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스칼라 유적7
엘스칼라 유적7
모두 숨을 멈추었다. 모두 두려움은 엄청났다. 잘못했다가는 여기가 무덤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육체의 조각이 온전하다면 다행일 정도로 말이다.
-쉬시식, 쉬시식
뭔가가 움직이며 공기를 가르는 느낌이 코앞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베인은 진짜 숨소리를 내면 들킬 것 같은 긴장감에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몸이 저절로 후들후들 떨리는데 왜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환장한 노릇이었다.
오스카가 아칸 최고의 마법사네 뭐니 떠들어 대면서 접근할 때 거절했었어야 했다.
그깟 금화 몇 닢에 목숨을 걸 모험가는 흔치 않다.
모그룩 저자가 영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끔찍한 장면을 보고서도 조사해야 하느니 증거 뭐라고 할 때 알아봤었어야 했다.
여긴 지옥의 입구다.
무엇에 홀렸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지옥의 입구 앞에 선 것이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근처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조심하라고 하는지도 듣지 못했다.
소리 내지 말라는 말은 곧 큰 위험이 다가왔다는 소리다.
베인은 필사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이 고비만 넘기면 빨리 빠져나가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 것이다. 진즉에 빠져나갔어야 할 것을.
스스로 가장 소중한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때 도적 파월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위험에 처했을 때 흔히 발생하는 도적의 본능이다.
위험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그 본능 때문에 파월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뒤로 뒷걸음질 치고 있다.
베인은 눈을 크게 떴다. 비스듬히 끼워져 있는 돌조각 하나가 파월의 엉덩이 쪽에 있었다.
그가 더 뒤로 물러난다면 그 돌조각을 건드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호흡이 가빠왔다. 파월과의 거리는 적어도 열 보 이상은 됐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앗! 앗! 앗!'
파월이 뒷걸음질 할 때마다 소리 없는 아우성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달그락, 탁, 탁, 탁···.
떨어져 나간 돌조각은 아주 크고 명쾌한 소리를 내지르며 아래로 굴러떨어져 내렸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려졌다.
오스카는 본능적으로 큰일이 터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순간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튀! 엇!"
그러나 자신들이 까마득한 투기장 꼭대기에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혼돈의 상황이었다.
아래는 뛰어내려서는 뼈도 추리지 못할 높이었다.
돌 굴러가는 소리 그리고 오스카의 고함은 죽음의 향한 피날레였다.
"으아아아."
그 완고한 전사 그웨인이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거꾸로 매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쉬싯식, 쉬시식
괴이한 소리가 접근해 온다. 바로 코앞이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돌벽에 매달렸다.
내려가는 것인지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표현은 오히려 감사한 표현이고 지금은 그저 살아야 한다는 본능에 빠져들어 비명을 질러대며 투기장 벽면을 타고 줄줄 미끄러져 내렸다.
옆에 누가 있는지 잘 탈출하고 있는지 그딴 것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저 붙잡을 수 있는 부분과 어떻게 하면 빨리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모그룩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리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카를 포함한 동료는 이미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중이다.
리치는 장애물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이므로 돌무더기를 넘어서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느끼는 사기의 강도가 달랐다.
리치가 가진 사기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역시 이 유적의 환경 때문인 건가?'
라마단의 정수를 품은 모그룩에는 리치의 사기 정도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리치가 날카롭게 손을 뻗어오자 준비하고 있던 비트레이얼 글로리를 펼쳤다.
바닥에서 밝은 빛이 리치를 향해 뿜어져 올랐고 그 빛을 쬔 리치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음, 배신의 영욕은 잘 먹히네. 그럼 서먼 디스펠도 먹힌다는 이야기인데."
비트레이얼 글로리는 타인이 소환한 소환수를 역으로 제 것으로 만드는 스킬이다. 이 스킬이 먹히려면 소환한 사람보다 더 높은 사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니면 소용없는 스킬이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저 많은 리치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만약에 저것이 미쳐 날뛰거나 아칸 시티로 쏟아져 나온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실수했군. 지하에서 이런 일을 벌이는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이놈 진짜 세상을 파괴하려는 거냐?'
모그룩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유용한 스킬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저 많은 리치를 서먼 디스펠로 소환 해제하려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그걸 지켜 보고 있을 놈들이 아니다.
지금 제압한 리치는 경비용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 이 소란에도 투기장 안의 리치는 움직이지도 않고 있으니 그건 분명 제어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때를 기다리기 위해 모종의 술수를 쓴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해할 수 없다. 네크로맨서의 반란 때 주신 제국 전역의 네크로맨서는 대부분 토벌당했다. 하물며 라마단의 정수를 이은 자들까지 죽음의 사막으로 추방당했으니까.
저 수만 마리의 리치를 소환할 네크로맨서는 없다는 소리다. 지금까지 습득한 지식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처리를 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리치는 원래 마족을 상대하기 위해 고안된 사령이었다. 리치의 전투력은 마족과 비슷하거나 웃도는 정도다. 그럼 지금의 각성자와 거의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대신 지독한 사기로 인해 상대하기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다.
네크로맨서의 반란 때도 리치가 등장했지만, 반란이 토벌될 때까지 없앤 리치는 채 이백 마리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지금 이 투기장의 리치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수치며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저들이 모두 뛰쳐나오면 오군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걸 참작해서 리치를 소환한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아칸의 멸망을 기도한 움직임이 분명했다.
케이사르 이놈은 정말 사악한 짓이란 짓은 모두 하고 있다.
모그룩은 주변이 조용해지자. 포획한 리치에 사령의 눈을 걸었다. 리치의 눈으로 사물을 볼수 있도록 말이다. 리치를 보내 투기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볼 참이었다.
밑에는 난리가 났다. 죽자 살자 뛰어내리는 동료의 소란스러움이 아예 투기장 전체에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소란스러움에도 투기장에 떠 있는 리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그룩은 보낸 리치는 투기장 아래로 내려갔다.
리치는 투기장을 가로질러 빠르게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우려하던 일이 바로 벌어졌다.
움직이지 않던 리치들이 모그룩의 리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은 모그룩이 조종하는 리치를 붙잡더니 갈가리 찢어 놓았다.
그리고 출렁이기 시작한다. 투기장 내 리치는 잠에서 깨어 나는 듯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으악."
"악."
밑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모그룩이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니 미친 듯이 내려가던 동료들이 어느샌가 모여든 리치를 발견하고 비명을 내지른 것이었다.
살기 위해 열심히 밑으로 내려갔는데 바닥에 리치가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오르지도 못하고 더 내려가지도 못하고 중간쯤에 꼼짝없이 매달린 셈이었다.
만약 발을 헛디뎌 추락하는 날이면 낙사로 죽거나 아니면 리치에 찢겨 죽을 판국이었다.
리치는 이미 그들을 발견했고 허공으로 점프하며 올라오는 중이었다. 리치는 허공에 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겨우 한쪽 팔 정도 높이다. 그 이상으로는 잘 오르지 못한다.
그래서 높은 건물 위로 피하면 다른 길이 없는 한 일단 리치로부터 피할 수 있긴 하다. 물론 전혀 디딜 곳이 없다는 가정에서 말이다.
이곳은 유적이고 오랜 세월 방치되어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그것은 리치가 충분히 디딜 공간을 마련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 마리도 아니고 네 마리가 한꺼번에 올라오니 이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모그룩은 혀를 찼다.
사태가 보통 사안이 아닌 것도 알았고 증거는 이 모든 것을 목격한 동료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최대한 이들을 살려서 데려가면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천마잠행으로 잽싸게 뛰어내린 뒤 올라오는 리치에 비트레이얼 글로리를 걸었다.
총 네 마리를 포획한 모그룩은 위를 보며 소리쳤다.
"어이, 살고 싶으면 빨리 내려고 오시구려? 난 기다리는 건 질색이라서. 내려오지 않으면 혼자 떠날 거요."
이래서 들리는 목소리에 동료들은 고개를 빼고 내려다보았다.
분명 고함친 사람은 모그룩이었다. 그들은 모그룩이 어떻게 아래로 내려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건 두 번째 문제고 그의 주변에 리치가 있다는 사실에 기겁했다.
"괜찮소. 이들의 제어권은 이미 내 손안에 있으니 두려운 것이 없소. 내가 안전한 것이 그 이유요. 믿고 안 믿고는 그대들에게 달렸소. 말했다시피 난 인내심이 넉넉한 편이 아니라오."
모그룩은 일단 리치를 좀 더 멀리 보냈다.
사람들은 모그룩의 손짓에 리치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서로를 바라봤다.
"지금 본 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초에 저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어이 대장 어떻게 할지 좀 정해줘."
"이렇게 매달려 있을 순 없잖아? 소란을 듣고 저것들이 다 뛰쳐나오면 끝이야."
"제길 내려간다."
오스카가 선두에 서서 내려왔다. 그는 바닥에 내려서자 경계의 몸짓으로 모그룩을 주시했다.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그 말은 한심한 놈이나 하는 말이라고. 내가 적이면 당신들이 내려오기 전에 처리했을 거라고."
"듣고 보니 설득력 있네."
"그렇긴 하네요. 우리는 별반 가치 없는 인간인데 굳이 지킬 이유도 없을 테니 말이요."
그웨인의 말에 모그룩이 말했다.
"증거지. 증거. 그대들이 두 눈으로 본 것이 죄다 증거가 아니요. 한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여러 입이 거들면 더 신빙성이 있는 거니까."
오스카가 말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어떤 속임수를 사용했기에 저들을 제어한다는 말이오?"
"일단 위험 지역을 벗어나는 게 먼저요? 여기서 잡담이나 하는 것이 먼저요?"
베인이 나선다.
"무조건 튀고 봐야지."
"그럼 갑시다. 소란이 있었으니 확인하려 들 거요."
"말해 무엇해? 어서 가요."
일행은 미친 듯이 달렸다. 다섯 명은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모그룩은 그저 산책하는 수준도 안 되었다.
베인은 모그룩의 뒤로 리치 네 마리가 붕붕 떠서 따라 오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헉, 헉, 저놈들 정말 제어 하는 거 맞는 거요?"
"그렇다니까."
그들은 먼젓번 모험가가 살해된 장소로 되돌아왔다.
"잠깐! 뭔가 이상해."
딱히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만큼 주변은 정리되어 있었다. 너절하게 널린 육편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들이 흘린 피는 아직 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기에 그 장소가 확실하다는 것은 알수 있었다.
"시체? 시체는 어디로 갔어?"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어서 가죠."
모그룩은 의아심이 들었다. 아주 강력한 사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건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었다.
물론 살아있지 않은 죽은 사령의 냄새지만 네크로맨서의 기술을 모두 통달했고 사자의 서 필사본까지 싹 다 외우고 있는 모그룩에 이 느낌은 생소했다.
사자의 서에 기록된 소환수는 그리 많지 않다. 하급으로 스켈레톤, 중급 워리어 스켈레톤 상급 마법사 스켈레톤, 다음 고급편으로 넘어가면 리치와 골렘을 소환하는 기술이 나온다. 최상급으로 넘어가면 리치킹을 소환술이 있다.
그리고 사기와 관계없이 다른 종류 즉 네이처 포스로 소환할 수 있는 것이 다이어 울프와 스플린터 플랜트다.
모그룩은 한번 소환한 소환물의 사기의 종류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사기 냄새만 맡아도 이것이 어떤 소환물인지 보지 않고도 구분할 수 있다.
지금 맡은 냄새는 단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는 생소한 것이다.
냄새의 강도도 매우 진해서 이곳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흔적을 지우려 했다면 시체만 가져가지 않았을 거야."
오스카는 고개를 돌려 모그룩을 바라봤다.
"맞습니다. 이건 치운 것이 아니라 먹은 것 같습니다."
모그룩의 말에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을 봐. 이건 핥은 흔적이 분명해."
"어서 가죠. 어서 가요."
베일의 재촉에 일행은 빠르게 토굴 앞으로 왔다.
"이런!"
선두에 있던 오스카의 분노 가득한 외침이 들렸다.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토굴은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도적 파웰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돌덩이를 치웠으나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냄새가···. 뭔지 모르겠지만 우릴 따라 오는 것이 있어요."
모그룩의 말에 파티원 전원이 경직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싸울 준비를 해야지."
그 와중에 오스카는 저 멀리 서 있는 리치를 바라보고 말했다.
"어이, 모그룩 자네 리치 제어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요?"
"그럼 자네 리치 아니 저 리치를 이용하면 어떻겠냐?"
"그래서 저기 방패막이로 세워 놓은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면 되는구나. 아하하."
"마, 맞아 우리에게 최고의 무기가 있었네. 리치가 네 마리면 충분하지 않을까?"
오스카의 제안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일행은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서로가 봐도 참으로 어색한 웃음이었다.
"제길, 너 도대체 누구야? 정체를 밝혀!"
마법사 베인은 모그룩에 지팡이를 겨누며 외쳤다.
"네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를 말해 줄까? 증거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란 말이지. 여기 올 때부터 계속 주절주절 귀찮게 하던데···. 살기 싫지? 너처럼 나대는 놈이 제일 먼저 뒤지는 게 진리인 거는 알고?"
베인은 은근쓸쩍 지팡이를 내리며 말했다.
"내 말은···. 도대체 어떤 용병이 리치를 제어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네크로맨서도 아니잖아? 아! 설마 네크로맨서?"
"아니라고 했잖아. 그냥 우연히 주워들은 기술 몇 개가 유용하게 써먹힐 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믿는 척이라도 할거 아니야? 미친! 네크로맨서도 아닌데 누가 리치를 제어해?"
"야, 나중에 하자. 뭔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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