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실전(1)
모든 전투준비를 갖춰놓고 막연한 기다림에 지칠 때쯤.
흐느적흐느적.
한 마리의 화이트급이 형체를 드러냈다. 진지 주위 100m 반경은 전부 공터. 지금 막 풀숲을 해치고 등장한 놈과 거리는 꽤 멀었다. 아직 확실한 외형이 식별 불가능했다.
놈의 상태로 보아 상당히 기운 없어 보였다. 제 몸의 중심을 조절하지 못하는 듯 걸을 때마다 몸이 좌우로 휘청였고 움직임이 이러니 이동속도 또한 매우 느렸다.
적의 등장을 기다리던 선임 조교가 모두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이 나타났다! 아까 나눈 1번 팀은 진지 앞으로 돌격해 전선을 갖춰라!”
앞서 나눈 근접병 5명이 진지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윽고 진지 앞 30m 부근에 근접병으로 전선이 쭉 형성됐다.
그들을 향해서 조교가 외쳤다.
“전선 유지 잘해라!”
“““악!”””
전선에 나온 훈련병은 옆 사람과 일정 거릴 벌리고 있었다. 진지에서 쏘아지는 지원사격의 이점을 최대한 받으려는 듯 보였다.
전선에 투입한 훈련병이 옆 사람과 거리를 벌리고 있던 사이에 엄청난 압박감이 들어 전방을 살폈다.
“헉!”
처음 한 마리였던 적이 순식간에 수천 마리로 늘어났다. 그들 모두 아직 형체밖에 안 보여서 검은 파도를 연상케 했으나 압도적인 물량임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진동시키는 발걸음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선에서 30m 떨어진 적.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외형 식별이 가능해졌다. 그동안 봐온 화이트급과 느낌이 달랐다. 놈들은 얼굴엔 이목구비 없었고, 신체는 인간의 외형을 닮아 160cm 정도였다. 또한 온몸에 천을 두른 듯한 느낌이었다.
전체적인 색상은 그림자를 보듯 어두웠다.
다가오는 놈이 신교소 놈과 차이라면 덩치, 그리고 더욱 짙은 어둠. 눈앞의 화이트급이 새로 태어난 객체라면 그동안 보던 건 늙은 느낌.
적의 진군을 늦추려고 진지에서 원거리 사격을 개시했다.
“전군 발포!”
피슈웅. 피슈웅. 쾅! 쾅!
포탄 한 발이 적중할 때마다 적 네댓 마리가 허공에 치솟았다. 하지만 날아간 빈자릴 금세 다른 이가 메꿨다.
KS 탄에 적중된 적은 뒤로 밀쳐지기만 할 뿐 그리 살상력이 크질 않았다. 얼추 쏘아보니 1마리에 3번 정도는 적중해야 보이드 못이 소멸했다.
아군의 필사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근접병 전선과 보이드 못 군단이 만났다. 아군이 사격으로 지원했지만, 압도적인 물량의 보이드 못의 발길을 막을 순 없었다.
전선에 있던 훈련병은 적의 진격에 깔리기 전에 저도 모르게 돌진했다.
“이야앗!”
휙.
적에게 도착과 동시에 자신의 칼에 마나를 입혀 휘둘렀다. 그로선 온 힘을 다한 사선 베기지만 주위선 볼 땐 쓰레기 같은 몸짓. 한데, 그 비루한 공격에 상대는 맥을 못 췄다.
화이트급은 칼질 한방에 크게 휘청이며 신형이 무너졌다.
“어?”
훈련병의 병장긴 보급용 쓰레기 칼. 무기가 좋아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놀람도 잠시 주위에 다른 적이 압박했다. 제 검술의 위력을 찬양할 새가 없었다.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화이트급은 수수깡 부러지듯 손쉽게 무너졌다.
“이야, 이 새끼들 X나 약하네.”
훈련병은 처음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적의 약함에 심취됐다. 이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며 진지 앞에 형성된 전선은 적을 밀어내며 점차 진지에서 멀어졌다.
진지 안에서 사격 지시를 내리던 조교가 이 광경에 피식 웃었다.
“병신들. 꼭 처음 나간 놈 중에는 생각이란걸 하는 새끼가 없더라.”
주위 훈련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지금 이기고 있는 거 아닌가?’
조교가 뒤돌아서 그들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늬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훤히 보인다. 전황이 유리한데 왜 지랄하냐고? 유리한지 보자고. 근접 2팀 투입 준비해라.”
아직 8시간이 안 지났기에 교체하려면 멀었다. 불합리한 조교의 지시에 2팀에 있었던 삼에삼(3-3)이 나섰다.
“조교님. 8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지금 준비합니까?”
“1팀은 예외다. 로테이션은 2팀부터 진행된다. 이 이후론 죽든 말든 신경 안 쓴다. 명심해라.”
“““악!”””
미리 투입되는 게 억울하지만, 조교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다엘을 포함한 2팀은 투입을 준비했다.
근접전투를 하던 1팀 병사는 자신의 힘에 심취해서 70m 이상까지 진격했다. 전선이 멀어지니 혹시나 하는 오발탄 때문에 사격을 머뭇거리는 아군이 늘었고 그로 인해 원거리 공격 화력이 줄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투하던 이들이 계속되는 전투에 지쳤다.
“헉헉, 끝도 없네.”
처음 약하다며 날뛰던 훈련병의 패기는 전투가 진행된 지 3시간 만에 사라졌다. 그로 인해 앞서던 전선이 뒤로 주춤했다.
“어어어?”
검이 무겁다. 온몸이 솜 물먹은 듯 축 처지며 간간이 유지하던 칼의 마나도 꺼지기 일보 직전이다. 끝없이 진행되는 전투에 치가 떨렸다. 아니 무서웠다.
‘이걸 8시간 버티라고?’
절대 무리.
훈련병의 뇌리엔 쉬고 싶은 생각이 가득 들어서며 전방의 적을 향해서 마지못해 검을 내리쳤다.
훌러덩.
‘뭐야?!’
검의 마나 감쌈은 어느덧 사라졌고 마나가 없는 민둥한 칼질은 보이드 못에게 1의 타격도 주질 못했다. 힘없이 적의 정수릴 향해 내려쳐진 검격.
보이드 못의 외형을 타고 옆으로 쭉 미끄러지더니 지면을 향해 의미 없이 꼬라박았다.
쾅.
“크으으.”
지면에서 올라오는 진동에 골이 울렸다. 팔을 타고 느껴지는 강한 떨림에 하마터면 무기를 놓칠뻔했다. 빨리 현 상황을 수습해 적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물량의 적군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퍽퍽퍽.
훈련병을 향해 쏟아지는 무분별한 주먹질. 놈들의 비루한 모습 그대로 솜 주먹이다. 맞아보니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이게 때린 거?’
별로 아프지 않은 적의 공격을 무시하고 땅에 깊숙이 박힌 검을 회수하려고 힘줬다.
퍽퍽퍽.
‘으헉?!’
적의 공격에 노출될수록 몸에 머금던 마나가 빠져나갔다. 오랜 전투로 얼마 남지 않은 마나가 다 빠져나가자, 엄청난 탈력감이 엄습했다.
“크으윽.”
계속되는 적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진지를 향해 점차 밀렸다. 쫓아오는 적의 이동속도가 느려서 정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계속 두들겨 맞다가 둘러싸여서 이번 생을 마칠 뻔했다.
위와 같은 상황이 돌격했던 훈련병 대다수에게 일어났다. 자연이 70m 가까이 멀어졌던 전선도 축소되었다.
어느새 20m가 넘게 밀려난 전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진지 내 훈련병들이 비웃었다.
“병신들 성난 황소처럼 뛰쳐나가더니 돌아오네. 회귀본능 오지고요. 연어 보는 줄?”
“난 부메랑인 줄 알음.”
“돌아와라! 때카츄!”
“때카츄가 뭐냐?”
“몰라···.”
밀려난 곳에서 자릴 지키는 근접병이 아무도 없었다. 속수무책 보이드 못의 진군에 따라 밀려났다.
어느덧 전선과 아군 진지와 거리 30m 차.
지원사격이 활발한 거리가 되자 사격수의 적극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피슈웅. 펑! 펑!
날아오는 탄에 맞은 보이드 못이 잠깐 주춤하더니, 전선을 빠르게 무너트렸다. 근접병은 지쳤기에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진군을 버티지 못했다.
더 이상 밀리면 진지까지 밀릴 것 같기에 사격하는 이들이 소리쳤다.
“자리 유지해!”
“찌든 때냐! 미는 대로 쑥쑥 밀리네.”
“새끼들아 더 후퇴하면 내 포에 맞을지 모른다고!”
그들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선은 계속 후퇴했다.
진지까지 10m.
어느덧 아군의 사격은 멈췄다. 바로 앞 전방에 동료의 등이 보인다. 몇몇 적극적인 훈련병만 고지대에 까맣게 물든 보이드 못을 향해 KS를 쏠 뿐이다.
전황을 지켜보던 조교가 지시했다.
“2팀 투입! 1팀 후퇴해라.”
“““악!”””
2팀이 진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들 근접 무기 ‘쓰레기 칼’만 소지한 채다. KS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거 같아서 진지 한쪽에 모두 모아서 세워뒀다.
다엘은 1팀 삼에오(3-5)를 향해서 빠르게 뛰쳐나갔다.
필요 부위에 마나를 머금고 움직이자, 어느새 삼에오 앞에 나타나 가까운 적에게 검을 내려쳤다. 일련의 행위가 0.5초도 걸리지 않았다.
촤아악.
다엘의 수직 겸격 한 번에 화이트급 보이드 못이 깔끔하게 양단됐다. 그 모습이 일도양단의 정석을 보는 듯했다. 갑작스럽게 지원군이 나타나자, 삼에오는 놀라 삼에칠을 바라봤다.
이윽고 서로 마주치는 눈.
잠시 지켜보던 삼에오는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이고 삼에칠 어깨를 톡톡 친 뒤 진지로 퇴각했다.
2팀과 바톤 터치다.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던 전선은 어느새 적을 뒤로 밀어내서 30m 부근을 지켰다. 앞서 1팀의 사례를 봐서 2팀은 자릴 고수 하며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며 전투를 유지했다. 이 위치에서 아군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8시간 동안 버터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다엘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주위를 초토화했다. 어차피 대기(大氣)에서 마나를 공짜로 끌어다 쓰기 때문에, 약간의 신체 고통만 참으면 무한 마나였다.
그가 마나를 끌어 쓸 때마다 보이드 못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하지만, 다엘은 지금 자신의 힘에 심취해 이를 파악할 순 없었다.
* * *
힘들다. 언제 끝나나. 쉬고 싶다. 세 단어를 제외한 단어는 생각나질 않았다. 아마 모든 훈련병의 공통 사항일 거다.
진지 밖에서 싸우는 훈련병이 가장 힘들지만, 사격 병력도 매한가지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근접병 투입이 5번째이기에 얼추 5일은 됐다.
중간에 한 번씩 조교들이 3시간 정도 나가서 대신 싸워주지 않았으면, 진즉에 무너졌을 거다. 조교가 나서는 주기가 이틀에 한 번이니 오늘 기대하긴 어려웠다.
사이에 3일째 되던 날 전선이 무너졌었다.
보이드 못은 진짜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차곡차곡 싸이는 피로에 결국 ‘나 하나쯤 어때 누군가 대신 싸워주겠지.’라는 마음이 훈련병 하나둘씩 마음에 자리 잡았다.
결국 전선을 유지하던 근접병이 버티지 못하고 계속 밀렸던 것.
‘진지까지 밀리면 다른 팀이 바꿔주겠지?’
처음을 생각하고 진지까지 밀린 결과 뒤엔 아무도 없었다.
‘다 어디 갔어?!’
근접병이 밀린 만큼 아군도 30m를 유지하며 진지를 버리고 후퇴했다.
‘미친!’
지원사격만 줄어든 꼴이었다. 힘든 상황에 사격이 줄어드니 버티기 더 힘들었다. 진지까지 밀린 근접 병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어떻게든 8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 뒤로 모든 훈련병 머리에 경각심이 생겼다.
‘후퇴해도 받아줄 아군이 없다.’
이후론 이런 일이 안 생겼다. 죽을 거 같아도 어떻게든 전방 30m에서 버티는 게 가장 덜 힘들었다. 대신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지금 탄의 화력은 처음에 비해 40% 가까이 줄었는데, 끝없이 중첩되는 피로에 진지 내 원거리 지원하던 훈련병이 나눠 자기 시작했다.
진지 밖에서 버티는 이들의 피로가 더욱 가중되지만 견뎌야 했다. 안자고 몇 날 며칠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암묵적으로 이뤄진 합의.
피 말리는 대치 상황이 오늘 5일 차에 깨졌다. 한창 적과 대치 중인 근접병은 적군 사이에서 극소수의 뭔갈 발견했다.
“저게 뭐지?!”
그것의 덩치는 인간을 뒤덮을 만큼 컸다. 등 뒤론 2장의 큼지막한 날개를 달고 있어서, 화이트급 위에서 저공비행 중이었다.
날개의 총 폭까지 더해서 길이를 구하면 3m는 가뿐히 넘어 보였다. 이목구비가 없지만, 머리로 짐작되는 곳 이마엔 큰 더듬이가 1쌍 자리했다.
상황을 이제야 파악한 조교들이 다급히 외쳤다.
“비상! 지금 다 진지 밖으로 나가 1팀을 엄호한다! 빨리!”
그들이 긴급하게 외치며 먼저 나방 닮은 적에게 접근했다. 훈련병도 피곤함에 취해있던 정신이 확 깼다.
“빨리 가보자.”
다엘은 놈의 접근을 보자마자, 진즉 1팀인 삼에오(3-5)에게 달려갔다.
‘안돼!’
하필이면 나방 녀석 2마리가 3 대기소에 몰렸다.
한 마린 삼에이(3-2)에게 한 마린 다엘의 은인에게 맹렬하게 날아갔다. 어느새 한 마리가 삼에이 코앞까지 접근했다. 그는 괴물의 맹렬한 추격에 열심히 도망치는 것 말곤 할 게 없었다.
“으악!”
때마침 옆에 같이 도망치는 삼에일(3-1)이 보였다. 순간 삼에이가 그의 어깨를 짚고 뒤로 밀쳤다.
“난 살아야 해!”
“어?”
휘익.
삼에일은 얼빠진 소리를 냄과 동시에 맹렬하게 날아오던 거대 나방에게 먹혔다. 그 나방은 인간을 두 날개로 감싸 안으며 고치 형태를 취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고치에서 하단부에 거대 나방의 다리가 튀어나왔다. 이윽고 두 다리는 지면을 박차더니 뒤편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이(2)의 밀침 덕분에 일(1)의 인생 퇴장.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