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 속의 도굴꾼
신전 속의 도굴꾼
"어이! 꼬마 말 안 들려? 가방 내려놓으라고!"
"아이코. 네, 네, 가방요. 여기 있습니다."
소년은 자기 몸 보다 두 배나 큰 가방을 메고도 가뿐한 걸음걸이를 보였다. 심지어 가방은 빈 것이 아닌 많은 물건으로 꽉 차 있었다.
이 소년이 두 도굴꾼에게 고용된 첫 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쳇, 봉인만 아니라면 이까짓 놈들은···.'
'이들이 과연 봉인을 풀 수 있을까?'
'흥, 큰소리쳤으니 밥값 정도는 하겠지. 아니면 다른 놈을 또 모집해야지.'
소년은 윈드러너였고 그와 마음속으로 대화하는 이는 당연히 칼자하리였다.
이 신전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당연히 윈드러너였다. 갖은 노력에도 이곳에 설치된 봉인은 깰 수 없었다.
칼자하리는 윈드러너의 몸에 빙의된 상태라서 본연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고 윈드러너도 불사의 능력 외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었다.
특히 몸에 칼라하리를 품고 있으므로 신전을 직접 만지면 칼자하리의 영혼이 타격을 받고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며칠 연구 끝에 봉인은 칼자하리 같은 말라키에 소용이 있는 것이고 일반 평범한 사람은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었다.
아, 먼젓번 문두스의 신전을 쉽게 턴 것은 이미 광부들이 봉인을 부숴 놓았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진입할 수 있었다.
이곳 신전은 진입 난도가 매우 높아 전문적인 기술 없이는 어려웠다.
윈드러너는 원래 도굴꾼 출신인 만큼 이쪽 계열의 인간들이 얼마나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계산적인지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유적을 발견했는데 도움을 달라고 하면 모두 콧방귀를 낄 것이다.
도굴꾼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도시 하나를 선택해 일부러 소문을 퍼뜨렸다.
뭐, 말할 필요 없이 이쪽 세계에서 소문은 엄청나게 빨리 퍼진다.
당연히 다음 차례는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다.
오래된 신전이라면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한탕을 노린 수많은 도굴꾼이 신전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초입 단계에서 모두 나가떨어졌다. 거대한 폭포의 수압을 버티며 폭포 중간 지점까지 밧줄 하나에 의지에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높이라 추락하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폭포를 통해 내부로 진입한다 해도 넘어야 할 난관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 동굴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인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인지 분간이 모호하지만, 내부는 여러 개의 동굴이 얽히고설켜 있어 자칫 길을 잃어버리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몇몇 어설픈 떨거지들은 모두 고개를 젓고 포기했고 신전의 존재가 진짜인지조차 확인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수들이 있으면 당연히 고수들이 있기 마련이고 드디어 난관을 뚫고 신전을 발견한 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오는 길이 너무 난관이었던 탓에 이들은 보물 상자를 눈앞에 두고 어쩔수 없이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입을 통해 실제 신전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보물 사냥꾼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제 가는 길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됐고 심지어 지도까지 그려졌으니 신전까지 도착하는 길은 어렵지 않게 됐다.
문제는 그 누구도 신전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신전은 크기도 작고 아담했다.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니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지만 도굴꾼들은 이 작은 신전 안에 뜻하지 않는 물건이 있을 거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도가 완성된 후로 단단히 준비한 몇 몇 그룹의 도전이 이어졌는데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신전은 분명히 문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문은 절대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해머를 가지고 온 자가 온종일 문에 해머질해 댔으나 끄떡도 없었다.
문 말고는 다른 통로는 없다. 도굴꾼의 감각으로 신전 전체를 조사했지만, 오직 입구는 앞면의 문뿐이라는 것을 알고 문을 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블레이드워커는 도굴 세계에서 그 이름을 모를 자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도굴꾼 중 한 명이다.
그는 늘 혼자 활동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특이 각 지방 고위 귀족과 연줄이 닿아 있을 만큼 뒷배도 탄탄했다.
그가 발굴한 유물은 상당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귀족이 아니면 처리할 수 없을 정도의 장물이라 그의 주요 고객 대부분이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귀족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물에 취미를 가지기 시작하면 재산 날리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하지만 또 유물 자체가 고부가 가치를 가진 재화이기 때문에 꼭 망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문제는 가짜를 속이고 파는 행위인데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닌 이상 귀족을 상대로 가짜 유물을 거래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 블레이드워커는 수많은 귀족을 상대하면서 한 번도 의심당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이 방면에서는 타고난 자였다.
그런 그가 이 소문을 그냥 듣고 넘길 리가 없다.
정보를 모으는 동안 그는 이번 모험이 혼자서는 절대 불가함을 느꼈다. 많은 장비도 그렇고 식량문제도 큰 난관이었다.
짐꾼을 고용한다 해도 가는 길이 워낙 험난해 견딜 수 있는 짐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비슷한 능력을 지닌 도굴꾼이 필요했다.
그만큼 자신의 이득이 줄어듦은 어쩔수 없는 상황임을 고려한다 해도 이 같은 조치는 어쩔수 없었다.
그래서 영입한 인물이 블러드포지였다.
마침 같은 생각을 가진 블러드포지와 블레이드워커의 만남은 당연한지도 몰랐다.
둘은 사전 조사를 철저히 했다. 먼저 둘은 신전을 한 번 방문해 보았고 문을 열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발생했다. 문을 열기 위한 방법에 따른 장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둘이 나눠서 움직인다고 해도 문제는 또 식량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가야 하기에 기름도 만만치 않게 필요했다.
그럴 즈음 그들 눈에서 뛴 것이 소년 장사 윈드러너였다. 둘은 우연히 길을 가다 거대한 장작더미를 메고 가는 윈드러너를 발견했다.
실로 성인 남자 둘이 메어도 멜 수 없을 만큼의 무게를 당당히 메고 그것도 앞으로 숙인 자세도 아닌 어깨까지 펴고 걷는 것을 보고 단번에 자신들이 원하는 짐꾼이라고 판단했다.
영입하고 알아보니 심지어 몇몇 도굴꾼을 도운 경력까지 갖춘 녀석이고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완력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윈드러너를 파티에 넣은 두 사람은 최종적으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신전 탐사에 나섰다.
조금 서두른 기색도 없진 않았다. 그들이 준비하는 사이에도 유적에 도전하는 도굴꾼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굴꾼 세계에서는 먼저 손에 넣은 자가 곧 임자다. 가로채거나 강제로 뺏는 행위를 했다가는 도굴꾼 세계에서 추방되고 어느 도시이건 현상금 포스터가 붙게 된다.
주신 제국은 도굴꾼보다 현상금 사냥꾼이 더 많은 세상이다 보니 포스터가 붙는 순간 체포 또는 죽음 둘 중 하나는 평생 고려하고 살아야 한다.
이 과정에 살인이라도 벌어지면 인생은 한 방에 끝장나버린다. 실력 좋은 도굴꾼일수록 그런 규칙에 집착하게 된다.
재미, 돈 둘 다 잡을 수 있는 이런 모험을 쉽게 포기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어이. 워커. 단번에 이걸로 승부 해 볼래?"
"통각···. 저번 녀석들 몇 개 썼다고 했지? 세 개를 동시에 터트렸다고 듣긴 했어. 하지만 더 쓰면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세 개라. 아직 시간은 충분해. 우리 뒤로 달라붙은 꼬리도 없고 하니 조금 더 조사해 보도록 하지."
"좋아. 여차하면! 해서 이것도 준비해 왔거든."
포지는 주머니에서 검은 달걀 같은 것을 꺼내 보였다.
"야, 그건 최후 수단으로 남겨둬. 그걸 쓰면 나중에 뒷말 나올 수 있어. 금지된 물품은 쓰지 않는 것이 우리 같은 놈들에겐 큰 이득이라고. 그리고 그걸 여기서 쓰면 세 명 모두 묘비 없는 무덤 속에 생매장 될 거야."
포지가 내민 것은 황혼의 망각으로 상인이나 개인은 물론 귀족들도 함부로 수출입에 관여할 수 없는, 국가 단위 거래만 가능한 제품이다.
통각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며 제작한 마법사의 레벨에 따라 그 위력이 다 다르므로 마나 5레벨 이상의 마법사가 만든 황혼의 망각은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한다.
마법사의 국가 테일리아드 수출 품목 중 최상위에 있으며 마나 7레벨 이상 등급은 오직 왕가를 상대로만 거래할 수 있다.
워커와 포지는 미리 계획했던 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문을 공략했다.
윈드러너는 신전에서 떨어져 물끄러미 그 장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들이 해 낼수 있을까?'
'이 세상은 멍청이들 천지야. 내가 이따위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노력했다는 것이 억울한 생각이 들어.'
'무슨 소리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많다고 넌 마교 교주 앞에서 꼼짝 못 했잖아?'
'야, 한둘 정도는 그래도 인간다운 녀석이 있어야지. 죄다 멍청이들만 있으면 이따위 종족은 차라리 멸족하는 게 낫지. 그리고 그 녀석은 인간이 아니라고.'
'인간이 아니면 괴물이라도 되는 거니?'
'여하튼 두고 보라고 내가 그 마교 교주인가 뭔가 하는 놈의 참모습을 드러내 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흩어진 내 몸을 다 모아야 해.'
'다 모아서 뭘 할지 왜 말을 안 해줘? 널 돕는 게 맞는 건지 가끔 의구심이 들어. 마교에서 말도 안 하고 도망치듯 나왔는데 나중에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해.'
'그때는 그때 가서 해결하자고. 정 그럼 내 핑계를 대면 되지. 칼자하리가 내 몸을 이용해 움직이는 바람에 어쩔수 없었다고 이것만큼 좋은 핑곗거리가 또 있어? 쓸데없는 걱정을 만들지 않는 것이 몸에 이로워.'
'근데 저들이 풀 봉인이라면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흥! 라마단 녀석 말라키에 반응하는 봉인을 만들었으니까. 원래는 모든 생명체에게 반응하게 되어 있는데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졌으면 봉인이 이 시대의 인간을 인간이라고 느끼지 않고 발동하지 않는 거야.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군.'
'그럼 앞으로 봉인된 신전을 찾을 때마다 이 짓을 반복해야 해?'
'쓸만한 재주를 가진 놈을 섭외해야지.'
'그래서 재들 둘 지켜보자고?'
'한번 풀어 보면 다음번은 더 쉬워. 운 좋게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를 찾았으니 나머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야.'
'가장 힘든 것? 저번에 찾은 것이 심장이었지? 두 번째는?'
'당연히 머리통이지. 제길 아직 영혼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머리통이 있는 위치는 찾지 못하고 있어. 나머지 부위를 다 모아야 할 거야.'
'쳇,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이길 기도할 수밖에 없군.'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나와 같은 배를 탄 거라고 같이 파도를 헤쳐 나가거나 서로 싸우다 파도에 삼켜져 가라 앉거나지.'
'라마단이라는 사람은 왜 그렇게 사람을 찢어서 따로 봉인한 거지? 그냥 불에 태워 버리면 간단할 텐데?'
'후후, 그건 그에게도 큰 이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둘의 싸움이 아니라 마족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 먼저였으니. 아무래도 내 힘이 계속 필요했던 거지.'
"야, 포지 잠깐 이리로 와 봐."
포지는 워커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먼젓번 녀석들이 굴을 파려고 시도했던 모양인데? 석질이 강해서 바닥 아래서 접근하더라도 쉽지 않을걸. 그리고 우리가 가진 식량으로 굴을 팔 만큼 버티는 것은 힘들어."
"봐. 구조상 문은 뭔가 단단한 것에 의해 안쪽에서 잠겨 있어. 여기서 좀 만 왼쪽으로 치우쳐 파면 얼마 안 가 문의 왼쪽 기둥 아래쯤에 이르게 돼. 여기서 황혼을 쓰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문의 균형이 무너질걸."
"음, 듣고 보니 그러네."
"그놈 드센트가 해머로 문을 수십 번 내리쳤는데도 금하나 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어림없고 만약 외부에서 황혼을 터뜨리다가는 자칫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러니 폭발의 힘을 문의 왼쪽 기둥에 집중시키자는 거지. 굴 파고 입구를 바위 같은 걸로 막으면 폭발력은 바로 위 기둥으로 치고 올라갈 테니까."
"폭발에 견딜 바윗덩이를 이곳까지 옮겨 오는···."
말을 하다 말고 둘은 동시에 윈드러너를 쳐다봤다.
"저놈 괴력에 우리 둘이 힘을 보태면 가능할지도 몰라."
"말 나온 김에 해 보자."
"어이. 꼬마. 삽 몇 개 가지고 일루 뛰어와."
윈드러너는 삽을 챙기고 신전 근처로 다가갔다.
"봐, 봐. 꼬마야 이렇게 해서 이쪽 아래까지 굴을 팔 거야. 무슨 알인지 이해 했지?"
"아, 네. 이해했어요."
"뭐해? 그럼 시작하자고! 네 힘은 이럴 때 쓰는 게 맞는 거지. 짐 따위 들려고 널 데려온 것이 아니라고. 이제 밥값을 할 차례야."
윈드러너가 삽을 휘두르자 삽시간에 구덩이가 넓어졌다.
윈드러너의 활약에 고무되어 두 사람은 응원까지 해댔다.
"이야. 이거 완전 도굴꾼 계의 신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 너 같은 놈이 왜 짐꾼이나··· 어이, 꼬마야 이제 날 따라다니며 기술 배워 보지 않을래? 아무리 생각해도 넌 이런 일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보여. 그 힘을 짐을 드는 것에 사용하는 것은 정말 낭비라고 생각해."
"대충 다 뚫은 것 같은데요? 위쪽으로 석판 바닥이 나왔어요."
"좋았어. 이제 나와. 입구를 막을 적당한 크기의 바윗덩이를 찾아보자고."
윈드러너는 재빨리 신전에서 물러났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칼자하리의 비명이 계속 울렸기 때문이다.
'넌 참을성을 기를 필요가 있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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