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놈
지독한 놈
테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사르의 몸으로 손을 뻗었다.
-탁
손가락 끝에 뭔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하하, 이건 모리엑의 거울이오. 마녀의 물건이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물건이다. 무슨 보물 중 하나겠거니 했다. 케이사르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이지 새삼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다.
"허허, 저 같은 일개 용병 우두머리는 직접 만날 필요조차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소."
테츠는 재빨리 움직여 방 안에 대기하고 있던 보좌관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그도 각성자지만 테츠가 점혈을 먼저 하고 움직였기에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자는 진짜인 것 같습니다만."
테츠는 소울 슬립을 사용하지 않고 그는 부드럽게 놓아주었다.
"허허, 소울 슬립으로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오?"
"말씀이 있었지 않습니까? 식사하기 전에 못 볼 꼴을 본다는 것을요."
"으하하, 마음에 드오. 마음에 들어. 그자에게 소울 슬립을 걸었다면 폭발과 함께 시뻘건 뇌수를 뒤집어썼을 거요."
"어련하시겠습니까?"
"자,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지 않겠소?"
그 와중 테츠가 풀어 놓은 사령쥐는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황태자를 찾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의 행방이 사라진 지 벌써 몇 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가 실제로 죽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탁은 일종의 미신과도 같습니다. 그것을 일반화 시키는 것은 불합리한 일입니다."
"알고 있어. 나도 신탁 따위를 무조건 신뢰하는 정도의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마녀의 기술은 확실하지. 마녀는 죽은 자를 초빙할 수 있거든. 황태자는 응답하지 않았어. 왜냐면 그 녀석은 살아 있으니까."
"무엇이든 확실한 것이 좋겠지요."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 이유지."
"그렇다면 저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아시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제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아시겠네요. 그런 저를 이런 곳까지 초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단지 의뢰라고 하기에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음, 여러 가지 알아볼 것이 있어서네. 첫 번째 자네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었어. 자네의 행적은 우리가 조사하려 해도 전혀 잡히지 않으니 솔직히 이렇게 초대장을 보내 마주 앉아 가진 속마음을 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어. 그건 마교의 힘과 위치가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자리조차 만들어지지 않았을 걸세. 암살자를 보내 자네의 목숨을 끊어 버리면 간단히 끝나는 거니까."
"그래서 황태자를 찾는 임무를 주기 위해서 저를 불렀다고 결론을 내야 하는 겁니까? 황태자 찾는 일이라면 굳이 마교에 의뢰하는 그것보다 휘하 인커전을 푸는 것이 더 쉬운 일일 텐데요?"
"오늘 만남은 꼭 그 의뢰가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네."
"얻은 결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비디언스 샤우트도, 저의 진정한 속마음도···. 어떻게 이용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자네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야. 재화를 탐하는 용병단체이며 그 재화만큼 의뢰를 수행할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겠나?"
"후후,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의뢰는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단 그의 목숨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부득이한 상황이 와서 그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 상관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그의 몸뚱이뿐이니까. 솔직히 그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할 수 있소. 다만.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소. 황태자의 신체는 되도록 훼손되지 않아야 할 것이오. 그대는 포탈을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들었소. 황태자가 제국 어디에 있든 단번에 이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오. 그러나 그것조차 되지 않는다면 임무 성사 최소의 조건은 반드시 황태자의 피는 있어야 한다는 거요. 가장 큰 포션 병 하나 이상은 꼭 필요하오. 그것이 진정한 요구 조건이오."
"그럼 달리 말해 황태자를 죽이지 않고 그 피만 받아 온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음,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면야. 그의 목숨보다 피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소."
"저야 솔직히 장사치이지 않습니까? 황제도 황태자를 찾는데 칠무신을 동원할 정도이니. 공께서 피만을 원하시니 죽지 않을 정도로 피를 빼내고 몸뚱이는 황제에게 바치는 것이 장사치의 머리 돌림이지요."
"하하, 그것참 이미 그리 많은 재화를 얻었는데 어찌 계속 재화를 탐하시오?"
"황제에게도 이미 말했지만 제 소원이 용병단체의 우두머리가 아닌 왕의 금관을 써보는 것이기에. 하하. 욕심쟁이처럼 탐욕을 부리는 중입니다."
"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소. 작은 소국을 하나 만드시겠다?"
"그렇습니다. 이번 공의 초대에 응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솔직히 지금은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데 괜한 짓거리로 어느 쪽이건 간에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타당한 생각에 따른 올바른 행동이었다고 생각하오."
"지금까지 황제의 의뢰를 중심적으로 행하느라 그 때문에 공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저는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의뢰는 없는 것으로 처리됨을 양지해 주십시오. 물론 오늘 일은 공과 저 사이에만 오간 대화이며 황태자를 찾는 일도 제자들이 아닌 저 혼자 움직일 것입니다."
"좋소,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아. 그리고 한가지. 혹시나 해서 말이오."
케이사르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방안에 서 있던 보좌관은 꼼작도 하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보좌관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지 않겠소?"
순간 테츠는 뭔가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
"하하, 그러지요. 이 기술은 조금 난도가 있는 기술이라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잠시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려 주십시오."
테츠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곡지혈과 몇 군데 혈도를 더 봉했다. 그리고는 팔과 어깨 배 아래를 주무르는 시늉을 했다.
케이사르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기에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그 상태에서 테츠는 뒤돌아 서 있었기에 그의 뒷모습밖에 볼수 없었다.
조금 뒤 보좌관이 큰 숨을 한 번 들이키더니 움직였다.
"마교의 기술은 언제봐도 신기하구려."
"비록 작은 재주이긴 하나 제국에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늙은이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소? 난 성격이 워낙 꼼꼼해서 말이오."
"해가 되지 않는다면야 무엇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대가 마교 교주라는 것은 의심치 않소. 하지만 난 보고 듣는 거 외에 진실을 확인하는 것에 더 신중을 기하고 있소."
"말씀하십시오."
그때 보좌관이 속이 빈 포션을 하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니 그 포션에 교주의 피를 좀 받아 주었으면 하오."
"하하, 제 피는 무엇에 쓰시려 하십니까?"
"다 노파심에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주시오. 아, 그대에게 해가 가는 일은 일절 없을 것이오."
"어렵지 않은 일이니 개의치 않겠습니다."
테츠는 단검을 꺼내 손바닥을 잘랐다. 손을 오므리고 포션에 피를 받기 시작했다.
케이사르는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하하, 꽉 채우지 않아도 되오. 그 정도면 충분하오."
테츠는 헝겊을 하나 꺼내 손바닥을 둘둘 말았다.
"그럼 이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그렇소. 몸이 뭐니, 배웅은 하지 않겠소."
테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공께서 그렇게 꼼꼼하시니 저 또한 신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군요. 이곳을 조사하는 것은 저 또한 신중함의 발로이니 부디 노엽게 생각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오. 하하. 이 성은 경비도 없으니 마음껏 조사해 보시오."
"제가 이곳 지리를 잘 모르니 혹시 안내할 사람 한 명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옆에 있는 로드리안 보좌관이 해 줄 거요. 로드리안 너는 교주에게 이 성을 안내해 주도록 해라."
그와 동시에 케이사르의 신체가 연기처럼 쓱 사라졌다.
과연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매우 가늘고 선명한 전신 거울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어찌나 깨끗한지 거울에 비친 테츠의 모습이 마치 쌍둥이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드리안은 테츠의 피가 든 포션을 손에 들고 문을 나섰다.
"안내하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다음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하하."
"여기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저를 따라오셔도 상관없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은 심심하니 움직여 볼까요?"
로드리안은 복도를 따라 걸어가더니 웅장해 보이는 나무 문이 있는 방에 멈추어 섰다. 그는 양손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방이 아니라 꽤 넓은 발코니가 있는 전망대 같은 곳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테츠는 단번에 이곳이 제국의 어느 곳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퍼득, 퍼득
머리 위에서 뭔가 큰 새 종류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풍겨오는 특유의 역한 냄새. 이건 유황 냄새다.
발코니 위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마족 카이악을 닮은 괴물 한 마리였다.
카이악은 박쥐 날개에 박쥐 머리를 가진 수인형 마족이다.
이 괴물은 박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박쥐는 아닌 완벽한 악마의 두상을 가진 괴물이었다.
박쥐라고 하기에는 뭔가 묘하게 달랐다.
괴물이 발코니에 내려앉자 로드리안은 박쥐의 손에 포션을 쥐여 주었다.
그러자 괴물은 날개를 펴고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먼 하늘로 날아 올라가 버렸다.
테츠가 발코니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짙은 운무만 끼어 있을뿐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제 임무는 끝이 났습니다. 안내해 드릴까 합니다. 그리 크지 않는 성이라 잠시만 시간 내시면 금방 끝이 날것입니다."
"그럼 부탁드려볼까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방금 본 괴물은 마족의 일종입니까?"
"아, 그놈은 마족이 아니라 가고일이라는 소환수입니다."
"가고일?"
"지옥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그럼 혹시 엘스칼라 유적에 돌아다니는 괴물 개도 아십니까?"
"그놈은 헬하운드라는 불리는 녀석입니다."
"헬하운드? 말 그대로 지옥의 맹견이군요."
"그렇습니다. 하하."
가고일도 그렇고 헬하운드도 그렇고 모두 테츠가 알지 못하는 소환수였다.
뭔가 몰레이그의 능력에 큰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이상하다. 그가 가진 지식은 사자의 서가 전부일 테고 숨겨진 비밀의 장에 기록된 내용일까? 하지만 현세에 와서 그걸 번역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울 그러니까 아르마할뿐이다.
로드리안은 천천히 걸으며 성 내부 곳곳을 소개해 주었다.
"음, 성에 비해 사람이 보이지 않는군요?"
"아, 여기에는 저 혼자뿐입니다. 조금 전 보셨다시피 필요한 것은 가고일을 부르거나 하면 되니까요."
"그럼 포탈은 본인이 직접 가동하는 겁니까?"
"전 네크로맨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포탈을 가동하는 것은 힘들지요. 포탈을 가동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이 성 때문입니다."
"호오? 이 성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제가 들은 지식으로 이 성은 고대 말라키가 만들었다는 차원 속의 성입니다. 당시 마족을 피해 인간을 숨겨 놓고자 이런 작은 차원을 만들고 성을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포탈은 이 차원과 현실을 오가는 통로인 셈이죠. 즉 포탈은 제가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성 자체에 깃들여진 단일 포탈입니다. 원래 출구는 다른 쪽에 있었는데 몰레이그가 아칸의 공동묘지로 제 수정한 것입니다."
"이런 곳을 찾아내다니···."
"몰레이그와 적대 관계라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두 분이 손을 잡는다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음, 같은 스승 아래 동문이긴 하나 전 스승의 유언을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쉬운 부분입니다."
"포탈이 아니라면 이 성을 벗어날 수 없는 거군요?"
"조금 전 보셨다시피 아래가 닿지 않는 곳에 홀로 서 있는 성입니다. 가고일과 같이 하늘을 날아서 이동하지 않는 이상 이 성을 나갈 방법은 없습니다."
"아래가 없다는 것은 바닥이 없다는 소리입니까?"
"그렇습니다. 가고일을 시켜 아래로 내려가 봤는데 몇 날 며칠을 내려가도 바닥에 닿지 않았습니다. 몰레이그는 아예 바닥이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아까 가고일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몰레이그가 뚫어 놓은 구멍이 있습니다. 다른 차원으로 가는 일종의 포탈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게 오직 하늘을 날 수 있는 가고일만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늘 위 허공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케이사르공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만큼 철저한 분이시군요."
"그러니 지금까지 실수 없이 계획은 진행해 오고 계신 겁니다."
"공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요? 제국을 인간들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인간 이외의 것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오크며, 마족이며, 특히 이브리엄은 대단히 위험한 족속입니다. 인간을 멸족 시킬수 있는 종족이기에 제국이 있는 델모어 대륙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 케이사르 공작이 원하는 단 하나의 소원입니다."
"그렇군요."
"자, 여기를 마지막으로 성 안내는 끝이 났습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생각보다 아담하고 깨끗한 곳이네요."
"처음 발견했을 때는 이끼와 먼지가 사람 키보다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걸 치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하, 그런 일이 있었다니 어찌 몰레이그는 이런 숨겨진 장소를 잘 찾는 것 같군요."
"그는 이제 네크로맨서가 아닙니다. 그는 한 단계 진보된 반신의 경지에 올라섰습니다. 참 저를 죽이시지 않으셨던 것은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몰레이그가 제 목숨과 여기 성의 포탈을 연결해 놓았습니다. 제가 죽으면 포탈이 망가지도록 장치해 놓은 거죠."
"저런, 그럼 저는 영원히 이곳에 갇혀 지낼 뻔했네요?"
"그렇지요. 하하."
로드리안이 비밀을 말한 것은 자신을 죽이면 너도 갇힐 테니 나에게 수를 쓰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케이사르 생각할수록 용의주도한 놈이다.
"갑자기 이곳이 무서워지는군요. 어서 포탈을 타고 돌아가야겠습니다."
"참, 케이사르님께서 식사 대접을 꼭 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초대한 손님인데 대접하지 않고 보내면 제가 큰 문초를 받을 겁니다. 거의 준비가 다 되었을 겁니다."
"여기 머무는 사람은 로드리안 혼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 보시면 압니다. 따라오십시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