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가드너
팬텀 가드너
아그니스 공주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제이미와 지금까지 나눴던 대화 전부를 합쳐도 이 밤 나눴던 대화만큼 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스웠다.
곧 육만의 대군이 몰려들 것이지만 제이미는 자기 말에 귀 기울이며 웃음까지 지워주었다.
같이 도망가자거나 불안한 기색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걸까?
가장 믿던 친구의 배신으로 무너졌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지만 반대로 그간 소홀히 대했던 미안함의 마음도 더불어 커지고 있었다.
"왜? 자꾸 울어요?"
"이 행복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너무 억울해서요."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그 행복을 영원히 지켜 줄 테니까요."
아그니스는 마음속에 담겨 있던 응어리를 모두 잃어버리게 되자 그제야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시시각각 죄어오는 두려움의 원인이 제거되자 비로소 남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 스승이란 분은 저희를 구해주시지 않을 건가요? 마교의 힘은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제이미는 싱긋 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오늘 내 옆자리에 함께 하겠소?"
아그니스 공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부탁할 참이었어요."
"윌리엄 대공이 깨어나시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 스승이란 분이 포션을 주셨으니까요. 독은 해독되고 곧 일어나실 거라고 하셨어요."
"그랬소? 하하, 그분의 말씀이라면 믿어 의심치 않소. 윌리엄 대공은 금방 일어나실 거요."
창밖으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그니스 공주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화사한 아침햇살은 여느 때 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얼굴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의 따듯함에 또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 햇살과 함께 창문을 넘어온 것은 수천 마리 말이 일시에 움직이며 질러내는 말발굽 소리였다.
"우리 가요."
"물론이요. 손님이 오셨으니 배웅하러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소. 모처럼 만의 손님이외다. 같이 맞으러 갑시다."
아그니스 공주는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는 제이미의 곁에 붙어 팔짱을 끼웠다.
"처음이라서, 미안해요."
"그런가요? 하하, 기분이 좋아요. 나중에라도 빼면 섭섭할 겁니다."
"당신이 좋다면야. 우리 가요."
***
왕궁이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아칸의 종탑에 두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기괴한 모습의 난쟁이와 그와 대변되는 정말 잘생긴 미남 한 명. 둘은 부조화의 극치다. 당연히 너무나 어색해 보였다.
한 명은 세상 더 없는 괴물 추남이었고 한 명의 세상 더 없는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둘 다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지금은 귀찮은 놈만 살짝 들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어차피 썩은 부분만 도려내는 거니까."
"황제께서 공을 들이신 것인데···."
"지랄, 공을 들이긴 개뿔. 뒤쪽 흑막을 잡아내려고 이용했을 뿐이잖아. 그거 이제 소용없어. 내가 분쇄해 버릴 테니까. 영감 더러 걱정하지 말라고 해."
"그럼 태자 전하가 개입했다고 전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네 목이 몇 개라도 되는 것 같냐? 황제가 신임한다고 해서 네 실수가 무마되는 것은 아니지. 나 정도는 돼야 황제가 인정할 테니까. 넌 그냥 태자 전하가 협박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 네 이용 가치는 황제가 더 잘 알 테니까. 그리고 선물은 잘 갔는지 모르겠군."
"후후, 황제는 의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보내주신 여섯 번째 금서가 틀릴 수도 있다면서 레베카를 붙잡아 놓고 계십니다."
"하, 이놈의 영감이 의심이 많기는···. 네가 전해 글자 하나 오탈자 없다고. 내가 보증한다고 말이야. 틀린 것이 있으면 내가 직접 찾아간다고 해."
"하하, 그 정도면 의심하지 않으실 겁니다."
"야."
"네?"
"네 야망은 어디까지야?"
"글쎄요···."
"넌 제국의 제상 정도에 만족할 놈이 아니야. 마교를 찾아왔을 때부터 알아봤지. 넌 항상 무언가를 감추고 있어.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하진 않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네 무덤을 파헤칠 수도 있어. 알지? 내가 거짓말은 절대 하지 못한다는 걸."
"···. 이야기가 깁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처음에는 복수였습니다."
"그때 네가 한 말 기억이 난다. 누명을 씌운 놈은 알아냈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원한도 풀었다고 했지? 하지만 복수는 할 수 없었다고. 상대가 건들 수 없을 만큼 고위 귀족이냐고 내가 물었지? 넌 그렇다고 했고 복수를 위해 더 큰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어. 그래서 기사 시험에 합격하고 성군이 됐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고위 귀족이라···. 알지만, 복수하기 힘든 대상이라고? 황제냐?"
"네."
"영감이 왜 네 부모를 죽였지?"
"뭐, 크게 설명할 부분은 없습니다. 어머니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순혈 마녀를 부활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으셨죠."
"어머니가 마녀였어?"
"네, 하지만 아주 선한 마녀여서 위치 헌터와도 술을 나눌 정도로 사이가 좋았죠. 풀기 어려운 마녀의 주술에 걸린 위치 헌터들이 저희 어머닐 찾아올 정도였거든요. 어머니는 마녀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살아남을 수 있으셨죠. 위치 헌터도 그녀만큼은 인정해 주고 오히려 다른 마녀로부터 그녀를 보호했어요. 하지만 문제가 터졌죠. 황제의 칙령이 내려온 겁니다. 제국에 존재하는 마녀를 모두 압송하라고···. 심지어 테일리아드가의 공주 세르자비까지 납치해 가버렸죠. 어머니도 그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셨는데 위치 헌터들이 어머니만큼은 숨겨 주시고 계셨어요."
"혹시 네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다는 중요한 것. 에우리의 서냐?"
"네, 어떻게 그런 추측을 하셨습니까?"
"넌 절대 네 성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성은···."
"후, 가든입니다. 아델리오 가든."
"토러스 가든의 아들이라고 생각은 했어. 둘이 닮았더군. 수염만 없으면 네 아버지 판박이야. 대대로 위치 헌터의 수장인 임페리얼 프라임이 에우리의 서를 지키고 있어. 하지만 그 내용을 알려면 마녀가 필요했지. 네가 토러스 가든의 아들이라면 에우리의 서 복사본이 여러 권이 되었던 이유를 알 것 같군."
"태자님은 이미 다 아시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까?"
"부모님을 다 헤친 것은 아니잖아?"
"제 마음속에 아버지는 그날 죽었습니다."
"말 안에도 알만하다. 결국 네 어머니는 자신과 에우리의 서를 바꾼 것이군. 토러스 가든은 네 어머니 대신 에우리의 서를 가지고 잠적한 거고."
"그렇죠. 어머니뿐만 아니라 제 동생 두 명의 목숨도 함께요."
"넌 중대한 실수를 하고 있어."
"무엇입니까?"
"토러스 가든은 네 어머니와 삼 형제 모두 죽었다고 믿고 있으니까.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라. 그렇지 않았다면 에우리의 서를 위해 다른 자식을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다른 자식?"
"그뿐이 아니야. 토러스 가든과 엮인 사람 중에는 마녀 에르제베트도 있고 그의 제자 페이락도 너와 마찬가지로 복수의 집념에 사로잡혀 자신을 옥죄고 있어.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게 돌아가는 중이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두 사람은 왕궁을 포위한 채 다가서는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르릉
육중한 쇳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고 남녀 두 명의 기사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걸어 나왔다.
그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육만의 대군이었다.
성벽 위 기사들은 이미 전투는 오래전에 포기했고 그저 두려움에 몸을 떨 뿐이다. 어젯밤 대거 이탈하여 왕궁 경비병 중 끝까지 남은 기사는 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 또한 싸우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애초에 전투가 되질 않으니 병력은 무혈 입성할 것이고 자신들은 끝까지 남아서 임무를 완수한 만큼 왕궁에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요구할 목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전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고 만약 전투가 벌어져도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제이미 부부가 지나간 다음 아예 성문이 닫히지 않도록 도르래를 고정해 놓았다.
이건 볼 필요도 없이 이미 정해진 것이며 순리대로 따른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는 일이라고 자책했다.
제이미가 탄 흑마와 아그니스 공주가 탄 백마가 쌍둥이처럼 잘 어울렸다. 두 마리 말은 똑같은 보폭으로 서로를 인지한 채 걸어 나갔다.
선두의 무리를 헤치고 시몰레이크 후작이 앞으로 나서자 노르딕도 보조를 맞추었다. 상대가 왕녀이고 팬텀 가드너가의 사위인 만큼 최대한 격식을 갖춰 이쪽도 지휘관이 나서는 것이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다.
보는 눈도 많으니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뒷골목 술집에서 오랫동안 오르내리게 될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정중히 권하는 바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윌리엄 대공을 양도한다면 왕궁의 그 어떤 사람에게도 피해가 가질 않을 겁니다. 공주.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소."
시몰레이크 후작은 담당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비릿한 조소가 역력하게 걸려 있었다.
제이미가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윌리엄 대공의 무죄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대공은 솔라리스 왕국의 왕입니다. 그럼 반대로 그가 아칸의 비극을 계획했다는 증거를 내어 보십시오."
아그니스 공주의 얼굴이 씁쓰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 대공은 수십만 아칸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마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제이미 백작. 그렇게 나오면 우리 입장도 곤란하오. 여기 황제가 보낸 칙서가 있소. 우리는 정당하게 우리 권리를 행해야 할 이유가 생겼단 말이오."
시몰레이크 후작이 턱짓하자 옆에 있던 부관이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제이미에게로 달려갔다.
제이미가 칙서를 받아들자 시몰레이크 후작이 외쳤다.
"황제의 직인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순서일 거요. 혹 우리가 꾸민 것은 아닌지 확인하라는 뜻이오. 만약 속임으로 황제의 직인을 사용하는 자는 반역 행위임을 알 것이오. 그 어떤 바보도 감히 황제의 직인을 위조하지는 않을 거외다."
시몰레이크 후작은 솔직히 배알이 뒤틀렸다. 눈앞에 제이미 백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디서 굴러먹다 온 줄 모르는 시골 청년에 불과했다. 그걸 키운 사람이 자신이다.
이제는 눈앞에 부마가 되어 자신이 경어를 사용해야 할 처지에 있으니 어찌 배알이 뒤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잠시뿐이다. 이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그때 가서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 아니겠는가?
곧 이 나라는 자신에 손에 들어온다. 이 머리에 금관이 씌워질 것이며 솔라리스의 전 국민이 자신을 왕으로 떠받들 것이다.
내용을 다 읽은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께서 원하시는 것은 솔라리스의 빠른 안정이지 그 어디에도 윌리엄 대공을 벌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시몰레이크 후작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말 잘했네. 빠른 안정을 위해서는 왕이 필요하지. 윌리엄 대공의 죄목은 이미 공표가 되었네. 그는 아칸 시민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만 남았네. 만약 자신이 무죄라면 아칸 시민 모두가 인정하는 증거를 제시하면 되는 것일세. 지금 내 말은 최후통첩이네. 자네의 남은 병력은 어제 모두 성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네. 우리 육만 대군이 이곳에 온 것은 전투를 위해서가 아닌 아칸 시민을 학살한 죄수를 호송하기 위함이며 이들은 역사적으로 남을 증인들일세. 만약 자네가 윌리엄 대공을 내놓지 않는다면 육만 대군은 내 명령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로 움직이는 걸세."
제이미는 마상에서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말했다.
"저도 말씀드렸습니다. 윌리엄 대공의 죄가 완벽히 증명되지 않는 이상 그분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노르딕이 나섰다.
"괜한 고집을 피우지 마시게. 이미 결과는 정해진 것이네."
"그래서 지금 광장에 단두대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까?"
시몰레이크 후작이 비릿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단두대라니? 그건 아칸 시민의 영혼의 담긴 처벌대일세."
아그니스 공주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흥, 우리 부부를 넘지 못한다면 윌리엄 대공을 만날 수 없을 거다."
"우리 부부? 으하하하하하."
시몰레이크 후작은 크게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노르딕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두 사람은 살기를 포기한 것 같습니다. 자신을 미끼로 우리를 반란군으로 만들 셈인가 봅니다."
시몰레이크 후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흥, 자신을 미끼로 우리를 반란군으로 만들어? 웃기는 소리지.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고 아내를 잃은 자들의 분노가 느껴지지 않소? 그들에게 누가 감히 반군이라는 오명을 씌우겠소. 나는 절대 명령하지 않았소."
그러나 그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컸고 각성자인 아칸의 기사들은 시몰레이크 후작을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누가 작은 불씨 하나만 당겨 주면 끝날 상황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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