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넘지 못한 자들
욕망을 넘지 못한 자들
시몰레이크의 인상이 오만상 구겨졌다.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몸이 마차 자기 몸이 아닌 것처럼 아예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노르딕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직 오비디언스 샤우트라 이름 붙여진 기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케이사르가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
성군이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오비디언스 샤우트라 이름 붙여진 기술 때문이라는 것을 시몰레이크 후작도 노르딕 백작도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마교 교주만이 할 수 있다고 했으나 브리완 왕의 공주 세일럼도 사용하여 황제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마교 교주 즉 황태자의 기술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마교의 장로들은 오비디언스 샤우트를 모두 구사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마교 앞에서 각성자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성군도 케이사르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눈앞에 먹잇감이 있지만 감히 덤비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황제는 해결책을 알아내기 위해 마테니를 통해 인간형 마족을 잡아 오라 했다. 그날 마테니가 롱홀드에서 잡은 마족을 데리고 간 이유도 황제의 명이다.
케이사르 또한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이 황당한 기술 때문에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껏 손에 넣은 각성자의 힘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니 어떻게 하든 이 기술을 비밀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 대안으로 기간테스를 손에 넣으려 했다가 오히려 마교 교주에게 빼앗기게 되는 참사까지 겪었으니.
황제는 케이사르가 기간테스를 가지지 못하도록 칠무신 중 첫째를 파견할 정도였다. 그러나 중간에서 이득을 취한 것은 테츠뿐이었으니 길은 연 것은 케이사르고 사신왕은 이왕이면 저 자신이 기간테스를 손에 넣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황제는 급히 레베카를 보냈다.
아그니스 공주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수가 없다. 노도와 같이 밀려오던 육만의 대군이 제이를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있으니.
-또각, 또각, 또각
왕도의 대리석 바닥을 제이미의 흑마가 걸어가며 유일한 소리를 만들었다. 모두가 부들부들 떨었다. 움직이기 위해 온 힘을 집중했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노르딕 백작 당신은 윌리엄 대공 앞에서 한 맹세를 잊었소? 평생 당신 한 분을 위해 검을 바치기로 한 맹세 말이오?"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강경한 어조의 말에 노르딕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위해 평생 검을 받칠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럼 오늘 그 맹세를 어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시오."
"어떻게 말입니까?"
제이미의 눈빛이 빛났다.
"노르딕 백작 지금부터 당신은 반군이 아니고 진압군이요. 여기 왕좌를 넘본 시몰레이크 후작의 반군을 제압하고 그 수괴를 척살하시오."
시몰레이크 후작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무슨 소리요? 왜 우리가 반군이요? 우린 정당성을 가지고 행동한 거요."
"당신 입으로 한 소리잖소. 내가 명령한 것이 아니라고. 그럼 저들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 아니잖소? 난 저들을 반군으로 지목한 것이고 그 수괴를 척살하라는 거요."
"이 되먹지 못한 짓 멈추지 못해? 무슨 사악한 주술을 쓴 거냐?"
"허? 이제 인정하는 거요?"
"내게 손을 대면 황제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성군이 국경을 넘을 것이다."
"성군? 그들도 당신과 같은 꼴을 면치 못할 거요. 일! 어! 서!"
단 한 마디에 육만 대군이 맞춘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실로 대단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오비디언스 샤우트 이건 테츠가 사자후에 내공을 실어 말하는 것에 라마단의 정수와 태모의 피가 섞인 다크 시럼 포션 이 세 가지 조합으로 즉석에서 만든 스킬이다.
원래 이름조차 없는 기술이었다. 그러기에 황제는 적당히 이 기술을 지칭하고자 오비디언스 샤우트라 명한 것이다. 황제가 지은 기술명이기에 테츠도 거부감 없이 그대로 사용했다.
즉 사자후 내공과 라다만의 정수와 태모의 피가 섞인 다크 시럼 포션 이 세 가지 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다.
단 라마단의 정수는 따로 떼어낼 수 없기에 테츠는 도력을 이용해 일종의 전가 즉 전이시켜 놓은 것이다. 회수도 언제든 가능하고 대상이 죽으면 즉시 복귀된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지면 오비디언스 샤우트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연구 해봤자. 내공과 라마단의 정수, 태모의 피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소리.
시몰레이크 후작의 얼굴로 절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 그의 입가에 걸렸던 조소 섞인 미소는 이제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아그니스 공주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제이미의 사자후에 자기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육만의 대군이 제이미의 일갈에 동시에 일어서는 장관을 보면서 놀란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제이미는 육만 대군을 목소리 하나만으로 제어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죽음의 공포도 걷혔고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것 같은 기분이다. 흑마에 당당하게 앉아 태양의 검 마르테스를 치켜든 제이미에서 제왕의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시몰레이크를 제거하라 명했습니까?"
"그래, 그렇게 해야 아칸의 귀족이 제이미를 향할 테니까. 불씨를 남겨둘 필요가 있나. 불을 끌 때는 확실하게, 완벽하게 꺼야지."
두 사람은 종탑 위에서 제이미의 호기 어린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르딕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물론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멈추시오. 노르딕 백작. 그 검은 나를 향할 것이 아니라. 제이미를 향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이게···. 저도 제어가 되질 않습니다.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멈출 수가 없습니다. 마무리해도 안 되는 것을···."
"부탁이네. 제이미 백작. 내 물러나겠네. 다시는 왕좌를 탐하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네. 부디 내 말을 들어 주시게."
"그럼 당신은 제 말을 한 번 이라도 들어 주신 적이 있습니까? 단 한 번이라도 들어 주신 적이 있다면 저도 들어 드리지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안 시몰레이크 후작의 마음이 급했다.
"내, 그대에게 서운한 것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네. 하지만 자네를 그 자리까지 이끈 것은 날세."
"그래요? 그때 공주와 사건이 있고 난 다음 저를 가장 먼저 교수형에 처하라고 하신 분이잖습니까? 그때 공주가 부마로 저를 공표하지 않았다면 아마 목이 매달렸을 겁니다. 공주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는 거지 당신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 노르딕 백작 진압군의 사령관이 되어 반란군의 수괴를 처단하시오."
"제이미!"
시몰레이크가 악을 쓰며 고함을 쳤으나 곧 그의 목은 바닥으로 향해 굴러떨어졌다.
"안 돼!"
노르딕도 처참하게 외쳤으나 이미 그의 검은 시몰레이크 후작의 목을 치고 바닥에 박혀 버린 뒤였다.
시몰레이크 후작은 그렇게 탐내하던 왕좌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끝내 덧없는 최후를 맞이했다.
"아버지!"
"으아아아."
뒤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시몰레이크 후작의 아들들이 비명을 지른 것이다. 시몰레이크는 모두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고 있었다.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 즉 시몰레이크 후작이 왕좌에 앉을지도 모르는 날이라 가족들까지 대거 데리고 나온 것이다. 아들 세 명은 물론 딸 두 명도 함께였다.
더욱이 세 명의 아내와 첩까지 아예 대가족이 모두 나온 상태에서 가장의 머리통이 잘리는 것을 눈앞에서 봐 버렸으니 이거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러나 몸은 아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복수하고 싶은가? 하고 싶은 자는 손을 들어라."
제이미의 명령에 수천 명의 사람이 일제히 손을 들었다.
"좋아. 좋아. 복수란 언제나 필요한 것. 노르딕 백작 그대의 팬텀 가드너가를 위한 충성심은 잘 확인했소. 나머지 반란군의 잔당이 저렇게 포기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시겠소?"
노르딕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다. 자신은 백작의 신분이다. 그런데 솔라리스 최고의 귀족 가문의 우두머리인 시몰레이크 후작의 목을 쳤으니 이건 귀족 집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작이 후작의 머리를 베는 일은 오직 국가를 배신하는 반란의 행위였을 때뿐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 또한 반란군이 되는 것이며 후작의 머리를 베었으니 자신이 쌓아 놓았던 것 또한 모두 무너지는 셈이다.
"반, 반란군을 제압하라."
노르딕의 외침을 들은 제이미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노르딕 사령관의 명이다. 반군을 제압하라."
아칸의 육만 대군이 시몰레이크 후작의 개인 사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건 공격이 아니라 그냥 처형이었다.
그들은 노르딕의 명령을 듣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 명령하는 것은 제이미였다.
"살고 싶은 자는 무릎을 꿇어라. 무릎을 꿇는 자는 공격하지 말라."
이 말은 곧 오비디언스 샤우팅이었기 때문에 의식에 따라 몸을 제어할 수 있었다.
"자네들에게는 특별한 권한을 주지.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나? 완전히 풀어 줄 테니 그리하게."
제이미는 시몰레이크 후작 가족의 제어권을 완전히 풀었다. 그의 세 아들들이 고함을 치며 득달같이 노르딕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아니다. 나는 제이미 백작의 마수에 걸려 어쩔수 없이 행동했을 뿐이다."
"노르딕 백작 자신을 부정하면 당신도 반란군으로 가담했다고 생각하고 단죄를 내릴 거외다."
노르딕은 지금 이 상황을 빠르게 수습하고 행동해야 했다. 이제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캉.
노르딕은 검을 휘둘러 쳐냈다.
세 아들은 사력을 다해 노르딕을 공격했다. 제이미가 이 사건의 원흉이지만 눈앞에서 아버지의 목을 자른 것은 분명히 노르딕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비디언스 샤우팅의 무서움을 아예 이해하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과 몸을 제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 생각했다. 즉 노르딕이 아버지를 배신하여 제이미 편에 붙어 아버지를 죽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때 두 딸마저 검을 들고 달라붙으니 그야말로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노르딕은 순간 판단했다. 이제는 확실히 결정해야 할 때라고.
"으아악."
"크윽."
무수한 전장을 누볐던 최고의 전사 앞에 겨우 검술 수업 흉내나 내던 시몰레이크 후작의 아들들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노르딕은 가차 없이 시몰레이크 후작의 아들을 베어 넘겼다. 두 아들이 결딴나자 살아남은 자들은 공포에 휩싸였지만 이미 이 비극의 막은 올랐고 하필 전 가족이 아버지가 왕관을 쓰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나왔기에 그 끝은 이미 결정이 난 거나 다름없었다.
반란을 일으키면 그 가족은 물론 하인까지 모조리 처형이다. 어떤 왕국이든 가장 무서운 죄가 반란죄다. 왕권을 전복시키는 행위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이의 생명까지 쥐어 잡고 간다.
제이미가 시몰레이크 후작을 반군이라 칭했고 복수하고 싶은 자는 손을 들라고 명했을 때 그들이 자의로 손을 든 것이 아니다. 바로 제이미의 오비디언스에 걸려 의지와 상관없이 손을 들었고 스스로 반군이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노르딕이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제이미의 말 그대로 진압하는 것뿐이다. 반군의 진압은 곧 척살이다.
"악."
시몰레이크 후작의 딸도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아내와 첩실의 몸에도 수십 개의 창날이 관통해 버렸다. 각성자의 힘은 대단해서 오비디언스 샤우트에 걸려 최대의 힘을 쏟다 보니 인간의 육체는 걸레 조각이 되어 버렸다.
시몰레이크 후작과 관계된 대부분은 사람은 목숨을 잃었다. 제이미의 명령대로 의식에 따라 복종하여 무릎 꿇은 사람만이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시몰레이크 후작과 그의 가족인 아들, 딸은 모두 노르딕의 검에 최후를 맞이했고 손을 들고 일어섰던 부하들도 노르딕의 기사들에게 전원 몰살당했다. 노르딕은 자기 손으로 시몰레이크 후작 일가를 완벽히 도륙해 버리고 말았다.
왕궁 앞은 피바다가 되었다. 마족이 왕궁을 점령했을 때 인간의 시체를 쌓아 놓았을 때와 비슷한 풍경이다. 이곳은 저주가 걸렸다. 이 왕궁 앞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 갔던가? 정말 저주가 걸린 땅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노르딕은 한 사람 앞에 섰다. 그는 오늘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자신의 목숨 하나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피로 얼룩진 채로 흑마 위의 제이미를 올려다봤다.
"이미 다 알고 있었소? 우리를 가지고 논 거요?"
"그럴 리가요? 전 여러분에게 수도 없이 기회를 준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제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
틀린 말이 아니다. 제이미가 참아 달라고 한 것, 기다려 달라고 한 기본적인 것을 다 무시한 사람이 시몰레이크 후작과 자신이 아니던가?
그때였다. 성문 안쪽에서 한 사람이 조용한 걸음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그니스 공주를 뒤를 돌아보며 반갑게 외쳤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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