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선 범인부터 잡고 죽자
원래 성격이 좋다는 얘기는 거절을 잘 못한다는 소리다.
“진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성추행을 당하라니! 그게 동기한테 할 소리야! 응?”
물론 동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든 해선 안 될 말이다.
하지만 나유신은 지금 뭘 가릴 처지가 아니다.
왜냐면 눈앞에서 황금문자가 계속 깜박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한부 선고를 하는 것처럼.
나유신이 볼을 붙들고 있다, 백희진에게 대꾸했다.
“폭행도 동기한테 하면 안 되지.”
“넌 어떻게 된 애가 뺨 한 번 때렸다고 지금까지 얼굴이 빨개? 안 없어져?”
“원래 멜라닌 색소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어. 그보다.”
새빨개진 볼을 문지르며 나유신이 외쳤다.
“네가 안 도와주면 절대로 범인 못 잡는다고. 좀 도와줘!”
백희진은 아주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함정수사.
이건 정식 수사관이라 해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고난이도 수사기법이다.
그런데 아직 시보에 불과한 애송이들이 함정을 판다고 뭐가 되긴 어렵다.
게다가 용의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유신은 확신하는 게 있다.
일단, 백희진은 착하고, 거절을 잘 하지 못하며, 이상하게 나유신에게 약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한숨을 쉬며 백희진이 물었다.
“너, 범인이 동기 시보들 중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저 치들 중에 범인이 될 만한 놈들도 있지. 룸살롱을 들락거릴 녀석들도 있고.”
“풉, 너무 평가가 박한 거 아냐? 그래도 대한민국 검사가 될 법조인들인데.”
법무연수원 식당, 연수생 모두가 모이는 곳.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백희진이 눈동자를 굴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쩐지 불안해졌나 보다.
나유신도 일침을 놓았다.
“검사가 원래 룸살롱에서 폭탄주란 걸 처음 만든 인종이야. 백희진 검사시보.”
폭탄주, 그러니까 소주에 양주를 섞어서 만드는 술이다.
이 폭탄주의 유래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이 국무총리를 지낸 전직 검사장이 만들었다는 학설이다.
양주나 소주만 먹어서는 취하지 않아, 룸살롱에서 섞은 게 시초라고 한다.
당연히 룸살롱이든 양주든 자기 돈으로 먹었을 리 없다.
여자와 접대와 뇌물이 오갔을 장소.
검사란 바로 그런 시대를 만들었던 집단이다.
예비 검사들이 가득한 곳에서 단호히 얘기하는 나유신을 보다, 백희진이 감탄했다.
“와, 방금 조금 멋있었어.”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아무것도 아냐.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할 건데? 함정을 판다지만 누가 범인인지도 모르잖아.”
됐다.
나유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째 맞은 건 나유신인데, 백희진의 낯이 빨개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꿈인지 현실인지 아직 분간이 안 가는 십년 전의 세상.
눈앞에 환영처럼 깜박이는 황금 문자.
그런데 상황을 타개할 첫 협력자가 생겼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나유신이 물었다.
“일단 사건상황부터 재구성해 보지. 사건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무엇이 일어난 거지?”
백희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방금 전까지 순진해 보이던 표정도 변했다.
전문가로서 훈련받은 숙련된 법조 엘리트의 얼굴이다.
“주일상목행, 그대로?”
“그대로.”
“우선 사건 피해자는 이승은, 검사 시보야. 일시는 어젯밤 저녁 9시에서 10시반 사이. 사건 상대방 혐의자는 불명. 수업을 마치고 법무연수원 내부 회의실에서 회식이 있었어. 그곳에서.”
주어, 일시, 상대방, 목적, 행위내용.
법률 판단의 기초다.
사실관계가 이 순서로 확정되며, 확정된 사실에 근거해 판단이 내려진다.
여기서 문제는 상대방.
“잠시, 불이 꺼졌을 때, 복도에서 추행이 있었던 거야.”
보통 사건을 수사할 때 검찰과 경찰이 부딪치는 장애물이 이 지점이다.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가.
항상 나유신에게 선배들이 말하던 것도 이 문제다.
예단 하지 말라.
바로, 범인이 누군지를.
“그럼 용의자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이들이겠군.”
“다들 아니래. 게다가 범행을 당한 이승은 시보도 처음에만 얘기하고, 그 다음부턴 입을 다물었어. 유신아.”
“누가 범인인지 이승은은 알고 있겠지.”
그러자 백희진이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알면서 말하지 않을 리가.”
만약 알았다면 벌써 범인이 잡혔을 테니까.
***
시보, 예비검사 이승은은 단호히 답했다.
“난, 몰라, 범인.”
마치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빠르게 도망치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보통 피해자라면 보일만한 태도긴 하다.
다만 나유신은 이승은의 눈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마치 실례가 될 정도로.
백희진이 나유신을 돌아보았다.
“거봐, 모른대잖아.”
“수사 실무 시간에 아무도 안 가르쳐줬나? 모든 인간은 거짓말을 한다고.”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
나유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희진에게 말했다.
“관계자, 참고인, 피의자. 모두 거짓말을 하지. 죄가 있든 없든 간에.”
이건 당연히 로스쿨도, 법무연수원도, 검찰도 가르친 적 없는 얘기다.
그렇지만 검사 생활 10년이면 풍월은 몰라도 알게 되는 게 있다.
만인은 거짓말을 한다.
그 크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심지어 무죄가 확실한 사람조차도.
“그래서?”
“저건 범인을 아는 얼굴이야.”
“와, 예단 쩔어. 그럼 안 돼, 나유신. 그러다 생사람 잡는 거야.”
백희진이 고개를 저으며 타일렀다.
사실 백희진 말대로 예단하는 검사들이 억울한 피의자를 양산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단하는 나쁜 시보 나유신은 멈추지 않았다.
“검사시보쯤 되는 법조인이 범인을, 그것도 성추행범을 말하지 않는다? 권력자란 얘기지.”
“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냐?”
“그 자리에 있었던 녀석들 중, 변태는 많지만.”
동기 시보들의 명예를 마구 훼손하며 나유신이 단정했다.
“권력자는 한 명이지. 법무연수원 교수, 검사 주시평.”
백희진이 눈을 크게 뜨다 주위를 재빨리 돌아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만약 누군가 들었다면 나유신이 오늘자로 연수원 퇴소조치를 당했을 소리다.
“와, 위험한 발언이야. 아무도 안 들었지?”
“나도 그 정도는 확인하고 얘기한 거야.”
“증거도 없이 어떻게 잡을 건데?”
나유신이 아주 간단히 대꾸했다.
“성추행 사건은 피해자의 지속적이고, 일관된 증언이 있다면, 증거로 채택될 수 있어.”
원래 형사사건의 원칙은 증거 우선주의다.
그렇지만 증언이 일관되고, 지속적이며, 신빙성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증인 말고는 별다른 증거가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성폭력 사건은 특히 목격자가 따로 없을 때가 많아 당사자 진술이 중요하다.
이번 케이스도 동석한 사람은 많았지만 목격자가 없으니, 상황은 같다.
“어쩐지 유죄추정의 법칙 같네. 그래서?”
“이승은 시보가 입을 열게 만들면 돼.”
“만약에 말야. 정말 주시평 검사가 성추행범이라 해도, 그렇다면 더욱 말을 못 할 텐데?”
백희진이 난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가 감히 신입 검사, 아니 시보가 선배 검사를 범인으로 몰아?”
나유신은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미쳤구나.”
“어차피 난 이판사판이라서 말이지. 도와줄 거야?”
그저 10년 전으로 [회귀]한 거라면 이러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승은이 성추행을 당했든 말든, 나유신과 상관도 없는 일.
허나 눈앞에 깜박이는 황금문자는 계속 일깨운다.
3일, 그 안에 사건을 해결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주 필사적인 나유신을 마주보다 백희진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딱, 한 번이야. 그 이상은 절대 못 도와줘.”
결국 백희진도 나유신의 위험한 [예단]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
오늘도 법무연수원은 술로 밤을 지샌다.
“와하하! 부어라, 마셔라, 죽을 때까지!”
가장 신나게 외치며 마시는 사람은 단연 주시평이다.
평소 술 마시는 것도, 시보들과 어울리는 것도, 특히 여자 시보들을 끼는 것도 좋아하는 검사다.
물론 반강제로 끌려온 시보들은 서로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어제 사고 났는데. 또 회식이야?”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넘어가기로 했잖아.”
“상부 보고는 들어갔을 건데?”
검사 시보들은 불안한 와중에도 열심히 술을 들이켰다.
일단 한국 사회에서 술은 인간관계를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다.
특히 법조계에서는 빠질 수 없는 필수요소다.
당장 눈앞의 주시평만 해도 언제 상관이 될지 모른다.
불콰하게 취해 다들 반쯤 달아오를 때였다.
“교수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후훗.”
문득 백희진이 주시평 옆에 앉았다.
그간 공부한다고 화장기 하나도 없던 얼굴이 화사하다.
옷은 어쩐지 달라붙는 차림이라 눈에 확연히 들어올 정도다.
주시평도 안면에 화색을 띄우며 백희진에게 바짝 뿥었다.
“응? 아, 우리 이쁜이! 연수생 중 제일 미녀, 백희진이군! 하하하!”
백희진은 생글생글 웃으며 술을 따랐다.
“저야 승은이보다 아니죠.”
“천만에! 승은이보다 쭉쭉빵빵! 진짜 미인이야. 그동안 서먹하게 대하더니, 오늘은 웬일인가?”
“아이, 제가 언제요. 성적 매기실 때 불공정하단 얘기 나올까봐 그랬죠.”
문득 백희진이 눈웃음을 머금은 채 잔을 들었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까 더욱 마셔볼게요.”
주시평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검사시보들이 쳐다본다는 건 이미 안중에도 없다.
특히 이승은이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는 것도.
오로지 백희진의 얼굴과 몸만이 주시평의 관심사다.
백희진이 술잔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며, 주시평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쭉쭉 들이켜. 으흐흐.”
한 잔, 두 잔, 세 잔.
어느새 소주 한 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낯이 새빨개진 백희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어지럽네. 저 화장실 좀.”
주시평은 일어나는 백희진의 모습을 보다 슬쩍 따라 일어났다.
-스윽.
이미 술이 오를대로 오른 뒷풀이 자리다.
지도교수가 일어나도 주의깊게 보는 시보나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두운 복도, 화장실로 가는 길.
복도에 비틀거리며 기댄 백희진에게 주시평의 손길이 다가섰다.
“오, 백희진 시보. 괜찮나?”
“교수님, 아, 어지러워요.”
“그래. 그러니까 말이지. 으차.”
주시평이 음흉하게 웃으며 백희진에게 손을 뻗을 때였다.
-콰직.
갑자기 누군가 손목을 움켜 쥐었다.
손길이 거센 게 백희진의 손 같지는 않다.
주시평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하는 짓입니까. 주 검사님.”
바로, 나유신이다.
나유신이 차갑게 주시평을 쏘아보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굳어버린 기분에 주시평은 눈을 깜박였다.
뭔가, 잘못됐다.
일단, 빠져나가야 한다.
“아니, 난 어디까지나 부축해 주려고.”
“추행하는 거 다 봤습니다.”
“뭐라는 거야! 지금 감히 선배 검사에게!”
주시평은 펄쩍 뛰며 고함쳤다.
사실 나유신의 말은 반만 맞다.
아직 추행에 이르지는 않았다.
다만 소란이 일어나자 시보들이 저마다 나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복도 끝에서 또 다른 [권위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체?”
유태우, 법무연수원의 실무 책임자다.
주시평 검사와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
그런데 나유신이 나서기도 전, 백희진이 재빨리 외쳤다.
“여기 교수님이 절 추행하려 했어요!”
시보들이 저마다 돌아보았다.
분명 주시평이 음흉한 눈으로 백희진을 보는 건 모두가 봤다.
허나 추행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현직 검사가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시보들이 당혹한 표정으로 저마다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착각한 거 아냐? 어.”
“설마.”
주시평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대로 가면 함정수사는 실패한다.
범인, 주시평 검사는 승승장구하게 될 거고, 설사 나유신이 여기서 죽지 않는다 해도 종국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을 사건을 벌일 거다.
나유신은 이를 악물다 시선을 돌렸다.
순간, 시보들 사이로 이승은이 보인다.
“이승은 검사!”
나유신이 이승은을 정시하며 고함쳤다.
“진실을 피할 건가?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아니면, 절대로 범인을 못 잡아!”
모두의 시선이 이승은에게 쏠렸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그런데 이틀 사이에 똑같은 일이 두 번이나 발생했다.
처음은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다시 일어난다면?
그건, 상습범죄다.
이승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또 다시 도망치려는 걸까?
“어제, 절 추행하려던 사람은 주시평 교수님이에요!”
순간, 나유신의 눈앞에서 황금문자가 바뀌었다.
[사건 해결]
살았다.
이게, 진짜 시한부 알림이었다면.
- 작가의말
<시한부 검사>는 일단 빠른 해결을 가장 우선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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