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착수(12) - 넌 누구냐?
조사착수(12) - 넌 누구냐?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심지어 도력조차 놈에게 통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온 건지 말 안 해도 알겠지?"
"생각보다 대단해. 얼굴 보고 가려고 기다란 보람은 있네."
"이곳 사정 묻는다고 답해 줄 것 같진 않네."
"뭐, 난 인간들 하는 짓엔 관심 없어."
"인간들? 자신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네?"
"아, 넌 알 필요 없어. 그냥 말실수라고 생각해."
"여기 너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네?"
"그래, 네가 오기 전까지 있긴 했어."
"밖에 묶어 놓은 마을 사람은 누구 짓이지? 네가 명령권자야?"
"아니, 난 그냥 구경만. 말했잖아? 인간들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 없다고."
"관심이 없다면서 혼자 왜 여기 있어?"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버렸거든."
"내가 그 궁금증의 대상인 모양인데. 이제 궁금증은 해결됐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라서 실망 중이야. 뭐 인간에게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지."
모그룩은 잠시 청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만 봐. 껍데기 아무리 봐도 달라지는 건 없어."
"어떻게 할 건데?"
"널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날 처리해? 누구로부터? 어차피 난 널 이기지 못하겠지. 적어도 난 평범한 인간이니까. 죽기 전에 누가 날 죽여 달라고 했는지 말해 줄 정도의 배짱은 있지 않을까?"
"하하, 그런 한심한 유도 질문은 사양할게."
녀석은 의자에 발을 꼬고 앉아 발등을 까닥까닥 대고 있었다.
"껍데기라."
"아, 내가 한 말 깊이 생각하지는 마. 어차피 곧 끝날 테니까."
-드드륵
녀석이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긁었다.
허리에는 평범한 롱소드 하나가 매달려 있다.
-쨍
"이게 인간이 사용하는 무기인데 참 원초적이지? 그래도 이들 몸을 멈추는 데는 확실하더라고."
"그렇지. 사용하기 나름인데 잘 못 사용하면 자신이 다칠 수도 있어."
"잘 가."
-팟
검과 함께 튕기듯이 날아온다.
그 빠름이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다.
눈꺼풀이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속도보다 더 빠른 것 같다.
-찹
모그룩은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상대의 검신을 꽉 움켜잡았다. 검 끝은 정확히 모그룩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온 거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살짝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내 공격을 막은 최초의 인간이네. 그것도 이렇게 간단히 막을 줄이야."
"껍데기. 껍데기···. 너 인간이 아니구나."
"나도 같은 생각을 했는데? 너 브레니악스와 무슨 관계냐?"
"이브리엄이었나? 제국에 또 다른 이브리엄이 있었단 말인가? 하긴 케이사르 그놈이 무슨 짓을 못 할까 싶긴 했지만···."
-팟
사내는 검을 비틀어 빼냈다.
'성력이군.'
다른 상대였다면 검은 바로 부러졌을 거다. 녀석은 검이 부러지지 않게 묘한 힘을 검에 실었는데 그것이 성력이라는 것을 모그룩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검을 잡고 있던 손가락에 욱신욱신한 통증이 전해져 올 정도였다.
"말해. 넌 어떤 존재냐?"
사내는 공격 자세가 아닌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상태로 말했다.
"네게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인간 몸뚱이를 껍데기 취급하는 놈에게는 말이야."
"뭐, 궁금한 것은 궁금한 대로 남겨 둬도 괜찮을 듯하네. 덜 심심한 게 좋은 거지. 솔직히 이 세상은 너무 심심해."
-팟
그 순간 검이 퉁겨져 올라왔다.
이미 예상하던 모그룩조차 간발의 차이로 피할 정도였다.
각성자는 아예 상대되질 않는 수준이다. 이건 비교할 수준의 움직임이 아니다.
천마잠행으로 녀석의 사각으로 움직이며 검을 뽑아냈다.
그러나 녀석은 몸을 틀어 사각의 범위를 순식간에 지워 버렸다. 녀석의 반응이 천마잠행을 따라잡은 것이다.
-챙, 챙,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푸른 불꽃을 사방으로 튕겨 냈다.
모그룩은 천마삼검을 연이어 떨쳐 냈다.
단순한 검이 아닌 변화무쌍한 이 검은 주신 제국의 기사들은 물론 각성자조차 절대 받아 낼 수 없는 초월적인 검이다.
하지만 사내는 능숙하게 모그룩의 검을 모두 튕겨 냈다.
그것도 평범하디 평범한 일반 롱소드로 말이다.
모그룩은 상대가 성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은 절대 성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성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를 상대에게 알리는 꼴이니 말이다.
한 번도 내공을 전력으로 쓴 적이 없다. 지금 공방이 이루어지는 것은 상대가 천마삼검을 모두 받아 냈기 때문이다.
그건 상대가 더 나은 검법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단 하나. 검의 속도가 모그룩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천마삼검에 담긴 변화가 통하지 않았다.
"이거, 이거야말로 놀랄 일이구나. 내가 만났던 그 어떤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췄어. 어떻게 제국에 너 같은 인간이 있을 수가 있지? 놀랍구나. 브레니악스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나와 대등하게 싸움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상대는 정말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놀란 것은 모그룩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에서 그 어떤 상대에게도 전력을 다해 검을 쓴 적이 없었다.
먼젓번 건너왔던 이브리엄 두 명 마크라스와 온두라스를 상대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눈앞에 상대 어쩌면 이브리엄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상대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아깝다. 정말 아까워. 여기서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래서 안 죽이기로 했는가?"
"그렇지. 그럴 생각이야. 너 같은 인간은 정말 처음이야."
"그럼 한 번 더 놀아 보지, 그래?"
모그룩의 신형이 둘로 다시 넷으로 갈라졌다. 각기 네 방향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호오?"
사내는 검도 뽑지 않은 채 맞섰다.
-쉬익, 쉬익
검은 바람 소리보다 더 빠르게 공간을 휘저었다. 사내는 아슬아슬하게 모그룩의 검을 피해 내고 있었다. 이곳은 실내고 검과 검이 대결하기에는 솔직히 좁은 곳이었다.
사내의 움직임을 파악한 모그룩은 적지 않게 놀랐다.
그는 정확히 자신의 검 궤적을 파악하고 정확히 거리를 유지한 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무공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팟
검 끝에서 검기가 뿜어져 나오자 상황이 단번에 바뀌었다.
-퍽
결국 모그룩의 검기가 사내 어깨에 깊숙한 상처를 만들어 냈다.
상의가 시뻘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내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제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나?"
사내는 잘린 어깨 상처에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이런 나약한 껍데기가 무엇이 좋다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네."
피는 금세 멎었고 상처 또한 눈에 보이는 속도로 빠르게 아물어 갔다.
"엘하카드."
"네 이름인가?"
"넌?"
"말해줘도 이해 못할 거야."
"섭섭한데. 내가 먼저 이름을 말했는데? 네 이름이 모그룩이라는 것쯤은 옆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어."
"더 할 거냐?"
"아니, 이 재미있는 걸 지금은 망치고 싶지 않아. 너에 대해 좀 더 지켜 보고 싶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거든. 그리고 너와 제대로 놀기엔 이 껍데기는 한심한 수준이라서."
-빠웅
기이한 소리와 함께 엘하카드 뒤로 이글이글하는 푸른 오라를 뿜어내는 반원형의 원구가 생성됐다.
"어렵게 얻은 거라서 지금은 아껴 사용해야 돼.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할게. 그때는 제대로 놀아 보자고."
모그룩은 엘하카드를 향해 파천수라장을 날렸다.
무거운 암경이 다가옴을 느꼈는지 엘하카드는 손바닥으로 펼쳐서 파천수라장을 맞받아쳤다.
-뻐뻥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엘하카드는 파천수라장을 손바닥으로 받아냈고 그 충격에 뒤로 날아갔다. 그리곤 그 푸른 오라 속으로 사라졌다.
"기억하라고 난 엘하카드다. 하하."
모그룩이 힘차게 도약해 푸른 오라 속으로 뛰어들었으나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처음으로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브리엄치고는 엄청나게 강했다. 저번에 상대해 본 적이 있는 마크라스, 온두라스와는 비교조차 못 할 정도였고 심지어 신체 반응 속도는 모그룩을 웃돌았다.
모그룩의 머리와 어깨에서 흰 연기가 피워 올랐다. 그가 적잖게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영감이 마지막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놈을 만났군."
순간 모그룩은 인상을 구겼다.
갑자기 심장 부근에서 바늘로 찌르는듯한 통증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일이라 모그룩 자신도 깜짝 놀라 내력을 다스려 일주천 했다.
하지만 심장의 고통을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모그룩은 자신의 두 손가락에서 은은한 빛이 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엘하카드의 검신을 잡았던 검지와 중지였다.
'놈의 성력인가?'
두 손가락에서 나오는 빛은 분명 성력의 빛이었다.
모그룩은 내공도 끌어 올려 보았고 마력도 사용해 보았지만, 손가락에 묻힌 성력은 가시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본인의 성력을 끌어 올리자 그 순간 심장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모그룩은 얼굴을 찡그리며 성력을 손가락으로 이동시켰다.
성력과 성력이 부딪치자 빛이 더욱 밝게 빛났다. 주변이 확 밝아 질정도 크게 한 번 빛을 뿜더니 이윽고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묻었던 엘하카드의 성력이 완전히 제거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의 고통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내공을 돌려 보았으니 몸에 딱히 다른 이상은 없었다. 내공 순환도 원활하고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모그룩은 엘스칼라 유적에서 만났던 야생왕의 말이 떠올랐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력을 개안시키지 않으면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없다고 했던 말이다.
야생왕은 이른 시일 안에 황제를 찾아가라고 부탁했다. 시련의 장이란 의식을 통해야만 제대로 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 못하면 심장이 가장 먼저 한계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내공도 마력도 도력도 성력과는 별개의 힘이라 어떻게 연관 지어 몸을 치유할 수 없었다.
그동안 성력 쓸 일이 전혀 없어서 의식하지 못했지만 제대로 된 막강한 성력을 사용하는 적과 처음으로 부딪진 것인데 몸에 이 정도 충격이 올 정도면 지금 상황은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어쩔수 없이 영감을 한 번은 봐야겠군. 집 떠나온지도 너무 오래됐고 세 어머니의 걱정이···. 하긴 진짜 어미도 아닌데···. 그건 그렇고, 생각할수록 난감한 상황이네."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겨우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엘하카드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제국 내에서는 자신과 성왕 잉그람뿐일 거다. 거기에 자신은 지금 불안정한 상태이다.
"엘하카드라. 성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이브리엄이 맞긴 맞는 모양인데 그들도 수준 차이가 있는가? 온두라스와 마크라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놈이 마음만 먹는다면 제국을 발아래 두는 것은 어렵지 않을 일일 거다. 케이사르 이놈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성 내부에 인간의 기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벌써 도망갔거나 아니면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숨은 것이겠지.
"푸른 빛이 나는 것은 포탈인가?"
파천수라장을 맞받아치고 빨려 들어간 푸른 반원형의 빚더미는 포탈이 분명했다.
자신이 사용하는 다크 디멘션 포탈에 비해 월등히 앞선 스킬이었다. 엘하카드는 포탈진도 그리지 않고 영창도 없이 생각만으로 포탈을 가동했다.
그 정도면 자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소리다.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강적의 등장이다. 하지만 모그룩은 두려움과 걱정 보다는 투기가 더 끓어 올랐다.
"시시할 것 같은 삶이었는데 아주 뜨거운 물을 확 끼얹어 주는구먼."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기척을 유지하기 위해 집중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대의 등장이다.
엘하카드의 정체가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마교 제자들의 경공 소리가 들려왔다. 테드버드가 도착했을 때 모그룩은 마교 교주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구했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부교주는 제자들에 명하여 이 성을 이 잡듯이 조사하라 이르고 남은 인원은 부상자 치료를 맡도록 하게나. 급히 치료가 필요한 인원을 따로 분류해 놓으면 내가 직접 힐로 치유해 줌세."
"알겠습니다. 저는 그럼, 사람 목숨을 구하는 데 전념하겠습니다. 성의 조사는 세실과 시온 두 사람에 명하겠습니다."
테츠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무던하게 받아 냈다는 것에 그는 몹시도 불쾌한 상태에 있었다.
물론 자신은 성력을 사용조차 하지 않았지만, 감히 천마의 무공이 밀린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엘하카드와의 만남은 테츠엔 신선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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