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여복
76화, 호텔 같은 우리 집
밤을 새워 난상 토론을 했으나 새벽에 리셋된 박정기는 컨디션이 좋아졌다.
궁녀들이 이사를 나가고 그 자리는 기술자들의 숙소로 사용할 예정이다.
궁녀들 이삿짐이라 봐야 괴나리봇짐이 전부이기 때문에 아침 일찍 끝이 났다.
호텔 같은 집 입구에서 상궁나인들을 지휘하는 장 상궁을 만났다.
장 상궁 때문에 아담해야 할 집이 이런 모양이 돼버렸기 때문에 박정기는 화가 나있는 입장이다.
“장 상궁님 빨리 시집이나 가세요.”
“네에~ 숙고해 보겠습니다.”
지은 죄가 있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장 상궁을 흘겨보고 4층으로 올라가니 승무원들이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주무셨어요?”
“첫날부터 외박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
“맞아요. 첫날인데.”
“누구랑 있었어요?”
여 승무원들의 바가지에 머리가 지끈했다.
“시청에서 회의했다.”
“무슨 회의를 밤새워 해요.”
“다른 사람은 생각안하세요?”
승무원들의 타박에 심신이 피곤해졌다.
‘10가지 복중에서 여복이 제일 안 좋다더니, 피곤해서 못살겠구나.’
잔소리를 5배 들어야 하는 박정기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희들 짐 빼서 3층으로 내려가. 여기는 나 혼자 지낼 거니까.”
“어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빨리 안가? 제일 늦게 가는 놈은 죽는다!”
“갑자기 그러시는 게 어디 있어요?”
“그래요. 이유를 말씀하셔야지 어른이 생떼를 쓰면 되겠어요?”
어르고 달래는 승무원들에게 기가차서 소리를 질렀다.
“니들이 잔소리를 해대니까 그렇지! 응? 도대체 니들이 뭔데 잔소리질이야?”
“몸이 상하실까봐.... 그래서.”
“걱정이 돼서 그런 건데....”
“히잉~”
박정기는 확실히 군기를 잡기위해 한 번 더 큰소리를 쳤다.
“시끄러 다 꺼져! 빨리!”
“넹~”
“어머 어떡해.”
“멋있다~”
“무서워~”
승무원들이 우르르 몰려나가고 한적해지자 실내를 구경했다.
좌우로 긴 건물에 가운데만 4층이 있고 양쪽으로는 테라스가 넓게 만들어져있다.
테라스 위에는 지붕만 있고 벽이 없어서 비와 햇빛은 막아주고 바람은 시원하게 잘 통했다.
호수 쪽 테라스에서 바라보니 비행기가 내려다보이고 호수와 멀리 시에라 산맥이 잘 어울려 보기에 좋았다.
“햐~ 삼겹살 구워먹기 좋겠다. 아주 잘 만들었네.”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바람을 쐬고 실내로 들어오니 넓은 침실에 10명이 자도 될 만큼 큰 침대가 있었다.
“무슨 침대가 방만해? 이건 오버다. 내가 황제도 아니고~”
중간 계단과 복도를 지나 맞은편으로 가자 넓은 응접실이 나왔다.
“가구를 채우려면 유럽에 몇 번 다녀와야겠는걸.”
테라스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나가자 요새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구조를 잘 만들었네. 역시 호텔건축 전문가라 그런가?”
방안을 자세히 구경하니 자잘한 공간이 잘 갖춰져 있어 당장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특히 화장실이 압권이다.
비행기 화장실을 참고했는지, 나무로 정교하게 깎은 좌변기가 있고, 품질 좋은 나무를 이용해 욕조도 만들어 놓았다.
표면처리를 어떻게 한 건지 반짝반짝 광이 나고 나뭇결이 살아있어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명품 가구처럼 만든 변기와 욕조를 보고 있자니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와~ 대박! 나무로 이게 가능해?”
박정기는 항아리 기술자를 통해 변기를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무변기에 홀딱 반해 버렸다.
‘샘 스테인씨에게 좋은 선물을 줘야겠는 걸.’
똑! 똑! 똑!
“누구세요?”
“크음! 상궁 장가입니다.”
“어? 장 상궁님 어쩐 일이십니까?”
장 상궁은 얼굴이 달아올라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뭔데 저러는 거야?’
“편안하게 말씀해 보세요?”
“그것이 나인들과 상의해보니~ 그게~”
‘어휴~ 명 짧은 놈은 다 듣기도 전에 사망하겠다.’
“그게?”
“그러니까 그게~ 대장님께서~”
“제가요?”
“네 대장님께서 연분을 찾아주시면 따르겠다, 합니다.”
“제가 연분을 찾아줘요? 연분이 뭔데요?”
장 상궁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박정기의 고개가 좌로 기울어 졌다.
‘연분이 뭐지? 연지곤지? 화장품인가?’
“짝을 정해주시면~”
“아! 아~ 중매를 서라는 말씀이군요?”
“예에~ 저희가 대이또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음~ 알겠습니다. 제가 주선을 해보죠. 대신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저에게 미리 언질을 달라고 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궁님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장 상궁이 내려가고 조금 있으니, 승무원들이 올라와 문틈으로 박정기를 살폈다.
“왜?”
“아니예요.”
“히끗!”
“에구머니.”
호통을 치자 기겁한 승무원들이 도도도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히히히 이번 기회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야겠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낸 박정기가 요새 아니, 연구단지로 들어갔다.
기술자들이 모여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토론하고 계십니까?”
“대포를 어떻게 만들까 상의 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깎아서 만들게요?”
테이블 위에 굵은 황동 기둥이 놓여있었다.
“네 그런데 설비가 완성이 안돼서 손을 놓고 있습니다.”
“무슨 설비요?”
“공작기계용 증기기관이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음, 얼마나 걸리는 데요?”
“한 달 이상 걸릴 겁니다.”
박정기의 고개가 좌로 넘어갔다.
‘그럼 한 달간 논다는 말이야?’
남들 노는 꼴을 못 보는 박정기, 뭐가 문제인지 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딱히, 방법이 없습니다.”
“돌릴게 뭡니까?”
사람들은 다른 건물로 안내를 했다.
“이거 선반이군요.”
“네, 대포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겁니다.”
“이거만 돌리면 되는 겁니까?”
“네 이것만 있으면 다 됩니다.”
박정기가 선반 뒤쪽에 붙은 벨트 풀리를 돌리자 척이 회전했다.
“여기에 손잡이를 달 수 있습니까?”
“그거야 금방 달 수 있습니다.”
“직접 돌리시게요?”
“네 한번 해보죠.”
기술자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만류했다.
“그게 사람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작업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을 돌려야 하는데, 말도 지쳐서 쓰러집니다.”
“그래도 한번 손잡이를 달아줘 보세요.”
“자네, 가서 손잡이 깎아오고 자네는 여기에 철봉을 끼워볼게.”
“네 알겠습니다.”
기술자들은 풀리에 쇠 봉을 튼튼히 고정시키고 거기에 구멍 뚫린 손잡이를 끼웠다.
“금방 만드시네요.”
“이런 건 일도 아니죠.”
확실히 기술자들이라 손재주가 남달랐다.
박정기가 손잡이를 잡고 휭휭 돌려보았다.
끼익 끼익 끼익 끼익 끼익 끼익
“여기에 기름칠 좀 해주세요.”
“아이고 참! 안된다니까요.”
“일단 기름칠하고 재료를 세팅해 보세요.”
“안되는데, 억지를 부리시네.”
박정기의 억지에 못 이겨 기술자들이 황동기둥을 척에 끼워 고정하고 스핀들을 센터에 맞춘 다음 심압대를 강하게 조여 작업준비를 마쳤다.
“준비는 했습니다만 지금이라도 그만두시는 게....”
“일단 해보고요. 왼쪽으로 돌리나요? 오른쪽으로 돌리나요?”“
“참나! 오른쪽입니다.”
“그럼 갑니다.”
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
찌익 찌익 찌익 찌익 찌익 찌익 칙 칙 칙 싸~~~~~아~~~~~악~~~~~~
황동 껍데기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더니 잠시 후 제대로 깎이기 시작했다.
-와아아~
-된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인간 증기기관이다.
-그럼 증기선도 되는 거 아니야?
-설마 배까지 움직일까?
박정기는 기술자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 배의 스크류를 돌려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30분을 돌리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에이씨,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고 미치겠네.’
시작하지를 말았어야 했다.
큰소리 쳐놓고 가오 떨어지게 이제와 멈춘다면 무슨 개망신인가?
힘은 부치지 않는데 이놈의 땀 때문에 자꾸 눈 속으로 들어가서 따끔거렸다.
“헉 헉 헉 헉 헉.......”
“이제 잠깐 쉬십시오.”
“아니요, 괜찮습니다, 더하세요.”
“그게 아니고..... 이게 마모돼서 다시 갈아야 합니다.”
기술자가 공구 날을 꺼내서 보여줬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것처럼 보였지만 아까부터 힘이 부쩍 더 많이 들어갔다.
“휴~ 그래서 더 힘들었군요.”
“아 죄송합니다. 미리 갈았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그래도 이게 제일 좋다는 건데 이렇습니다.”
“그럼 대포하나 깎는데 그걸 몇 번 갈아야 하는 겁니까?”
“글쎄요? 안 세어봐서... 수십 번 갈아야겠죠?”
‘이래가지고는 한 달 동안 졸라 돌려도 못 만들겠다.’
“저 좀 다녀올 때가 있으니까 기다리세요.”
박정기가 급히 나가자 기술자들이 속삭였다.
-도망가는 거 아녀?
-그래도 대단하지 않냐?
-말해 뭐해 이게 사람이냐?
-진짜 마녀 아닌가?
-에~이, 이 사람은 지난번부터 왠, 마녀타령만 늘어놓는 겨?
-아니면 말구~
박정기는 비행기 비상물품 중에서 큰 공구박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중에 쓸 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세요.”
“음, 좋은 물건들이군요.”
“이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소중히 다뤄야 합니다.”
“음, 이게 좋을 것 같군요.”
기술자가 고른 것은 끌이었다.
나무나 플라스틱을 파내기 위한 도구로 앞에 날카로운 날이 달려있고 뒷면은 망치로 칠 수 있도록 만들어져있다.
커다란 공구박스 안에는 드릴 날 세트와 각종 드라이버 피스세트, 줄, 끌, 망치, 펜치, 송곳, 스피너, 복스 알 세트, 육각렌치, 쇠톱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비행기는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이 있어서, 자동차의 100배인 300만개의 부품으로 제작된다.
비상공구 또한 웬만한 카센터 수준으로 준비되어있다.
“그럼 다시 해볼까요?”
“네, 준비 됐습니다.”
“갑니다.”
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
스아아아아악~~~~~~
“헉! 아니 이게~”
“뭐야?”
“우와~ 마술이다.”
“거봐 마녀가 맞잖아.”
끌날을 공작물에 가져다 대자 나무를 자르는 것처럼 숨풍숨풍 깎여나갔다.
너무나 부드럽게 깎여서 종이 자르는 소리가 났다.
“이런 일이~”
“왜? 힘이 안 들어가는 거죠? 빨리 하세요.”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헛도는 것 같은데~”
“잘 돼도 너무 잘 되고 있습니다.”
대포의 외형을 깎는데 한나절 만에 모두 끝냈다.
박정기가 그려준 스케치보다 더 잘나왔다.
“오! 모양은 제대로 나왔군요.”
“네, 모두 시장님 덕분입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속 파내는 것은 내일 하기로 하죠.”
“네 힘드셨을 텐데 푹 쉬십시오.”
박정기는 다시한번 강조했다.
“이 공구들은 생명처럼 다뤄야 합니다. 아시겠죠?”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저는 먼저 갑니다.”
“살펴 가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만약에 말을 안 들으면 호수에 집어넣고 전기로 지진다. 진짜로.’
기술자를 남겨놓고 시청의 부시장실을 찾았다.
“시장님! 어서 오십시오.”
“으응? 소피아 여기서 뭐해?”
“네, 저는 부시장님 비서하고 있어요.”
“그래? 일은 할 만 하고?”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오랜만에 보는 소피아가 밝아져서 좋았다.
소피아가 내주는 차를 마시고 회의 테이블에 앉아 톰에게 지시를 내렸다.
“톰! 좀 있으면 여름이니까 야유회를 기획해보자.”
“야유회가 뭔가요?”
“한번도 안 해봤어?”
톰과 소피아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든다.
‘에구 불쌍한 것들, 그 빌럼인지 빌어먹을 놈인지 머리통을 날려버렸어야 했는데.’
남매를 노예처럼 부린 한스 빌럼과의 결투에서 어깨를 쏜 게 후회되는 박정기다.
“휴일에 가까운 곳에 가서 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게임을 하는 거지.”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여기는 매일 보는 곳이니까 분위기가 안 살잖아.”
“밖으로 나가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업무도 늘어날 텐데요.”
모든 것을 업무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는 톰에게 박정기는 이번기회에 똘똘한 처녀를 구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해야 해,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냐?”
“고기도 먹잖아요.”
“아이고 융통성 없는 부시장아! 그냥 해!”
“네 알겠습니다.”
박정기는 아예 축제를 만들어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이름을 리노 축제로 하고, 참가 인원은 처녀 총각으로 제한해.”
“홀아비는요?”
“아~ 그건 나중에 따로 하자.”
“노예도 참가하나요?”
“아니! 응~ 지위나 기술력이 높은 사람으로 200명 안쪽으로 선발해.”
“여자는 어디 있어요?”
“관사에 살던 사람들이 참가 할 거야.”
“그럼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 되겠군요?”
“그렇지 그게 핵심이야.”
“저도 갈래요!”
신호등도 안 키고 소피아가 훅 들어왔다.
“응? 소피아도?”
“네! 저도 나이 먹기 전에 시집가야겠어요.”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고르면 되잖아?”
“제가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요.”
‘순박한 건지? 아니면 시대가 그런 건지? 중매가 아니면 시집도 못 가게 생겼다?’
박정기는 하는 김에 연애 문화를 만들자고 작정했다.
‘사람이 살면서 데이트도 하고 해야지, 무슨 재미로 살아?’
정작 자신은 여자에 대한 피해 의식으로 데이트도 못하면서 남 걱정하는 박정기다.
“프로그램은 내가 더 생각을 해서 짜볼 테니까. 부시장은 소비될 음식과 필요한 자재들을 뽑아봐. 소피아도 도와주고.”
“네~ 그런데 뭐하실 건데요?”
“남자 여자 함께 어울려서 게임하고 노는 거지.”
“아이 쑥스럽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소피아.
‘너 도대체 뭘 상상을 하는 거니?’
박정기는 부시장과의 미팅을 마치고 호텔 같은 집으로 돌아왔다.
선반을 돌리느라, 땀 범벅이 된 옷을 벗고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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