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물결 (1)
반스딘이 쓰러져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건흥은 백악관에서 국무회의를 하고 있었다.
"선거 준비 상황 말씀드리겠습니다"
총리 홍대수는 건흥이 미리 지시했던 지방선거를 5년에 걸쳐 준비하고 전체 미국에 홍보했었다.
건흥은 장기적으로 입헌군주국과 대통령제를 섞은 정치체제를 운영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선거의 도입은 필수였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거 교육도 마무리되었고, 황제 직속 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수차례 예행 연습을 진행하였습니다"
"자네도 많이 늙었군"
"예?"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나?"
"아....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반스딘의 일이 있고 나서 건흥은 국무회의에 참여한 인원들을 훑어 봤다. 다른 어떤 인원들 보다 홍대수와 윌이엄이 눈에 띄었다.
그들도 반스딘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1세대 고위층이었다.
교육부나, 사법부, 과학부등은 모두 2세대 인물들이라 아직 한창의 나이였지만 홍대수는 79세, 윌이엄은 82세로 이미 은퇴했어야 하는 나이였다.
"선거도 중요하지만 자네들의 뒤를 이어 미국의 중추를 담당할 인원들을 선발하는 것도 필요하겠군"
"폐하... 저는 아직 괜찮습니다. 제국을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하겠습니다"
윌이엄이 건흥의 말에 대답했다.
"아니야 자네들은 나와 달리 세상의 법칙에 따라야 해서 백년을 넘기기 힘들다. 그리고 백세가 될 때까지 일만하다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노화라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적당한 인물을 추천하도록"
"예... 폐하..."
홍대수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그도 이제 은퇴를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몸 상태가 크게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주의력 집중력등 많은 지적 능력들이 크게 감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력이 크게 감퇴하고 있어 중요한 일들을 깜빡하거나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폐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구나...'
자신의 변화에 안타까워 하던 홍대수는 문득 건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처음 만난 그 순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한마디 한마디가 무서웠던 그 시절 건흥보다 요즘 많이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그것은 성격이었고 외모는 똑같았다.
"다시 선거 관련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선거가 치러 지는 지역은..."
선거는 미국령을 제외한 북미 본토에서만 이뤄졌다.
기존에 중앙에서 발령 내던 총독을 이제 주민들의 선거로 뽑기로 했고, 그것을 위해 행정 구역을 나눴다.
선거가 이뤄지는 가장 큰 단위는 '주'였다. 주는 미국 본토의 가장 큰 행정 단위였고 총독의 역할을 주지사가 대신하게 되었다.
북동쪽부터, 퀘벡주, 엽사주, 서울주, 함양주, 감주주, 무한주등 북미 전역을 나눈 48개의 주가 동시적으로 선거에 들어가 각각의 주지사를 선출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직 개척이 한참 진행 중인 북부와 서부는 이번 선거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백악관이 있는 황도는 특별행정구역으로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 지사가 맡아 다스리게 되었다.
'주'단위 아래는 시와 군이 있었는데 이 부분부터는 현대 한국의 행정단위와 동일했다.
"말씀드린 지역에 주지사 선거가 치뤄지는 동시에 하원의원 선거역시 진행됩니다. 이번에 선출할 하원의원의 숫자는 150여명으로 지역구는...."
주지사 선거와 함께 미국은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하원의원 선거까지 동시에 진행했다. 하원의원은 주단위에 3명 내외로 구성되었다.
상원의원은 추후에 세계 각지의 미국령에서 선출되어 미연방제국 의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아직 미국령이 선거를 할 정도의 수준에 올라오지 못했기에 상원의원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본국의 하원의원만 선출할 계획이었다.
북미 본토와 미국령 국가들은 자신들만의 하원의원을 가지고 그들이 만든 법률을 그 국가에 적용 시킬 예정이었고, 이후 만들어진 상원의원은 미연방제국 전체의 법률에 관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헌법은 오롯이 건흥의 영역으로 남겨질 것이었으며 헌법에 수정할 것이 있으면 상원의원에서 의견을 모아 황제에게 건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좋다. 주지사와 하원의원을 뽑는 것은 장기적으로 미국의 정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니 다들 긴장감을 가지고 관리할 수 있도록, 특히 부정선거가 이뤄지지 않도록 잘 감시해야 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폐하"
"각 당의 관리는 잘하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현재 등록된 정당 중에서 지지율이 높은 순서부터 말씀드리면..."
건흥은 미국의 현대적 정치 발전을 위해 국비를 지원하여 다양한 집단들이 정당을 설립하게 해 주었다.
지지율 순서대로 나열하면 조선계가 주축이 된 공화당, 유럽계가 주축이 된 민주당, 일본계과 중국계의 연합인 사회당이 있었다.
순위권 외에는 인디언들이 주축이 된 녹색당, 대학생과 학자들이 주축이 된 청년당, 공장 노동자와 근로자들이 주축이 된 노동당등 다양한 정당이 설립되어 각자의 후보를 주지사와 하원의원 선거에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선계 인원들이 주축이 된 공화당의 당원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최근 자유민이 된 일본계 인원들이 사회당에 대거 가입하면서 사회당의 규모도 커지고 있습니다."
"사회당이 일본계와 중국계의 연합정당인가?"
"그런 성격이 짙습니다. 지역적 특징보다 이념적인 동질성으로 뭉치게 해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 동질감으로 뭉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언어만 같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의 개념은 점차 흐려질 것이고 정당도 이념과 이해관계 중심으로 재편성 될 것이다"
아직 미국에 오기 전 자신의 조국과 부모님이 몸 담았던 국가에 의해 개인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을 막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건흥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급해 하지 않았다. 1700년대 중반 즈음, 세대가 4-5번 바뀌는 시기에는 분명 지금의 조선계, 일본계, 유럽계의 구분이 점차 흐려지고 미국인이라는 정체성 안에 들어올 것을 확신했다.
현재 미국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숫자가 많은 조선계였다.
그들은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유교이념 때문에 개인의 적극적 자유보다는 공적인 이익과 공동체의 안녕을 중시했다.
그랬기에 정당의 이름도 공화당으로 지었는데, 현대 사회의 공화당과 개념이 다른 부분은 시민 주권을 소극적으로 주장하고 절대적 황권을 중시했다.
공화당 소속 정치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어버이이자 절대자인 황제의 뜻을 잘 따르고 말씀을 해석하여 황제의 어진 마음이 제국 곳곳에 퍼져나가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조선계는 미국내에서 기득권이기도 했고, 원래 조선인들의 성향이 보수적이기도 해서 공화당은 미국 내 모든 정당들 중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원칙적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세력이 큰 것은 유럽계가 주축이 된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을 구성하는 핵심 계층은 개척촌 출신의 유럽인들과 그 후손, 그리고 건흥이 유럽에서 데려온 과학자와 기술자. 마지막으로 스페인 식민지에서 노예가 되었다가 자유민이 된 메스티소들이었다.
그들이 추구 하는 것은 자유였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권리 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했고 사유재산을 보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황제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인정했고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마음속으로 황제를 존경했다.
건국 초기부터 미국인이었던 개척촌 출신이나, 능력이 뛰어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주축이었기에 그들의 재산 수준도 상당했고 각 민족의 평균을 냈을 때 가장 재산이 많은 자들이 바로 유럽계 미국인이었다.
물론 부자들을 1등부터 줄 세운다면 조선계가 단연 높은 순위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지만, 개인으로 보면 전문직이 많은 유럽계 미국인들의 생활 수준이 가장 높았다.
그들도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이었기에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공화당 만큼은 아니었지만 정치 성향이 보수적인 편이었다.
그 다음으로 일본계와 중국계 미국인들이 주축인 사회당이 있었다.
사회당이 주장하는 권리는 평등이었다.
그들은 조선계 미국인이나 유럽계 미국인들에 비해 차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법에 의해 차별은 금지되어 있지만, 민간 기업에 취업하거나 공직에서 승진할 때 아무래도 조선계나 유럽계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주류 사회로 진입이 쉽지 않았던 그들은 대부분 공장이나 광산 또는 조선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근로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최근에는 상업에도 많이 진출하고 금융업도 시작하면서 그 세를 키워가고 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미국인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물론 그들 역시 감히 황제의 월등한 권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고 황제를 따르는 모든 국민들은 폐하의 발 아래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가치를 언급했다.
"아무쪼록 이번 선거는 각별히 신경 써야 해. 그리고 너무 조선계가 주요 자리를 독식해선 안돼 알고 있지?"
"예 폐하. 그래서 민주당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습니다."
홍대수는 조선인 출신이었지만 조선계가 자리를 독점하게 해선 안된다고 지시한 건흥의 명령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미국은 다민족 국가였고 그들이 하나로 융합되려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그것이 미국 사회에 반영된다고 믿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계만 미국을 다스리는 것은 다른 민족들이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
"사회당도 지원해"
"예 폐하."
"필요하면 정보부 도움도 요청하고"
"알겠습니다"
홍대수는 민주당을 적극 지원하여 공화당, 민주당 양당 체제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 사실 중국계와 일본계가 주축인 사회당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미국에서 오래 살았고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이 확실한 홍대수였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생각하면 일본인과 중국인이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의 지시인데 거절 하겠는가? 홍대수는 곧바로 고개 숙여 대답하고 마음속으로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
"사회당을 지원하는 것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들도 엄연한 미국인이야. 이제 숫자도 제법 많지. 그들 역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해."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이 자리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야. 이곳에는 조선계와 유럽계만이 참석해 미국의 미래를 의논하고 있지 그렇지 않나?"
국무회의에는 홍대수로 대표되는 조선계와 윌이엄으로 대표되는 유럽계 인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 그 어떤 중국계, 일본계 인원도 국무회의에 참석할 정도의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다양성은 발전의 원동력이야. 배타적인 사고방식은 결국 도태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건흥은 자신이 연구원으로 근무했던 현대 미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강대국이 되었고 또 어떤 정책으로 그 지위를 유지했는지 알고 있었다.
세상의 다양한 인재를 받아들이고 또 그들이 미국 안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했다.
인종이나 민족에 상관없이 능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국민 모두에게 심어줘야 했고, 나아가 미래에는 외국인에게도 능력이 있다면 미국으로 가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했다.
그러면 국가 내부적으로는 인재를 놓치지 않고, 외부적으로는 실력 있는 인재들을 빨아들일 수 있었다. 건흥도 그런 이유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과학자 중의 한명이었다.
"자 그럼 오늘도 다들 열심히 일하도록. 회의는 여기까지!"
"예 알겠습니다 폐하!"
선거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 회의는 마무리 되었다.
이제 두 달 남은 선거를 잘 치러내기 위해 모든 관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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