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40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26)
“솔직히 말해서,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그냥 깔끔하게 배양액을 싹 교체해 버리고 싶어요.
일단 한번 다른 사람의 피로 물들었던 배양액을 정화하는 것 보다는 아무래도 그게 기분상 더 낫기도 하고요.
다만, 문제는 오염된 배양액을 정화하는 건 구식 시스템으로도 가능하지만, 배양액을 아예 교체하려면 일단 제가 생체 모듈이 되어서 메인 시스템을 작동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에요.”
그러니까 배양액을 교체하려면 먼저 일레시아가 저 배양액 속에 들어가서 메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생체 모듈이 되어야 한다니······
이건 문자 그대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어이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시스템 규칙상 배양액 교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관리국 보안부의 승인까지 받아야 돼요.
귀하고 비싼 특수 배양액을 함부로 낭비하지 말라는 뜻으로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즉, 제가 생체 모듈이 되어 메인 시스템을 작동시킨다고 해도, 어차피 배양액을 교체하려면 마치 보안부의 승인이 떨어진 것처럼 시스템을 속이는 해킹 작업을 따로 해야 할 거예요.
그러니 교체해서 쓴다는 선택지는 그냥 포기하는 게 좋겠어요.”
일레시아가 한숨을 쉬면서 이아테스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규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 관리국의 규정이 너무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다느니 운운하면서 한탄해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가만, 그러고 보니, 팀장은 세피노의 안내를 받아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요?”
일레시아가 문득 이레니아의 클리엔스인 세피노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마 저 입구 밖 복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겁니다.”
이아테스가 대답하자, 일레시아는 반색을 하면서 그 초록색 털을 지닌 고양이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다.
“세피노? 어디 있니, 세피노!”
그러자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세피노가 메인 데이터 센터 입구 밖에서 빠르게 달려왔다.
고양이는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용케도 어딘가에서 잘 숨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저 고양이는 이레니아의 클리엔스가 아닙니까? 주인이 지금 기절해 있는데 무슨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아테스가 옆에서 궁금한 듯 물었다. 일레시아는 세피노를 번쩍 안아 들면서 대답했다.
“세피노를 저 핏물 안에 집어 넣고 동시에 정화 장치를 작동시키면, 배양액이 완전히 정화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적어도 1/10 정도로 확 줄어들 거예요.
이 고양이는 그린 코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최상의 바이오 필터거든요.”
“그린 코어가 주변의 적대적인 환경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인의 명령이 필요하지 않나요?”
“능동적으로 주변 환경을 폭넓게 정화하려면 당연히 주인인 이레니아의 명령이 필요하죠.
하지만 이 고양이는 기계가 아니라 엄연히 살아 있는 생물이며, 자기 보호 본능을 가지고 있어요.
따라서 자신이 살기 위해서 수동적으로 주변 환경을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면, 주인의 명령이 없어도 환경 정화 작업을 하기 마련이에요.
다시 말해, 이 핏물 안에 강제로 넣어 두면, 고양이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재빨리 주변 환경을 파악하여 정상적인 배양액 성분과 오염물질을 구분한 다음, 혈액 성분 등 시체에서 새어 나온 이물질을 그린 아르케의 힘으로 걸러 버리게 될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일레시아는 물론이고, 듣는 이아테스도 아무 죄 없는 저 고양이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미안하다. 지금은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런다.”
일레시아는 무척 미안해 하면서도, 안아 들고 있던 세피노를 조심스럽게 핏물로 오염된 배양액 안으로 집어 넣으려 했다.
이쯤 되자 고양이도 상황을 깨닫고 크게 놀란 듯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비치면서 제법 격렬하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일레시아가 워낙 자기 주인과 가까웠고 평소부터 친근했던 사람이라서 이 정도 반항으로 그치는 것이지, 만약 낯선 사람이 이런 짓을 했다면, 손을 확 깨물어서 체내에서 만든 독극물이라도 주입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일레시아는 세피노가 지금 느끼고 있을 배신감이 얼마나 클까 하고 생각하면서 거듭 사과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반항하는 세피노를 힘으로 제압하면서 핏물로 오염된 배양액 안으로 완전히 집어 넣었다.
그러자 곧 피로 물든 배양액이 고양이로부터 나오는 초록색 광채로 은은하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정화 장치를 가동시키자, 거짓말처럼 엄청난 속도로 오염된 배양액이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몇 분 정도면 정화가 완전히 끝날 거예요. 우리는 이 틈에 팀장의 부하 두 명을 캡슐 안으로 집어 넣어두도록 합시다.”
일레시아가 세피노에 대한 미안함을 일단 접어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아테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실자가 된 자신의 부하들 곁으로 비로소 다가갔다.
이그시아와 이르피오는 인생 다 포기한 사람 같은 절망적인 표정을 한 채, 산송장처럼 멍하니 주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까 이클리프도 비슷하게 인생 다 포기한 사람 같은 분위기였지만, 이들 두 사람과 비교하면 그는 그나마 활력이 넘쳤던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찮으냐?”
이럴 때 뭐라고 위로하면 좋을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이아테스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코어의 기능을 전부 상실하고 무력한 존재가 되었는데, 지금 이들 둘이 괜찮을 턱이 있겠는가?
워낙 질문이 어리석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저 대답할 기력도 없어서 그런지, 두 사람은 괜찮으냐는 질문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팀장과 팀원들 사이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분위기는 실로 어색하고 무겁기 그지 없었다.
“시간이 없어요. 제기 도와 드릴 테니 어서 두 사람을 캡슐 안으로 집어 넣도록 하죠."
일레시아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면서 말했다.
그녀는 이아테스가 부하들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배양 캡슐 2개에서 핏물로 오염된 배양액을 전부 빼낸 터였다.
“저 혼자 해도 됩니다.”
이아테스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우선 이그시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일레시아는 지금 자신이 끼어 들어 봐야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세피노를 집어 넣은 제어 캡슐의 정화 상태를 살펴보러 돌아갔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이그시아를 안아 들고 캡슐 안으로 집어 넣으면서 이아테스도 아까 일레시아가 세피노에게 했던 것처럼 입으로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다른 할 말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그시아는 여전히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캡슐 안으로 들어가는 게 못마땅한지 얼굴을 잔뜩 찡그렸지만, 어차피 세상만사 다 포기했기 때문인지 딱히 심하게 반항하지는 않았다.
이아테스는 이그시아를 캡슐 안으로 집어 넣은 다음 조심스럽게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뚜껑에 붙어 있는 패널을 어렵지 않게 조작하여 기본적인 생명 유지장치를 가동시켰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피비린내가 남아 있는 공기도 정화될 터였다.
뚜껑에 붙어 있는 작은 창으로 안을 들여다 보니, 이그시아는 문자 그대로 관 안에 들어간 송장처럼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 자신의 지금 심정도 그렇겠지만, 현재 전 은하계의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봐도, 후천적 상실자가 된 사람은 실제로 거의 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곤 했다.
그만큼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은 것 보다 더 못한 처지였던 것이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완전히 목숨을 잃은 부하를 묻어주는 편이 훨씬 더 낫겠다.’
이아테스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심정 속에서, 다음에는 이르피오를 안아 들고 뚜껑이 열린 캡슐 안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넣었다.
여전히 입으로는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이르피오가 불쑥 입을 열어서 대꾸했다.
“됐어. 지금 팀장이 미안하다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야.”
훨씬 더 성격이 과격했던 이그시아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산 송장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던 것에 비해, 평소 더 얌전했던 이르피오는 그래도 자기 심정을 어느 정도 밝힐 만큼의 기력은 남아 있는 듯했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줘. 절대로 관리국, 특히나 이베리스 국장을 용서하지 마.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다 그 사람 때문이니까.”
이르피오는 캡슐 뚜껑이 스르르 닫히기 전에 진지한 표정으로 이아테스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강조해서 부탁했다.
그 순간의 진지한 표정만 놓고 보면 결코 인생 다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진지하고 힘 있는 모습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부터는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인지, 이그시아처럼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역시 송장처럼 캡슐 안에 얌전히 누워 있기만 했다.
관리국과 이베리스 국장을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이 마지막 부탁에 대해 이아테스는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 없이 캡슐 뚜껑을 닫은 다음 기본적인 생명 유지 장치를 가동시킬 뿐이었다.
다만, 아무런 대답은 하지 않았어도 마음 속으로는 생각이 무척 복잡했다.
이아테스는 지금까지 고지식할 정도로 관리국과 이베리스 국장에 대해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왔고, 기본적으로 워낙 충직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탓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별다른 의심도 품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 커다란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관리국에서 점점 마음이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아테스가 소중하게 여기는 부하들은 물론이고, 처음 만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일루리아는 모두 관리국 국장인 이베리스와 적대적인 관계다.
따라서 그가 부하들과 일루리아에게 충직한 태도를 보인다면, 결국 이베리스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의 입장에서는 충직한 태도가 까딱하면 반역으로 이어지기 쉬운 지금 같은 상황이 무척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쪽은 준비가 다 되었어요. 그쪽은 어때요?”
그때 일레시아가 세피노를 집어 넣은 캡슐 곁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이아테스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일레시아 쪽으로 돌아갔다.
“제 부하들은 둘 다 캡슐 안에 안전하게 집어 넣었습니다. 여기는 정화가 다 끝났습니까?”
이아테스가 묻자, 일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제의 캡슐 안에서 조심스럽게 세피노를 꺼냈다.
그 불쌍한 고양이는 캡슐 밖으로 나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일레시아의 손을 뿌리치고 멀찌감치 달아나 버렸다.
온몸에는 배양액이 잔뜩 묻어 있었으며, 자꾸만 콜록거리면서 입에서 배양액을 마구 토해냈다.
캡슐 안에서 억지로 바이오 필터 노릇을 하면서 어지간히 괴로웠던 모양이었다.
대신 그 고양이가 고생해준 덕분에 피로 물들었던 배양액은 한눈에 봐도 완전히 새로 교체한 것처럼 깨끗하게 정화되어 있었다.
세피노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그린 코어를 이용하여 주변의 배양액 성분을 분석한 다음, 오염된 배양액을 온몸으로 흡수하여 이물질이라고 판단되는 성분만 말끔히 분해해 버린 후 도로 배출하는 작업을 빠르게 반복한 덕분이었다.
언뜻 봐서는 굉장히 복잡한 작업 같았지만, 세피노의 입장에서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신진대사의 일환일 뿐이었다.
다만, 강제로 그런 짓을 해야만 했으니 무척 힘들고 잔뜩 났던 것이다.
“이거 단단히 미움을 사고 말았네요. 아마도 한동안 제가 꼴도 보기 싫을 거예요.”
일레시아는 그런 세피노의 토라진 모습을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두 번 다시 저 고양이를 볼 수 있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시간이 없으니 저는 지금부터 이 캡슐 안으로 들어가서 생체 모듈이 되어 이레니아를 해방시키겠습니다.
제어 캡슐을 작동시키는 일은 구식 시스템을 이용해서 이루어지니, 팀장은 제가 캡슐 안으로 들어가면 뚜껑을 닫고 작동 스위치를 눌러주세요.”
일레시아는 이아테스를 향해 이런 당부를 남긴 다음, 캡슐 옆면에 붙어 있는 발판을 딛고 올라가서 제어 캡슐 안에 가득 차 있는 배양액 속으로 슬며시 한쪽 발을 들여 놓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썩은 물 안에 몸을 담그기 위해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전히 망설이는 태도가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골드 코어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심정을 100% 실감할 수는 없었지만, 이아테스도 옆에서 영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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