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재벌가 상속녀도 보이스피싱을 당한다
월야그룹 상속녀 하주연이라고 스마트폰을 안 쓰는 게 아니다.
“오늘도 전화가 쉬질 않네. 휴.”
하주연은 월야그룹 [의장실] 소파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우우웅!
고급 이탈리아제 탁자 위, 스마트폰이 연신 울린다.
화면에 떠오르는 이름은 월야 지주사 대표이사, 최경민이다.
본래는 부회장 하무식 라인을 탔다가, 그룹의 최고위자가 바뀌면서 황급히 하주연에게 충성맹세를 했던 임원이다.
보통은 이런 경우 하주연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보고도 가뭄에 콩난듯 하기 쉽다.
그러나 최경민은 너무 연락이 많이 와서 골치다.
“분명히 중요하지 않은 보고는 하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최경민 대표도 불안한 거겠죠. 회장님.”
“김비서, 나 회장님 아니라니까? 의장직도 할아버지가 깨어나시면 다시 물러날 거야. 빨리 깨어나셔야 할 텐데.”
하주연 옆에 시립해 있던 비서, 김유린이 냉정한 태도로 말했다.
“회장님, 그건 어려운 거 아시잖아요.”
김유린은 단순한 의장 비서는 아니다.
오래된 재벌쯤 되면 대대로 [사용인]으로 봉사하는 가족들이 생겨나기 마련.
그러다 월야그룹에 취직하는 인원도 제법 있다.
김유린 비서도 그중 하나로 하주연이 이사회 의장이 될 때, 비서로 끌고 왔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사이라 하주연도 믿고 속내를 말하는 편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 김비서는 자기 조부님이 돌아가시게 될 거 같다고, 누가 말하면 좋겠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공적인 문제입니다. 월야그룹 사원 20만 명의 인생이 걸린 사안이라구요.”
“됐다구. 나보다 할아버지가 훨씬 잘하실 텐데. 돌아오시기만 하면.”
문득 하주연이 낯을 흐렸다.
“고모들이랑 싸울 일도 없을 거고.”
소파 뒤로 의장의 사무용 책상이 있다.
책상 위는 아주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유독 서신들이 눈에 띈다.
비서 김유린이 시선을 돌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내용증명. 상속분 회복을 즉각 이행하지 않으면, 소송을 진행하겠음.〉
하명희가 보내온 내용증명이다.
현재 월야그룹 지주사의 최대주주는 단연 하주연이지만, 그건 [상속]을 통해서다.
그러니 다른 가족들은 다들 상속 재분배를 요구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중이었다.
김유린 비서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정말 다들 난리군요. 정당한 상속인이 회장님이란 건, 화성그룹 한강민 변호사가 모두 설명했을 텐데요.”
“그것도 화성그룹이 우리 집안에 개입하는 거라고 난리야. 내 출생에 문제가 있으니, 균분상속해야 한다나?”
“법 무서운 줄 모르는 분들이에요. 욕심내다가 부회장님도 깡패랑 같이 감옥 가는 꼴을 봤으면서!”
아주 차갑게 화를 내던 김유린이 냉정하게 사과했다.
“사죄드립니다. 회장님.”
하주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김유린도 하주연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보아온 일가 친척들이 서로 싸우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게다가 하주연은 양부든 친부든 아버지도 없는 신세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가족과 법으로 싸워야 한다니, 서글프기 그지없다.
“정말, 김비서는 내 비서가 아니라 감사를 해야 할 인재야. 혹시 로스쿨이라도 보내줘?”
“전 회장님 모시는 게 더 좋답니다. 옛날부터.”
“됐거든? 어머.”
문득 스마트폰이 다시 울려 돌아보던 하주연이 눈을 크게 떴다.
“무휼이가 전화가 왔네?”
순간, 김유린이 하주연을 막아섰다.
“함부로 받지 마십시오. 음모일지도 모릅니다.”
“김비서. 그만해.”
“회장님, 하무휼 군은 사실 회장님 동생도 아니고. 또한 상속분쟁 상대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무휼, 하주연의 이복동생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족관계등록부상 관계다.
실제로 유전적으로 따지면 복잡하게 꼬인 [사촌]쯤 된다.
그래도 하주연에게 하무휼은 동생으로 알고 살아온 가장 가까운 가족이다.
일순, 하주연이 낯을 굳혔다.
“김유린, 그만하라고 했어.”
결국 김비서가 한 발 물러났고 하주연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응, 무휼아. 무슨 일이야?”
그런데 스마트폰 너머, 급박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나 큰일 났어! 돈 3천만 원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3천만원, 크다면 크지만 사실 하주연에게는 그리 큰 돈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집안에서 살인사건을 겪었던 하주연은 하무휼의 급한 목소리만 듣고도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지금 당장 송금할게. 어디로 하면 돼? 응?”
곧이어 3천만 원이 송금되었다.
아주 정체 모를 계좌로.
***
당연히 식사를 할 때는 스마트폰은 주머니에 넣어놓고 보지 말아야 한다.
“요새, 혹시 하주연 회장이랑 연락해?”
그러나 스마트폰이 막 사회에서 붐을 일으키던 2010년대.
저마다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을 놓고 시선을 떼지 못하던 게 일상풍경이다.
10년을 이미 살아본 나유신은 자유롭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질문이 갑자기 불쑥 나올 때는 차라리 스마트폰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야? 사건 뒤풀이 차 밥 산다고 불렀더니.”
“사람이 안 하던 짓하면 수상하지. 네가 이렇게 레스토랑으로 날 부르다니, 전에 없던 일이잖아.”
“그거야 지금까진 단 하루도 쉴 날이 없었거든.”
레스토랑 테이블 맞은 편, 아주 화사하게 웃으며 백희진이 물었다.
“바하마에서 하주연 만날 때 빼고 말이지?”
이곳은 강남 프랑스 레스토랑.
아무리 나유신이 돈을 잘 벌어도 쉽게 오기 어렵다.
왜냐면 예약제라 그냥 오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어서다.
그런데 날잡아서 데려온 백희진이 하주연을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주 찔리는 게 없는 건 아니라서, 나유신은 더욱 버럭 소리를 냈다.
“안 만나. 연락 안 해. 아무 사이도 아냐!”
“그래? 그럼 다행이구.”
“다행은 또 뭐야? 하주연 씨가 무슨 흉악범도 아니고.”
그러자 백희진이 여전히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왜, 연락 못 해서 아쉬워? 지금이라도 연락 받고 싶은 거야?”
누가 검사 아니랄까 봐 진술에서 허점을 찾아내는 건 탁월한 모양이다.
다만 나유신은 바하마에서 [사고]를 친 후, 한 번도 하주연에게 연락한 적이 없다.
사실 너무 바빠서 생각할 틈도 없었다.
“너 요새 왜 그러냐? 여기 예약 못 하면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곳이야. 일류 프랑스 요리사가 요리하는 곳이라고.”
“난 식사보다 네가 더 중요한데?”
“뭐?”
백희진이 여전히 빤히 나유신을 보다, 낯을 살짝 붉혔다.
“이상한 사람 만나서 신세 망치는 건, 못 봐줘. 하주연은 위험한 사람이라구.”
순간, 나유신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백희진이 이걸 왜 걱정할까?
나유신이 신세를 망치든 말든, 백희진이 직접 타격을 입는 건 없다.
기묘하게도,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억누르다 나유신이 물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어, 글쎄? 동기사랑?”
“애초에 너 학번은 내 후배인 거 잊었냐?”
사실 나유신은 월반을 거듭했기 때문에 백희진보다 한참 선배다.
만약 군대를 다녀온 게 아니었다면 검사로 동기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찰나, 백희진이 낯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그럼 선배 사랑이라고 하든가! 하여간! 사건 관계자랑 사적만남 가지면 안 되는 거야!”
그때 스마트폰이 대답하듯 울렸다.
-우우웅.
슬쩍 꺼냈을 때, 나유신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바로 하주연의 연락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지금껏 한 번도 연락이 없다가 오늘 올 건 뭐란 말인가?
“사적 연락 안 한다며?”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날카롭게 묻는 백희진에게 나유신이 소리쳤다.
“안 받아! 식사에나 집중하자고.”
아주 부드러운 스테이크가 고무줄 씹는 맛으로 느껴지는 저녁이다.
***
그러나 재벌 회장 상속녀쯤 되면 단순히 사적 이유로만 전화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사건 제보를 안 받으면 어떡하냐? 나한테까지 연락이 왔잖아. 위에서.”
다음 날, 노담지검 형사 3부장 신수겸이 호출해서 한 말이다.
아무리 재벌회장이라도 사적으로 검사에게 사건 제보를 하는 것도 문제긴 하다.
그렇지만 대체 무슨 사건이길래 나유신에게 직접 연락했을까?
“무슨 일인데요?”
“월야그룹 이사회 의장님께서 보이스피싱을 당하셨단다.”
“뭘 당했다구요? 하주연 씨가?”
나유신이 어이없는 얼굴로 되물었지만, 신수겸이 진지하게 말했다.
“보이스피싱 사기. 뭐, 금액은 소액이라는데, 재벌회장도 당했다고 윗선에서 난리야. 그래서.”
신수겸이 슬쩍 발령문서를 내밀었다.
“나검보고 민생 TF로 오라는데?”
민생 수사 특별 테스크포스.
새로 총장이 된 장사성이 야심차게 미는 임시 특별조직이다.
허나 나유신은 분명 서울로 가는 걸 거절한 바 있다.
“아니, 그게 무슨.”
그러나 나유신이 거절할 일은 없었다.
[보이스피싱 사기 사건. D-44. 해결하지 못하면 죽음.]
황금문자의 새로운 시한부 알림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보이스피싱 사건으로.
- 작가의말
* 새로운 사건 시작입니다. 이번에는 보이스피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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