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쥐
여성의 약점은 얼굴이라고 했던가?
그것도 끝장나게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더 하겠지?
세일럼은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쥐가 뱉어낸 침은 그냥 침이 아니었다. 약간 초록색을 띤 이 액체는 인간의 피부를 녹이고 흰 연기를 뿜게 할 정도였다. 그것도 각성자를 말이다.
"물러나!"
실버팽은 천마비행으로 쭉 미끄러져 들어가며 세일럼과 쥐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눈앞의 쥐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간파했다.
'이놈 마족 이상의 능력을 갖췄다.'
실버팽의 판단은 정확했다.
녀석은 마족 이상의 민첩성을 가졌으며 몸의 털과 침까지 온몸이 무기였다.
송곳 같은 무기를 든 근접전의 무서움, 털을 가시처럼 만들어 쏘는 원거리 공격, 침의 강력한 독. 세 가지 모두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버팽의 둠스브링거가 묘하게 휘어지며 쥐를 압박했다. 녀석은 왼쪽 어깨에 상당한 피해를 본 모양이다.
실버팽의 눈빛이 빛났다. 보통 마족의 신체는 치유 능력이 대단해서 상처가 나면 먼저 지혈부터 시작해서 상처도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문다.
하지만 쥐의 어깨에 난 상처에는 아직도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녀석은 평범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체는 별 볼 일 없다는 것이다. 중요 부위에 단단한 쇠 갑주를 두른 것이 이제 이해가 됐다.
-쉬이이이이잉
쥐는 실버팽이 날린 검을 향해 쇠꼬챙이를 내밀어 방어했으나 그 순간 기이할 정도로도 괴이하게 검이 휘더니 단번에 가슴의 쇠 갑주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역시 잉겔리움으로 만든 검은 평범한 검 따위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예리함을 담고 있었다.
쥐는 당황했다. 그만큼 실버팽이 휘두르는 검의 위력에 놀랐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있는 방향에서 검이 날아오는 것이 아닌 이건 도대체 종잡을 수 없이 휘어져 들어오니 맞부딪치기도 힘들었다.
-사각
검이 목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단번에 붉은 피가 뿜어졌다.
쥐는 찍소리와 함께 뒷걸음질 쳤다. 놈도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조금 전 상대했던 세일럼은 검이 채찍처럼 움직이긴 해도 분명히 쇄도해 들어오는 각도와 방향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버팽의 검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도대체 어디서 날아오는지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유성탈혼검법은 거의 완숙의 경지에 올라가 있었다. 장로들이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는 검법이며 검을 좋아하는 테드버드조차 교류전에서도 그녀의 검만큼은 배울 수 없었다.
그건 그녀의 특이할 정도로 유연한 신체가 아니라면 절대 유성탈혼검의 위력을 제대로 낼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리가 공처럼 둥글게 말린 상태에서 갑자기 튕기듯이 펴지며 벼락같이 치고 들어오니 민첩에서 그렇게 빠른 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찌찍!"
실버팽의 둠스브링거는 쥐의 오른쪽 가슴을 뚫고 등 뒤로 삐져나왔다. 쥐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픽! 픽! 픽!
놈은 그 상태에서 머리를 숙이고 목덜미의 털을 날렸다.
실버팽은 양다리를 일자로 쫙 찢으며 주저앉아 공격을 피해냈다.
순간 쥐는 재빨리 뒤로 빠지면 둠스브링거를 몸에서 뽑아냈다.
그리곤 뒤쪽 무리 속으로 뛰어들더니 미친 듯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쳇, 조금만 아래로 검이 들어갔으면 심장을 쪼갰을 텐데. 앗!"
뒤에서 들리는 세일럼의 비명을 확인하고 더는 놈은 쫓지 못하고 세일럼에 달려갔다.
그녀는 급히 품에서 힐링 포션을 꺼냈다.
세일럼은 얼굴을 감싸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손을 떼봐! 포션을 부어 줄 테니. 손 좀 떼봐."
세일럼은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공주 신분에 걸맞게 살다 보니 이런 환경에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정신 무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윽!"
세일럼의 상처를 확인한 실버팽은 신음을 흘렸다. 침을 맞은 부위의 피부가 완전히 녹았고 심지어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녀의 왼쪽 눈에도 침이 튀었는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실버팽은 급히 힐링 포션을 상처 위에 들어부었다.
"으악."
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내지른 비명에 헬하운드가 반응하고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이미! 후퇴할 테니 길을 열어줘."
실버팽의 외침을 들었다. 제이미는 막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자이언트 스켈레톤의 목뼈를 단칼에 절단했으며 떨어지는 머리통을 백로마현의 초식으로 뒤돌려 찼다.
내공이 가득 실린 발차기를 맞은 자이언트 스켈레톤의 머리통은 정확히 실버팽을 향해 달려드는 헬하운드 무리 위로 무자비하게 떨어져 내렸다.
"좋았어."
성벽 위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노르딕이 말했다.
"대공 가끔 느끼지만, 공주가 제대로 된 인물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 어디서 굴러먹던 시답잖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용 새끼였어."
"제이미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팬텀 가드너 가문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노르딕은 순간 실언했다는 것을 느끼며 말을 끊었다.
자신도 진심이었던 아니었든 간에 반역죄를 진 몸이다. 물론 실제 그가 팬텀 가드너 가문을 추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때도 지금도 솔라리스 왕국을 향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그가 그때 시몰레이크 후작을 도운 것은 순전히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지 진짜 반역을 도모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가 윌리엄 대공 옆에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세일럼 공주가 상처를 입은 것 같습니다."
"그녀는 아직 경험이 상당히 부족해. 이번 일전이 그녀에게 좋은 공부가 되었으면 좋겠네. 작은 상처야 각성자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윌리엄 대공의 말과 달리 실버팽은 그녀의 상처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보통 각성자의 신체도 마족과 같아 상처 치유 능력이 월등하다. 더군다나 최상급 힐링 포션 한 병을 통째로 들어부었는데도 그녀의 상처는 조금도 낫지 않았다.
그리고 각성자의 고통 레벨도 평범한 사람에 비해 삼 분의 일 정도로 낮지만, 그녀는 지금 너무나 큰 고통에 떨고 있었다.
지휘는커녕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며 무엇보다 왼쪽 눈이 심각한 상태였다.
실버팽은 그녀와 무기를 들쳐 없고 재빨리 후퇴했다. 제이미가 1군 방패병과 함께 헬하운드를 효과적으로 막아 주었다.
"공주가 확실히 빠진 다음 밀어붙이도록 하세. 이미 승기는 우리가 잡은 것과 다름없네."
"네, 알겠습니다. 공주가 성문을 통과하면 3군과 4군의 보병대를 출병시키겠습니다."
실버팽은 세일럼 공주를 힐러에게 부탁하고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대공 공주와 싸웠던 놈을 보셨습니까?"
"사령이 아니었는가?"
"그게 쥐였습니다."
노르딕과 윌리엄 대공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쥐? 쥐라면 그 쥐?"
"인간형으로 보이며 뛸 때는 네발이지만 전투 시 두 다리로 인간처럼 싸웠으며 무기는 뾰족한 송곳에 갑옷을 두른 것을 보니 지능도 어느 정도 있어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공주가 뒤로 밀릴 만큼이었습니다. 솔직히 마족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지닌 것 같습니다."
"놈을 베었는가?"
"죄송합니다. 상처는 확실히 입혔습니다. 검으로 놈의 오른쪽 가슴을 관통시켰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도망쳤습니다."
노르딕이 인상을 찌푸린다.
"도망쳤다는 것은 전략적 후퇴인데? 그놈 사령은 아니지?"
"사령이 아닙니다. 분명 붉은 피를 흘렸습니다."
윌리엄 대공이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놈 한 마리뿐이었나? 다른 놈은 보지 못했고?"
"네, 궁중들 틈에 숨어 있다가 공주를 노리고 급습했습니다. 사령과 달리 지능적으로 움직이는 놈 같습니다."
"쥐라니. 거참 믿기 힘들군요."
노르딕의 말에 실버팽이 내려다보니 확실히 지하라 전장은 어둡고 특히 공주가 싸우던 곳은 오른쪽 방면 최상위라 자세히 보더라도 누구와 싸우는지 분별이 쉽지 않았다.
"마족보다 위 등급이라고?"
"제가 롱홀드에서 마족의 대군과 전투 경험이 있습니다. 장담하건대 마족보다 위 등급입니다. 각성자 한 명으로는 놈을 잡기 힘들 겁니다."
전장은 확실히 승기를 잡은 오군단이 스켈레톤과 헬하운드 조합의 사령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자이언트 스켈레톤은 철기마대와 제이미가 한 마리씩 거꾸러뜨리고 있고 개체수가 많지 않아서 기세가 뒤집힐 일은 거의 없었다.
윌리엄 대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계단 아래서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전령이 뛰어 올라왔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것으로 봐서 쉬지 않고 내달려 온 모양새였다.
"대공 급한 전갈입니다. 구두로 전하는 점 용서하십시오. 아칸 동쪽과 서쪽 성문 쪽에서 사령이 모습을 보였습니다. 5군단의 수비병과 대치 중이며 리전의 마교 용병이 동쪽과 서쪽으로 급파되었습니다."
윌리엄은 노르딕을 향해 외쳤다.
"노르딕 아군을 모두 불러들여라. 놈들의 진짜 목적은 우리다."
"네? 승기를···."
"이건 명령이다."
노르딕은 안색을 굳히며 붉은 깃발 다섯 개를 일시에 올리라 명하고 퇴각의 북도 최대한 크게 울리도록 명령했다.
치열한 전장에서, 그것도 승기를 다 잡아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광란의 전투에서 갑자기 울린 후퇴의 북소리를 들은 사람은 후미뿐이었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보병의 거대한 함성이 그것도 각성자가 내지른 함성이다 보니 북소리는 쉽게 묻혔고 눈앞의 적을 베느라 누구 하나 뒤를 돌아 성벽에 걸린 후퇴기를 보는 자가 없었다.
후미의 부대는 북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해하며 성벽 쪽을 바라봤다. 확실히 후퇴기도 걸렸다는 것을 확인한 후미 부대의 기사 단장은 그제야 고함을 내질렀다.
"후퇴한다. 후퇴하라."
갑작스러운 후퇴의 명령에 열정적으로 돌격하던 보병대가 움찔했다. 눈앞의 적은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사령이다.
약간의 틈만 나면 미친 듯이 돌진해 오는 놈들이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후퇴라니? 조금만 더 밀면 저 끝이 보이는데?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다. 후퇴는 하지만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차례대로 빠져나가야 했다.
철기마대는 자이언트 스켈레톤을 상대하느라 속도는 제일 빠르지만 이탈할 수 없었고 그 뒤를 받치는 방패병은 기마대를 보호하기 위해 헬하운드를 막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촉박한 상황에 전원 후퇴 명령을 내리다니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적에게 밀리는 상태라면 어쩔수 없다고 판단했겠지만,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후퇴라니?
진짜냐는 표정으로 기사들은 어리둥절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 바빴다.
-우르르르르릉
한 차례 진동이 일어났다.
지진과 같은 땅울림이다.
"어서! 후퇴시켜 병력을···."
윌리엄 대공이 성벽 가까이 바짝 다가가 고함을 내질렀다.
"부관! 성내 병사들에게 전투 준비 태세를 발동시켜. 궁수는 전원 발사 대기 상태로 들어간다."
노르딕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기사로 임명되면서부터 윌리엄 대공을 섬겼고 그가 가진 능력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용기사다. 인류의 존망을 건 대전투를 두 번이나 치러낸 솔직히 말해 솔라리스 역사 이래 최고의 성군이자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다.
그의 지도력을 단 한 번도 믿어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는 급히 부관 울드리히를 찾았다.
"울드리히! 부하들과 북을 직접 들고 나가 울려라. 너희 임무가 대단히 중요하다."
"즉시 움직이겠습니다."
울드리히는 돌격형 4두 마차에 큰 북을 싣고 전장 한가운데로 매섭게 내달렸다.
그는 북이 터져라 힘껏 내리쳤다.
-우르르르르릉
또 한 번 지반이 출렁거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유적은 아칸 지하 깊숙한 곳에 있었고 어떻게 이런 거대 도시가 땅속에 있는지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거론된 적이 없었던 곳이다.
-와르르르르
바닥이 내려앉는다. 그런데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진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우물과 같은 구멍이 나면서 내려앉았다.
마치 두더지 구멍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구멍 안에서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커다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거대 쥐였다. 바닥에 뚫린 굴속에서 거대 쥐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령은 부대를 밖으로 빼내기 위한 미끼였어. 나머지 인원은 대비하라. 놈들은 반드시 후방도 함께 노릴 것이다."
윌리엄 대공의 말은 정확했다. 성벽 내 바닥에도 구멍이 뚫리더니 거대 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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