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질서 (6)
"총구 전방!"
"사수 위치로!"
"발사!"
-탕!탕탕! 탕탕탕!
아침부터 맹호사단 사격장에서 훈련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사격 훈련을 하는 자들의 복색이 미군 군복이 아닌 조선군의 군복이었다.
전체적으로 푸른색 계열의 옷에 겁은색 추가 장갑을 가볍게 걸친 그들은 미군의 지도 하에 뇌우 사용법을 열심히 익히고 있는 중이었다.
사격장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사격 통제실에 덕만과 이갑성, 그리고 조선에서 넘어온 병조판서 김석주, 이조판서 윤휴가 조선 병사들의 사격 훈련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러한 세상이 있다니!...'
병조판서 김석주는 한양의 훈련도감 군영 앞에 생겨난 게이트를 넘어 미국으로 왔다.
처음에 숙종이 훈련도감 전 병력을 이끌고 미국에 다녀오라고 지시 했을 때는 그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허나 대전에서 목이 떨어지는 김수향을 바로 앞에서 지켜봤기에 감히 숙종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게이트를 넘었다.
그곳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미군 총사령관 덕만이 있었고 신기하게도 그들과는 말이 통하여 어렵지 않게 훈련에 대한 계획을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저 뇌우라는 조총 말입니다. 사거리가 상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정도입니까?"
"최대 사거리는 600m 까지 갑니다. 물론 말 그대로 최대 사거리이기 때문에 그 정도 거리에서 맞으면 살상력은 거의 없습니다. 아! 600m는 600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600보 말씀이십니까!?.... 대단하군요..."
호기심이 많은 이조판서 윤휴는 뇌우의 연습사격을 지켜보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이에 맹호사단장 이갑성이 덕만을 대신해 열심히 설명해 줬다.
윤휴는 김석주를 보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함께 게이트를 넘었는데, 보좌는 말 그대로 명분일 뿐 그의 주 목적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호기심 해결이었다.
"저런 대단한 무기를 조선에 무상으로 제공해도 재정적 문제가 없습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군에서 총기나 탄약이 부족한 경우는 없었기에 아마도 넉넉하게 있으니 지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한 정 생산하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어갑니까?"
쏟아지는 윤휴의 질문에 이갑성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질문의 범위가 점점 이갑성이 대답하기 어려운 범위로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윤대감께서 궁금한 부분이 많으신가 봅니다"
질문 공세에 곤란해 하는 이갑성을 구해준 것은 홍대수였다.
홍대수는 조선에서 온 대표들에게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라는 건흥의 지시를 받고 훈련장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기도 했고, 오랜 세월 미국의 권력자로 살아왔던 그는 남다른 기품과 아우라가 느껴졌다.
이에 윤휴와 김석주는 딱 봐도 그가 높은 사람임을 느끼고 자세를 공손히 한 다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하....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라 들었는데... 그들에게 인사 받는 날이 올 줄이야'
홍대수도 그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조선에 있던 시절, 현감이었던 그의 지위를 생각하면 눈앞의 인물들은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이젠 아니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러 온 소국의 신하들이었고 자신은 도움을 베푸는 대국의 재상이었다.
"홍대수라 합니다. 제국의 총리를 역임하고 있지요"
"총리라고 하시면..."
"조선의 영의정 정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반갑습니다. 윤휴라 하옵니다"
"김석주라 하옵니다"
사실 총리는 영의정 보다 훨씬 복합적인 일을 하는 재상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절대왕권의 조선에는 2인자를 두는 시스템이 아니었기에 딱 매칭되는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홍대수는 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벼슬 중에 가장 높은 벼슬을 언급한 것이었다.
"훈련을 참관 해 보시니 어떠십니까?"
"귀국의 무기가 대단합니다"
"그렇지요? 저 무기들이 있으면 조선이 규슈를 장악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뇌우의 생산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조선과 제국이 경제 개념이 완전 달라서 정확하게 설명 드리기 어렵군요. 안 그래도 폐하께서 두 분이 원한다면 제국의 주요 거점을 모두 견학 시키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참에 총기 공장을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오호!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윤휴가 계속 생산 비용에 집착하는 것은 뇌우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와 기술이 얼마나 필요한지 간접적으로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홍대수가 아예 총기 만드는 곳을 데려가 준다고 하니 그는 반색하며 기뻐했다.
호기심이 많은 그에게 저런 뛰어난 물품의 공장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대단한 일이었고 윤휴는 김석주를 바라보며 제발 같이 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저도 함께 가지요"
김석주는 윤휴의 마음을 거절할 수 없었고, 그도 뇌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과정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 조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남인 세력의 핵심 중 하나인 윤휴의 의사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시지요. 두 분 말을 타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훈련장이 교외라 기차역까지는 말을 타고 이동하셔야 합니다. 기차역에 도착하면 편하게 기차로 가시지요"
"기차....는 무엇입니까? 마차 같은 것입니까?"
"으음... 가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윤휴는 말 타기에 자신이 있어, 굳이 속도가 느려지는 마차로 갈아타지 않고 쭉 말을 타고 갔으면 했다. 빨리 도착해서 더 많은 걸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차라는 것을 탄다고 했을 때 영 내키지 않았다. 그의 상식으로 판단했을 때 기차라는 것이 아마 마차와 비슷한 것으로 짐작되었기에 그랬다.
"훈련은 두 분이서 계속 진행해 주실 수 있으시지요?"
"물론입니다 총리님. 다음주엔 뇌격까지 훈련 시켜 두겠습니다"
"그렇게 빨리 가능합니까?"
"조선군도 조총 병과가 있고 천자총통을 운용하는 포병 병과가 있어서 아예 새로운 개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에 속도가 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홍대수는 덕만과 이갑성을 보며 말했고, 덕만은 여유로운 미소를 띄며 홍대수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이동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이동하자는 홍대수의 말에 윤휴는 신이나서 크게 대답했지만 병조판서 김석주는 조금 망설였다.
아무래도 놀러온 윤휴와 다르게 자신은 병사 훈련 최고 책임자로 왔는데 이 훈련장을 떠나도 될지 다시 고민이 되었다.
'만약 저들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 한들 나에게 방법이 있겠는가?'
김석주는 미군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봤다. 결국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저들의 무기 체계를 익혀 가는 것이 오히려 조선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석주는 그저 시간만 때우는 병조판서가 아니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행군수지'라는 병서를 만들어 숙종에게 올리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전술을 만드는데 열심히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들은 역시 배움의 기회라는 유혹에 취약했고, 김석주도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부하들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줄 시간 잠시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시지요"
김석주는 홍대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장들을 불러 모아 훈련에 성실히 임할 것과 절대 미군과 충돌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고 홍대수를 따라 나섰다.
* * *
"밥을 이렇게 푸짐하게 주니 여기가 천국인가 싶소"
훈련도감 좌별장 안혁손은 식판에 잔뜩 담아주는 제국의 배식에 감탄하며 말했다.
그는 도깨비가 사람을 끌고 갔던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문을 넘어와 맹호사단 훈련장 생활 일주일째인 지금은 여기가 너무 좋았다.
"그저 양만 많은 것이 아니라, 고기 반찬이 아주 잔뜩 나오니 참으로 대단한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요"
안혁손과 함께 앉아 있는 다른 군관들도 반찬을 칭찬하며 수저를 멈추지 않았다. 소금과 후추를 포함한 다양한 향신료들이 가미 된 음식의 맛도 일품이었기에 그들은 이 밥상이 조선으로 치면 임금님 밥상에 비할 정도일 것이라며 추켜세웠다.
"많이 드시오. 먹고 더 드시고 싶으면 더 먹어도 되니까"
안혁손과 짝을 이뤄 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강동구가 천천히 수저를 들면서 그에게 말했다.
"강선생, 정말로 이곳 병사들은 항상 이렇게 풍족하게 식사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선생이라니요 그냥 강군관이라 부르시지요"
"보아하니 우리 군관 계급보다 강선생의 계급이 높은 것 같아. 내 그리 부르기가 미안해서 그러오"
"그러면 강대위라 하시지요. 이곳에서 제 계급입니다"
"좋습니다 강대위. 정말 솔직하게 답변해주시오. 우리가 왔다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시 이렇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 이곳이라 다른 나라는 가보지 못했지만, 군에 처음 입대할 때부터 식사는 잘 나왔습니다. 물론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좌별장 안혁손과 대화를 나누는 강동구는 참으로 신기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조상님들의 고향인 조선에서 온 사람들과 정말로 말이 통했던 것이다.
물론 미국어와 조선어 사이에 어휘나 표기법이 다른 경우는 많았지만, 그래도 며칠 대화를 나눠가면서 맞춰가니 일주일이 지난 오늘은 서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오늘 돌격훈련을 하는 중에 느낀 것인데 말이오. 우리를 지도해주는 미군들의 전투능력이 범상치 않더이다."
"하하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오. 교관들의 신체 능력이나 움직임이 모두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맹수 같았소"
안혁손은 이곳에서 훈련 받으며 그들의 무기에도 놀랐지만, 그 무기를 운용하는 병사들의 전투능력에도 놀라고 있었다.
일단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들의 신체능력부터 시작해, 뛰어난 사격 명중률과 엄정한 군기까지 미군은 강군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군대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실전 경험이 많은 자들이니 그렇습니다."
"최근에 전쟁을 하였소?"
"최근 뿐만 아니라. 제가 군에 몸 담은 이래로 항상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병영에서 훈련을 하는 기간이 길어야 1년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이오?"
"제 경험으로는 인디언, 프랑스, 스페인등과 전쟁을 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쟁한 스페인과는 거의 2년 넘게 전쟁이 지속되었지요"
"이렇게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에 전쟁을 거는 자들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들이 전쟁을 건 적은 없습니다.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모두 황제 폐하의 명령이지요"
강동구의 말을 듣고 나서 안혁손은 마음속에 떠오른 물음이 하나 있었지만, 꾹 참았다. 이곳에 머무른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충만했기에 섣부른 물음은 피해야 했다.
'그 황제라는 자가 도깨비 인 것이지?'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안혁손은 마음속으로 질문했다. 조선에 소문이 쫙 퍼진 도깨비가 사실은 이런 강력한 나라의 황제였다는 것은 훈련도감 모든 병력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저녁 식사를 다 마치고 오늘 훈련이 끝났기에 안혁손은 병력들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는 모두 개인 침상이 준비되어 있었고 상태도 매우 깔끔하고 좋았다.
원래 좌별장 안혁손에게는 개인 1인실이 제공되었지만, 그는 극구 사양하고 병졸들과 함께 공용숙소에 머물렀다.
병졸들에게는 성가신 일이었지만, 안혁손은 타국에서 훈련 받는 지금 이 상황이 전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평시도 아니라 생각했기에 군기의 흐트러짐을 방지할 겸 결정한 일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나라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느냐?"
"맞습니다. 뛰어난 무기에 강한 군대에"
"듣기로는 병자호란때 끌려갔던 우리 선조들이 이 나라의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들었다. 지금 군에서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 출신이라 하더구나. 그리고 종종 보이는 색목인 병사들까지.... 참으로 놀라운 나라다."
"도깨비가 참으로 능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가 이 나라를 만든 것 아닙니까?"
"쉿! 이놈아 말조심해라!"
숙소로 돌아와 병사들과 대화를 나누던 안혁손은 느닷없이 도깨비를 언급하는 병졸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는 이곳의 황제다. 행여나 말 실수를 하여 경을 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죄송합니다 별장어른.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똑똑
경솔한 병졸의 말을 꾸짖는 그 순간 누군가가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이에 일행들 모두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시오?"
"추가 보급입니다"
"들어오시오"
다행이 문을 두드린 것은 보급담당 미군이었다. 그는 품에 한가득 과일을 가지고 와 숙소 한가운데 놓아 두었다.
"이...게 무엇이오?"
"추가 보급으로 나온 과일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럼"
미군은 과일만 두고 바로 빠져나갔는데 아직 그에게는 보급을 전달 해야 할 다른 숙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이거 귤 아닙니까?"
"귤이 뭐 이리 큰가?"
"이 길쭉하고 노랗게 생긴 건 뭐 이래?"
그들에게 배급된 과일은 오렌지와 바나나였다. 모두 조선에서는 경험해 본 적 없는 과일이었다.
조선에도 귤은 있었지만, 워낙 귀해 지체 높은 사람들 아니고 서야 먹을 기회가 잘없었다.
잠시간 오렌지와 바나나 먹는 방법을 몰라 씨름하던 병졸들은 얼마 뒤 껍질을 다 까고 그 과실을 입에 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놀라운 맛에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Commen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