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조선
15화, 금보다 귀한 사람
새벽의 한양 풍경은 고즈넉했으나 한편으론 활기찼다.
“속은 괜찮으세요?”
“아주 좋네. 자네는 어떤가?”
“저도 멀쩡합니다.”
어젯밤 과음을 했으나 새벽에 리셋이 되어 컨디션이 좋았다.
“저 잠시 집터에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다녀오게.”
“금방 올 겁니다.”
“알겠네.”
박정기는 비행기 지붕에서 내려와 술과 남은 음식을 챙겼다.
보트를 타고 흑석동 부모님 집터로 향했다.
이 세상으로 갑자기 오게 되면서 부모님과 전화 한통 못한 것이 가슴에 한이 되었다.
집터가 있던 장소로 예상되는 지점에 도착했다.
바닥에 술을 붓고 음식으로 고시를 하였다.
“엄마 아버지! 저는 이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뵐 수 있을지 없을지 기약은 없지만 해마다 와서 두 분께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저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 하지 마시고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27년 후 돌아갈지 모르니까요.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박정기는 집 방향으로 절을 한번 했다.
나는 이세상, 부모님은 저세상 서로 엇갈려 뵙지 못하니 이렇게 인사를 드렸다.
박정기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가슴속에 있었던 큰 덩어리가 조금 줄었다.
다음에 오면 작은 집이라도 지어야겠다.
“또 오겠습니다. 그동안 안녕히 계세요.”
비행기로 돌아오니 기장님이 맞이했다.
“부모님께 인사 드렸는가?”
“네. 마음이 조금 홀가분합니다.”
“오길 잘했군.”
“감사합니다.”
[저기 배가 옵니다.]
[어제 먹었던 그릇을 챙겨라.]
[네.]
큰 귀가 대답하고는 광주리에 그릇과 술병들을 담았다.
‘그래도 눈치는 제법인데.’
배가 도착하고 어제 보았던 하인이 인사를 했다.
“밤새 무탈하셨습니까?”
“덕분에 잘 먹고, 잘 잤네.”
난리가 났었다는 애기는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조반을 가져왔습니다.”
“어허~ 이렇게 고마울 때가.”
박정기는 광주리를 받고, 어제 먹은 광주리는 돌려줬다.
“대감께서는 별말씀 없으신가?”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댁에 계신가?"
"아침 일찍 입궐하셨습니다.”
“그렇군, 이것 가져 가시게.”
박정기는 또 고기를 주었다.
“아이고 올 때 마다 이런 걸 주시면 쇤네가 부담스럽습니다.”
“자네가 음식을 갖다 주니, 고기가 많이 남았네.”
“아이고,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넙죽 받는다.
“혹시, 요즘 쌀 한 섬이 얼마 하는가?”
“벼 한 섬입니까? 아니면 쌀 한가마니 입니까?”
‘벼와 쌀을 구분해서 파는구나.’
“벼를 말한 것이네. 종자로 써야 해서.”
“아! 네, 이천 쌀이 맛이 좋고 수확도 많습니다. 한 섬에 5냥이면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럼 금 1냥이면 통보로 몇 냥이나 하는가?”
“쇤네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알아봐 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겠네.”
“그럼 점심 가지고 오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들어가시게.”
박정기는 하인을 돌려보내고 식사를 했다.
독약 걱정을 안 하고 먹으니 꿀맛이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어떻게 풀이 이렇게 맛있지?]
[이 마른 풀도 맛있다.]
인디언 청년들은 연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기장님, 오늘은 맛있네요.”
“하하하. 나도 아주 맛있다네.”
“어제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온 기분일세.”
“흐핫! 하하하.”
다시 생각하니 끔찍했는지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요. 진짜로 독살을 하려면 경계심을 풀어놓게 한 다음에 독약을 쓰지 않을까요?”
“뭐? 하지 말게 방금 소름 돋았네.”
“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죠.”
“농담도 그런 말 하지 말게.”
크억!
빠직! 기장님과 박정기가 들소 바위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야! 그런거 하지마~]
[트림이 나오는 걸 어떻게 해요.]
[아무튼 하지마. 십년감수했네.]
어제 화장실에서부터 구박을 당한 들소 바위는 의기소침 해졌다.
“왜 안 드세요.”
“체할 것 같아서 그만 먹어야겠네.”
“그럼 물 좀 드세요.”
“아니,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네.”
박정기도 흐름이 끊기자 별로 밥맛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
수저를 내려놓자 청년들이 좋아라 하며 음식을 쓸어 넣기 시작했다.
‘뭐야? 이 자식들 눈칫밥 먹었던 거야?’
앞으로는 청년들과 따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그 시각 대왕대비 처소에서 김좌근이 독대를 청했다.
“들라 하시게.”
“네이~”
상궁이 문을 열어주자 김좌근이 들어왔다.
절을 올리고 꿇어앉으니 누이인 대왕대비가 다정하게 말했다.
“편히 앉으세요. 그래 갔던 일은 어찌 되었소?”
“미국에서 온 자들은 모두 일곱 인데, 우두머리 색목인이고, 야인이 다섯 명 그리고 조선 사람 같은 내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내관은 우리말을 아주 잘했습니다.”
박정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자가 되고 말았다.
“어찌 타국에 내관을 보낸단 말이요?”
“아마도 조선말을 잘해서 따라 온 것 같습니다.
"통변을 하러 왔구만."
"네! 그런데 지위도 상당히 높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뭐라 하던가.”
김좌근은 박정기와 나눴던 얘기들 중에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해서 말씀드렸다.
“동쪽으로 수 만리 먼 곳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땅은 조선보다 넓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물이 너무 많아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약을 팔면 들소를 잡아서 가죽과 고기를 싸게 팔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싸게 판다는 것인가?"
"돌소 한 마리에 1냥을 받겠다고 합니다."
김좌근은 소 한 마리에 1냥을 떼어먹겠다는 것이다.
"지금 소 한 마리가 20냥 하는데 1냥이면 쌀 대신 고기를 먹겠다고 하겠군."
"맞습니다. 그 나라는 일 년 내내 고기만 먹는다고 합니다."
"허허, 쌀 한 섬이 5냥이니 고기보다 비싸구나."
"고기를 먹어봤더니 그 맛이 조선소보다 맛있습니다."
"어찌 먹어 보았는가?"
김좌근은 예쁜 보자기에 쌓인 소반을 내밀었다.
“멀리서 가져오면 상하지 않느냐 했더니 직접 먹어보라고 고기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요리해 먹어보니 소고기보다 부드럽고 맛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고기로 요리한 것이니 들어보십시오.”
기미상궁이 소반을 감싼 천을 벗기고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었다.
“드셔도 되겠사옵니다.”
“오 그래? 이것이 미국의 고기란 말이지.”
“어떻습니까?”
대왕대비는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맛은 괜찮네, 그런데 이 고기를 얼마나 가져올 수 있겠는가?”
“미국에 있는 들소를 다잡으면 조선 백성 모두가 10년 동안 고기만 먹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다는 말인가?”
“네 오죽하면 들소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김좌근은 들소 숫자 만큼은 제대로 아뢰었다. 화약을 얻어야 하니까.
“그럼 사냥꾼도 많이 필요하겠군.”
“그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쪽에 야인들이 살고 있는데 오로지 사냥만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약만 충분하면 고기와 가죽은 얼마든지 들여올 수 있습니다.”
모든 군주의 마음은 백성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다.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굶어 죽는 백성이 있다고 하여 시름이 많았다.
그런데 고기를 무한정 들여올 수만 있다면 백성들의 칭송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실어오는 방법이나 물량 같은 기술적인 부분은 아녀자인 대왕대비가 알 수 없었다.
대왕대비는 자신의 치세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화약만 주면 된다.”
“농사지을 사람도 보내 달라 합니다.”
“백성을 고기와 바꿔 먹으란 말이냐?”
대왕대비는 언성을 높여 김좌근을 꾸짖었다.
“아이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마.”
“그럼 무엇이란 말이냐?”
“농사지어서 쌀을 싸게 팔겠다고 합니다.”
“흐음! 그렇다면 생각해볼 문제군.”
김좌근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산전수전 다 격은 누님이다.
보통 사내는 감히 대보지도 못할 정도로 강단이 있다.
“화약은 안된다고 하니, 그럼 왜 나라로 가겠다고 하는 걸 간신히 잡아두었습니다.”
“그리 협박을 하더냐?”
“아이고, 협박이 아니고 그만큼 급하다는 겁니다. 마마.”
“왜 가 어디 옆집인 줄 아는가?”
“이양선은 날아서 하루에 3,000리를 간다고 합니다. 왜 까지 하루면 간답니다.”
“어찌 그런 배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드디어 때를 잡은 김좌근이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사람을 보내서 기술을 배워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농사꾼과 대장장이가 필요하다고 하니, 눈치 빠르고 재주 좋은 놈들을 끼워 넣으려고 합니다."
"오호! 첩자를 심어 놓겠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사람을 계속 보내보면 무엇이든 나오지 않겠습니까?"
대왕대비의 생각도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래 누구를 보낼 것이오?”
“일단은 저희 노비중에서 눈치 빠른 자들을 보내고, 천천히 사람을 모아봐야겠지요.”
대왕대비는 곰곰이 생각했다.
막내는 어려서 고집이 세고, 욕심이 많아 집안의 걱정거리였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덮고 넘어갔다.
그래서 형님들과 달리 벼슬도 미관말직이다.
벼슬을 높여 주었다가 물의를 일으키면 집안의 체면에 먹칠을 할까 우려했다.
생각을 정리한 대왕대비가 조건을 걸었다.
“내 군기시 장인과 몇 사람을 따로 보내겠다. 그리하겠는가?”
“마마께서 명하시면 불 속이라도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 이 사안은 대전에서 논의할 것 없이 동생이 전결해서 처리하도록 하세요.”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어허! 경거망동 하지 말고, 신중히 처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마마.”
궁궐에서 나와 집으로 온 김좌근은 집사와 마름들을 불러 들였다.
박정기가 요구한 내용들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오늘 중으로 착오도 없이 끝내 거라.”
“네 알겠습니다.”
성격이 워낙 폭급한지라 지시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 *
대왕대비 처소에 초립에 홍색포를 입은 별감 하나가 꿇어 앉아있다.
“내, 자네를 부른 이유를 알겠는가?”
“모르겠사옵니다.”
“자네가 용인 김진사의 처조카 아닌가?”
“어찌? 송구하옵니다. 맞사옵니다.”
최광용 별감은 요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용인사는 이모가 천주학을 믿는다는 고변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신 또한 어려서 천주학을 배웠기 때문에 국문이 열리면 빠져나가기 힘들다.
하지만 어디에서 손을 썼는지 공론화 되지 못하고 수면 아래 머물고 있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30년 전에 천주교도 300여명이 순교하는 신유박해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에 계속된 탄압에도 끈질기게 천주학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이젠 국가적으로 크게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동 김씨 가문은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이었고, 대왕대비 또한 우호적이었다.
안동 김씨나 시파는 천주학을 믿거나 옹호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풍양 조씨 가문과 벽파는 천주학을 탄압해서 시파를 몰아내려고 했다.
두 세력 간의 싸움에서 1승 1패, 하지만 다시 안동 김씨와 순원왕후가 득세하는 시점이다.
정권을 잡은 지 고작 1년 만에 천주학 고변이 들어오니 참으로 난처한 입장이다.
“그래서 내 자네에게 밀명을 내리겠네.”
“넵! 성심껏 따르겠나이다.”
“여기를 나가자마자 용인으로 내려가서 김진사의 식솔들과 자네의 가족들을 데리고 동재기나루터로 가거라.”
“그 이양선이 있는 곳 말이 옵니까?”
“그렇다. 내, 손을 써 놓았으니 이양선을 타고 떠나 거라.”
“망극하옵니다. 대왕대비 마마.”
“어서 떠나 거라.”
“네. 물러 가겠나이다.”
큰절을 올리고 밖으로 나오자 상궁이 마패를 내밀었다.
말이 5마리 그려진 마패였다.
최광용은 다시한번 큰절을 하고 궁을 빠져나왔다.
부인에게는 가산을 정리해서 아이들과 동재기나루터로 오라고 말해 놓고 급히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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