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먼저 움직일 거냐고?
누가 먼저 움직일 거냐고?
"그래?"
"네, 정보를 듣고 확인차 제가 직접 가 봤습니다. 문두스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교묘하게 위장해 놓았으나 과거의 유산 사이에서 현재 인간의 손길이 묻은 조형물은 쉽게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이놈들 아주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설쳐 대는구나."
"명령만 내려 주시면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테츠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이고 있는 자는 테드버드의 여섯 번째 제자 시온이다.
제자 중에서 경공을 가장 좋아하고 경공의 숙달치도 일곱 제자 중 가장 높아 테츠가 직접 가르치며 공을 들이고 있는 제자다.
마교 내 테츠의 신분이 매우 증가하는 바람에 그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다 바뀌었다. 그것은 테드버드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마교 교주를 대면할 때는 왕을 대하듯이 하라는 거였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지금 마교 교주 테츠의 공식적인 신분은 대공이다. 즉 솔라리스 국왕 윌리엄 대공과 같은 서열이라는 것이다.
마교의 위세를 봤을 때 테츠가 왕이라 해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그것은 성황 잉그람이 마교의 활동 즉 테츠의 활동 범위를 넓혀 주려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마교를 일개 용병 집단이라 칭하지 않는다.
이젠 한 국가의 권력과 경제와 심지어 가장 막강한 군대를 가진 집단으로 인식했다.
윌리엄 대공이 침묵의 숲을 내어준 것도 그런 마교를 아칸 바로 곁에 두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다는 사실도 이젠 모두가 다 아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엘스칼라 유적 때문에 불안해하는 아칸의 귀족과 시민들에 있어서 침묵의 숲 레이븐크로프트 리전의 존재는 가장 확실한 명약이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마교가 그들을 도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리고 리전이 도시화 되어 가면서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아칸의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노동력을 제공했고 이는 아칸 경제 활성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조용했던 아칸의 시장 거리는 새벽까지 불을 밝히고 취객을 맞이했다. 아칸의 그 사건 이후 처음으로 아칸에서 춤과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다난했던 아픔을 몸으로 겪었던 아칸이던가? 왕자의 난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크의 난으로 이어졌고 다시 마족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 아칸의 시민을 도살했다. 겨우 마족을 몰아내고 나니 지옥의 겁화가 아칸 전체를 휘감아 올렸다. 아칸 영혼 수확 사건은 솔라리스 왕국 몰락의 전조로까지 인식됐다.
그러나 아칸은 보란 듯이 되살아났다. 제이미 백작의 고군분투, 윌리엄 대공의 복귀 그리고 마교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 아칸은 솔라리스 수도로서 그 역할을 재기했고 건재함을 다시 알렸다.
신성불가침 조약의 재발동으로 성군의 간섭을 벗어난 이때야 말로 자국의 힘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윌리엄 대공이 내건 목표는 솔라리스 재건이다.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롱홀드 수복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다.
신성불가침 조약을 재발동한 것은 케이사르다. 그 또한 성군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함인데 그 목적은 솔라리스의 찬탈이다.
솔라리스를 손에 넣고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황제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했고 신성불가침 조약의 재발동이 최대의 난관이었다.
조약의 발동에는 팬텀 가드너 가문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걸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베레트 후작이다.
심지어 베레트 후작은 이전 황제 성왕 잉그람으로부터 황제의 직위를 일임받았다.
이것은 신성불가침 조약이 승인된 상태여서 행한 것이라 곧 실제 황제의 능력을 갖춘 이는 베레트 후작이 되는 것이다.
케이사르는 솔라리스를 삼키기 위해 수도 아칸을 몰락시켰지만, 마교에 의해 아칸이 다시 살아났고 이번에는 제2 도시인 문두스를 노렸으나 이 또한 마교에 의해 계획 자체가 박살이 나 버렸다.
문두스는 이점이 정말 많은 도시였다. 동쪽의 거대한 산맥 덕분에 아칸의 직접 적인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였고 최대 상업 도시인 만큼 경제력도 풍부했다.
하지만 마교가 그 둘을 다 가져가는 바람에 케이사르의 계획은 일소에 사멸되고 말았다.
그가 또 어떤 흉계를 계획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테츠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가 물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고 있다. 배고픈 물고기는 먹이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을 테고 결국 미끼를 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다급한 것이 케이사르다. 보유 병력도 무시 못 할 정도로 많다. 하지만 마교의 오비디언스 샤우트가 두려워 군대를 동원해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한 상태에서 아칸을 공략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대신 시몰레이크 후작을 조종하여 팬텀 가드너가를 축출하려 했으나 제이미의 활약으로 이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오비디언스 샤우트는 케이사르 발목을 잡은 최악의 족쇄였다.
그래서 기간테스를 손에 넣으려 했으나 그 또한 난데없이 등장한 마교의 제자 모그룩에 강탈당해 버렸다.
케이사르에는 마교가 눈엣가시가 아니라 이젠 숨통을 제대로 조여 오는 교수대의 목줄과 같았다.
테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온."
"네, 교주님."
"시간 다 되질 않느냐? 가서 제자들 수련장으로 불러 모아라."
"알겠습니다."
시온이 나간 뒤 테드버드가 들어왔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5군단과 세일럼의 전사 2만을 한꺼번에 잡을 계획으로 가장 효율적이 방법입니다. 유적을 이용하면 가장 적은 피해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놈은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샤우트 때문에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지. 그렇다고 사령으로 아칸을 휘어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 뒤에 숨겨 놓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
"오비디언스 샤우트에 걸리지는 않는 거대한 힘 말이군요."
"그래, 기간테스 같은 무적의 힘을 가진 존재가 설쳐 대면 아군은 막대한 피해를 볼 거다."
"그 무적의 존재는 저희 손에 있지 않습니까?"
"그걸 상대도 알고 있다는 게 문제지. 그럴수록 놈들은 더 강한 존재를 손에 넣으려 할 거야. 이미 판은 너무 커버렸어. 그네들도 되돌리기에는 이제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든 운명에 맡기고 움직여 보려 할 거야. 내가 걸리는 것은 하나다."
"그 이브리엄 말입니까?"
"그렇다. 그는 완벽한 신체를 가지질 못했어. 하지만 그 상태로도 너희 장로급은 충분히 상대할 거다. 그놈이 한 놈뿐이라면 내가 직접 멱을 따버리면 되겠지만 한 명이 아닐 경우는 문제가 커지겠지. 더욱이 베레트를 잡지 못하는 이상 솔라리스에서 신성불가침 조약을 해제할 수 없다는 것도 풀어야 할 숙제다."
"그럼 사프란의 성에서 추적하지 않은 것은 함정이라고 보셨기 때문인 겁니까?"
"당연하질 않으냐? 베레트가 도망갔으니 대비를 철저히 하겠지."
"음, 저라면 그 당시 바로 추적했을 겁니다."
"놈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만약 혹시라도 이동진에 문제가 생기면 난 영원히 다른 차원에 갇혀 버리게 된다. 놈들이 나를 포획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뿐이야. 이미 그런 계획을 만들어 놓고 베레트 후작을 이용해 나를 꾀어내려는 계획일 수도 있어. 그래서 모그룩이 나 대신 중요한 일을 하는 거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케이사르 녀석의 힘 분산이다. 내가 언제 사프란의 성에서 이동해 올지 몰라 조마조마하겠지. 그래서 엘스칼라 유적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무림맹의 기틀을 완벽히 세울 수 있었던 거다. 이제 저쪽에서 더는 못 기다리고 움직이려고 하는 것 같더구나."
"네, 영혼 수학 한 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정확히 다섯 개의 마법 구성 요소가 있어야 하니 유적의 지도를 근거로 다른 구조물을 찾는 중입니다."
"발견은 해 놓되 절대 건드리지 말도록. 놈들이 완벽히 고개를 내밀었을 때 잡아야지 어설프게 움직이면 또다시 숨어 버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테드버드가 인사하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테츠가 말했다.
"어이 무림 맹주."
"네? 무슨 다른 명령이라도?"
"아냐, 아냐, 그냥 한 번 불러 보고 싶었어. 허허. 무림 맹주라···. 거 오랜만에 입에 담아 보는군. 허허."
***
제이미는 시몰레이크 후작의 성에서 나와 아이언 캐슬로 가는 중이었다. 대로를 지날 때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그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일이 답했다.
참 인생이란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 새삼 피부에 와 닿았다.
시골 출신 별 볼 일 없는 청년이 멋모르고 수도 아칸에 와서 한 나라의 부마가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자기 부모는 오크에 처참히 살해되었기에 지금 자신의 자식이 어떻게 됐는지 모를 것이다.
만약 살아계셨다면 지금쯤 호화로운 저택에 머물려 인생을 즐기고 계실 텐데 말이다.
"무슨 일이냐?"
아이언 캐슬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바삐 움직이는 기사들을 보며 제이미가 일갈했다.
"사령의 급습이라고 합니다."
"그래?"
아이언 캐슬은 단단한 성벽으로 방어진을 구성하고 있다. 그동안 앞서 나간 일선 부대가 성벽을 또 하나 더 지어 최종 두 개의 성벽 방어진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더욱이 최정예 1군단은 이제 윌리엄 대공이 직접 지휘하고 2군단 호오란 백작이 뒤를 받치는 형태며 3군단 얀센 백작이 좌측을 4군단 이드릭 장군이 우측을 맡고 있는데 원래 4군단장이었던 필리프 백작은 시몰레이크 후작 반란 사건 때 주모자로 지명되어 처형당했다.
이후 4군단장은 기사단원의 추대와 제이미 백작의 지명으로 이드릭 워스톤이 장군직을 계승했다. 이드릭은 제이미를 도와 내성을 탈환한 주요 맴버 중의 한 명이었다.
5군단장은 사실 공석이지만 실제는 제이미가 맡고 있다. 윌리엄 대공이 없을 시는 제이미가 총사령관으로서 5군단을 이끌었고 지금과 같이 윌리엄 대공이 총사령으로 복귀했을 시는 5군단장이 된다.
노르딕 사령관은 부사령관이 되어 윌리엄 대공을 보좌했다. 그는 시몰레이크 후작 사건 때 주모자 중 한 명이었으나 워낙 충성심이 깊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판단해 선처받고 1군단을 지휘하는 중이다.
제이미의 5군단이 아칸의 치한과 외곽 경비를 담당했고 나머지 4개의 군단은 모두 엘스칼라 유적 내부에서 대기 중이다. 이제 곧 세일럼이 이끄는 전사들 2만이 합류하면 본격적으로 엘스칼라 유적을 토벌할 계획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서둘러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내부는 고함과 함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적은 마치 하늘이 막힌 거대한 동굴과 같아서 소리의 울림이 굉장히 심했다.
작은 전투라도 소리가 동시에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가 되돌아오기 때문에 중첩되어 훨씬 소란스럽게 들려졌다.
제이미는 두 번째 성문을 통과해 천마비행으로 단숨에 첫 번째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로 뛰어올랐다.
성벽 위에는 노르딕과 윌리엄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성벽 아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습격해 온 것은 헬하운드 무리였다.
오군단 기사들 사이에서 시체 개라고 명칭이 붙은 헬하운드 무리는 기사단의 방어벽을 뚫기 위해 살벌하게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근본 죽음의 공포심도 없고 삶의 집착도 없는 놈이다. 오로지 공격하는 것을 본능으로 알고 있는 지옥의 사냥개다. 이놈을 멈추는 방법은 완벽히 죽이는 것뿐이다.
목이 잘려도 잘린 대가리는 한동안 죽지 않고 쉬지 않고 주둥이를 움직인다. 잘렸다고 방심하고 다른 놈을 상대하다 근처에 발을 디디면 여지없이 물린다.
무는 힘도 대단해 평범한 사람이라면 발목이 그대로 잘릴 정도였다. 각성자이기에 그나마 버티는 수준이지만 치명상을 입는 것은 똑같다.
그래서 경험 있는 노련한 자들은 발목에 강철 각반을 만들어 둘렀다. 각성자는 신체적 조건이 워낙 뛰어나니 무거운 강철도 만든 각반을 착용하더라도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발밑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좀 더 집중력을 발휘해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가끔 있는 일이라 크게 놀랄 상황은 아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즉 머릿수가 생각 외로 많다는 것이다.
헬하운드는 닥치고 공격하는 몬스터고 틈이 있으면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상당히 귀찮은 놈들이다.
이런 헬하운드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방패병이 최고다. 하지만 방패병이 제구실하기 위해서는 후미에서 공격하는 창수나 검수의 재능이 매우 중요했다.
창수의 경우 정확하게 헬하운드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어야 하며 빠르게 다음 대상으로 옮겨 가야 한다.
그다음 검수는 치명상을 입은 헬하운드의 숨통을 깔끔하게 끊어 놔야 한다. 이 두 명이 앞선 방패병을 보호하면서 적을 척살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 실수하게 되면 한 마리의 적이 두 마리가 되고 두 마리는 다시 세 마리로 늘어나니 방패병의 압박이 늘어나게 되고 결국 방패병이 뒤로 밀려 틈이 생기면 그 사이로 미친 듯이 밀고 들어온다.
이 악랄한 놈들은 한번 물면 모가지가 잘려도 절대 놓지 않는다.
"뚫렸다."
"진형을 흩트리지 마라."
"물러서는 놈은 극형에 처한다."
각각의 기사단장이 분투를 종용했다.
제이미는 단신으로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허리춤에서 마르테스를 뽑아냈다.
-촤라랑
검집에서 검이 빠지는 소리에 전신으로 소름이 확 쓸고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전투의 흥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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