라울이 인사했고 세렌의 팀원인 제럴드와 브라이트, 크림슨, 로이드, 바실이 달려 나와 인사를 했다.
"심심하지?"
"아닙니다. 라울과 함께 대련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
-딱
테츠가 지풍을 날려 세렌의 이마를 살짝 튕겨 냈다.
"내가 말한 것은 속내다. 그동안 마족의 공격도 없었잖느냐?"
"···."
세렌은 테츠 앞에서 무얼 속이거나 속마음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입을 닫았다.
천살성.
생명을 죽이지 않으면 미쳐버리는 살귀.
그 때문에 윈드러너를 놓쳤고 여러 가지 사고를 친 세렌이다. 그건 본능이기 때문에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테츠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도 강제로 억압하여 가슴에 쌓이면 더 미쳐 버리는 것이 천살성이기에 한 번씩 풀어줘야 하는 것도 잘 안다.
"야, 나 따라 침묵의 숲으로 가자. 쥐 새끼들이 리전을 공격하려 하는 데 네 힘이 좀 필요해. 그쪽 애들은 처음 시작이라 아직 어수선해서 말이야. 피해 나는 것도 달갑지 않고."
"쥐 새끼라니요?"
칼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말 그대로 쥐 새끼다."
테츠는 스케이븐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내가 경험해 본 바로는 신체 능력이 마족과 비슷하거나 살짝 위야."
"세상에 그런 괴물 쥐가 다 있네요?"
테츠는 칼멘의 말을 받아넘기며 말했다.
"세렌."
"네 스승님."
"입술이 바짝 메말라 있고 아까 보니 검에 활기가 없어 보이더군. 그동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했으니 가슴이 답답하고 사지가 축축 늘어지지?"
"아, 아닙니다···, 저기 솔직히 좀 그렇긴 합니다···."
"가자. 이번에는 손에 사정 둘 필요도 없고 칼멘이나 라울을 신경 쓸 필요도 없어. 그냥 죽여라."
"그···냥···죽···이···라···고···요?"
"응. 뭘 그리 말을 더듬어? 마음 푹 놓고 제대로 작정하고 죽이면 돼."
그 순간 갑자기 세렌의 몸에서 뻗친 무지막지한 살기가 어깨 위에서부터 머리 정수로부터 터져 나와 수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볼수 있는 것은 테츠뿐이다.
천살성의 억눌렀던 살기가 테츠의 한 마디에 촉발이 되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실로 거대한 살기 덩어리였다.
라그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호오? 그녀의 살기를 느낀 것은···. 역시 태모인가?'
세렌은 심호흡하며 뛰는 심장을 가다듬었으나 터져 나온 감정의 고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끌면 아무에게나 칼부림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가자. 제럴드 너희들도 다."
"네, 교주님."
"저도 가요? 라그는요?"
칼멘의 말에 테츠가 고개를 저었다.
"애를 전쟁통에 데려가는 것은 곤란하지. 라그는 에르제베트에게 맡겨. 칼멘 너는 이제 전장의 냄새를 제대로 맡아봐야지."
그렇게 일행은 리전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막 스케이븐의 공격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테츠는 세렌 일행에 리전을 맡기고 유적 지하로 내려갔다.
우드퍼펫은 차원 문을 통해 지하에 집결하고 있었다. 차원 문은 하나뿐이기에 우드퍼펫은 일렬로 기다랗게 줄을 서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시간이 걸릴 것 같네.'
우드퍼펫의 진격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자 탈로스는 먼저 치고 달려 나왔다.
지하에는 이미 스케이븐의 공격 루트가 완성된 단계였고 조금 전 리전의 공격방식으로 오군단 아래서 치고 나오면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천마비행으로 물 흐르듯이 지면 위를 미끄러져 가는데···.
'사기!'
앞쪽에서 옅은 사기가 느껴졌다. 지금 있는 곳이 엘스칼라 유적지의 가장 깊숙한 뒤쪽이기 때문에 지금 느낀 사기는 한 참 앞쪽에 있다는 소리다.
스케이븐은 사기가 느껴지는 생물이 아니다. 저번에 만나본 적이 있으니까 잘 알고 있다.
이 사기는 당연히 네크로맨서의 냄새다.
탈로스는 다리에 내공을 한 층 더 끌어 올려 속도를 높였다.
'네크로맨서가 왜 필요하지? 스케이븐 삼십만 정도면 이미 승패가 갈릴 정도인데?'
유적의 크기는 아칸 시티보다 훨씬 크다. 지금 탈로스는 아칸 시티 북쪽 성문에서 남쪽 성문까지 내려오는 거리를 달리는 것과 같았다.
접근하면 할수록 사기가 짙어졌다. 사기는 계속 짙어지더니 마침내 그 정체를 보였다.
유적 내에서도 거대한 광장이 있다. 유적지라고 해도 과거에는 엄연한 도시였다.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이 운집할 수 있는 광장이 있었고 지금 이곳이 엘스칼라 도시의 광장인 셈이다.
그곳에는 많은 수의 기사와 네크로맨서들이 소환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이언트 스켈레톤부터 헬하운드에 워리어 스켈레톤까지 소환되고 있었고 소환된 사령들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전진 중이었다.
탈로스는 그 장면을 무너진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스케이븐이면 충분 할텐데 왜 이딴 귀찮은 짓을 하는 거지?'
하지만 곧 이유를 알수 있었다.
막 한 네크로맨서가 정답을 말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저희도 이제 피해야 할 때입니다."
"사령들이 설쳐 대면 도시 수비 중이던 5군단도 가세할 거고 드라고나 전사놈들에게 지원 요청도 갈 겁니다."
'영혼 수확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인원이 모일수록 좋겠지. 도시 수비 병력에 드라고나 전사들까지 싹 끌어들이려 사령을 미끼로 쓸 모양이군.'
스케이븐으로 밀어붙이면 단번에 결판이 나기 때문에, 일단 사령으로 5군단과 드라고나 전사를 유적지 내부로 불러들인 후 스케이븐을 출동시킬 모양새였다.
침묵의 숲 리전이 먼저 공격받은 이유였다.
벌써 상당수의 사령이 몰려간 상태고 선두 쪽에게서는 서로 부닥쳤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탈로스는 주변을 살폈다.
근래 보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많은 수의 네크로맨서였다. 이걸 보더라도 이번 공격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 무리는 거의 삼십 명에 가까웠고 그들을 호위하는 반사르가의 기사도 근 이백 명 가까이 되었다. 그들 모두 각성자이기에 반사르가에서는 아주 소중한 병력이라고 할 수 있다.
리브하르트 사프란 성에서 각성자 주 병력 수만을 잃었으니 이번 공격이 어쩌면 마지막 도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탈로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네크로맨서를 제외하고 각성자 이백 명은 직접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각성자를 죽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목을 자르는 것이다.
리치나 심지어 리치킹을 소환하더라고 각성자를 단번에 제압하기는 힘들다. 어중간한 기술로는 각성자 제압이 번거로운 것이 사실이다.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아직 영혼 수확의 마법진이 파괴된 걸 모르는 모양이다.
어서 피하자고 하는 것을 보니 영혼 수확의 두려움 때문이란 걸 알수 있었다.
"쳇, 이런 하류배 애들에까지 손을 대야 하니 나도 참 많이 착해졌군. 하긴 어쩔수 없는 노릇이지. 이곳을 무림화하기 위해 잡동사니는 빨리 치우는 게 맞으니 직접 손을 쓸 수밖에···."
탈로스는 단번에 무리 가운데 뛰어내리며 네크로맨서부터 베어 나갔다. 손에 들려진 중원의 곡도는 인간을 베는 데 특화된 검이다.
"나, 난쟁이닷!"
특이한 외모를 바로 알아본 기사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 들었다.
그때는 이미 탈로스의 손에 네크로맨서들이 세상과 하직한 다음이었다.
각성자들은 각성자가 되고 난 뒤 첫 번째로 과신이라는 감정에 도취한다.
실제로 일반 평범한 인간에 비해 월등한 정도가 아닌 거의 반신에 가까운 신체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나라별 최고의 무장이라고 불리는 전투의 달인이 검으로 찔러도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낼수 없는 것이 각성자이다 보니 그 기고만장함은 하늘까지 뚫을 기세였다.
세상이 전부 자신 밑으로 보이고 평범한 인간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규율이 그들을 붙잡지 않고 있었다면 세상으로 나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대적할 상대가 없기에 그 우쭐함은 말로 가타부타 떠들기도 귀찮을 정도다.
그들은 평범한 네크로맨서 따위를 쉽게 베어버리는 난쟁이를 보고 콧방귀를 끼었다. 네크로맨서는 사기 때문에 다크시럼 포션을 먹으면 즉사한다.
네크로맨서는 평범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을 윗선의 명령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각성자 기사로서 배알이 뒤틀리는 일이다.
그들에게 네크로맨서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눈앞에 난쟁이에 걸린 상금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것이다.
누가 먼저 난쟁이의 멱을 따냐에 따라서 인생이 확 바뀔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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