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과거로
2화, 과거를 비행하다
"기장님! 피라미드 바위에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가면 무언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가보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출력을 조금 올리자 비행기가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꼬리날개 밑에 방향타가 있어서 물에서 움직이는데 문제가 없다.
흐느끼는 소리에 뒤를 보니 윌슨이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울고 있다.
"윌슨, 왜 그래? 괜찮은 거야?"
"흑흑, 이젠 낸시를 만날 수 없잖아요."
"낸시가 누군데?"
"제 애인이요."
윌슨을 보고 있는 기장의 안색이 미묘하게 흐렸다.
박정기는 기장님의 가족 안부를 물었다.
“기장님은 가족은 어떠세요?”
“딸아이가 결혼해서 손자를 낳은 지 얼마 안 됐네.”
부인 얘기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그동안 겪어온 기장은 멋진 중년이지만 홀아비의 냄새만은 지우지 못했다.
"아, 그러시군요."
"자네는 결혼 안 했나?"
"할 뻔 했죠. 하지만 헤어졌습니다."
"안됐군,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
담담하게 말했지만 눈매가 찡그려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박정기가 웨딩 스튜디오를 접고 미국에 오게 된 것도 그 여자와의 사연이 큰 역할을 했다.
김선화, 그녀는 웨딩 업계에서 유능하기로 소문난 웨딩 플래너였다.
단골 거래처로 지내다가 애인이 됐지만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 사람들은 언제 결혼할 거냐고 궁금해 했고,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녀가 부탁을 하면 쉬는 날을 반납하고 그녀의 고객을 촬영해주었고, 결제가 밀려도 독촉하지 못하고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업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김선화가 고객의 남자친구를 가로챘다는 얘기도 나왔고, 재벌 3세와 사귄다는 소문도 퍼졌다.
더구나, 웨딩 컨설팅 회사 돈을 떼어먹고 도망갔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연락을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를 남겨도 답변이 없었다.
그녀에게 받지 못한 촬영비가 3,500만원에 빌려준 돈이 2,000만원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업계 내부의 소문이었다.
김선화가 빚진 돈을 박정기에게 받아야 한다거나, 공범이라고 함께 싸잡아 욕을 먹어야 했다.
진짜 피해자는 박정기 본인이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안됐다’ ‘잊어라’ 위로를 건네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입은 상처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애인이 바람서 도망갔는데도 속 편하게 사는 멍청한 놈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상황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미리 항공학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미국으로 떠나,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향해 열심히 도전했다.
‘휴~ 너무 멀리 왔구나,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박정기는 상념에서 벗어나 창밖을 살폈다.
피라미드 바위에 접근하자, 인디언 1,000여명이 환호하고 있었다.
식인종을 만나면 어쩌나 걱정 했던 것이 무색해졌다.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은데요."
"내가 보기에도 그런 듯하네.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 보게나."
비행기는 조종석 측면의 창문을 안쪽으로 당겨서 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창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기내로 들어왔다.
박정기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나라 인사말을 했다.
“안녕하세요? 헬로우!.... 하이!.... 올라!.... 알로하!.... 아디오스!......”
“저쪽에서 배가 오는군.”
작은 통나무 배가 비행기에 접근했다.
추장은 앞에 서있고 젊은이들이 노를 젓고 있었다.
인디언 부족은 파란 눈의 악마들을 물리쳐 달라고 호수의 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중에 호수 속에서 비행기가 튀어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들이 환영하는 것은 호수의 신이 구원자를 보내줬다고 믿기 때문이다.
[구원자께 인사 올립니다]
"못 알아듣겠는데, 어떻게 하죠?“
“바디랭귀지라도 해보게.”
박정기는 왠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 난감했다.
“윌슨 네가 해볼래?”
“제가요?”
“그래도 한번 해봐.”
“네 알겠어요.”
박정기는 조종석 의자를 뒤로 밀어서 넓혀 윌슨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윌슨은 창문 너머로 상체를 내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검은 유령님? 오 신이시어!]
추장이 뭐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굽신굽신 허리를 숙였다.
일행은 몰랐지만, 인디언 전설에 의하면 '검은 유령'이라는 영웅이 등장한다.
위험에 빠진 부족을 '검은 유령'이 나타나 구원해주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피부가 검은 윌슨을 보고 '검은 유령'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었다.
사실, 전설 속의 '검은 유령'은 흑인이 아니고, 단지 이름이 그랬을 뿐이었다.
"왜 저러는 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이제 어떻게 할까요?"
난감한 표정의 기장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가뜩이나 정신없는 하루인데 저들과 소통하는 문제로 정신력을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다음에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고 돌아가자."
"알겠어요. 잘 있어요! 빠이 빠이"
윌슨은 해맑은 표정으로 추장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인사를 했다.
기장님은 호수의 중심부로 기수를 돌리고 출력을 높여서 미끄러져 나갔다.
그 때 강력한 제트 엔진의 후폭풍에 의해, 배 위에 서있던 추장은 날아가듯이 물에 빠졌고, 젊은 사내들이 뛰어들어 추장을 구해 밖으로 끌고 갔다.
부족 사람들은 모두 이 장면을 똑똑 보았다.
[추장이 날아갔다.]
[큰새 방귀가 엄청 세다.]
[큰새는 똥꼬가 두개다.]
어린 아이들이 신기한 광경에 떠들어 댔다.
추장을 물속으로 날려버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나아가 호수 중간에 비행기가 멈췄다.
기장은 부기장에게 심경을 토로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장으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해 미안하네.”
“이게 기장님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비행기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기장이 판단하고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 과거로 온 문제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기장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자네 생각을 묻고 싶네?”
“당장은 생존이 문제 아닐까요? 일단 원주민들이 적대적이지 않아서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은 없지만, 먹는 문제는 당장에 급합니다. 살아야 다음을 기약하지 않겠습니까?”
박정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기장이 말했다.
“그렇지 식량이 문제로군.”
“네, 먹을 것을 당장 구해야 합니다.”
기장은 이런 일에 서투른지 박정기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한국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간다던데 자네도 다녀왔는가?”
“물론입니다. 저는 공수부대에 다녀왔습니다.”
박정기는 자긍심을 가지고 대답했다.
"그럼 자네도 생존 훈련을 받았겠군."
"네, 받았습니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윌슨이 흥분된 제스처로 말했다.
"와~ 맨손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요?"
"할 수는 있는데 실제로 해본 적은 없어."
"저도 가르쳐주세요."
"안정이 되면 너한테도 알려 줄게."
얘기가 다른 곳으로 가자 기장은 다시 말했다.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우리의 생존 문제를 자네가 담당해주겠나?”
“제가 책임지고 생계를 꾸리라는 말씀입니까?”
“뭐, 그렇다 할 수 있지, 도움이 못돼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고맙네.”
박정기는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 느낌을 받았다.
돈 벌어다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고 한마디로 야생에서 생존하는 것이다.
‘일단, 장비부터 챙겨보자.’
계기판을 찬찬히 살펴보던 박정기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연료 게이지가 90%정도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장님 연료가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네요?”
“어디? 샌프란시스코까지 다녀왔으면 70% 정도 남았어야 하는데”
기장은 계기판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아까 이륙하는데 가볍게 느껴졌는데, 기장님은 어떠셨어요?”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던 것 같았네.”
“이상한 일이네요.”
윌슨이 인디언과 싸움을 대비해서 들고 있던 빨간색 소방용 도끼를 흔들면서 말했다.
“도끼도 가벼워요?”
“그래? 이리 줘봐.”
“어~ 왜 이렇게 가볍지?”
박정기는 도끼를 받아서 흔들어 보고는 훨씬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도끼가 가벼워 졌던지 힘이 강해졌던지 둘 중의 하나이다.
“질량 보전의 법칙 때문에 가벼워질 수는 없는데. 그렇다면 힘이 좋아진 건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법칙이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윌슨은 머리를 갸우뚱 거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머리를 치고 일어섰다.
“기장님! 점심시간 된 것 같은데요?”
“배고프냐?”
“네, 헤헤.”
“그래 뭐 먹을 게 없을까?”
오늘은 오전에 화재 진압하고 점심은 리노의 공항에서 먹는 일정이었다.
당연히 식사나 간식은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초코바 2개있어요.”
“자네도 없는가 보군.”
“비행기에 비상식량이 없을까요?”
“찾아보면 있기는 하겠지, 하지만 비상식량을 먹어 버리면 나중에 비상 상황이 닥쳤을 때는 곤란하지 않겠어?”
“그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낚시라도 있나 찾아볼까요?”
“그래 일단 뭐가 있는지 살펴 보세나.”
조종실 수납함을 뒤져보니 배낭 두 개가 나왔다.
낙하산과 응급 의료키트가 세트로 묶여있는 비상탈출용 장비 같았다.
‘오랜만에 스카이다이빙이나 해볼까?’
다음 객실에는 산소탱크와 응급상자, 고무보트, 등이 있고 식량이 될 만한 것들은 전혀 없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수병이 전부였다.
“식량이 큰 문제군.”
“낚시나 그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총이라도 있어야지 사냥이라도 하지.”
그렇게 구석구석을 살피니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인디언들에게 음식을 얻어 볼까요?”
“네가 구해올래?”
“같이 가야죠?”
박정기는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차라리 굶는 한이 있어도 남에게 손을 벌리지는 않는 스타일이다.
“내가 물고기를 잡아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봐.”
“물속에 들어갈 건가요?”
‘배가 어지간히 고픈가 보네, 가만있자 물고기 잡는 법이 뭐가 있었더라.’
투망이나 그물을 만들려면 끈이 많이 있어야 한다.
있어도 만들다가 굶어 죽는다.
다음 작살로 잡으려면 철사와 대나무 고무줄 그리고 물안경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것 하나 가진 게 없다.
통발 정도는 있는 재료들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물에 담가 놓고 몇 시간 기다려야 한다.
예전에 시골에서 전기로 물고기 잡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불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
'불법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박정기는 동체 뒤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꼬리 날개 밑에 있는 화장실은 각종 케이블과 배관이 정신없이 엉켜있어 보기에도 좁고 답답했다.
‘러시아 놈들은 왜 이런 곳에다 화장실을 만들었을까? 도대체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어요.’
화장실 양옆과 천정 속에 수납공간이 있다.
여기에서 연결 콘센트가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박정기는 길이가 10m정도 되는 연결 콘센트 2개를 꺼내 들었다.
[출처] By Armada International -June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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