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물결
변화의 물결
사내는 정면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눈빛에서 굳은 의지가 묻어났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동안 쥐새끼 잡으려고 한 노력이 뭐가 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상대를 보고 사내의 눈빛이 다시 변했다.
말도 안 되게 긴 팔 짤막한 다리 자신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의 키.
길거리 돌아다니면 병신 취급받을 딱 그런 모양새의 인물이었다.
"미친!"
사내는 거칠게 달려들었다.
"늘 이렇다니까. 외모로 상대를 파악하는 놈들은 항상 같은 꼴을 당하지."
-퍽
"우윽"
사내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지금 어떻게 무슨 공격을 받았는지 알수 없었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다.
단지 가슴과 복부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질 뿐.
"오랜만이야. 필포드 경."
"우, 날 아나?"
"당연하지. 그때도 쥐새끼처럼 빠져나갔잖아."
"너 따위는 기억에도 없어."
"알아, 그때는 내가 아니었으니까. 뭐, 그건 그렇고 후딱 본론으로 가자고. 케이사르 어딨어?"
"후후후."
"기분 나쁘게 왜 웃고 지랄이야? 그 웃음으로 자신의 맹세를 되새기겠다는 망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 네 머리통 속을 뒤져 볼 방법은 많아."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사사삭
필포드는 인커전의 아버지로 불리는 자로 제국에서 인커전이라는 특수 병과를 처음으로 직접 창설한 자다. 물론 그가 왕국에 소속되어 있었을 때고 윌리엄 대공으로부터 전적인 신임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는 정보전의 달인으로 그 노하우를 가르쳐 수많은 인커전을 배출해 냈다. 심지어 그의 기술은 제국의 수도 어반마르스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결국 대륙 전체에 인커전을 퍼트린 일등 공신인 셈이다. 날카로운 얘기가 허공을 갈랐다. 분명히 베어졌어야 할 난쟁이의 모습이 눈앞에서 꺼지듯 사라져 버리기 전에는 그는 분명히 상대를 베었다고 생각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필포드는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옆구리에서 전해져 오는 통증은 어마어마했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멎어 버릴 정도였다.
"컥, 컥."
거친 숨을 터트리며 필포드는 연신 뒷걸음쳤다. 그는 바로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이 난쟁이는 자신이 어떻게 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이다.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을 다 알고 있지만 네 놈에 관한 정보는 단 한 줄도. 우욱."
결국 입에서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내장이 박살이 나 버린 것이다.
"당연하지. 난 내 존재를 드러낸 적이 거의 없거든. 너희들 인커전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 봐야 인간의 범주를 벗어날 순 없으니까. 자. 순순히 말해. 케이사르 어디에 있어?"
"답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묻자. 엘로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 너희들이야?"
"아, 그년? 후후 처녀는 언제나 먹는 맛이 각별하지. 싫증 나도록 가지고 놀았으니 본전은 다 뽑은 셈이야."
"후후, 네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일을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네 발목을 잡을 것이다."
"미안하게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미끼는 한 번 쓰면 끝이지 어차피 잡힌 물고기 배로 들어가는 거니까."
"좋은 말이다. 내가 그 미끼를 물어 버리고 말았군."
"그렇지. 넌 지금 물 밖으로 끌려 나와 퍼덕거리는 물고기에 지나지 않아. 말해. 케이사르는 어디에 있지?"
"알았어. 알았다고. 말해 줄게. 그전에 말이야. 진짜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너, 황제의 개냐?"
"아니. 황제와는 상관없어. 개인적인 일로 케이사르를 꼭 좀 봐야 해서. 우리 세 명의 목적이 겹쳐서 말이지."
"넌 도대체 누구냐?"
"누구긴 누구야. 황제 머리 위에 앉으려 하는 사람이지."
"후후, 좋은 말이다."
"어서 말해. 시간 없어."
"알고 있다고 알고 있어. 약속은 지킨다. 영애를 그렇게 만든 놈을 잡고 간다면 결코 헛된 개죽음은 아니지."
필포드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탈로스는 놓치지 않았다.
"이놈이!"
필포드는 재빨리 품속에서 꺼낸 것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앗!"
-콰 쾅~!!
거대한 불줄기와 함께 시뻘건 화염이 밤하늘 위로 길게 솟구쳤다.
테일리아드의 수출품 중에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두 가지다.
통각의 맥박과 황혼의 망각이 그것이다.
은 솔방울을 닮은 돌조각인데 일종의 폭발물이다. 위력은 마나 5 이상의 마법사가 날리는 파이어볼 정도다.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해서 완벽히 무장한 기사 서너 명을 공중으로 날려 버리는 수준이다.
황혼의 망각도 수출품이긴 한데 제재가 매우 심한 수출 품목으로 각국의 고유 인사에게만 판매되는, 즉 일반 상점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막강한 무기다.
한때 테일리아드에서는 황혼의 망각 수출에 관해 큰 논란이 있기도 했다. 이는 익스플로전이라는 마법을 한 곳에 응축시켜 놓은 것으로 마법과 전혀 무관한 사람도 달걀 하나 깨뜨리는 정도의 힘만 있으면 충분히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황혼의 망각은 만든 마법사의 능력에 비례해 위력이 달라지므로 킹덤 오브 소서러스의 지위를 가진 고위 마법사가 만든 황혼의 망각은 소형 메테오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졌다고 한다.
지금 침묵의 숲을 뒤흔든 것은 킹덤 오브 소서러스 그 이상의 고위 마법사가 만든 최상급 황혼의 망각이다.
그 폭발력은 거대한 침묵의 숲 전체를 흔들었고 사방팔방으로 불씨를 날려 숲은 삽시간에 거대한 불구덩이가 되어 버렸다.
이 정도 폭발력이면 폭심지 가까이 있는 인간은 아예 증발해 버릴 정도의 위력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정도로 막강한 위력의 망각이 터진 것이다.
***
침묵이 감도는 밤하늘 아래 길게 늘어뜨린 흑발이 바람에 출렁거린다.
세렌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녀의 앞, 세 명의 벌거벗은 소년들이 팔을 들어 올리고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사실 장면만 놓고 보면 웃기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여성 기사 한 명과 벌거벗은 10살짜리 소년 셋. 누가 보더라도 추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소년들은 알몸은 둘째치고 손에 무기 따위는 들지 않은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들의 모습은 매우 안정적이었으며 겁 따위는 전계 관계없이 침착한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오히려 사냥감을 앞에 둔 짐승처럼 지독한 살기를 풀풀 뿜어 댔다.
"이번에는 방해하지 마. 세 마리뿐이다? 알겠지?"
"이번뿐입니다. 또 그러면 저희는 교주님께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럴드의 고함에 세렌의 입꼬리가 삐죽거렸다.
"너흰 오직 교주님뿐이로구나 더 그럴싸한 핑곗거리는 없는 거냐?"
"그야 대장이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존재는 그분 한 명뿐이지 않습니까? 어쩔수 없는 일이지요."
"닥쳐. 이제 조금 흥분이 올랐는데 찬물 그만 뿌리라고."
제럴드 옆에 있던 크림슨이 말했다.
"너무 간섭하는 것도 좋지 않아. 가끔은 대장 기 좀 살려 주라고."
"크림슨 너 말한 번 잘했다. 나도 진짜 쌓인 스트레스는 풀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
-팟, 팟, 팟
세렌이 대화하는 사이 세 명의 괴물 아이는 동시에 바닥을 차고 날았다. 그 속도는 실로 엄청났다.
세렌은 바이올렛을 눕혀 달려드는 아이들의 손톱과 발바닥을 받아냈다. 날로 베어 버리면 너무 싱겁게 끝날 것 같아 검신으로 공격을 받아넘긴 것이다.
이들이 아무리 빠른 움직임을 보여도 세렌의 감각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재들 저번보다 더 빨라진 것 같지 않아?"
추적술과 분석의 달인 바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애들이 해봐야 뭘 더 하겠어? 괜히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고 씨가 될 수도 있어."
"아니야. 자세히 봐. 저 녀석 왼 팔뚝에 상처 있는 놈. 저번에 싸우다 상처 입고 도망간 놈이야. 그때와 움직임이 확실히 달라."
제럴드는 바실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전투야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벌써 한쪽 다리가 잘린 마족 한 명이 바닥에 뒹굴었고 그걸 본 다른 두 명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세렌은 망설임 없이 다리 한쪽이 잘린 아이의 머리를 떨궜다.
"어휴. 저, 아무리 마족이지만 아이 모습인데 여지 없구먼."
아이 목을 쳐낸 세렌은 멈추지 않고 다른 마족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마족 두 놈은 양 갈래로 벌어졌다. 제럴드가 외쳤다.
"오른쪽 놈!"
세렌은 제럴드의 외침을 듣고 오른쪽 마족을 쫓기 시작했다. 마족이 아무리 날래다고 해도 경공에는 미치지 못한다. 세렌은 멈추지 않고 마족을 스쳐 지나갔다. 뒤따르던 제럴드의 눈에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작은 머리통 하나가 들어왔다.
"왜, 오른쪽이라고 했지? 그리고 왜 날 따라온 거야? 그놈을 쫓지 않고?"
두 놈 중에 한 놈을 선택하면 다른 한 놈은 놓쳐 버릴 수밖에 없다. 제럴드가 오른쪽이라고 외친 것은 자신들은 왼쪽 놈을 쫓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놈은 남겨 둬서 조사 좀 해 보려고요."
"조사? 무슨 조사야? 살려 보내면 귀찮아져."
"아뇨, 좀 더 조사해 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야, 쪼잔하게 조사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놈들은 우리 말도 알아듣지 못해. 그저 본능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이미 결론을 냈는데 또 뭘 하게?"
"바실과 제가 뭔가 수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조사는 교주님이 내린 명령에 포함된다는 걸 잊지 마시죠."
"넌 툭하면 교주님 타령뿐이야?"
"마교인이 마교 교주님 명령 따른다는데 뭐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그래, 맘대로 해. 하지만 날 방해! 피햇!"
세렌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앗"
제럴드는 피하지도 못하고 아예 몸을 완전히 뒤로 젖혔다. 거의 바닥에 등이 닿을 정도였다.
-스아아아악
바로 위로 검 하나가 빠르게 지나갔다.
-피이이이잉
그리고 난 다음에야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소리보다 검이 더 빨랐다는 이야기다.
"뒤로 물러나."
바실은 제럴드를 지나가 땅에 박힌 것을 보려 했다. 그것은 땅속으로 아예 박혀 버려 무엇인지 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다.
"뭐지?"
"검, 검이다. 길이로 봐서 투핸드 소드 같았어."
"미친 누가 검을 그따위로 던져?"
"모두 조심해. 세렌에 맡기고 뒤로 물러나. 보통 놈이 아니야."
"브라이트! 방패 들어 여차하면 뛰어들 준비하고!"
"알았어."
"머릿수는?"
"몰라. 저쪽에서 날아 온 것 같았는데 기척이 안 잡혀."
"온닷."
세렌의 날카로운 음성이 밤공기를 갈랐다.
-쎄에에에엑
칼바람이 분다. 제럴드는 어깨 위로 오싹한 기운이 올라붙는 느낌을 받았다.
"마족인가?"
"커! 성인이다."
"저기."
"브라이트 준비해. 어? 브라이트 네 쪽! 네 쪽이라고!"
-뻐 뻥
굉장한 소음이 터졌다.
모두의 눈에 브라이트가 튕겨져 날아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브라이트의 방패는 잉겔리움으로 만든 거다. 병장기 따위에 부서질 방패가 절대 아니다.
-텅, 텅텅.
흙먼지를 일으키고 바닥에 몇 바퀴 나뒹군 브라이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팟
바실이 제일 먼저 달렸다. 그는 엎드린 채로 꼼짝하지 않고 있는 브라이트를 뒤집었다. 방패를 잡고 있던 팔이 흐느적거리며 흔들렸다.
방패를 들고 있던 왼쪽 팔이 아예 박살이 나 있었다. 팔의 뼈가 완전히 바스러져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렸다. 호흡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는 안정적이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은 확인했다.
바실의 방패를 보니 잉겔리움 방패가 움푹 패 있었다. 그 팬 모양은 다름 아닌 주먹 모양이 각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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