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전리품
102화, 황제는 무릎 꿇지 않았다.
광주를 보고 심양으로 올라온 황제는 심양 별궁의 대정전 앞에 섰다.
그제야 포로가 된 사실을 실감하는지 황제가 눈물을 보였다.
“예전에 청 태종 황제가 조선왕에게 삼배구고두례를 받고 세자를 볼모로 잡아갔습니다. 이제 상황이 반대가 되었으니 오랜 원한을 풀고 서로 친하게 지내보십시오.”
“짐도 잘 알고 있네. 그런데 그게 왜 하필 짐이란 말인가?”
“그걸 모르세요? 왜 병사를 보내서 나를 공격했습니까? 가만히 있는 사자의 수염을 뽑은 게 누군데요?”
“크흠, 그건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어린 조선왕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조선의 인조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했다니까요? 폐하는 아무도 안보잖아요? 이 정도면 많이 봐준 겁니다. 자꾸 고집을 피우시면 나는 갈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나이 53살이 되어 9살 짜리 어린애한테 무릎을 꿇으라니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동시 통역을 맡은 이 씨는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엄중한 내용이라서 비지 땀을 흘렸다.
사방에는 무장한 별감들이 원수를 보는 눈빛으로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고, 조선의 대신들도 황제의 초라한 모습에 혀를 차고 있었다.
더 가관인 것은 청나라를 건국한 청 태조 고황제 누루하치와 청 태종 홍타이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옛 황궁의 대정전 앞, 그것도 선대 황제들이 앉았던 옥좌에 조선의 어린 임금이 앉아있다.
“와~ 신난다. 정말 황제를 잡아왔네. 박 대사, 빨리 무릎을 꿇으라고 해!”
신나게 떠들어 대는 어린아이 앞에 무릎을 꿇으려니 차라리 죽는 게 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못하겠네.”
“이제 와서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조선에 볼모로 잡혀가시겠습니까?”
“박 대사가 다시 한 번 중재를 해주시게.”
하기야 박정기도 저 꼬맹이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면 혀를 물고 죽을지언정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하물며 세계최대 제국의 황제에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하~ 황제 폐하의 입장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임금이 자금성을 갖겠다고 떼쓰는 것을 간신히 말렸는데, 이제와 안 하겠다고 하시면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그깟 자금성? 내주겠네. 그러니 짐을 남경으로 데려다 주게.”
박정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황제에게 하소연을 했다.
“하~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지금 저들은 인조 대왕의 원한을 갚겠다고 하는데 순순히 보내주겠습니까?”
“짐은 도저히 못하겠으니 알아서 하게.”
“제가 협상을 해볼 테니 기다려 보십시오.”
청 황제를 폐위 시키거나 볼모로 잡아 간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
청나라 백성들이 똘똘 뭉쳐서 조선과 미국을 원수처럼 대항할 것이다.
그럼 이화원은 물론이고 원명원도 유지하기 힘들다.
매일 테러와의 전쟁을 불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차기 황제가 영토 할양이나 무역에 협조할 리가 없다.
부모를 볼모로 잡은 원수에게 가당키나 한 말이겠는가?
그래서 아편 전쟁에서도 황제를 살려주고 조약을 맺은 것이고, 미국이 일본에게 항복을 받아낼 때도 일왕의 권력을 유지 시켜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흉악한 일본도 조선을 침략했을 때도 고종 황제를 살려주고 협박과 사탕발림으로 각종 이권만 빼앗아 간다.
만일 고종을 죽이고 다른 왕이나 일본이 직접 통치 한다고 했다면 전 국에 의병이 들고 일어나 일본과 끝나지 않는 전쟁을 했을 것이다.
이렇듯 얻는 것 보다 잃는 게 많기 때문에 강제 합병보다는 천천히 조선을 흡수할 계략을 썼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배운 박정기는 황제는 살려주되 이권만 얻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어린 임금에게 다가가 사정을 얘기했다.
“전하 황제가 다른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그게 뭔데?”
“무릎 꿇는 대신에 만리장성 이북을 조선에 넘긴다고 합니다.”
만리장성의 이북이라면 조선 영토의 4배에 해당하는 면적과, 조선 만큼 인구가 많다.
한마디로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격이다.
“그게 정말이야?”
“네, 어떻게 할까요?”
조선의 현재 능력으로는 자금성과 중국 대륙을 차지한다는 것은 화약을 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박정기 생각했다.
먹어도 적당히 먹어야지 자신의 수십 배나 되는 사자를 잡아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땅도 땅이지만 인구 수도 수십 배나 많아서 수시로 반란이 일어나고 관리들이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얼마나 골치가 아프겠는가?
그래서 나름대로 조정을 해준 것이 만리장성을 경계로 만주 지역을 조선에 넘기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도 감당이 될지 모를 일이다.
엄연히 만주에 사는 여진족은 자신들이 청나라의 지배 계층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여길 것이다.
과연 그들이 조선을 인정하고 따르겠는가?
“그럼 고토 보다 더 넓은 거 아니야?”
“고토 보다 3배 정도 더 큽니다.”
“와~ 그럼 내가 정복 군주가 되는 거지?”
“그러하옵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해.”
박정기는 다칭 유전과 요하 유전은 자신이 가져야 하기 때문에 어린 임금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전하! 이렇게 승리하기까지 미국이 힘쓴 거 아시죠? 그래서 미국의 지분도 남겨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어디를 주면 돼?”
“땅 위의 것은 조선이 가져가시고, 땅 밑의 것은 미국이 가져가겠습니다.”
“그럼 미국은 아무것도 못 갖는 거 아니야?”
“그럼, 요동반도 끝 부분을 조금 나누어 주십시오.”
“알았어. 그렇게 해!”
요동반도의 끝에는 여순항과 대련항이 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까지 불사하며 차지하려 던 곳으로 발해만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다.
박정기는 쾌재를 부르고 황제에게 갔다.
“폐하, 만리장성의 북쪽을 조선에 넘기면 무릎 꿇는 것은 면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미국이 중재해서 친선 조약을 체결하도록 돕겠습니다.”
“으음, 열하는 안 되네, 그리고 이곳 봉천도 선황의 황릉이 있어서 안 되네.”
박정기는 골치 아픈 문제 때문에 다시 한 번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열하는 포기할 수도 있지만 심양(봉천) 특히 황궁은 임금이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 별궁은 조선의 왕이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열하와 봉천의 복릉(누루하치)과 소릉(홍타이지) 주변의 땅은 청의 영토로 인정하고, 언제나 참배가 가능하도록 해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으음, 알았네, 그쯤으로 하지.”
양측을 중재하느라 진땀을 흘린 박정기는 조청 친선 조약까지 체결하도록 도왔다.
조청 친선 조약 내용은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았다.
평화와 불가침, 자유무역, 통행의 자유, 투자와 재산의 보호, 범죄인 인도, 상호 방위조약, 대사 파견, 통화는 미국화폐로 한다. 등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있었다.
심양 황궁의 대정전 앞에는 큰 테이블이 놓이고, 황제와 어린 임금이 마주앉아 조약문에 서명과 옥새를 찍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박정기는 카메라로 열심히 찍었다.
“두 분은 앞으로 나와서 서로 악수를 해주세요.”
“악수가 뭔데?”
“손을 마주잡고 서로 인사하는 겁니다.”
박정기는 다가가서 손을 마주 잡아주고, 어린 임금을 의자 위에 올려서 높이를 맞춰주었다.
“조약문이 앞에서 보이도록 들어주세요.”
“이렇게?”
“네, 좋습니다.”
찰칵! 찰칵!
“이제 웃어보세요.”
“황제님도 웃어보세요.”
두 사람이 어색하게 웃는 사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연회가 베풀어 졌다.
황제와 어린 임금은 50년의 나이차이도 불구하고 의형제를 맺었고, 박정기도 미국을 대표해서 의형제에 한발을 디뎠다.
‘이거 족보가 꼬이는 구나.’
김좌근이 형님이고, 어린 왕이 동생이 됐으니 어떻게 되는 건지?
어차피 술 깨면 다시 폐하, 전하로 부르게 되겠지만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박 형, 우리 큰형님과 같이 유럽에 가보자!”
“하하하 그거 좋은 생각이네. 우리 막내하고 영길리와 블랑기에 가보자고. 어떤가? 동생!”
“까짓것 뭐, 가보죠.”
박정기는 술김에 흔쾌히 승낙했다.
“와아~ 신난다.”
“하하하 나도 신나는 구나. 생전에 서양도 가보게 생겼군.”
“그렇게 좋습니까?”
“좋고말고, 동생을 안 만났으면 한 번도 못 가보고 죽었을 것이네.”
유럽 얘기가 나오니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유럽에 가려면 북극을 지나가야 하거든요. 거기는 일년내내 눈으로 덮여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하늘에 초록색 비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황홀한 오로라가 펼쳐집니다.”
박정기가 다니면서 겪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얘기해주자, 두 사람은 흠뻑 빠져들었다.
“와~ 멋있겠다.”
“그런가? 그럼 북극이란 곳은 사람이 살지 못하겠군.”
“아이고, 사람이 어떻게 삽니까. 오줌을 누면 바로 고드름이 열린 다니까요.”
“그렇게 추운가?”
“뜨거운 물을 뿌리면 바로 눈으로 변합니다.”
“엄청나다. 나도 해보고 싶어.”
황제는 항복하러왔다는 것도 잊은 채 흥에 겨워 웃고 마셨다.
자금성에 있을 때는 신하들과 태감들 그리고 후궁들에 둘러 쌓여있다 보니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고, 의형제를 맺어서 동등한 위치에 있다 보니 마음의 벽이 허물어 진 것이다.
세 사람이 마음을 열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니 그 어느 때 보다도 즐거웠다.
“참, 황제 형님! 한 가지 당부 드릴께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절대로 태의들이 받치는 탕약이나 환약을 드시면 안 됩니다.”
“왜 그러는가?”
“그 약들에 수은이나 독성이 강한 게 많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쳐 죽일 놈들을 보았나.”
“아마 태의들도 그 사실을 모를 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연구해서 밝혀진 것이니까. 믿으셔도 좋을 겁니다.”
“그럼,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제가 약을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안심이 되는군. 아무튼 미국은 대단한 나라일세.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지 않나? 한 번에 수백을 죽이는 총이 있지를 않나? 대단해, 아주 대단해.”
“맞아요. 원구단도 한 번에 날려버렸잖아요.”
“커흠!~”
어린 치기에 황제의 치부를 깊숙이 찔러버리는 어린 임금이다.
“어허~ 동생 전하! 그런 말씀은......”
“괜찮네, 사실인 걸 어쩌겠나. 이참에 남경으로 천도를 해야겠네.”
“왜 그러십니까?”
“어디 백성들 보기 민망해서 살겠는가?”
박정기는 황제의 체면을 살릴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을 했다.
그렇게 즐거웠던 시간은 어린 임금이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마무리하게 되었다.
다음날 황제와 어린 임금은 유럽 갈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심양 황궁에 있던 옛 황제들의 물건과 기록이 담긴 서적들이 비행기에 실렸고. 심양에 잡혀있던 관리와 귀족들이 비행기에 올랐다.
“그럼 이륙하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제대로 구경해 보지.”
“보고 싶은 데가 있습니까?”
“우리 선조들은 장백산(백두산)에서 기운을 받았다던데 짐도 기운 좀 받아가고 싶군.”
“알겠습니다. 바로 가보시죠.”
비행기는 강물 위를 달려 속도를 높이고 기수를 들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으악~
-날았다.
-내가 날다니.
청나라 관리들이 아우성을 쳤다.
비행기는 30여분 만에 백두산 상공에 나타났다.
“저기가 천지입니다.”
“아~ 참으로 경이롭구나.”
박정기가 몇 바퀴 돌면서 가늠해보니 지름이 4km정도 돼서 착륙하기 충분한 거리가 되었다.
“착륙하겠습니다.”
“오~ 그래, 기대 되는군.”
비행기는 낮은 북쪽 능선을 넘어 급강하 했다.
사람들은 기겁했지만 박정기는 차분하게 자세를 제어하며 천지의 수면에 가볍게 착륙하는데 성공했다.
“동생 솜씨가 대단하구만.”
“뭐 별거 아닙니다.”
호승심에 무중력 체험을 시켜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박정기였다.
비행기는 천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한쪽 호숫가에 붙였다.
“기운을 제대로 받으시려면 입수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허허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네.”
“그럼 한잔하시던가요?”
“그것 좋겠군, 자네도 한잔하게.”
“네.”
천지의 물은 맑고 깨끗해서 한두 잔 마시는 것은 시원하고 좋다. 하지만 일부 온천수가 흘러나와 장기간 음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캬~ 시원하고 좋네요.”
“으으 너무 차갑네.”
“무병장수하십시오. 형님!”
“그래 고맙군.”
고마울 일은 아니다.
‘형님 폐하 덕 좀 보게 오래오래 사세요.’
황제가 죽으면 어떤 녀석이 황제가 될지 모른다.
그럼 피곤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완전히 체계를 잡을 때까지 지금의 황제가 있어주는 게 좋다.
도광제는 앞으로 15년을 더 살지만 박정기는 거기까지 모르고 있다.
비행기는 천지물을 담아서 이륙했다.
“또 어디를 보고 싶으세요?”
박정기는 이번 중국 원정에서 얻은 게 너무 많다 보니 황제에게 서비스를 더 해주고 싶었다.
조선은 만주 땅을 차지하게 되면서 4배나 넓은 국토를 가지게 되었고, 박정기는 북경의 이화원과 원명원 그리고 겨울에도 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와 국제 무역 특구를 가지게 되었다.
미국은 홍콩, 상하이, 대만, 청도, 천진, 대련의 영구적인 무역 특구와 만주와 중국의 석유및 지하자원 개발권을 가지게되었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은 중국과 거래하는 모든 유럽 국가들은 미국에게 물건을 받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큰 이권을 손에 쥐게 된 미국은 천조국을 넘어 만조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제 북미 대륙을 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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