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발 신입검사 나유신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 따위는 없다.
“이건, 정말, 현실이 아닐 거야. 절대로 있을 수 없어!”
물론 나유신은 현실을 믿지 않는다.
일단 눈앞에 나타난 기괴한 황금문자, 그럴 수 있다.
뇌가 문제가 생기면 어떤 환상이든 볼 수 있다.
다만 10년 전으로 되돌아오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때 비명을 지르는 나유신 옆으로 정장을 입은 남녀가 지나가며 수군댔다.
“저 백발이 뭐라는 거야, 미쳤어?”
“쉿, 조용히. 저래뵈도 이번 기수 수석이야.”
“뭐? 되게 어려 보이는데? 대체 몇 살에 합격한 거야? 군대는 갔다 왔대?”
백발.
사실 수석이니 어리니 하는 소리보다, 더욱 귀를 자극하는 소리는 이거다.
나유신의 외관으로 명확히 드러나는 특징.
새하얀 알비노 같은 머리칼.
어릴 때부터 타고난 유전적 이상이라 고칠 수도 없다.
평소 검찰에 근무할 때는 염색으로 가렸던 머리칼.
허나 10년 전에는 멋도 모르고 그냥 백발로 다니곤 했다.
그 순간 머리를 가리는 나유신의 옆에 누군가 다가와 섰다.
“14살에 대학 입학, 18살에 수도대 로스쿨 수석 입학, 22세에 변호사시험 수석, 그리고 군법무관을 다녀와서, 25세.”
단발머리 예리한 눈매의 여자가 들으라는 듯 말한다.
“검사 시험 수석 합격. 수석인생 나유신이지. 그런데 너 왜 그래?”
수군거리던 남녀가 깜짝 놀라 바삐 사라진다.
사실 남녀라고 했지만, 저들도 나유신과 같다.
법무연수원 소속 [검사시보], 곧 연수생이다.
당연히 나유신 옆에 선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유신은 여자를 돌아보다 놀라 외쳤다.
“백희진? 너 진짜냐? 살아있었어?”
“얘가 뭐라는 거야? 갑자기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고 그래?”
“아니지, 10년 전이면 살아있는 게 당연하지. 빌어먹을. 이건 꿈이 아닌 건가?”
여자 검사시보, 백희진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얘가 쓰러졌다더니, 정신이 나갔나? 병원 데려다 줘? 진짜 연수 기간에 [성추행] 사건까지 일어나고, 이번 기수 왜 이래?”
나유신은 새하얀 머리칼을 쥐어뜯다 멈췄다.
이 아픔, 결코 거짓이 아니다.
눈앞의 백희진도 결코 환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10년 전의 시간 속에서 나유신이 숨쉬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게다가 백희진이 말하는 바도 아주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성추행이라고? 무슨 말이야, 그게?”
“설마 까먹었어? 어제 교육 끝나고, 회식 있었잖아. 회식 자리에서 승은이, 아니 이승은 검사가 성추행 당했다고 난리가 났잖아?”
“엄밀히 말하면 우린 아직 임관식 선서를 안 했으니까, 합격생이긴 한데. 뭐 하여간, 범인을 못 잡았던가?”
백희진이 가볍게 웃었다.
“누가 수석 아니랄까봐 별 걸 다 따지네. 그래, 성추행. 누군가 이승은 검사시보의 신체를 물리적으로 추행했고, 아직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어.”
어쩐지 너무 생동감이 넘쳐, 나유신은 잠시 넋을 잃었다.
10년 전, 혼자 외톨이로 지내던 나유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검찰 동기.
그렇지만 10년 뒤에는 볼 수 없는 얼굴.
수상한 사건에 휘말렸다 자살했던 동기가 살아 있다.
그것도 10년 전에 나유신이 처음 맞이했던 미해결 사건과 함께.
“이승은 검사시보 성추행 사건이라.”
“뭐래. 아직 우리 검사 아니라며? 벌써부터 검사처럼 생각하지 마.”
“신고는 된 거야? 왜 못 잡았지? CCTV 없어?”
기억을 더듬으며 나유신이 묻자, 백희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법무연수원에 CCTV가 있을 리가 없잖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데.”
법무연수원은 검찰청 산하 교육기관이다.
검찰수사관, 교도소 공무원, 출입국 담당, 그리고 검사를 교육하는 곳이다.
초임 검사들은 모두 이곳에서 변신 교육을 받는다.
로스쿨 졸업생에서 무시무시한 칼잡이 검사로.
그러니 여기서 범죄가 일어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칼잡이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까.
하지만 나유신은 이를 갈았다.
“가장 안전한 곳은 개뿔! 여긴 가장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넘쳐나는 곳이야!”
“얘가 뭐래? 조용히 해! 선배들 들어!”
“듣든가 말든가!”
나유신이 복도에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대한민국 검사 놈들 다 똥이나 처먹어라! 으아아!”
백희진이 깜짝 놀라 나유신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나유신이 비리비리해도 남자인데다 악에 받친 터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 복도 끝,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나유신 시보!”
아주 부리부리한 눈의 남자.
법무연수원 교수. 유태우 검사다.
유태우 검사가 나유신을 큼지막한 손으로 가리키며 고함쳤다.
“당장 내 방으로 오게!”
검사 시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순간이다.
***
물론 죽다 살아난 나유신은 하나도 안 무섭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유급일세!」
나유신이 코웃음을 치며, 연수원 숙소에 누웠다.
“시발, 어차피 죽을 거면 유급이 대수냐.”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은 현실이다.
그런데 현실이라면 10년 후, 나유신은 초대형 사건에 휘말려 죽는다.
사실은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떠 있는 황금문자가 아주 선명하다.
나유신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이거 진짜인가?”
손에 만져지는 것은 없지만, 글자는 여전히 잘 보인다.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죽음. 기한은 3일.]
누가 이런 문자를 스마트폰으로 보낸다면, 협박죄로 처넣었을 내용이다.
“어떤 개새끼가 날 두고 장난치나 싶지만, 그것도 아닌 거 같고.”
허공에 문자를 띄우다니 듣도 보도 못했다.
그것도 나유신이 다니는 곳마다 시야에 보이게 만든다?
도저히 현대 과학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10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하지만 나유신을 괴롭히는 문제는 따로 있다.
“그런데 범인이 주시평이라고?”
이 황금문자의 정체가 뭐든 나유신에게 주어진 정보는 2가지다.
하나, 법무연수원 성추행 사건의 진범은 주시평 검사다.
둘, 이 사건을 3일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나유신은 죽는다.
눈을 뜨기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에게는 아주 가혹한 조건이다.
그럼에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과거회귀란 초자연적 현상을 받아 들인다면.
만약 시간이 많다면 천천히 알아보겠지만 3일의 [시한부]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시평을 잡아 처넣으면 될까?
“그걸 어떻게 잡지? 증거도 없는데.”
증거 없는 심증 수사는 위험하다.
10년, 검사 생활 동안 누누이 들었던 바다.
문득 선배가 외쳤던 말이 떠오른다.
「예단하지마!」
순간, 나유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시발. 그래. 예단해야 해. 왜?”
예단하지 말 것.
좋은 말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자.
공정 사법 절차의 수호자인 검사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다.
나날이 수사권 폐지가 거론되는 시절이라면 더욱 그렇다.
오로지 철저한 증거 수사만이 검사의 정당성을 보증해 준다.
개소리, 그 자체라는 게 문제지만.
“난 예단 안 하다가 죽었으니까!”
나유신은 예단하지 않았다.
그 대가로 범인을 놓쳤다.
범인만 놓친 게 아니라 생명까지 잃었다.
예단하지 말라고?
그건 범인을 모를 때나 할 소리다.
“저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정말이라면.”
나유신이 눈앞에 떠오른 황금문자를 노려보았다.
진범의 이름이 있다.
정말로 진범인지는 솔직히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 모든 협박이 진실이라면, 혹은 과거 회귀가 진짜라면.
“범인은 주시평이다. 그럼, 주시평을 잡아 처넣으면.”
문득 나유신이 멈칫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잡아넣지?”
증거가 없으면 대체 어떻게 진범을 잡을 수 있을까?
***
나유신은 법무연수원 지하 식당, 식판을 노려보는 중이다.
“너, 밥 안 먹어?”
백발이라 그 모습이 너무 도드라진다.
지나가던 검사시보들과 교수들이 수군거릴 정도다.
보다못한 백희진이 다가와 말을 걸 때까지도 나유신은 식판만 노려보았다.
“범인을 잡아야 해.”
“응? 너 승은이 좋아했니?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전혀 그런 건 아니지만, 이승은 시보 얘기라는 건 어떻게 알았냐?”
그러자 백희진이 불쑥 나유신에게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너 하나 꽂히면 멈추지 않잖아. 그러니까 알지. 그래서 내가 수석을 못했고.”
그때서야 나유신은 식판에서 시선을 뗐다.
아주 생기가 넘치는 얼굴.
예전, 발인식 때 보았던 창백한 시신이 떠오른다.
질끈 눈을 감았다 떠보니,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백희진이 보인다.
갑자기 말문이 막혀, 나유신은 헛소리를 했다.
“아, 네가 차석이었나?”
“와, 수석답게 2등은 관심도 없구나?”
“아니, 사실 난 수석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서.”
당연히 한 대 맞을 소리지만, 성격 좋은 백희진은 혀만 내둘렀다.
“와, 진짜 재수 없어! 내가 들은 말 중에 가장 밥맛이야!”
“그보다, 너 범인 잡고 싶지 않아?”
“응? 그야, 잡고야 싶지? 여자의 적 아냐. 나도 추행할지도 모르는데.”
나유신은 백희진을 빤히 보았다.
이제야 기억난 게 있다.
백희진은 나유신 다음 가는 성적, 그러니까 차석이었다.
대학 때도, 로스쿨 때도 모두 후배였지만 군대를 다녀오자 같은 나이가 된 검사 동기.
성격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검사에게는 전혀 좋은 자질은 아니지만.
문득 나유신이 입을 열었다.
“범인을 잡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 되겠지.”
“응? 어, 그런가? 오늘 수업에서 배우기로는.”
“수업이 밥먹여 주는 거 아니야! 범인을 잡아주지도 않고!”
나유신은 버럭 고함쳤다.
“중요한 건 범인을 잡아서, 처넣는 거야. 아니면 죽음이니까!”
옆에서 식사를 하던 시보들이 모두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나유신은 오늘 괴짜로 낙인찍힌 것 같다.
첫인상이 만사를 결정한다면, 그야말로 나락 감이다.
그렇지만 딱 한 사람.
백희진은 오히려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유신에게 물었다.
“와, 이렇게 사생결단인 건 처음 보네.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나유신은 심호흡을 했다.
이것은 검사로서의 수사 원칙을 버리는 일이다.
게다가 나유신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반드시 협력자가, 그것도 여성 협력자가 필요하다.
과연 성격 좋은 차석, 백희진이 도와줄까?
“그럼, 함정수사 한 번 안 해볼래?”
백희진은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한 번 꽂히면 멈추지 않는 남자.
지금 당장 눈앞에서 시한부 3일의 황금문자에 시달리는 회귀자.
아무렇지도 않게 검사들에게 배설물이나 처먹으라고 외치는 막장 검사 시보.
나유신이 목소리를 낮춰 엄청난 제안을 던졌다.
“네가 성추행범을 유인하는 거야. 성추행을 당해서.”
나유신은 결국 한 대 맞고 말았다.
- 작가의말
함정수사에는 기회제공형과 범의유발형이 있는데, 엄밀히 말해 범의유발형은 위법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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