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에바
31화, 기술을 전수하다.
에바의 위로 덕분에 감정을 추스릴 수 있었다.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아니에요. 부모를 잃었는데도 멀쩡한 게 사람인가요? 짐승보다 못하죠.”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군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에바는 회상하듯 무덤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멕시코를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스페인과 싸워서 독립을 쟁취했지요. 아버지와 가까운 부스타만테씨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반대파에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은 대통령에서 물러나 추방되었어요. 그때 아버지도 세인트 조지로 쫓겨나게 된 거죠.”
“그럼 지금은 누가 대통령인가요?”
“그 이후로는 모르겠어요. 세인트 조지가 워낙 외진 곳이라 소식을 들을 수 없었어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에바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몇 달 전에 상부로부터 명령이 내려왔죠, 북쪽으로 가는 루트를 개척하고 조사 하라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반대했죠. 북쪽은 수백 년 동안 개척하지 못 한 곳인데, 그곳으로 가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거든요.”
“정치적인 압박이었나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명령이 없었더라면 아버지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요.”
에바의 목소리에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 서려있었다.
이곳이 명목 상으로는 멕시코 영토임을 확인한 박정기는 속으로 다짐했다.
‘우선 멕시코에서 독립해야겠네. 지금은 반란군 밖에 안 되는 거잖아!’
박정기는 자신들의 처지부터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멕시코에서 독립을 선언하면 전쟁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긴다 하더라도 미합중국과 다른 나라들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미합중국’이란 표현은 USA (United States of America)를 지칭하는 것이고. 박정기가 말하는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통용되는 미쿡이다.
현 시점에서 미합중국은 북미 대륙의 동부 연안을 차지하고 있으며, 1803년 중부 지역인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로부터 사들인다.
그래서 미래의 USA 국토의 3분의 2 정도까지 크기를 키운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땅의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거의 주인이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서부 해안과 택사스는 현재 멕시코의 영토로써 미합중국이 호시탐탐 욕심을 부리고 있는 상태다.
즉! 미래의 미국 영토의 3분의 1은 박정기와 일행들이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박정기는 요새로 돌아와 새롭게 벌이는 일들을 챙기며, 유럽으로 가는 일정을 서둘렀다.
카를로스 중위가 지휘하는 포로들의 참여로 건축물들은 빠르게 지어지고 있었고, 들소의 가공 속도도 하루 10마리까지 늘렸다.
윌슨은 새로 영입된 신병들을 훈련 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영화 감상은 가장 중요한 훈련 과정의 하나로 매일 밤 시청이 이루어져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그것은 포로들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문화 앞에 무장 해제 당하고, 오히려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다.
-영화 없이는 이제 하루도 못살 것 같아.
-나는 쫓아내도 돌아가지 않을 거야.
-영화 볼 생각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
이런 말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포로들의 적응? 아니 영화에 노예가 되어 스스로 동화 되고 말았다.
이들에게 내려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 영화 못 보게 하는 것이었다.
이틀이 지나고 박정기는 하와이로 날아갔다. 변화가 있었다면 에바가 조종실에 타고 있다는 것이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싸하지?’
에바와 승무원들 간의 신경전이 대단했다.
-저 불여시 같은 게 어디서 뛰어나온 거야?
-생긴 것 좀 봐봐, 키는 커다랗고, 얼굴은 주먹 만해 가지고, 눈은 송아지 같이 생겼잖아.
-맞아 꼭 귀신같이 생겼어.
-나는 볼 때마다 무섭더라.
수근대는 승무원들과는 대조적으로 에바는 박정기의 옆에 붙어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이걸 타면 멕시코시티까지 얼마 만에 갈 수 있어요?”
“4시간이면 갑니다.”
“와~ 그렇게 빨리요?”
“왜요? 가고 싶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힘을 키워서 반드시 돌아갈 거예요.”
“돌아가서 뭐 하려고요?”
“아버지 복수를 해야지요.”
에바의 대답에 박정기는 움찔했다. 에바의 아버지가 인디언들에게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와이에 도착한 박정기는 김진사를 불러서 준비할 목록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니면서 공사의 진척 상황도 챙겼다.
“벌써 풍차가 완성된 겁니까?”
“아닙니다. 테스트 해보려고 간이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 실험은 해봤나요?”
“바람이 좋아서 기대 이상으로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좀 더 크게 만들어도 되겠는데요.”
박정기가 보기에는 네덜란드의 풍차보다 작아 보였다.
미래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풍력 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하는데, 만드는 회사 중에서 네덜란드가 최고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선박 기술자에게 믿음이 갔다.
“물론입니다. 실험용이라 축소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여러 군데 많이 만들어서 설탕 생산량을 늘렸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대장장이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대장님! 풍차로 풀무를 돌리면 안 될까요?”
“오! 좋은 생각입니다. 풀무도 돌리고 망치질도 하게 만들어 보세요.”
“망치질이 될까요?”
“떡방아를 생각해 보세요. 연구하면 다 됩니다.”
그러면서 기술자들을 모아 놓고 대략적인 개념을 설명해주었다.
회전하는 것을 왕복 운동으로 바꿔주는 크랭크 축과 힘을 전달하는 벨트와 톱니바퀴, 작은 힘을 크게 만들어주는 원리와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원리 등 다양했다.
박정기가 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을 해주자 대장장이들과 목수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는 것은 선박 기술자인 노인이었다.
‘어떻게 저런 것까지 잘 알고 있지?’
뛰어난 지식을 남들에게 무상으로 그냥 애기 해준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런 원리를 이용하면 풍력으로 작동하는 톱이나, 망치는 물론이고 선반도 만들 수 있습니다.”
“선반이 뭔가요? 물건 올려놓는 거 말씀이십니까?”
“선반은 나무나 쇠를 돌려서 깎아 내는 기계입니다.”
“쇠를 깎는다굽쇼?”
“물론입니다. 탄소 공구강을 만들면 쇠도 나무처럼 깎을 수 있습니다.”
“정말 입니까?”
“정말입니다.”
박정기는 유럽에서 공작기계들을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금방 지나고 늦은 오후에 포틀랜드로 향했다. 유럽까지 직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포틀랜드에서 가죽을 구매하고 하루 쉬었다가 연료 충전이 완료되면 암스테르담으로 떠날 것이다.
박정기는 손에 들고 있는 편지를 바라보았다. 선박 기술자가 부탁한 편지였다.
“이게 좋은 내용일까? 아니면 안 좋은 내용일까?”
만약 안 좋은 말이 쓰여 있다면 모든 면에서 차질이 생길 것이고, 좋은 내용이 써 있다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뜯어보느냐, 마느냐 갈등을 하고 있는 박정기에게 에바가 말했다.
“읽을 수 있어요?”
“아니요.”
박정기는 퍼득 정신을 차렸다. 읽지도 못하는 편지를 들고서 괜히 고민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달하지 마세요.”
“왜 요?”
“제가 여기저기 많이 다녀봤거든요,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몇 년 지났다면 좋은 내용이 많겠지만,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불평하는 내용이 많을 거예요.”
박정기는 에바의 식견에 사람이 달리 보였다.
“그렇군요. 좋은 의견 고마워요.”
“고마운 건 저예요.”
비행기는 포틀랜드에 도착해서 모피를 잔뜩 실었다. 지난번에 유럽에서 벌어온 돈이 거의 모피 가격으로 지불됐다. 하지만 열 배 넘는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다.
다음날 일찍 출발한 비행기는 북극을 지나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잘 다녀 왔는가?”
“기장님! 보고 싶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박정기가 기장을 끌어안자 기장이 기겁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정기는 더욱 끌어안았다.
부모와 떨어져 가슴 아팠지만 억누르며 씩씩한 척했다. 그러다 보니 감정 표현도 자제하며 경직돼 있었는데, 지난번 에바의 아버지 묘지 앞에서 감정을 털어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너그러워졌다.
“아버지 같아서 그래요.”
“허허 부기장이 이상해졌구먼.”
그러면서 박정기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 친구는 누구인가?”
“아! 그때 편지의 주인공입니다. 아버지를 찾아 왔더라고요. 그래서 모두 붙잡았어요.”
“그럼 포로인가?”
“네 그런 셈입니다. 하하하”
“마음에 있는 건 아니고?”
그때 에바가 어색함을 밀어내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에바 베르날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어찌된 사연인지는 차차 듣기로 하고, 돈 좀 줘보게.”
“네? 무슨 돈을요?"
"급히 필요해서 그러네.”
“놀음 하세요?”
“어허 무슨? 나는 도박에 관심이 없다네.”
“지금은 돈이 없습니다. 물건을 팔아야 돈이 생기죠.”
“큰일이군.”
난처해 하는 기장님을 보자 마음이 약해진 박정기가 금덩어리를 내놓았다.
“급하시면 이거라도 쓰시죠.”
“오! 그래 고맙네, 이따가 보세.”
“잠시만.......”
기장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너는 뭔가 알고 있지? 기장님이 왜 저러시는 거냐?”
옆에 서있는 김대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혀요. 오늘 처음 뵙는 겁니다.”
“김좌근 대감은 어디 갔어?”
“모르겠어요. 저는 교회에만 있어서요.”
“공부는 할 만하고?”
“아직은 말과 글만 익히고 있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봐. 김진사께는 얘기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 집 딸아이가 오고 싶어 하더라.”
“희선이 가요?”
“그래, 김진사가 절대 안 된다고 하더구나.”
“네......”
김대건은 아쉬워 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사제복 비슷한 것을 입고 있어 그런지 한결 어른스러워 보였다.
박정기는 실버 1,000개를 주었다.
“아니 지난번에도 주시고......”
“가지고 있어 다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감사합니다.”
“장사꾼들 기다리니까 이제 가봐.”
“네 다음에 또 오실 거죠?”
“그럼 더 자주 올 거야.”
김대건이 아쉬워하는 얼굴로 배에 오르자. 승무원들이 인사를 건넸다.
“대건아! 잘 지내.”
“밥 잘 챙겨 먹고.”
“다음에 또 보자.”
기장님과 대건이가 떠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상인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정말 금방 갔다가 왔군요. 참으로 신기합니다.”
“오랜만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승무원들이 파인애플과 애플 바나나를 접대했다.
“오~ 나는 이 바나나가 더 맛있더군요.”
“저도 자꾸만 생각나서 혼났습니다.”
“우리도 바나나를 구입할 수 있나요?”
“그건 곤란합니다. 얀센씨와 독점계약이 되어있어서요. 대신 조금씩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참, 아쉽군요. 얀센 그 친구는 어쩌다 이런 행운을 잡았을까?”
박정기는 살짝 밑밥을 깔아야겠다고 판단했다.
“모든 계약은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 다음을 기약해 보시죠.”
“정말입니까? 계약 기간이 언제 까지죠?”
“그건 비밀 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네요. 죄송합니다. 이제 물량을 나눠 볼까요?”
“네 좋습니다. 우리가 미리 물량을 분배해 두었습니다. 이걸 보시죠.”
종이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니 비슷하게 나누어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 많았고 두 사람은 조금 적었다. 나머지 10명은 동일 n분의 1로 똑같았다.
모피를 나중에 실었기 때문에 먼저 출고를 해야 과일을 꺼낼 수 있었다.
1시간에 걸쳐서 모피를 모두 처분했다. 조종실에는 은화 보따리가 쌓여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얀센씨!”
“아이고, 바쁘신데 기다려야죠. 이번에 모피가 2배도 넘습니다.”
“네 많이 가져왔습니다. 파인애플은 1,000개를 가져왔습니다.”
“오호~ 제 마음을 어떻게 알고 딱 맞게 가져오셨습니까?”
“느낌이 오더군요.”
“허허 신통하십니다.”
그렇게 얀센이 원하던 수량만큼 파인애플과 바나나를 넘겨주었다.
“아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네.”
“대장님! 이 동전들 때문에 비행기가 가라앉겠어요.”
“맞아요. 이렇게 무거우면 못 뜨는 것 아닌가요?”
“하하하 나는 든든하고 좋기만 한데 안 그런가요?”
‘그나저나 이 양반은 죽은 거야, 산거야?’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부서질 것 같은 작은 배를 타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
“아이고 동생 이 사람에게 은화 2개만 얼른 주시게.”
“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빨리 은화 2개 좀 줘보시게. 설명은 나중에 하고.”
“알겠습니다.”
박정기가 은화 2개를 넘겨주자, 배 주인에게 배 삯을 치렀다.
김좌근이 손짓 발짓으로 비행기까지 데려다 주면 은화를 2배주기로 하고 타고 온 것이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말씀해보세요.”
“밥부터 먹고 하면 안 되겠는가?”
“에효! 장금씨 여기 식사 좀 드리세요.”
김좌근과 구종은 밥을 씹지도 않고 목으로 넘겼다. 며칠만 늦게 왔으면 굶어 죽었을 것 같았다.
밥을 몇 번 리필해서 먹고 나서는 피곤하다고 잠들어 버렸다.
‘씨..... 휴 궁금한 건 나의 몫이고, 살아 돌아왔으니 다행이지. 죽었어봐 대왕대비가 가만히 있겠어.’
박정기는 긍정의 회로를 풀로 돌리고 있었지만 이해가 안 되었다.
김좌근이 골아 떨어져 있을 때 얀센의 집사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기술자들의 면접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 안 돼서 꽤 많은 기술자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비행기가 워낙 사기템이라 소문이 비행기보다 더 빨리 퍼졌기 때문이다.
상인들이 소개한 기술자들이 점점 더 몰려왔다. 이런 식으로 면접을 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아 방법을 찾아야 돼,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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