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재벌가를 노리는 간 큰 보이스피싱은 누구냐
간만에 본 상속녀는 여전히 나유신을 보며 웃는다.
“저한테 온 전화요? 그냥, 단순 보이스피싱 아닌가요? 제가 놀라서 전화드리긴 했었지만.”
사기 피해자치고는 아주 화사한 표정으로 하주연이 나유신을 맞이했다.
일반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정신적 충격이나 경제적 타격으로 가끔 자살까지 하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격차다.
과연 재벌가 금수저다운 태도랄까.
여전히 평창동 저택에 머무는 하주연 앞에 앉아, 나유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검찰에선 뭐라고 했습니까?”
“검사님이 수사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전화를 안 받아서 섭섭했지만, 그래도 수사해 주신다고 해서 기뻤는데?”
“아니, 나는 의장님의 사건만 조사하는 게 아니니까요.”
칼 같이 친밀하게 대하려는 태도를 나유신이 잘랐다.
바로 옆에 진상판 경감도 함께 있는데, 사적 관계를 강조하면 곤란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백희진도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하주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칫, 어쨌든 전 정말 깜짝 놀랐어요. 우리 무휼이가 갑자기 돈 필요하다니, 그럴 애가 아닌데 뭔가 큰일 났나 했죠.”
“보통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의심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전부 검사님 같은 줄 아세요? 게다가, 우리 무휼이는.”
문득 하주연이 낯을 흐렸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잖아요. 전 그래도 성인이 돼서 겪은 일인데.”
물론 하무휼이 엄청난 일을 겪은 건 사실이다.
일단 친부로 알던 하경진이 죽었다.
또한 조모인 이연자가 살해당했다.
조부, 하유식이 쓰러진 건 둘째 문제고 모친인 윤서희가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게다가 [진범]이라고 공표된 하대진이 어쩌면 친부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하무휼에게 누가 소상히 설명해 줬을 리는 없다.
그러나 미성년자라도 재벌가 자제쯤 되면 정보를 얻을 경로가 있기 마련이다.
이래저래 충격을 받았을 하무휼에게 하주연이 마음을 쓰는 게 이상하진 않다.
만약, 보이스피싱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갑자기 진상판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요? 겅찰 분, 성함이?”
“진상판이라고 합니다. 노담 남부경찰서 수사팀장입니다. 조모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합동수사를 한 적이 있지요.”
경찰이라기엔 너무 조폭 같이 생긴 남자, 진상판을 보다 하주연이 살짝 몸을 떨었다.
“신세를 많이 졌네요. 그런데,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요?”
어쩐지 진상판이 더 무서운 모양이다.
사실은 나유신도 이런저런 일을 겪고, 또한 황금문자의 능력을 얻지 않았다면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두 사람 앞에서 진상판이 놀라운 말을 꺼냈다.
“그 보이스피싱 전화, 하무휼 군 명의로 전화되었던 사안입니다.”
나유신은 미간을 좁혔다.
이건, 분명 수상한 얘기다.
하주연도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잠깐만요. 보이스피싱이란 거, 저는 잘 모르지만 성명불상자의 명의로 전화가 걸려오는 거 아닌가요?”
“원래는 그렇습니다. 여기 검사님들이 [전수조사]하시는 중이지만, 그래도 뭐가 안 나오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죠.”
“그런데, 대체 왜 제 동생 명의 폰으로 제게 전화가 걸려 왔다는 거죠?”
진상판이 나유신도, 하주연도 먹지 않는 다과를 집어먹으며 대꾸했다.
“냠냠, 사실 민감한 사안이라 더 캐지 않고 덮었습니다만, 하무휼 군이 직접 걸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유신이 어이가 없어 진상판을 쳐다보았다.
“그 얘기 안했잖습니까.”
“아니, 우리 패를 전부 깔 이유는 없으니까 말요.”
“검찰에 아직 정보 안 넘긴 겁니까?”
진상판은 어깨를 으쓱였다.
“검사님들은 뭐 삼합회인지 뭔지 파느라 바쁘시다며? 그래서 굳이 이 사안까지 넘길 생각은 없었소.”
물론 검찰 민생수사TF가 바쁘지 않아도 넘길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묘한 지점에서 경쟁의식을 느끼는 게 검찰과 경찰이니까.
다만 이번에는 나유신이 협조를 제안해 왔기에 입을 연 게 분명하다.
나유신은 가볍게 혀를 차다, 말했다.
“아무래도 하무휼 군을 직접 만나봐야겠는데요.”
말이 좋아서 만나는 거지, 대면조사다.
***
미성년자 대면조사는 원래는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혹시 피의자라도 변호사나 보호자 대동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한데 지금은 그저 참고인일 뿐.
또한 임의조사라 강압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
나유신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하무휼 군, 사실대로 말해주시죠.”
“저, 저는 그러니까, 폰을 빼앗겼을 뿐이에요.”
“폰을 빼앗겼다구요? 누구에게?”
그래도 진상판보다는 나유신이 덜 무서운지, 나유신을 보며 하무휼이 외쳤다.
“그러니까, 그게, 이, 이상한 사람이요!”
최소한 폰을 잃어버렸다는 핑계는 대지 않은 셈이다.
하기야 그래봤자 나유신의 [정오판정]에 들켰겠지만.
온몸을 떨고 있는 하무휼에게 하주연이 붙어 달랬다.
“무휼아. 이분들은 널 도와주려고 오신 분들이야.”
“누나, 나 진짜 아무것도 몰라. 정말로.”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 순간 하무휼이 부르짖었다.
“나, 나, 난 정말 몰라! 엄마가 한 짓도, 아저씨가 한 짓도! 난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 정말이야!”
하주연은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지금, 하무휼을 부른 것은 월야그룹 살인사건과는 전혀 별개의 건이다.
허나 그거야 수사당국의 입장일 뿐.
사건 당사자는 두 사안을 별개로 여기기 어렵다.
형사사건은 보통 사람에게 인생에서 한 두 번 겪기 어려운 충격적인 일이다.
하물며 양부모와 친부모가 엮여 있는 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일순, 하주연이 하무휼을 급히 껴안았다.
“무휼아, 그런 게 아니라.”
“누나, 나 진짜 몰랐어. 내쫓지 마. 집에서.”
“안 그래. 절대로 내보내지 않아! 넌 내 동생이니까!”
하무휼이 하주연에게 안긴 채 다급히 물었다.
“나, 누나 동생 맞지? 그렇지? 진짜 안 쫓아낼 거지?”
그저 단순히 하무휼의 발작적인 반응만은 아니다.
하씨 집안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하무휼을 남의 자식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하대진의 친자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불륜, 그것도 범죄자의 자식.
그럼에도 하주연은 하무휼을 감싸 안은 채 나유신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보았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나중에.”
“하무휼 군,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검사님!”
반면에 나유신은 백발을 쓸어 넘기며 차디찬 눈으로 하무휼에게 말했다.
“누나한테 복수라도 하고 싶었습니까? 당신은 스마트폰을 빼앗긴 게 아니라 건네줬습니다. 또한, 그 전화가 어떤 전화가 될지도 알았죠.”
정오판정, 신체감정, 감정반응.
그리고, 5초 예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하면 사람의 거짓말과 진술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하무휼처럼 어린애라면 쉬운 일이다.
“누굽니까? 당신에게 이런 일을 사주한 자가?”
하무휼은 너무나 예리한 나유신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꿨다.
“아저씨요.”
“누구죠, 그게?”
“대진이 아저씨요.”
나유신이 눈썹을 치뜰 찰나, 하무휼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답했다.
“그분이 보냈다고 했어요. 어떤 사람을. 그래서, 시킨 대로 했어요. 아니면 누나도, 나도 다 죽인다고 해서.”
하대진은 하무휼에게 친부다.
그런데 그 친부가 보낸 사람이 하무휼에게 죽인다고 협박했다.
아직 초등학생인 하무휼이 얼마나 무서웠을지는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하주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됐잖아요? 그만하세요, 제발.”
그러나 나유신은 황금문자의 정오판정을 보고 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진술은 사실이군요. 하무휼 군.”
동정심은 사건 해결에 도움이 안 되니까.
***
평창동 월야 전택에서 나오는 길, 마치 얼음덩이를 보는 눈으로 나유신을 보다 진상판이 혀를 찼다.
“영감님도 참 어지간하시군.”
“그건 사건 수사와 관계없습니다.”
“뭐, 하여간 그러니까, 이걸 오진회 두목, 하대진이 저지른 짓이란 말요?”
그런데 나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사칭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건 또 왜 그렇소, 영감님?”
“하대진은 범죄의 중대성과 월야그룹의 비공식적 요청 때문에 엄중 감시받고 있습니다. 다른 거물 범죄자들하고는 경우가 틀리죠.”
보통 거물 범죄자는 외부와의 연락이 자유롭다.
사채왕 오지후 회장이 좋은 사례다.
그렇지만 하대진은 배경이 될 만한 자들이 몰락한데다, 월야그룹 차원의 [원한]을 샀다.
동생에게는 자애로운 하주연도 하대진에게는 엄격하다.
이래저래 월야그룹 차원에서 로비가 들어갔고, 하대진과 윤서희는 누구보다 엄격하게 관리받는 중이다.
물론 듣는 진상판 경감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얘기였다.
“캬, 이럴 때는 또 거물 범죄자가 이상하게 차별대우를 받게 되는군. 유전무죄하곤 정반대인가?”
“하지만 하필 월야그룹 상속녀를 노린 이유가 있을 겁니다.”
“보이스피싱이 뭐 이유가 있겠소, 돈이지. 응?”
그때 두 사람의 앞에 소형차가 섰다.
“나유신 검사님?”
차에서 나유신을 향해 평범한데 이상하게 미모가 있는 여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잠시, 대화 좀 해보실까요?”
“누구십니까?”
“음, 이렇게 말하면 아실라나.”
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묘하게 웃었다.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같은 서초구지만, 내곡동에 있는.”
내곡동.
그러니까, 정보원이 있는 곳이다.
- 작가의말
* 다음은 “한국정보원”의 IO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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