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 (2)
유럽식 콘크리트로 제법 단단하게 만들어진 서울항 선착장에 갤리온급 선박이 줄지어 정박했다. 선박에는 각 지역에서 데려온 조선이 노예들이 쏟아져 나왔다.
"번호별 인솔자를 찾아가라!"
"분류 가! 번호 앞자리 2개가 15인 자들은 이쪽으로!"
김만배는 미국에 끌려 오기 전 거제도 옥포에서 배를 만들던 조선 장인 이었다. 그가 주로 만드는 것은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과 군용 판옥선이었다.
가-一七八八三
분류번호 가-17883. 현재 김만배 손에 들려있는 번호패였다. 항구 앞에는 번호별로 인솔자들이 잔뜩 나와 있었는데 그는 번호 앞자리 2개가 17인 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은 번호 앞자리 3개가 178인 조선 기술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배 만드는 일을 하던 자들이 모이는 곳이니 해당사항이 없는 자들은 재확인 담당자에게 가도록 하라!"
인솔 담당 치안부 관리가 크게 소리치며 안내했다. 김만배는 조선공이었으니 제대로 찾아온 것이었다.
"인원 점검이 있겠다. 호명 하면 크게 소리쳐 대답해라! 17801 조충현!"
"예!"
치안부 관리의 인원 점검이 있었다. 조선 기술자는 총83명이었다. 김만배는 마지막에 이름이 불린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몇몇 낯이 익은 자들도 있었다.
'옥포 조선소에 함께 있던 자들도 보이는 구나...'
도깨비 문이 열리고 이곳으로 끌려 올 때만 해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 끌려온 사람이 많다 보니 낯익은 자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별 문제 없이 잘 지내시고 있으실까....'
김만배의 어머니는 현재 함양에 있었다. 김만배도 처음엔 함양에 있었는데 인원 분류 도중 기술자로 분류되어 배를 타고 서울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갈 수 없어서 서울로 가는 것을 거부했지만 미군의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과연 그들의 말처럼 어머니를 모셔올 수 있을까?'
그를 배에 타게 한 것은 미군의 완력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찾는 그에게 치안부 관리는 기술자로 인정 받으면 가족과 함께 서울에 살 수 있게 배려해준다고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예 신분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전원 이동한다!"
인원점검이 끝나고 조선공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이 가는 곳은 서울항에서 멀지 않은 베니스 조선소였다. 이곳은 베네치아 출신 조선공들과 네덜란드, 잉글랜드 기술자들이 모여 만든 미국 최초의 조선소였다.
'내가 타고 온 대형 범선이구나!'
조선소에는 새롭게 건조되고 있는 갤리온급 선박들이 반쯤 완성된 모습으로 있었다. 김만배는 갤리온을 타고 대서양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이 대단한 범선에 여러번 감탄해 왔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 지고 있는 것 이었다.
인솔자는 그들을 거대한 건물 내부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대형 책상이 여러 개 놓여있었고 큰 종이가 있었는데 딱 봐도 배를 설계하는 장소였다.
"지금부터 검증을 시작하겠다! 검증을 통과하여 기술 인력으로 선정된 자들에게는 노예 신분임에도 개인 주택을 제공 받을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라!"
인솔자는 대형 책상 하나당 5명씩 배치하여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했다. 만배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상 앞에 섰는데 그곳에는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종이와 처음 보는 도구가 있었다.
"눈 앞에 필기구는 연필이라는 것이다! 붓 보다 훨씬 편하니 써보면 알 것이다. 첫번째 검증 과정은 설계이다! 자신이 조선에서 만들던 배를 직접 설계한 뒤, 이곳 장인에게 설명하면 된다"
"질문 있습니다"
"말하라"
"배는 아무 종류나 상관 없습니까?"
"자신이 설계할 수 있는 배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하나! 제한 시간이 있기에 하나를 잘 완성 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간은 어디서 확인 합니까?"
"앞에 보이는 시계... 아 참 자네들은 이걸 처음 보지?"
치안부 관리는 진자의 원리를 이용한 거대한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국은 하위언스의 개발로 벌써 진자 시계가 공급되고 있었다.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 이곳에서 만날 때! 끝난 다고 생각해라. 그럼 시작하라!"
관리는 12시 정각을 최대한 자신이 설명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한 다음 시작 신호를 내렸다. 곳곳에서 연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김만배도 연필을 들었다.
'판옥선을 설계하자....'
세운용 조운선과 군사용 판옥선을 둘 다 설계할 수 있는 그였는데 조운선보다 판옥선이 훨씬 컸고 건조도 복잡했다. 김만배는 시간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설계에 열중했다.
'세세한 내용까지 다 설계한다...'
네모진 통나무 15개를 이어 붙여 배 밑을 만들고, 양현에 판재 하나하나에 서양의 클링커 이음과 유사하게 턱을 따서 이를 짜맞춘 뒤 나무못을 박아 고정시켜 뱃전을 형성함을 설계로 표현했다.
'갑판은 2중 구조.. 전투와 동력의 분리...'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를 걸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다음, 상장 위에 이물과 양쪽 뱃전을 따라가면서 여장이 상장의 언방 위에 뱃집 멍에를 걸고 널빤지를 깔아 2층 갑판을 만드는 것을 세세하게 그리고 표시했다.
그리고 장교가 탑승할 수 있는 일종의 지휘소인 장대와 이물돛대, 고물돛대를 그렸다.
그 아래 갑판은 2중 구조로 되어 있음을 표현했고 판때기의 크기를 정확하게 기입했다. 이 2중 구조 덕분에 노를 젓는 요원인 격군(格軍)은 1층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전투요원들은 2층 갑판에서 방해 받지 않은 채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시간 종료!"
김만배가 정신없이 설계를 하고 있던 도중 시간이 종료되었다. 아직 다 못한 부분이 많았지만 서슬 퍼런 미군이 통제를 하고 있었기에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저들이 이곳의 조선공들인가 보군'
언제 들어왔는지 머리색이 다양한 색목인들이 시험장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베니스 조선소에 기술자로 일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지나가면서 참가자들의 도면을 살폈다. 아직 그들은 미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통역이 따라 붙어 있는 상태였다.
어느새 김만배의 자리에도 기술자들이 왔다. 그들은 김만배가 그린 판옥선 설계도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
"갑판이 2중 구조로 되어 있는 이유가 뭔가?"
기술자들이 먼저 말을 하고 난 뒤, 통역을 통해 질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통역해 주는 자들도 모두 색목인이었는데 조선말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이 배는 전투선입니다. 갑판 위의 상황과 상관없이 노 젓는 동력을 계속 공급하기 위해서 입니다"
"백병전이나 포격을 대비한 구조다?"
"그렇습니다"
김만배의 대답을 통역은 그대로 옮겨 전달했다. 그 이후에도 설계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고 그는 무리 없이 다 답변해 주었다.
답변을 들은 기술자들은 각자 가져온 종이에 점수를 기입했다. 궁금한 마음에 슬쩍 훔쳐 봤는데 모르는 글자라 뭐라 적혀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시험으로 이동한다!"
이후 진행된 시험은 실기였다. 목재를 상황에 맞게 가공하는 시험이었는데 김만배는 온 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열심히 시험에 임했다. 실기 시험은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모든 과정이 끝난 그들은 인솔자에 이끌려 조선소 식당으로 향했다.
'이건... 무슨 음식인가..? 국수인 듯 보이는데....'
조선소 식당의 오늘 메뉴는 미트볼 스파게티였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가축 농장에서 고기가 많이 공급되고 있었고, 서울 외곽에서 밀 농사도 많이 지어졌기에 가능한 메뉴였다.
'고기 덩어리가 아닌가!'
김만배는 미트볼을 한 입 베어 먹은 순간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 음식은 마치 조선의 떡갈비 같았는데 떡갈비는 고을에서 제일 부자의 잔치상에나 가끔 오르는 귀한 음식이었다.
만배도 평생에 딱 한번 떡갈비를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미트볼은 그 맛을 떠올리게 했다.
'분명 우리를 노예로 잡아오지 않았는가?'
항상 자신들 보고 노예들이다. 미국어를 익혀야 된다. 세뇌 시키듯 말해왔던 그들이기에 식사도 형편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실 이미 배 위에서 나왔던 옥수수 스프와 빵도 매우 맛있었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 땅은 정말 풍요로운 곳 인 것 같았다.
'어머니도 식사 잘 드시고 있으시겠지?'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또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계시는 함양에도 이런 맛있는 음식이 배급되었으면 했다.
"식사 시간 종료다! 여기서 대기하다 호명하는 자들은 따라와라!"
식사 시간 이후 면담이 시작되었다. 면담은 베니스 조선소 기술자들이 평가한 점수를 토대로 앞으로 거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면담은 앞선 번호부터 시작되었기에 김만배는 한참을 대기해야 했다. 먼저 면담을 하러 간 자들은 식당으로 다시 오지 않고 밖으로 나갔기에 그는 대충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들을 수도 없었다.
"83번! 들어와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김만배는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면담하는 공간은 식당 옆 건물이었는데 조그마한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관리와 대면하는 자리였다.
"83번?"
"예."
"이름이?"
"김만배입니다"
면담을 진행하는 관리는 이제껏 자신을 인솔했던 자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 보는 색목인이었다.
"반갑다. 나는 반스딘이라고 한다"
"반갑습니다"
"자네는 이번 평가에서 3위를 기록했다"
"아..."
83명의 평가자들 중에 3위라면 매우 높은 순위였다. 김만배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배에 탈 때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의 말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올 수 있다고 반스딘이 말해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자네는 조선공으로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신분은 노예이지만, 개인 주택을 지급받고 어느 정도 자유 시간도 보장 받을 수 있다"
"감사합니다...저... 그런데 드릴 말씀이..."
"뭔가?"
"어머니가 함양이라는 곳에 계십니다. 기술자가 되면 함께 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조치해주지."
반스딘은 어렵지 않다는 듯 말하며 김만배 어머니의 이름과 관리 번호를 받아 적었다.
"한 달 이내에 어머니께서 도착할 것이다. 도착하면 이곳에서 직업을 재분류 받고 자네가 살고 있는 집에 함께 살 수 있게 될 것이야"
"감사합니다 나으리!"
김만배는 반스딘에게 큰절을 올렸다. 은인도 이런 은인이 없었다. 반스딘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 거리더니 이제 그만 일어나라며 김만배를 일으켜 세웠다.
"일하는 시간에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교에서 미국어를 열심히 배워라. 반쪽짜리 미국인 말고 진짜 미국인이 될 수 있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거듭 인사를 올리는 김만배를 격려 해준 반스딘은 이제 그만 나가보라며 그를 내보냈다. 밖으로 나와 인솔자를 따라가니 조선소 공터에 두 무리의 인원이 모여있었다.
"통과자다."
"알겠습니다"
인솔자는 다른 관리에게 김만배를 넘기며 통과자라고 말했다. 그에 김만배는 두 무리 중 왼쪽의 무리 뒤에 줄을 섰다.
"자 모두 왔으니 출발한다! 자네들이 이제 생활 하게 될 집으로 가겠다"
통과된 기술자는 50명 남짓 되어 보였다. 통과되지 못한 오른쪽 무리의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재분류 절차를 거쳐 다른 직업을 배정 받게 될 예정이었다.
조선 기술자들의 집은 베니스 조선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집들은 같은 규격의 크기로 지어져 있있고 한 명씩 차례차례 배정 받고 나서 마지막인 김만배의 차례가 되었다.
"이... 이게 정말 제 집 맞습니까?"
"물론이다. 오늘 푹 쉬고 내일 제 시간에 출근해라"
"알겠습니다. 나으리"
김만배가 받은 집은 벽돌로 지어진 주택이었다. 방하나와 거실, 주방, 화장실로 구성된 집이었는데 네덜란드 양식을 따라 지어진 집이었다.
'집이 너무 좋구나!'
집은 바로 생활을 할 수 있게 기본적인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침대였지만 푹신해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대자로 펴고 누웠다.
'조선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김만배는 왠지 미국이라는 이 곳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