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59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45)
자비의 대륙 관리국 본부 메인 타워 지하.
그곳에 재현되어 있는 고아원 건물의 지하 대피소에서는 일레시아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그녀는, 유서 깊은 건물을 재현한 장소에 와 있는 터라 조금 감동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감동을 한가롭게 만끽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다.
지금은 한시바삐 일루리아의 목에 채워진 초커의 봉인을 풀고, 둘이 함께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으니까.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너 역사 공부 좋아하지? 그런데 이 역사적인 건물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아무런 감동도 못 느낀단 말이냐?”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일루리아는, 지하 대피소에 있는 낡은 침대에 느긋하게 드러누운 채, 자기를 바라보면서 고민하고 있는 일레시아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저도 찬찬히 감동을 느끼고 싶긴 하지만, 지금은 하도 골치가 아파서 그럴 여유가 없네요.”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골치 아픈 거냐?”
“짧은 시간 내에 이 초커의 봉인을 풀려면 반드시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조력자를 찾아서 여기로 데려와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일레시아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면서 하소연하듯이 대꾸했다.
“그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딱히 도와줄 방법이 없구나.
다만, 한가지 문제에 지나치게 골몰하다 보면 똑똑하던 사람도 바보가 되어버릴 때가 있다는 건 잘 안다.
너도 잠깐 주변을 둘러보면서 긴장을 푸는 게 좋겠다.”
“긴장을 풀라고요? 어떻게요?”
“우선 주변을 한번 둘러 봐라. 이 지하 대피소에 와 본 느낌은 어떠냐?”
일레시아는 이 질문을 받고서야 겨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볼 생각이 들었다.
희미한 촛불이 밝혀진 어둠침침한 지하 대피소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어서 실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할머니가 누워 있는 낡은 침대 역시 때가 잔뜩 묻어 있어서, 어떻게 저런 더러운 침대 위에 아무렇지 않게 드러누울 수 있는지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여기 와 본 느낌은, 한마디로 정말 어둡고 지저분한 것 같네요."
할머니는 이 대답을 듣고 빙긋 웃었다.
“정확하게 봤다. 그래, 여긴 정말 어둡고 지저분하지.”
"아까 들어오다 보니까, 고아원 건물 안팎이 전부 깨끗하던데요. 정원도 잘 가꾸어져 있고요.
왜 여기만 이렇게 지저분한 거죠? 대체 여길 청소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뭐? 청소하고 관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따로 있을 리가 있냐? 그냥 나 혼자 다 하는 거지.”
할머니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말을 듣고 일레시아는 흠칫 놀랐다.
“네? 이 넓은 건물과 정원을 혼자서 다 관리하고, 거기다 시간이 남아서 농사까지 짓고 계셨던 거예요?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다니? 뭐가? 여기 갇혀 있으면 썩어버릴 정도로 남아 도는 게 시간이야.
오히려 그런 소일거리라도 없었다면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벌써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죠. 저 같으면 아무리 심심하더라도 그런 피곤한 육체 노동은 못할 것 같아요.”
“잊었느냐? 나는 아르케의 힘으로 신체를 재구성한지 제법 오래 되었다. 그 이후로 피곤함이나 배고픔 같은 건 한동안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았어.
잠을 잘 필요도,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어졌단 말이야. 거기다 병에 걸리지도 않고, 몸을 씻을 필요도 없어졌지. 어때? 부럽지 않냐?”
“뭐, 부럽다면 부럽긴 한데요. 그러면 삶이 너무 재미 없어지지 않을까요? 특히나 음식 먹는 재미가 없어진다면 정말 아쉬울 것 같아요.”
일레시아가 이렇게 말하자, 할머니는 빙긋 웃었다.
“넌 정말 예리하구나. 잠을 잘 필요도,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어지고 나니까, 확실히 삶이 재미 없어지긴 하더라.
그래서 처음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괜히 누워서 눈을 감고 빈둥거린다거나, 각종 기호 식품을 계속 즐기려 하거나 했지.
나중에 새로운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점점 안 하게 됐지만 말이다.
다만, 이 초커가 채워져서 코어의 기능이 대부분 봉인된 다음부터는 약간씩 피곤하고 배고프긴 하더구나.”
“오래간만에 피곤함과 배고픔 같은 감각이 돌아오니까 낯설지는 않으셨어요?”
“당연히 처음에는 무진장 낯설었지. 하지만 동시에 옛날 생각이 나서 재미있기도 했어.
물론 어디까지나 아주 조금 피곤하고 배고픈 것일 뿐, 하루에 1시간 정도만 자고, 저기 밖에서 키우는 채소나 과일을 약간만 먹으면 전부 해소되어 버리는 수준이야.
그러고 나면 시간과 체력이 남아 돌아서, 고아원 건물 청소쯤은 간단한 소일거리 밖에는 안 되는 거란다.”
“아니, 그렇게 시간과 체력이 남아돌아서 청소로 소일하셨다는 분께서, 이 지하실만은 왜 이렇게 어둡고 지저분하게 내버려두신 거예요?
마음만 먹으면 궁전처럼 꾸밀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렇긴 하지만, 어둡고 지저분한 게 이 지하실의 중요한 정체성이니까 일부러 이렇게 내버려둔 거야.
너는 실제로 여기 살아본 적이 없으니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음, 이걸 어떻게 납득시키면 좋을까?
이 지하실은 구인류가 멸망하기 이전, 온 세상이 극도로 혼란스러웠을 때, 나와 동료들이 종종 숨어 있었던 곳이야.
원래부터 어둡고 지저분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덜덜 떨면서 숨는 장소였으니 한층 더 무섭게 느껴졌지.
사실 그냥 이렇게 청소를 안 하는 것만으로는, 그때 그 무서운 느낌을 거의 재현할 수가 없을 정도란다.”
실제로 그 혼란한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 일레시아의 입장에서는, 그냥 말로만 들어서는 ‘이 지하실의 정체성' 운운하는 소리가 도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어려운 과업을 억지로 떠맡고 답답한 심정으로 지하실에 숨어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추측해 보려고 노력하자, 지난날 불안에 떨면서 여기 숨어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은 짐작되는 것 같기도 했다.
“과거에 성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이 건물에서 살았던 고아들 가운데, 이곳 지하 대피소를 가장 많이 이용했던 사람은 아마도 바로 나일 거다.
내가 제일 사고를 많이 쳤으니까. 허구한 날 사고를 치고 돌아오면, 성녀는 한숨을 쉬면서 일단 나를 여기에 숨겨 놓기부터 했었지.
여기서 며칠 동안 숨 죽이고 숨어 있으면서, 나는 항상 후회와 불안에 시달렸단다. 왜 또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을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성녀가 고생해서 내가 친 사고를 수습해준 덕분에 이 지하실에서 나오게 되면, 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욱하는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새로운 사고를 치곤 했었다.”
할머니는 옛이야기를 하면서 그리운 추억이 떠오르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난 이 지하실에 대해서라면 심지어 이베리스 보다 더 잘 안다. 내 기억 속의 진짜 지하 대피소는 이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어둡고 지저분한 곳이었어.
거기다 매번 또다시 사고를 치고 말았다는 후회, 성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 이번에도 사건이 잘 수습될까 하는 불안감 속에서 덜덜 떨면서 숨어 있곤 했다.
그러니 당연히 이곳이 정말 실제 보다 더 어둡고 무섭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않겠냐?”
할머니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실은 이 지하실만이 아니라, 고아원 건물 전체가 내 눈에는 그저 거대한 짝퉁처럼 보이는구나.
규모만 줄여서 최대한 그대로 재현하려고 노력했다고? 웃기는 소리!
또 정체성 얘기를 하자면, 이 낡고 볼품 없는 건물이 지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당시 험한 세상에서 힘없는 고아였던 우리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요새였다는 점이야.
여기에 자상한 성녀가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들이 함께 있으니,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의 안정을 주는 요새 말이다.
그런데 타워 지하에 겉모습만 비슷하게 재현해 놓은 이 건물이 그럴 수가 있겠냐? 그러니까 이건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거다.”
일레시아는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반론을 제기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 그렇게 따지면 유적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요?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역사 유적이,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최신 기술로 수리하고 복원한 거잖아요?
과거 그 유적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도 당연히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고요.
엄밀히 따지면 그래 봤자 결국 겉모습만 비슷한 가짜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복원된 유적을 방문해서 말이나 글만 가지고는 알 수 없는 감동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으니까 의미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유적이 실제로 사용되었던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예 없는 것 보다는 모조품이라도 있는 게 나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처럼 그 시대를 실제로 살았던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짝퉁은 그냥 짝퉁일 뿐이다.
이런 이치는 사실 이베리스가 나한테 처음 알려준 거란다.”
“네? 국장님이요?”
“그래. 고아원 시절에 다 같이 오래된 왕궁 유적에 놀러 간 적이 있었어.
그때 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정말 멋지다, 옛날 왕과 왕비는 이런 엄청난 건물에 살았구나 하면서 감탄하고 있는데, 이베리스 혼자만 꿈도 낭만도 없는 소리를 늘어 놓지 뭐냐?
아무리 비슷하게 복원해 놓았어도 이건 결국 저급한 모조품일 뿐이라는 거야.
만약 실제로 그 왕궁에 살았던 과거의 국왕이 다시 살아나서 자기 집을 본다면, 내 집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감히 누가 이런 가짜를 만들어 놓았느냐면서 화를 낼 게 분명하다고 말했어.”
“국장님께서는 그때부터 사고 방식이 냉정하셨군요.”
“그런데 웃긴 건, 자기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으면서, 이제는 나한테 이런 짝퉁에서 살라고 강요한다는 사실이야. 정말 황당한 일 아니냐?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가짜 건물을 보면서, 행복했던 지난 날의 추억을 회상한다는 자체가, 어떻게 보면 그 추억에 대한 모욕이야. 그저 역겨울 뿐이지.
그러니까 이건 이베리스가 날 괴롭히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그래서 저와 함께 여길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신 거예요? 가짜 고아원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산다는 자체가 너무나 역겨워서요?”
“음, 그 이유도 없지는 않지.
네가 어떻게든 구하고 싶은 그 이레니아라는 아이 말인데. 예를 들어, 걔랑 꼭 닮은 가짜가 나타났다고 상상해 봐라.
비록 규정상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의료용 캡슐의 전신 성형 기능을 이용하면 이론상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만약 그 가짜가 네 앞에서 진짜 행세를 하려고 든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으냐?”
일레시아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당연히 그 즉시 순직 처리해 버려야죠, 뭐.”
“거 봐. 이제 내 심정을 알 것 같지? 자, 그러니까 이 초커를 빨리 풀어다오. 이 역겨운 가짜 추억에서 얼른 빠져나가게 말이다.”
할머니가 웃으면서 이렇게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일레시아는 잠깐 잊어버렸던 고민이 다시 생각나서 머리가 도로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 초커의 잠금 장치는 여기로 들어오는 출입문의 잠금 장치와 원리상 동일한 거 맞지?
넌 출입문은 쉽게 열고 들어왔잖아? 그런데 이걸 푸는 건 그렇게 골치 아프단 말이냐?”
일레시아의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할머니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내참, 원리는 동일해도, 출입문의 잠금 장치는 암호를 알고 있었으니까 쉽게 열었던 거죠.
만약 그것조차 해킹해서 열어야 했다면, 저는 아마도 닫힌 출입문 앞에서 계속 쩔쩔 매고 있다가, 진작에 보안요원에게 잡혀 갔을 거예요.”
“아, 그러니까 이베리스가 너한테 출입문 잠금 장치의 암호만큼은 가르쳐준 거로구나.
네가 정말로 문 앞에서 쩔쩔 매다가 잡혀가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정작 이놈의 초커를 풀지 못하면 출입문을 쉽게 열고 들어왔어도 다 소용 없는 일이지만요.”
이때 할머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순진하게 생긴 보안요원은 어떻게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걸까?
머리색을 보아하니, 너처럼 골드 코어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네? 지금 절 놀리세요? 그거야 당연히 출입키로 열고 들어왔겠죠.”
“뭐라고? 여기 관리국에 출입키라는 게 있었어?”
이 말을 듣고 일레시아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일루리아님은 출입키를 한번도 써본 적이 없으세요?
그러면 여기 갇히기 전에는 관리국 내의 보안 구역을 어떻게 돌아다니셨던 거예요?”
“그거야 예전에는 언제나 부하들을 데리고 다녔으니, 걔들이 알아서 내가 가는 곳마다 미리 문을 열어놓고 기다렸지.
이제 보니 그게 다 출입키로 열었던 거였구나.”
이 말을 듣자, 일레시아는 이 할머니가 한때 정말 ‘높으신 분’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하들이 항상 문을 열어준 탓에 출입키가 뭔지도 모르다니, 맙소사!
- 작가의말
사전에 공지한 바와 같이, 2022년 12월 21일부터 29일까지 잠시 휴재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크리스마스 시즌 즐겁게 보내십시오.
저는 잠깐 재충전한 다음에 12월 30일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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