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몰이6
쥐 몰이6
"으윽."
아그니스 공주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등 뒤로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에 이은 통증이다.
'헉' 소리가 저절로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등에 두 개의 깊은 검흔이 새겨졌다. 곧 붉은 핏물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윌리엄 대공과 브렌든 중 한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브렌든을 감싸 안았다. 브렌든이 모유를 떼고부터는 거의 유모가 맡아서 키웠고 온종일 단 한 번도 안아 주지 않는 날이 늘어갔고 그녀에게 브렌든은 반쪽짜리 자식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윌리엄 대공 대신 브렌든을 껴안고 대신 검을 맞았다. 각성자가 휘두른 검이라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이번 공격으로 그녀의 척추는 완전히 동강이 났다. 그녀가 브렌든을 막지 않았다면 브렌든의 몸이 잘려 나갔을 터였다.
그녀가 브렌든을 택한 덕분에 같이 누워있던 윌리엄 대공은 검날을 피하지 못했다. 검은 아그니스 공주를 베고 옆에 누운 윌리엄 대공의 가슴 또한 깊숙이 검흔이 새겨졌다.
"우윽, 쿨럭."
아그니스 공주는 움직이기 힘들었다. 척추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탓이다. 그녀는 품 안에서 힐링 포션을 끄집어냈지만 상대가 그걸 못 볼 리 없다.
-빠직
암살자는 아그니스 공주의 손째로 발로 밟아 부숴버렸다.
곧이어 달려온 암살자 한 명이 윌리엄 대공의 한쪽 발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놈들 감히 누구의 몸이라고 손을 대는 것이냐?"
죽음과 같은 고통을 참아내며 마지막 울분을 토했다.
"지금 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고?"
"악."
사내는 우악스럽게 아그니스 공주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질질 끌었다. 그녀는 울고 있는 브렌든의 입을 틀어막고 꼭 껴안는다.
그들을 갈림길이 있는 공동으로 끌어낸 암살자들은 서로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어서 끝내지?"
"네가 대공을 맡아. 내가 공주를 맡을 테니까."
"왜 나야? 네가 직접 하지 그래?"
"시끄러워. 이곳에 올 때 이미 각오한 바잖아."
이놈들은 전문 암살자가 아니다. 하긴 각성한 암살자 따위는 없을 테니까. 아그니스 공주는 속으로 이놈들이 노르딕이나 시몰레이크 후작이 보낸 암살자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질 않는다. 분명히 이 통로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텐데. 그것도 엘로이와 케이사르 공작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휙
오른쪽 입구에서 또 한명의 인물이 뛰어 들어왔다. 그 인물은 쓰러져 있는 세 구를 확인하고 말했다.
"뭐야? 확실히 끝낸 거야?"
엎드려 브렌든을 꼭 안고 있던 아그니스 공주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 목소리 잊을 수가 있나? 어릴 때부터 자신의 곁에서 늘 떠들던 그 목소리를.
"엘로이? 엘로이 너 인 거야?"
"쳇! 뭐해? 병신들이. 빨리 처리하지 않고."
순간 아그니스 공주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긴장으로 팽팽하던 근육이 한꺼번에 풀어졌다. 죽음의 공포보다 더 간절한 자식의 목숨이 한순간 뒤흔들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믿어왔던 친구의 배신이 아그니스 공주의 모든 것을 앗아버리고 말았다. 엘로이의 배신의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어 그녀를 완전히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충격이 너무나 커 그녀는 삶의 의지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녀를 붙든 것은 아버지 윌리엄 대공도 자신도 아닌 바로 아들 브렌든이었다.
"엘로이 마지막 부탁 하나만 들어 줘. 브렌든을 맡아 줄 수 있겠어? 그냥 평범한 아이로 길러주기만 해도 돼. 제발 부탁이야."
"미안해 아그니스."
"너에게 받기만 하고 준 것은 아무것도 없어. 마지막으로 친구로서 부탁을 들어 줄 수 없겠니?"
"아버지는 완벽한 분이셔. 가지고 오라는 것은 세 명의 머리뿐이야."
아그니스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뭣들 하는 거야? 사람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처리해. 이봐. 뭐해?"
아그니스 공주 바로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마지못해 검을 치켜들었다. 아그니스 공주는 고개를 들어 엘로이를 정면으로 노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 모든 한이 응축됐다.
-스르륵. 쿵.
아그니스 공주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뒤로 꼬꾸라지며 쓰러졌다.
복면을 써서 표정을 알수 없지만 엘로이는 즉시 뒤로 몸을 날리며 검을 뽑았다.
-쿵, 쿵, 쿵
연이어 네 명의 사내도 차례로 쓰러지기 시작했고 그 외에 느껴지는 기척은 전혀 없다.
두려움이 담긴 엘로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
-팟
무언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아그니스 공주는 누가 자신을 건드리는 것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기이한 모습의 난쟁이 한 명이 서 있었다.
누구며 도대체 언제 나타난 것인지 전혀 느끼지도 못했다.
"아이 호흡이 끊어졌어. 그렇게 입과 코를 막으면 애가 어떻게 숨을 쉬나?"
그 말에 기겁하며 품 안을 살폈다. 이미 브렌든은 축 늘어져 있었다. 브렌든의 울음이 적들을 자극할까 봐 살짝 입을 틀어막았는데 엘로이의 등장으로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버렸고 그녀는 각성자이기에 4살짜리 평범한 아이가 버틸 수 없었다.
"브렌든! 브렌든 정신 차려. 브렌든."
아그니스 공주는 겨우 움직이는 두 손으로 브렌든을 흔들었으나 축 늘어진 아이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이리 줘. 뭐 하는 거야? 진짜 아이를 죽일 셈이냐?"
난쟁이는 호통을 치며 아이를 낚아챘다.
그리고 이상한 손길로 아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에취. 에~취. 쿨럭, 쿨럭."
재채기를 두 번 하고 깨어난 브렌든은 호흡을 급히 들이키며 기침을 토했다.
"쩝, 내가 나올 순간이 아직 아니었는데···. 조그만 늦었어도 애 죽일 뻔했어."
브렌든이 다시 울기 시작하자 난쟁이가 슬쩍 등을 한 번 치니 스르륵 고개를 떨궜다.
"놀라지 마. 그냥 잠시 재운 것뿐이니까."
엘로이는 몸을 움직이려고 온몸의 힘을 있는 대로 쥐어 짜내고 있으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몸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탈로스에게 점혈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능력이 되질 못했다.
"쯧쯧 남편보다 친구를 더 믿었나? 멍청한 것. 그녀는 지금까지 널 가지고 논 거야. 정확히는 팬텀 가드너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널 이용한 것이고 이제 때가 왔으니 팬텀 가드너가를 제거하려 한 것이지. 두루마리를 이용해 네게서 제이미를 떼어 내고 널 이곳으로 유인한 거지. 윌리엄 대공도 함께 처리해야 하는데 그의 무력이 뛰어나 감당이 안 되니 포션을 줘서 윌리엄 대공을 재운 것이고 네가 브렌든과 윌리엄 대공을 업고 올 거란 그것까지 예측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이걸 마셔. 상처가 아무는 데 도움이 될 거다."
탈로스는 최상 등급의 힐링 포션을 건넸다. 아그니스 공주는 포션을 마시고 나서야 겨우 제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가만 있어 봐.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아무리 각성자라도 후유증이 남는다고. 넌 척추가 잘린 상태에서 무리하게 움직여 이미 어긋나 있어. 바로 잡아준 상태에서 아물어야 뒤탈이 없어."
탈로스는 아그니스 공주를 반드시 엎드리게 한 뒤 잘린 척추를 제대로 맞추었다.
"그 상태로 움직이지 말고 몸에 힘을 빼. 곧 상처가 아물기 시작할 거야."
아그니스는 엎드린 채로 말했다.
"구해주셔서 뭐라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제이미를 봐서 구해준 거지. 아니라면 솔직히 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 멍청함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아. 보기 거북했거든···."
"죄송합니다. 전 다만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놈의 피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건가? 넌 아들을 내팽개쳐 두고 안아도 보지 않더니 웬일로 아버지보다 아이를 감싸고 도는 거냐? 브렌든은 네가 아니라 유모를 어미로 생각하고 있는데?"
"다 부족한 제 탓입니다."
"그때는 부족함이 아니라 멍청함을 탓해야 한다."
아그니스 공주는 호통치는 난쟁이의 말투가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이 누군가 솔라리스 명백한 국왕이다. 자신은 공주의 신분이며···.
"흥, 내 말투가 듣기 싫다 그런 표정인데? 생명의 은인이 반말 좀 하면 어때서? 아직 그런 격식에 신경 쓸 거면 제 아들에게 관심을 더 주던지."
아그니스 공주는 힘없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서서히 고통을 가시고 있지만 그만큼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다시 한번 저희 부자와 부녀의 목숨을 구해주신 데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저를 욕하시고 무시하셔도 괜찮습니다. 베푼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제 좀 정신이 드는 게냐?"
"엘로이가 저를 배신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니? 애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네. 배신은 왜 해? 애초부터 널 이용하고 있었는데. 배신이 아니고 제 행동을 들킨 셈인 것이지."
"그것도 모르고 제가 저지른 일이···."
"이제야 후회되는 거야? 넌 가장 믿고 의지할 사람은 뒤로 내팽개쳐 두고 심지어 자식까지 소홀히 하면서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군. 내가 아니었다면 팬텀 가드너가는 이 시커먼 땅굴 속에 다 묻히는 거지."
"엘로이가 정말 제게 검을 휘두를 용기가 있을 줄을 몰랐습니다."
"직접 물어봐. 말은 할 수 있으니까."
"엘로이 정말 날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어? 정말 날 죽일 수 있었던 거야?"
"···."
엘로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다. 그녀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
"제는 지 아버지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뿐일 거야. 어떻게 하나같이 멍청한 것들 뿐이냐?"
"그럼 케이사르 공작이?"
"그래. 뒤에서 시몰레이크와 노르딕을 조종한 배후지. 윌리엄 대공이 누명을 벗고 자리에 앉으면 난처해지거든. 결국 버리는 패로 생각한 거지. 실컷 이용해 먹고 버린 거야."
"그럼 아버지의 누명은 벗을 수 있는 것인가요?"
"누명? 무슨 누명?"
"아칸 시민을 학살한 계획은 아버지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대공이 아니라고 하더냐?"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럼 관계된 거지. 이 계획은 애초에 케이사르와 네 아버지가 계획한 거야. 계획을 세운 장본인인데 무슨 누명 타령인 거냐?"
아그니스 공주는 또 한 번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절대로 아버지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십만 아칸 시민을 학살한 장본인이 아버지라니.
"큰 걸 하나 잡아보겠다고 작은 것을 희생시켰는데 오히려 큰 것에 더 많은 힘을 실어 줘버리는 꼴이 되었지."
"당신이 누구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이미의 스승으로 마교의 장로. 탈로스다."
"마교분이시군요. 당신은 제가 이곳에 올 것을 그리고 엘로이가 저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난 오랫동안 케이사르를 추적해 왔다. 얼마 전에 네 덕분에 엘로이의 흔적을 찾아냈지. 며칠 감시하면서 엘로이의 뒤를 미행했다. 더 큰 걸 잡기 위해서. 그러다 오늘 이 사건이 터진 거야. 네가 브렌든을 죽일 거 같아 할수 없이 나선 거다. 제이미를 위한 일이기도 했고."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라. 손상된 척추는 쉽게 낫는 부위가 아니니까. 이걸 대공에게도 먹여라."
힐링 포션을 받아든 아그니스 공주는 탈로스 품에 축 늘어져 있는 브렌든을 힐긋 했다.
"왜? 내가 뭐라도 했을까 봐? 봐라. 주의력이 정말 산만하구나. 조금만 집중하면 아이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너도 각성자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넌 그런 노력은 전혀 생각에도 없구나."
그녀는 잠든 윌리엄 대공의 입에 포션을 부어 넣었다. 윌리엄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갔다.
"허, 둘 다 성력을 가져서 상처 하나는 기막히게 빨리 아무는구나."
"성력은 무슨 말입니까?"
"넌 태성왕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았느냐? 그에게서 받은 힘이다."
아그니스는 윌리엄 대공의 상처가 아물어가자 떨어진 썬더버드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엘로이를 향해 다가갔다.
검 끝은 엘로이의 목에 닿아졌다.
"죽여 줘. 이미 명령에 실패한 때에 살 생각은 포기했으니까."
"그렇게 죽고 싶어? 얼마나 널 믿고 의지했는지···. 넌 나에게 그동안 무슨 감정으로 대했던 거지?"
"감정? 그딴 건 없어. 잘나가는 공주님, 뻔뻔함만이 가득한 무능한 공주님이었을 뿐이야."
검 끝이 목젖을 파고든다.
"그래, 승기를 잡았을 때 망설이지 말고 적을 죽여. 난 그 틈을 놓쳐서 이렇게 된 거지. 너도 후회하지 말고 네 생각대로 행동해."
"그만해. 그건 내 것이야. 내가 나선 이유도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좋은 상품에 신경 쓰이는 흠집은 내지 말아 줬으면 해."
그녀는 썬더버드를 내렸다.
"엘로이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말했잖아. 그 애는 내 전리품이고 그 앨 미끼로 쓸 거야.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아주 좋은 미끼란 말이지."
엘로이는 혀를 깨 물으려 턱을 움직였는데 이젠 턱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여하튼 둘이 소꿉친구 아니랄까 봐 부성애는 똑같네. 자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고!"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