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정오판정으로 오풍제지 주가조작을 발견하다
아직, 나유신은 살아있다.
“헉! 진짜지? 안 죽었지? 날짜 지났는데!”
그리 크지 않은 노담지청 앞 원룸.
나유신이 식은 땀에 젖어 벌떡 일어났다.
부임 후 한 달.
황금문자가 가장 처음 선고한 시한부 날짜가 지난 다음 날이다.
물론 부패검사 이충우, 그 다음 뇌물 의원 엄상전을 날려버리며 시한부 퀘스트는 끝났다.
그렇지만 시한부 선고의 충격은 엄청나다.
오늘도 꿈에서 봤을 정도다.
눈앞에 황금문자가 변동 없이 번뜩이는 걸 확인한 후에야, 나유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음 미션, 아니 퀘스트가 주어지기 전에는, 죽지 않아.”
새로운 퀘스트는 아직 미부여 상태다.
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겪었다.
언제든 예상하지 못했을 때 퀘스트가 주어진다는 것을.
세수를 하며 나유신은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 정리 좀 해보자.”
그동안 너무 바빠 상황을 분석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나유신은 수석 인생을 살아왔다.
비록 융통성과 응용력이 부족해 한 번 죽었지만 수석이란 그저 공부만 한다고 오를 수 있지 않다.
당연히 아인슈타인처럼 천재여야 수석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분석력.
주어진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 시험 수석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상황이라도 일단 주어졌다면 분석할 수 있다.
“일단, 난 회귀했다. 내가 혹시 정신병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기엔,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게 너무 많아. 게다가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났고.”
나유신이 냉정히 현재 자기 상황을 분석했다.
혹시 정신병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일단 황금문자 자체가 환각일 가능성도 존재하며, 환각은 정신분열증의 증상 중 하나다.
허나 그렇게 보기에는 전체 상황이 지리멸렬하지 않고 현실적이며 너무 오래 지속된다.
그렇다면 과거 회귀가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건 현대 과학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초월성]이 개입한 게 확실해. 그리고.”
아주 비합리적인 분석을 나유신이 냉정하게 내뱉었다.
“이게 증거고.”
눈앞, 황금문자가 판정 중이다.
[낙양우유, 유통기한 도과. 소비기한 이내. 식용 여부 불가.]
바로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 하나를 두고서.
“이렇게 우유가 속이는 것까지 판정하는군. 이 정오판정이라는 게.”
모든 식품은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이 다르다.
사실 10년 뒤의 세상에선 유통기한이 제도적으로 폐지된다.
해서, 소비기한이 대신하는데 이 소비기한은 식품 제공처에서 자신 있게 상하지 않는다고 장담하는 기한이다.
반면 유통기한은 원래 식약처에서 임의로 설정한 기한으로 소비기한보다 짧다.
그런데 눈앞의 우유가 명목상 소비기한 내지만, 실제로는 상했다는 얘기다.
마셔본다면 정오판정이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유신은 그렇게 바보도, 무모한 자도 아니다.
“하지만 편리하기만 한 건 아니겠지. 내게 퀘스트가 주어지면, 그때부터 시한부 일자가 정해진다. 그리고, 그 기한 내에 사건을 해결해야만 해.”
만약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이 초월적 능력이 내 목숨을 노리거나, 혹은 정오판정을 반대로 해서 날 죽이겠지. 사람 죽이는 건 쉬운 일이니까.”
역시, 나유신은 냉정하게 결론 내렸다.
물론 사람 목숨이 질기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지만 나유신의 목숨을 빼앗아 간 존재는 일개 트럭기사였다.
길 한 번 잘못 드는 것만으로도 도로 위에서 죽을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 시한부 판정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맞다.
“하지만 이걸, 주어지는 대로 끌려가선 안 돼.”
황금문자를 노려보며 나유신이 이를 악물었다.
“날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주시평이나 총장으로 충분해. 내가 그래도 수석이었는데 말야. 날 이용하기 쉬운 허수아비로 취급하고, 게다가!”
순간, 나유신의 눈에 불꽃이 튕겼다.
“내 동기 백희진을 비롯해 검사들까지 죽게 만들었지. 결국, 나도 죽였고.”
당연히 지금 황금문자를 보고 화를 내는 게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회귀 전의 생, 전생.
전생에서 나유신을 죽게 만든 [상관]들을 향한 분노다.
검찰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검사들까지 죽게 만든 자들.
다만 현재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복수는,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사건을 막는 과정에서 짓밟아 주는 건?”
문득 나유신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서렸다.
“아주 합리적이지. 그러자면, 이 능력을 내가 잡고 휘둘러야 해.”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검찰에 들어왔으니 승진을 걱정해야 했다.
선배와 틀어지면 법조인 인생 전체가 무너질까 전전긍긍했다.
세상에 대단해 보이는 사람은 많았고 늘 위축된 채 살았다.
그러나 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났다가 시한부 인생이 되자 두려운 게 없어졌다.
왜?
어차피 뭘 하든 죽기 밖에 더 할까?
그런데 항상 휘둘려 왔던 나유신을 새롭게 휘두르는 존재가 생겼다.
황금문자.
또는 그 뒤에 있는 어떤 초월자.
다시는 그저 마음대로 휘둘러지고 싶지는 않다.
“그럼, 내가 먼저 수사하면 어떨까? 기한이 혹시 패턴이 있거나 한 달로 주어지는 거라면.”
나유신이 골똘히 황금문자를 노려볼 찰나.
-삑!
문득 책상 위 놓여 있던 폰이 울렸다.
무슨 알림인 모양이다.
한데 폰이 좀 이상하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구형? 아, 스마트폰이 이제야 나오는 시기지.”
나유신은 입맛을 다셨다.
새삼 구형, 정확히는 초기형 스마트폰을 보니 실감난다.
지금 현재가 10년 전 세상이라는 것이.
그럼 과거에 숙제처럼 남았던 일들도 모두 풀 수 있을까?
상념을 떨치다 나유신은 무슨 알림이 떴는지 보았다.
“주가인가. 아, 하긴 나 회귀했지. 그럼 주식도 먼저 사도 되나? 어, 아직 검사윤리규정이, 미비하지?”
미래에는 검사윤리규정과 청탁금지법 신설로 검사의 재산 취득에 제한이 많아진다.
그러나 10년 전인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검사가 주식을 [선물]로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니까.
대가만 아니라면 뇌물이 아닌 시대다.
그러니 주식을 사고 파는 일 따위야 별 상관없다.
다만 문제가 있다.
나유신이 지금껏 주식에 별 신경쓰지 않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나유신이 알만한 회사라도 볼까 하고 주식창을 느리게 띄웠을 때였다.
[일성전자, 상승. 시대모터스, 하락]
나유신은 눈을 깜박였다.
착각인가 했는데 사라지지 않는다.
정오판정.
황금문자가 주식을 두고 [판정]하고 있는 거다.
“뭐야, 이거. 설마 오르고 내리고도 정오판정이 되는 거야? 어, 이걸 이용하면.”
나유신은 눈을 크게 떴다.
주식은 결국 상승과 하락을 이용해 돈을 버는 일종의 [게임]이다.
전문가는 그게 아니라 기업의 가치니 어쩌니 하지만, 결국 상승과 하락의 홀짝 게임이란 본질을 숨길 수는 없다.
한데 어떤 주식이 상승할지 혹은 하락할지를 안다?
그렇다면 주식 홀짝 게임에서 절대 지지 않을 수 있다.
나유신의 심장이 펄쩍 뛸 찰나.
갑작스레 황금문자가 바뀌었다.
[삑-삑-삑! 상승, 하락, 상승, 하락.]
나유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거. 등락 판정이 이상한데. 설마 벌써 고장났나?”
황금문자를 두고 농담하던 나유신이 미간을 좁혔다.
“아니야, 이건. 설마.”
딱, 하나 특정 종목에 시선이 갔을 때.
황금문자가 급박하게 변동한다.
문득 황금문자의 최종판정이 내려졌다.
[등락판정 불가. 인위개입. 오풍제지.]
이 회사 이름, 들었던 기억이 난다.
10년 전에 아주 떠들썩하게.
바로, 주가조작 사건으로.
***
아직 정식 부장이 아닌 신수겸은 나유신이 두렵다.
“야, 넌 교수 잡아먹고, 부장 잡아먹고, 검찰 선배 출신 의원까지 잡아먹더니. 이젠 나냐?”
일단 부장대행은 어디까지나 대행자일 뿐이다.
물론 염상전 의원 살인 교사 및 뇌물 사건이 성공적으로 기소되긴 했다.
해서, 승진 가능성은 높다.
그렇지만 혹시 또 다른 사고라도 터지면 당연히 부장 자리도 날아간다.
바로 그 사고를 터뜨릴 수 있는 [백발]이 눈앞에 있다.
또 다른 사건을 들고서.
사고뭉치 백발독사, 나유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뇌물 받으신 거 있어요? 적당히 받으세요, 부장대행.”
“그게 아니라! 우리가 일 처리할 게 얼만데 이딴 걸 갖고 오는 거야!”
“아니, 좀 이상한 데다, 이거 우리 [관할]에 있는 회사 같던데요?”
나유신이 가볍게 손가락으로 서류를 튕기며 말했다.
“오풍제지, 노담시 외곽에 본사가 있는 기업이잖아요.”
관할, 이를테면 담당 구역을 말한다.
사법기구에서 관할이란 모두 법원을 기준으로 한다.
검찰도 알고 보면 법원에 대칭되는 기관이라, 대부분의 검찰청은 법원 부근에 있다.
그러니까 노담지청 관할이라고 하면, 노담지청이 수사할 수 있는 지역 범위를 의미한다.
이 관할을 벗어나면 통상적으로는 다른 담당에게 넘어가기 마련이다.
다만 관할 범위와 상관없이 수사할 수 있는 부서가 있긴 하다.
예컨대 대검 중대수사부라든가 혹은 수도지검 특수부 같은 곳이다.
노담지청 형사 3부가 그럴 리는 없다.
그러니 수사하고 싶다면 지역관할이 필요하다.
한데 정말로 오풍제지는 노담지청 관할이었던 거다.
당연히 신수겸은 그게 더 싫다.
“이봐요, 유창재 계장! 여기, 이 아무나 무는 [백발독사]에게 현실 좀 가져와요!”
신수겸이 밖에 소리치자 형사 제3부 옆에 붙어 있는 사건팀에서 서류뭉치가 날아왔다.
-쿵, 쿵, 쿵!
유창재 계장과 사건팀 총무계 직원들이 가져온 서류더미.
어쩐지 한달 전, 이충우 부장이 가득 안기던 서류와 비슷한 규모다.
나유신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다 뭡니까? 설마 또 제 일?”
“너만의 일은 아니지! 이 새끼는 사기, 이 새끼는 절도, 이 새끼는 강도. 아, 이 새끼는 음주운전인데 도주한 연예인!”
“오, 그건 좀 흥미가 가네요.”
서류를 헤집으며 외치던 신수겸이 으르렁댔다.
“이런 게 우리 사건의 99프로야. 의원 잡고, 나아가 검사 잡는 일 따위는 1프로도 안 된다고. 그런데, 지금 넌 또 그 1프로를 갖고 왔어. 주가조작 의혹? 그딴 건 금감원이 하라 그래!”
신수겸이 대행으로 담당하는 부서는 노담지청 형사 제3부다.
물론 노담시는 고속성장한 신도시답게 사건이 많다.
가끔 검사나 의원까지 날아가는 수백억, 아니 수천억원이 걸린 사건도 벌어진다.
허나 기본적으로 형사 사건의 대부분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원한, 사고, 불시에 벌어지는 살인, 강도, 사기, 절도, 음주운전과 같은 일들.
그 모든 사건들을 처리해 법정에 넘기는 게 검사 본연의 직무다.
그런데 나유신처럼 걸핏하면 위험한 일만 가져오면, 검찰이 돌아갈 수가 없다.
물론 알 바 아닌 나유신은 뻔뻔하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저도 조사 좀 해보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회사, 그래프가 이상해요. 공시하는 것도 뭔가 수상하고. 아니, 제지회사가 신소재? 그래핀? 이런 걸 왜 만듭니까?”
“나도 다 해보고 하는 말이야!”
“예? 벌써요?”
조금 놀란 나유신이 되묻자, 신수겸이 콧방귀를 뀌며 서류뭉치 한쪽을 쳤다.
“이거, 주가조작 악성민원이다. 무려 150회나 민원 들어온 건이지.”
민원.
고소나 고발, 투서가 아니라 민원이다.
정식으로 형사 절차를 밟을 요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관공서가 답변은 해야 하는 서류.
공무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물론 검사도 어떤 의미에선 공무원이긴 하다.
그렇지만 검찰을 대상으로 민원을 넣는 일은 사실 극히 드물다.
왜냐면 누구도 검찰과 엮이고 싶지 않고, 사실 검사들은 정말 불이익을 줄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민원을 넣었다면 둘 중 하나다.
보통 사람이 아니거나.
아니면 보통 사건이 아니거나.
나유신이 눈을 빛냈다.
“그런데 왜 조사 안 하신 건데요?”
“고발 요건을 하나도 안 갖췄잖아. 그럼 기각도 아니고 각하야. 게다가 오풍제지가 이 동네 회사라지만, 금융범죄가 우리 관할이냐?”
“물론, 대부분 금감원이나 남부지검이 하긴 하죠.”
가볍게 옛 경험을 떠올리며 답하다, 나유신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지역 관할은 여기 노담시 맞잖아요.”
신수겸은 나유신을 보다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 독사가 가만 있지는 않을 것 가다.
그렇다면, 현실을 직접 알게 해주는 수밖에.
“그럼 마음대로 해. 단, 인지수사는 보고서 따로 작성해야 하는 거 알지? 아무것도 없으면 시말서까지 써야 할 거다!”
물론 신수겸은 나유신이 포기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그러나 나유신은 지금 간덩이가 붓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다.
“그래서, 왜 저까지 불러서 여기 오신 겁니까?”
수사관 민혁기는 당연히 불만이 많다.
일단
가 볼멘소리로 묻자 나유신이 원룸촌을 걸어가며 대꾸했다.
“이 동네가 민원인 주소라면서요.”
“아니, 검사가 참고인 부르면 되지, 왜 직접 와요?”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연락이 안 되서. 그런데 저 혼자 가기는 좀 무섭거든요.”
황금문자는 나유신에게 정보를 알려줄 뿐.
딱히 신체 강화라든가 하는 특별한 능력을 준 적이 없다.
다시 살게 된 후 운동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지만, 고작 한 달만에 약골이 강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서 나유신보다는 훨씬 건장한 민혁기와 함께 온 거였다.
아주 불만스런 표정의 민혁기를 무시한 채, 나유신이 주소지 앞에 섰다.
“계십니까? 여기, 김충선 씨 집이죠? 검찰에서 나왔는데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났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유신이 다시 문을 두들기려던 찰나.
민혁기가 나유신 앞으로 나섰다.
“잠깐, 검사님. 멈추시는 게.”
“왜 그러세요?”
“이상합니다.”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민혁기가 문을 열었다.
-슥.
열린다.
잠겨져 있지 않다.
범죄의 가능성이 갑자기 커진다.
슬쩍 고개를 디밀던 나유신이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사람이!”
중년 남자가 쓰러져 있는 게 보인다.
부패한 듯 벌레가 오가는 모습.
민혁기가 뛰어들어 상태를 살폈지만, 나유신은 주저앉아 버렸다.
“죽었어!”
그때다.
“경찰이다! 너희 뭐야! 어, 배, 배, 백발?”
문득 뒤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순경으로 보이는 이들이 보인다.
아마도 고약한 냄새가 나서 옆집이라도 신고한 걸까.
잠시간 눈을 질끈 감았던 나유신이 떴다.
이건 단순 시체발견 사건이 아니다.
“검사입니다. 그쪽, 책임자가 누구죠?”
순간, 황금문자가 떴기 때문이다.
[선택지, 오풍제지 주가조작 케이스. 시작?]
아무래도 찍은 게 맞은 것 같았다.
이 황금문자는 사건을 [주도적]으로 택하는 것도 허용한다.
- 작가의말
* 다음은 나유신의 무절차 수사지휘권 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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