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 그리고 아그니스
제이미 그리고 아그니스
아그니스 공주는 조금 전까지 자신을 죄어오던 죽음의 공포감이 사라지자 허탈감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른 아그니스 공주는 윌리엄 대공을 다시 업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일단 제 가족은 탈출시킬 겁니다. 성 밖으로 나가면 성군에 투항할 생각입니다."
"아이고 이런 멍청한 것을 봤나? 도대체 왜 생각이 그리 짧아?"
"네?"
"멍청이야 널 이용한 엘로이가 제대로 된 지로를 줬다고 생각해? 돌아 버리겠군."
그러자 아그니스 공주의 동작이 멈췄다.
"그럼?"
"이 통로의 끝은 반사르가의 지하로 이어져 있어 그곳에는 각성자들이 버글버글한다는 거지. 생각해 봐라. 엘로이는 반대편에서 뛰쳐나왔어. 어디서 왔을 거로 생각해?"
"아. 이럴 수가."
"노르딕의 대군이 겁이 나나? 넌 가장 유능한 사람을 외면하고 있어. 가장 믿어야 할 사람을 말이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이런 멍청한 년아! 네 남편을 믿어야지. 누굴 믿겠다는 거냐?"
세상에 자신은 공주다. 누가 자신에게 멍청한 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던가? 그건 곧 자살 행위와 같다. 일국의 공주에게 멍청한 년이라니.
그러나 이상하다. 싫지도 않고 화도 나지 않는다. 저 못생긴 난쟁이의 기세에 눌린 것인가? 왠지 그런 소리를 들어도 당연하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인지 모른다.
"저쪽은 노르딕의 오만 대군과 시몰레이크의 개인 사병 일만까지 육만의 병력입니다. 저희는 오백 명도 안 됩니다. 이건 말할 가치조차 없는 싸움이 될 겁니다. 저는 죽어도 윌리엄 대공을 그들 손에 넘기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네 남편을 믿고 그에게 의지하란 말이다. 너는 살아도 죽어도 제이미의 여자다. 공주가 아닌 아내란 입장에서 제대로 된 내조를 하라는 말이다."
아그니스 공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팬텀 가드너가의 핏줄 생각뿐이었다. 피한 방울 섞이지 않고 또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 어쩔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묶인 그런 사이었다.
아그니스 공주는 단 한 번도 제이미를 위해 아내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말이다. 그래도 제이미는 팬텀 가드너가를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가장 친한 친우에게 배신당해 하마터면 아버지와 아들까지 잃을 뻔했다. 그녀는 허리를 폈다.
"오늘 팬텀 가드너의 모든 핏줄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고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아그니스 공주는 왔던 길로 되돌아섰다.
-쾅! 콰쾅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갱도 전체가 흔들거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뭘 망설이냐? 어서 달려! 통로가 무너지는 것이 안 보이니?"
아그니스 공주는 브렌든을 껴안고 힘차게 달렸다.
그들이 다시 주방으로 나왔을 때 갱도는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아이참. 달리는 게 굼벵이보다 느려터져서는···. 먼지만 잔뜩 뒤집어썼네."
탈로스는 어깨에 축 늘어진 엘로이를 둘러메고 투덜거렸다.
"그 앨 죽이실 겁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이건 굉장한 전리품이자 미끼 역할을 할거하고. 야. 내가 계속 이거 들고 있을까?"
탈로스가 빈 곳에 대고 소리치자 유령같이 한 인물이 등장했다. 아그니스 공주가 흠칫했다. 그 여성은 굉장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몸에 짝 달라붙는 기이한 가죽옷을 입었는데 몸의 굴곡이 완벽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탈로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엘로이를 안아 들고 바닥으로 스르륵 꺼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이 해괴한 모습에 아그니스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때문에 일이 좀 꼬였다. 차마 네가 브렌든을 죽이는 꼴은 못 보겠더구나. 어휴. 일국의 공주라는 애가 뭐 이러냐?"
그 말에 아그니스 공주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니 온몸으로 소름이 솟아오른 것이다.
"저기 마교분이라면, 제이미의 스승이 되시면 저희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탈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말이야?"
"네, 마교의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근처에 대규모 마교 병력이 있다면···."
"나하고 아까 그 애하고 둘 뿐인데?"
"네···."
"야. 밖에 인원이 무려 육만 명이야. 그네들이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데? 그리고 좀 있으면 비밀 통로를 통해 쏟아져 들어 올지도 몰라. 노르딕도 오랫동안 왕궁에서 근무했어. 비밀 통로 서너 개쯤은 당연히 알고 있을걸?"
아그니스 공주는 절망으로 고개를 숙였다.
"난 가볼 테니 고생들 해. 그리고 마지막이니 남편이나 잘 챙겨. 팬텀 가드너가를 위해 검을 든 자는 지금 네 남편 한 명뿐이다. 그 녀석이 얼마나 너를 아끼는지 몰라? 그가 여기 남아서 분투하는 것은 팬텀 가드너가를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아내를 위한 거란걸 잘아 둬야 할 거다. 그럼."
"스승님. 스승님."
아그니스 공주가 애타게 불렀으나 유령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교의 인물은 괴이한 기술을 많이 쓴다고 하니 정말 신기하게도 눈앞에서 인간이 저절로 사라지는 마법 같이 일을 벌어지다니.
아그니스 공주는 주방 문을 걷어찼다. 쇠고리로 단단히 묶인 문은 각성자의 발차기 한 방에 산산이 부서졌다. 애초에 의미 없는 짓이다.
충격에 앞으로 날아가 엎어진 두 경비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미안하네. 아직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어."
경비병은 눈을 동글하게 뜨고 말했다. 그리고 아그니스 공주가 흘린 핏자국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주님 혹시 다치셨습니까? 즉시 포션을···."
"아니 괜찮아. 이미 다 나았어. 여긴 이제 지킬 필요 없으니 성벽으로 나가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윌리엄 대공의 거처로 들어가자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녀들은 도망가지 않고 윌리엄 대공의 거처에 모여 있었다.
"고, 공주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윌리엄 대공의 시녀 줄리아가 달려 나오며 브렌든을 부둥켜안았다.
"쩝.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대공을 보살펴 줘. 브렌든도 함께."
"공주님은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고생하는 남편한테 가봐야지."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단 한 번도 제이미 백작을 남편이라고 호칭한 것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이미도 아그니스 공주를 찾기 위해 막 지하로 내려가던 참이었다. 계단에서 뛰어 올라오는 아그니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상체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그니스 공주 괜찮은 겁니까?"
제이미가 놀라 외치자 아그니스 공주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밀 통로로 도망갔다가 적을 만나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마침 당신 스승이란 분이 나타나셔서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비밀 통로는 거의 다 봉쇄했는데 또 다른 곳이 있었던 모양이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아그니스 공주는 지금, 이 순간! 이제야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제이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아내를 바라보는 자상한 눈빛을 왜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일까?
-와락
아그니스 공주는 설움이 복받쳐 올라 제이미를 와락 껴안았다. 남편의 땀 냄새가 코끝을 향해 들어왔다. 친근감이 가득한 냄새.
행복의 냄새. 왜 이런 행복을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것일까?
"무슨 일이오 공주, 혹시 대공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오?"
갑작스러운 공주의 행동에 제이미는 당황했다.
"아뇨. 괜찮아요. 그리고 아내에게 그런 말버릇은 싫어요. 그냥 말놔도 되잖아요."
"어? 진짜 아무 일 없는 거요?"
"그렇다니까요. 다친 곳도 없어요. 당신 스승께서 절 잘 치유해 주셨거든요."
"아, 앗! 스승님은?"
"좋은 미끼를 구하셨다면서 가셨어요?"
"미끼?"
"네, 엘로이 반사르를 잡으셨어요."
"뭐요? 그는 당신의 소중한 친구가 아니오?"
"친구긴 했었죠. 한때는요. 지금은 당신과 브렌든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걸 알았어요."
"정말 아무 일 없는 거 맞소?"
"그렇다니까요. 밖은 어때요?"
"잠시 소강상태요. 오늘은 날이 저물었지만 아마 내 생각으로 내일 오전쯤이면 공격해 오리라고 보오."
아그니스의 마음은 착 가라앉았다.
"팬텀 가드너가에 신에 내려준 시련이군요. 내일 죽더라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무슨 소리요? 당신은 브렌든과 대공을 지켜야 하지 않소? 내 생각인데 상황이 이 정도쯤이면 굳이 대공을 지하에 가둬 두지 않아도 되지 않겠소?"
아가므네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 말했다.
"오늘 저녁 공격이 없다면 이야기 나눌 시간은 많겠네요?"
"하하, 그 사람들도 꽤 골머리를 썩힐 것들이 많으니 밤새 떠들어 댈 거요."
"그럼 우리도 이야기꽃이나 피워 볼까요? 아, 혹시 비밀 통로로 습격해 오진 않겠죠?"
"그건 하지 않을 거요.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정당성이오. 강탈이 아닌 정당한 방법으로 윌리엄 대공을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 주된 목적이요. 그렇지 않으면 황제가 인정하지 않을 테니 말이오. 습격을 계획했다면 저렇게 모든 병력을 끌고 성을 포위하지 않았을 거요.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방법은 하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오."
아가므네는 그윽한 눈빛으로 제이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늘 저녁 당신에게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아요. 새벽이 밝아 올때까지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실수 있겠어요?"
"물론이요. 당신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없소. 밤새 들어 드리리다."
"좋아요. 가죠. 그전에 피 냄새나는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요."
"정말 다치지 않은 거요?"
"당신은 당신 스승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전 그분에게 치료받았다니까요."
"그럼 알겠소. 하하.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아가므네는 이상하리만큼 편했다. 오랜만에 제이미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도 고백했고 미안하다고 수십 번이나 말했다.
제이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황해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 너무 웃겨서 아가므네는 모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녀는 문득 이런 사소한 행복을 스스로 멀리했었다고 하는 생각에 조금은 서글퍼졌다.
내일 태양이 떠오르면 모른 것이 끝이 난다.
지금에 와서야 웃음의 가치를 안 것이 너무나 후회됐지만 이지 지나간 시간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겠지.
그녀의 눈가에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
이제야 찾은 이 행복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녀의 복합적인 감정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버지 윌리엄 대공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윌리엄 대공의 무죄를 믿고 또 믿었다.
그러나 탈로스로부터 진실을 듣는 순간 그녀는 마침내 가슴에 응어리진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내일 팬텀 가드너가가 끝장이 나더라도 그녀는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웃고 같이 슬퍼해 주는 제이미의 진심을 이제야 볼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서글프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결국 참다 참다못한 눈물이 저절로 흐르고 있었다.
제이미가 다가와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그니스는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제이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 너무나 편안하다. 왜 지금까지 이렇게 편안한 곳을 외면 했던 거지?'
제이미의 어깨에 기대니 그 편안함에 저절로 눈이 감겨왔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던 것인데 왜 몰랐던가? 바득바득 살려고 발버둥을 쳐도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던 윌리엄 대공이 십만 아칸 시민의 학살자라는 사실 앞에 그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겨우 손에 잡은 이 행복과 아들의 숨결에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제이미의 어깨에 기댄 체하고 싶은 말속에 감춰 두었던 소녀 감성까지 모조리 꺼내 버렸다. 공주로서는 차마 입에 담긴 힘든 말까지 아낌없이 쏟아냈다.
제이미는 매우 즐거워했다. 죽음의 사신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데 왜 그는 이토록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지···.
먼동이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조용한 새벽 공기를 가르는 말발굽 소리가 천천히 왕궁을 향해 다가왔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