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하와이
21화, 장금이라 부르겠소
3일 동안 바쁘게 지내며 온갖 잡무를 처리한 박정기가 선착장에서 누군가 기다렸다.
“박 대사님 미리 나와 계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국왕전하. 이 사람들이 다 시종입니까?”
“그렇습니다. 폐가 가지 않도록 최소로 줄였습니다.”
‘이 왕 새끼야! 이게 줄인 거라고? 딱 봐도, 네 자식들 인거 알겠는데, 뭐? 시종? 세상에 믿을 새끼 하나도 없다 더니...... 뭐 30명? 아이고, 머리야!’
박정기는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무슨 짐이 이렇게 많습니까?”
“파인애플이요. 좋은 것만 골랐으니 가격을 잘 받을 수 있을 것이요.”
박정기는 어이가 없다 못해 기절할 것 같았다.
“아니! 어제 제가 100개 실어 놨는데, 지금 가져온 것이 두 배는 되겠는데요?”
“하하하, 내가 필요한 게 있어서~ 이걸 팔아서 사오고 싶소.”
한 번에 파인애플이 풀리면 가격이 폭락해서 둘 다 망한다는 걸 모르는 국왕은 실글벙글이다.
‘내가 미쳤지 이걸 모르고 탑승을 허락한 내가 미친놈이지’
박정기가 기둥에 머리를 꽝꽝 부딪히자 놀란 국왕이 왜 그냐고 말렸다.
“어째 그러시오, 다칩니다.”
“머리가 아파서 그럽니다. 자! 일단 안으로 타시지요.”
아이들이 왁자지컬 달려 들어갔다.
진짜 시종들은 포대에 담긴 파인애플을 낑낑거리며 들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어! 미안합니다. 오셨군요.”
중국 상인 염인환과 뱅크스 선장이 서있었다.
“선장님도 가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제가 영국의 실상을 몰라서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장님도 타는 거 아닌가요?”
“지금은 선장이 아니고, 제가 안내인으로 고용한 사람입니다.”
‘이런 샹~ 짱 개새끼! 어디서 수작질이야? 뭐 안내인~ 돈 안내는 사람! 안,내,인~’
박정기가 혈압상승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염인환이 염장을 질렸다.
“수행원 1사람 데려가도 된다고 하시기에...... 크음! 저희는 먼저 타겠습니다.”
꽈직!
뒤에서 기둥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은 뛰어서 비행기 안으로 쏙 들어 가버렸다.
“순진한 척 하다가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는 말이지? 어디 두고 보자. 누가 이기나!”
[우리는 안 탑니까?]
[타! 이 자식들아~ 아참! 그리고 화장실 교육 똑바로 시켜라. 알겠어?]
[네! 제가 확실히 시키겠습니다.]
들소 바위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박정기는 인디언 청년들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말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소름이 확 끼친 인디언 청년들이 서둘러 비행기에 탑승했다.
선착장에는 훌라 춤을 추는 여인들과 주민들이 나와 국왕의 해외 순방을 배웅했다.
비행기는 진주만을 달려 하늘로 솟아 올랐다.
-와 날아간다.
-우리는 새가 됐다.
-저기 마을을 봐봐라.
-다른 섬도 보인다.
밖이 아이들 소리로 시끄러웠다.
“대건아! 문 닫아라.”
“네 대장님!”
김대건이 일어나서 조종실 문을 닫았다.
“아이고 조용하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피라미드 호수에 들렀다가 갈 겁니다. 거기에 농사꾼들을 내려주고 가려고요.”
“큰 평야 지대에는 안 가는 건가?”
“가는 길이니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씨도 뿌리고 할 겁니다.”
김좌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한테 보고를 하려면 똑똑히 봐둬야 하기 때문이다.
‘내 땅을 볼 수 있다니, 벌써 부터 가슴이 뛰네 그려.’
김좌근은 넓은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미국에 대한 꿈을 꾸었다.
“식사 준비 했습니다.”
예쁜 김개똥이 쟁반에 담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바닥에 앉아있던 김좌근의 수행 구종이 벌떡 일어나 음식을 받아 들고 제 주인에게 받쳤다.
김대건이 조수로 오면서 의자가 부족해서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니까 김좌근이 바닥에 앉아 있으라고 시킨 것이다.
집안 바닥보다 깨끗했지만 창밖을 볼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이건 기장님 것이고요, 이건 대장님 것입니다.”
“벌써 식성을 파악한 것이요?”
“네! 기장님께서는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시고, 대장님께서는 단백하고 깔깔한 음식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정확하오.”
박정기는 음식을 먹어보았다.
역시 궁중 음식이라 그런지 하나하나 모두가 맛있다.
“직접 만든 거요? 아주 맛있네요.”
“그렇습니까? 입에 맞으신다니 황공~ 감사합니다.”
커흠! 큼! 큼! 허음!
옆에서 김좌근이 큰 기침을 해서 김개똥의 실수를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박정기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참! 뭐라고 불러야 할지? 이름이 뭐요?”
“소녀는 김개똥이라 하옵니다.”
커흑! 크흠~
박정기가 사례가 걸려서 켁켁 거리자 사발에 담긴 물을 내밀었다. 김개똥이가.
“내가 처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에는 크음! 좀 적절하지 않는 것 같으니 앞으로는 장금이라 부르겠소. 그래도 되겠소.”
“네! 미천한 소녀에게 크나큰 광영~~~옵니다.”
커흠! 큼! 크음~!
또다시 발작하듯 헛기침을 해대는 김좌근이다.
‘아주 쇼를 해대는구먼.’
“형님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소?”
“그러게 자꾸 목에 걸리는 구먼, 괜찮으니 어서 드시게.”
“네 물도 드시면서 천천히 드세요.”
장금이가 된 김개똥은 얼굴이 발개져서 밥을 먹는 박정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이 여자 뭐야?
“한 사람 당 하나씩 받으시면 됩니다.”
-글세? 아바마마 첩이야?
“아이고 손으로 드시면 안 됩니다. 이걸 사용하십시오.”
-엄청 예쁘다. 그치?
시장판이 따로 없는 기내에서 나인들이 음식을 나누어 주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국왕이 데려온 왕자들만 10명이 넘어서 4명의 나인으로는 감당이 안 되었다.
그때 바람 매가 왕자들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 째려봤다.
존재 자체 만으로도 분위기를 얼려버리는 포스가 바람 매에게는 있었다.
뚝 튀어나온 광대뼈! 움푹 들어가고 쫙 찢어진 눈매! 검게 그을린 피부까지, 아이들이 순식간에 얼음이 돼버렸다.
세답방 나인이 고개를 까딱하고 감사를 표한 다음 계속해서 식사를 나누어 주었다.
바람 매는 이 예쁘게 생긴 여자에게 이미 마음을 뺏긴 상태이기 때문에 작은 고갯짓 하나에도 눈물이 날만큼 감동을 받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치 빠른 녀석들이 4명이나 더 있었다.
[허억! 저 자식 뭐한 거야?]
[에이~ 젠장 내가 먼저 갔어야 하는 건데.]
[가자!]
인디언 청년들이 전부 달려가 나인들을 하나씩 호위했다.
한 사람만 빼놓고~ 화장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들소 바위는 갈들이 심했다.
화장실이냐? 아니면 예쁜 여자냐? 결국 자신을 빼고 4대4의 짝짓기 배정이 끝나고 말았다.
‘으으~ 이 억울함을 어떻게 갚아야 하지?’
들소 바위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국왕전하 어찌 식사는 안 하시고~”
국왕의 시선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나인들에게 향하자, 중국 상인이 그만 보라는 의미에서 국왕에게 말을 걸었다.
“흠~ 대단한 미인들이구먼, 내 일찍이 저런 미인은 본 적이 없다네.”
하와이 부족 혈통은 폴리네시아 계열이다.
많은 유전 학자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종족으로 폴리네시아인을 꼽는다.
사진에서 많이 들 봤겠지만 키가 크고, 골격이 단단하고, 살 집이 풍부하다, 그리고 대단히 전투적이다.
이런 특징은 비단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에 가면 더 예쁜 여자들이 많습니다. 이제 식사를 하시지요.”
“정말이요? 선장!”
“그럼요.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밭에서 풀 뽑고, 산에서 나무를 합니다.”
“정말이요? 어찌 그런 미인에게 험한 일을 시킨단 말이요?”
“그렇게 미인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전하.”
국왕은 몽롱한 표정으로 무엇을 상상하는지 희죽거렸다.
비행기는 태평양을 건너 로스앤젤레스 상공에 들어섰다.
“여기부터 우리 땅이요.”
“오~ 끝이 보이지 않네 그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사람 말을 그렇게 못 믿어서 어디 큰 인물 되겠습니까?”
“미안 하이, 하도 과장이 심해서 그만.”
“과장이 아니래도요. 에이 참! 말을 말아야지.”
김좌근은 실제로 와보니 사진보다 더 넓어 보였다.
박정기의 부탁으로 비행기의 고도를 낮추었다.
드디어 들판의 버펄로 떼와 광활한 초원이 보였다.
“저것이 들소 떼인가?”
“맞습니다. 버펄로라고 하는 들소입니다. 조선소보다 2배는 커다랗죠.”
“그렇게 큰가? 그럼 어찌 잡는단 말인가?”
“그러니까 화살로는 턱도 없고 총으로 쏴서 잡아야 합니다.”
박정기는 김대건을 보고 심부름을 시켰다.
“대건아 마름 좀 오라고 해라.”
“네 대장님!”
농사 경력이 많은 마름 안정호가 조종실로 들어왔다.
“아이고, 이게 다 뭐래요?”
군기시 장인이 신분을 위장해서 침투한 마름이었다.
군기시에서는 최고의 기술자라고 해서 뽑힌 자이기 때문에 눈치가 보통 빠른 게 아니었다.
말만 듣고도 원리를 파악해서 물건을 만들 정도로 실력과 이론에 밝았다.
물론 어려서 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기 때문에 농사 책임자로써 자질도 충분하고 넘쳤다.
‘이건 사람이 만든 게 아닌데?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안정호 마름은 단박에 신이 아니고서는 만들 수 없는 물건이란 것을 간파했다.
수많은 계기판과 스위치, 알 수 없는 장치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조종실의 풍경에 그야말로 아연실색했다.
‘이걸 배워서 오라고? 미친! 조선에 갔다가는 목이 날아가겠는 걸.’
왕실에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고 한껏 기대에 차서 왔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미친 짓이다.
돌아가면 무조건 죽는다.
마음을 정리하니 한결 진정이 되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뭐 보고 배울만한 게 있는가?”
“아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박정기가 툭 찔러본 말에 안정호는 첩자라는 사실이 발각되었다고 생각했다.
희죽 웃은 박정기가 김좌근을 바라봤다.
김좌근은 창문에 바짝 붙어서 밖에만 쳐다봤다.
“일어나세요, 여기서 부터 평야 지대니까 잘 보다가 쌀 농사에 적합한 곳이 나타나면 말해주세요.”
“네? 살려주시는 겁니까?”
“내가 왜 죽입니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실은....”
커흠! 헙! 커헙!
또다시 김좌근의 기침이 시작됐다.
‘저러다 죽겠네 죽어.’
“형님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탕재라도 올려야 하나요?”
“아닐세, 목이 칼칼해서 그러네, 어서 일보시게.”
장단을 맞춰주니 안심을 하는 김좌근이다.
“내가 한 말 알아들었죠?”
“네! 그런데 농사짓기에는 전부다 좋은데, 어디서 뭘 또 골라야 합니까?”
“그래도 이중에서 제일 좋은 곳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30결 이상 되는 면적이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최초의 정작촌이 될 장소를 찾아 비행기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끊임없이 북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안정호 마름이 소리쳤다.
“대장님 저기입니다. 저기 강 사이에 있는 넓은 섬이면 지금 당장 씨를 뿌려도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정기는 기장님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저공 비행을 부탁했다.
가까이 날면서 보니 강에 있는 평평한 섬이었다.
그런데 갯벌처럼 물이 축축히 젖어있는 그냥 어마어마하게 넓은 논 그 자체였다.
“그냥 논이네요. 풀도 없고.”
“흑! 저는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저 색깔을 보십시오. 거무튀튀한 것이 비옥하다는 증거입니다. 물을 댈 필요도 없고, 김을 맬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씨 뿌리고 수확하면 끝입니다.”
안정호 마름은 얼마나 흥분했는지 죽여 달라고 무릎 꿇은 게 언제인지 까맣게 있고 있었다.
“그렇게 좋습니까?”
“벼농사 짓기에는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습니다. 장마 때가 걱정이긴 해도 이만한 곳은 없을 겁니다.”
“아! 장마. 여기는 겨울에 비가 많이 오고 여름에는 비가 안 옵니다.”
“오~ 세상에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는 그냥 천국입니다. 천국!”
옆에서 듣고 있던 김좌근이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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