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67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53)

“내가 신임하는 부하들을 많이 파견해서 널 도와주라고 했는데, 그래도 이니에스를 놓쳤다고? 믿을 수가 없구나!”

크게 실망한 이스카엘이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동안 이스카엘님의 지시를 받들어, 이니에스에게 적극적으로 텍스툼에 귀순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신임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의심 받지 않도록 언행 하나하나에 주의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니에스는 저한테 다른 의도가 있다고 경계하면서 겉으로만 신임하는 척 했던 모양입니다.”

이드리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이스카엘은 깊이 탄식했다. 자신이 이니에스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 같다는 때늦은 후회가 들었던 것이다.

“이건 내 잘못이다. 내가 너무 이니에스를 과소평가했어. 다시 생각해 보니, 이니에스의 능력이라면 네가 내 지시에 따라 접근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나를 텍스툼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지엽적인 문제로 내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모르는 척했을 수도 있다.”

이스카엘의 말을 듣고 이드리스가 즉시 동의했다.

“예, 충분히 가능한 말씀입니다. 어쨌든 이니에스와 함께 있던 텍스툼의 다른 첩자들은 전부 다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하나 같이 세뇌 당한 관리국 요원들뿐이더군요. 텍스툼 본성에서 파견된 자들은 단 한 명도 없더군요. 이니에스는 정말 무서운 여자입니다.”

이스카엘은 이니에스의 세심함에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무척 실망스럽고 짜증나는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드리스를 무작정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드리스도 최선을 다했는데, 불행히도 상대가 나빴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니에스를 과소평가한 자신 또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터.

앞으로 할 일이 많아서 한층 더 일손이 부족해질 텐데, 여기서 이드리스를 너무 야단쳐서 기를 꺾는 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닐 듯했다.

“됐다. 이니에스가 그렇게 쉽게 잡힐 만큼 무능한 사람이라면, 텍스툼에서 그녀를 뽑아서 일부러 이곳에 첩자로 파견하지는 않았겠지.

이니에스를 과소평가한 내 잘못도 있으니, 너무 자책할 것 없다.

그런데 이니에스는 도대체 어디로 도망쳤단 말이냐? 이베리스도 당연히 그 여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텐데?”

“아무래도 자비의 대륙 지상 거주민들 사이에 숨어든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이상은 추적하지 못했습니다.”

이스카엘은 이드리스의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뭐라고? 지상 거주민 사이로 숨어들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거주민들 입장에서는, 금발의 독특한 외모를 지닌 소디아인이 다른 소디아인을 피해서 악착 같이 숨어 다니는 게 굉장히 수상해 보일 텐데?

금방 소문이 나서 관리국 요원들에게 쫓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니에스는 잠입 침투에 능한 첩보요원입니다. 정보 조작과 교란이 주특기인 황금색 공작 클리엔스도 데리고 있고요. 의외로 잘 숨어 다닐지도 모릅니다.”

이드리스가 다소 막연한 말투로 이니에스를 두둔했다. 이니에스를 잡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능력을 추켜세우고 있는 듯했다.

“그건 두고 봐야겠지. 일단 두고 보자.”

이스카엘은 골치 아픈 이니에스 문제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다음에는 이덴바르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그건 그렇고, 급진파의 분위기는 어떠냐? 많이 안 좋으냐?”

“급진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치료약 톡시쿰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타베스 시료를 채취하고자 제 3대륙으로 갔던 연구원이 난데없이 클라데스로 변했지 않습니까?

그 바람에 부왕궁 근위대가 출동해서 한바탕 대륙 규모의 격전을 벌였고요.

거기다 급진파의 은인인 일루리아를 구하겠다면서 이스카엘님을 따라 나섰던 인원 수십 명이 돌아오지 못한 상황입니다.

혼란에 빠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이덴바르의 말을 듣고 이스카엘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니에스의 신병을 확보하는 일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급진파를 완전히 장악하는 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니까.

급진파가 혼란에 빠지면 빠질수록, 자신이 그 혼란을 수습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체 조직을 장악하기가 수월해질 것이 아니겠는가?

“급진파가 혹시 날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던가?

결국에는 내 제안 때문에 급진파 소속 유력 인원 수십 명이 일루리아를 구하러 갔다가 죽거나 붙잡혀 버린 거잖아?

나한테 속았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느냔 말이야.”

이스카엘이 묻자, 이덴바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사람들의 속마음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여론만 놓고 보면, 딱히 이스카엘님을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이스카엘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학자들 수십 명은, 이번에 거의 대부분 일루리아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제 10요새로 가서 관리국 전투요원들과 정면 대결을 벌이다가 알아서 죽거나 포로가 되었죠.

그 때문에 남은 급진파는 비교적 이스카엘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덴바르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듣고 이스카엘은 다시 한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순진무구한 학자들 수십 명을 꼬드겨서 굳이 제 10요새로 데리고 가서 죄다 죽거나 포로로 잡히게 만든 이유는, 바로 이런 식으로 급진파를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번에 함께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 4명은, 급진파 가운데에서 진작에 이스카엘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었다.

비교적 전투에 능한 그들은 전투 중에 일부러 순진무구한 동료 학자들이 죽거나 붙잡히게끔 방관하기까지 했다.

급진파에게 있어서 최대의 은인인 일루리아를 구하러 가야 한다, 아무리 위험해도 꼭 가야만 한다는 명분은 설득력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카엘이 그런 강력한 명분을 내세워 수십 명의 반대파를 데려가서 이베리스에게 죽거나 붙잡히게 만들었으니, 살아 남은 급진파 잔당들은 이베리스를 더 크게 원망할지언정 이스카엘을 원망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마음 속으로 의심을 품었다고 해도 대놓고 말을 꺼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나저나 저기 일루리아의 바이크, 프로토 판테라는 보이는데, 정작 일루리아 본인은 안 보이는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이베리스에게 잡혀 가기라도 한 겁니까?”

그때 이덴바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말도 마라. 이베리스가 그 쿠라토르라는 이상한 기계를 써서 일루리아를 아예 즉결 처형하려고 했지 뭐냐?

그 기계, 겉보기에는 이베리스의 덩치를 몇 십 배 키워놓은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인데 말이야.

오로지 일루리아를 제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위력이 무시무시하더군.

그 대단한 일루리아가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은 다음, 하마터면 손에 붙잡혀서 짓눌려 죽을 뻔했다니까.”

이스카엘의 말을 듣고 이덴바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베리스가 설마 일루리아를 즉결 처형하려고 하다니,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요? 일루리아는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습니까?”

“일루리아가 거의 다 죽어가는 아슬아슬한 찰나에, 운 좋게 이센티스가 나타나서 현장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이베리스를 제지한 다음, 만신창이가 된 일루리아의 목숨을 구했다.

나는 이센티스를 피해서 도망치느라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몰라. 하지만 십중팔구 이센티스가 일루리아를 부왕궁으로 데려 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듣고 이덴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일루리아를 이용해서 급진파를 장악하려는 계획은 좀 실행하기 어렵게 된 거 아닙니까?”

“아니, 꼭 그렇지도 않아.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와 관련해서 너한테 시킬 일이 있다.

나중에 우리 대화가 다 끝나면, 넌 살아남은 급진파의 대표들을 찾아가서 이렇게 전해라.

제 10요새에서는 안타깝게도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지만, 쿠라토르라는 이상한 기계를 만들어둔 이베리스 때문에 일루리아를 구해서 데려오는 데에는 실패했다.

일루리아가 자신이 이베리스와 쿠라토르를 막겠으니 먼저 떠나라고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루리아는 다시 한번 스스로 희생해서 우리의 목숨을 구한 셈이다.”

“잘 알겠습니다. 끝입니까?”

“아니, 가장 중요한 대목이 남았으니 끝까지 들어봐라.

다만, 일루리아는 스스로 뒤에 남은 대신, 절대적인 신뢰와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부하인 이델리온을 우리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있는 이델리온은 일루리아가 급진파의 대의에 동참하겠다는 결의를 확고하게 밝혔음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이덴바르는 놀라서 물었다.

“잠깐만요. 이델리온은 후천적 상실자가 되어서, 지금은 기존의 기억이 다 지워진 채 지상 거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베리스가 특별히 지시를 내려서, 암살자의 칼에 찔려 산 속에서 죽어가는 젊은이의 신분과 기억을 빼앗아서 이델리온에게 주고 지상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만들어 줬잖아요?”

“그래. 하지만 그건 너나 아는 사실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 특히나 세상물정에 어두운 급진파 사람들은 더더욱 알 턱이 없어.

이번에 내가 어쩌다가 이베리스가 제 10요새에 파견한 태스크 포스팀의 팀장인 젊은 친구를 데려왔는데, 이름이 이아테스라고 하던가?

하여튼 무척 용감하고 고지식할 만큼 성실한 성격이, 그야말로 과거 이델리온을 생각나게 하더군.

그러니까 이아테스를 급진파에게 보여주면서, 이 젊은이가 바로 일루리아가 급진파의 대의에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파견한 부하 이델리온이라고 한다면, 급진파는 별 의심 없이 믿어줄 거야.”

이스카엘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옆에 있는 이드리스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이스카엘님, 지금 이아테스라고 하셨습니까? 성격이 아주 고지식하고 성실하다고요?”

“그래. 왜?”

이드리스는 누군지 알 것 같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게, 그 놈은 좀 곤란합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예전에 이베리스 국장이 부왕궁의 허락도 없이 이스카엘님을 잡겠다고 비밀리에 팀을 파견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 바로 그 사건 당시, 네가 문제의 팀을 배신하고 내 휘하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 바람에 그 팀은 대부분 몰살 당했지. 불쌍한 것들.”

“맞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몰살 당한 불쌍한 팀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바로 이아테스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이아테스는 이스카엘님 때문에 자기 동료들이 다수 죽었다고 생각해서 크게 원망하고 있을 겁니다.

그 놈의 고지식한 성격이라면 오히려 이베리스 국장 보다 이스카엘님을 더 원망할지도 모르지요.”

이스카엘은 그제서야 뭔가 빠진 것 같았던 퍼즐 조각이 하나 맞춰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 그때 그 놈이었구나! 이제 기억난다. 어쩐지! 오늘 처음 만났는데, 그 이아테스라는 젊은 놈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원수 보는 듯해서 이상하다 싶었다.”

“이스카엘님의 뜻은, 가짜 이델리온이, 일루리아가 당분간 이스카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라고 당부했다면서 급진파를 설득하게 만들려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급진파가 이스카엘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충성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아테스는 성격이 워낙 고지식한데다가 과거에 그런 원한까지 있었으니, 절대로 순순히 가짜 이델리온 노릇은 안 하려 들 겁니다.

굳이 가짜 역할을 맡기려면, 아주 강력한 프레임을 걸어서 세뇌를 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이드리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음, 그 놈은 지금 정신을 잃고 있는데, 당연히 어느 정도 세뇌는 해야겠지. 하지만 세뇌에만 의존해서는 불안해서 안 된다.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려면 이아테스가 진심으로 내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뭔가가 더 있어야 돼.”

이스카엘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이아테스 같은 성실하고 고지식한 성격은 결국 가까운 사람을 이용해서 복종시켜야 한다. 넌 이아테스가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알고 있느냐?”

“네, 제가 배신할 당시, 이아테스는 팀장이었던 이클리프, 그리고 팀원이었던 이셀리아와 셋이서 거의 친남매처럼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들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이아테스가 이스카엘님께 복종하게 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겠지. 그럼, 그들 둘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아느냐?”

이드리스는 이번에는 다소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저도 정확한 건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알기로 이클리프는 그 사건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제 10요새에 경비팀장으로 파견되었다고 하니, 이번 사건에 휘말려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셀리아는 최근에 이아테스와 다시 한 팀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아테스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임무 수행 도중 죽었거나 행방불명이 되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