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49화: 아들들의 전쟁 (80)
거기다 카르스덴은 아까 출진하기 전에 그의 누나이자 샤먼인 카란드라가 아무런 저항할 힘이 없는 플로젠의 포로를 조상신에게 제물로 바쳐 승리를 기원하는 광경을 똑똑히 보고 오는 길이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면서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 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플로젠의 여자가 자신과 같은 케르비오 족에게 팔려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그건 판단 기준이 뭔가 이상한 것이 아닐까?
카르스덴은 이런 모순 속에서 잠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때 카르스덴의 직속 부하 가운데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권했다. 같은 페단 부족 출신의 플린트라는 남자였다.
“왕자님, 민간인 여자를 납치해서 돈으로 사고 파는 몹쓸 짓을 그냥 내버려두는 건 결코 명예롭지 못한 일입니다.
그 여자가 아무리 적국 사람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어서 저 더러운 추방자 놈을 죽여버리십시오.”
지극히 도덕적인 이 조언을 듣고, 쿠스크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빈정거렸다.
“예, 저는 더러운 추방자입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 온갖 나쁜 짓도 서슴없이 하곤 하지요.
하지만 저 같은 놈의 혈관 속을 흐르는 더러운 피에도 케르비오 조상들의 성스러운 피가 약간이나마 섞여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왕자님의 도끼에 죽은 플로젠 놈이 한둘이 아닐 텐데, 오늘은 난데없이 플로젠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제 피를 그 도끼에 묻히시렵니까?”
그러자 플린트가 또 나서서 쿠스크를 꾸짖었다.
“닥쳐라, 이 더러운 놈! 네 놈은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자기 부족을 떠난 추방자이니, 엄밀히 말해 케르비오 왕국 사람이 아니다.
왕자님께서 네 놈의 더러운 피를 도끼에 묻히신다 한들 아무 문제가 없단 말이다!”
쿠스크는 태연하게 반박했다.
“잘못 아신 겁니다. 전 태어날 때부터 카마 부족이었으니 제 부족에서 추방당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보니 우연히 추방자가 제 부모였고, 선택의 여지 없이 카마 부족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기 부족을 떠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라면, 저는 평생 카마 부족의 일원으로 살아야 하겠군요. 그렇죠?
그럼, 남은 길은 다른 카마 부족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더러운 짓을 해서 먹고 사는 것뿐 아닙니까? 그게 죽을 죄라면 얼마든지 죽이십시오.”
카르스덴은 쿠스크의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태도가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직속 부하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카마 부족 사람을 부하로 삼는 것은 추방자 집단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수많은 부족 대표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신중하게 따져봐야 할 사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플로젠의 연락관 일행을 공격하러 가야만 하니, 그렇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한가롭게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왕자님, 저 더러운 놈 말에 귀를 기울이시면 안 됩니다.
하다못해 우선 플로젠 여자를 풀어주고 사정을 들어본 다음에 다시 심사숙고 해서 결정을 내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플린트가 답답한 듯 다시 권했다. 카르스덴은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플로젠 여자의 불쌍한 사정을 들어서 뭘 어쩐단 말이냐?
저 자의 말에도 나름 일리가 있다. 추방자들이 비록 더러운 족속들이긴 해도, 플로젠 놈들과 비교하면 엄연한 케르비오 왕국의 백성이다.
나는 적국 여자를 구하기 위해 동족을 죽이고 싶지는 않구나.”
카르스덴은 이미 어느 정도 결심을 굳힌 듯했다. 플린트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 자를 죽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플로젠 여자만이라도 풀어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당당한 케르비오 왕국의 용사들입니다. 이대로 모른 척하고 지나가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카르스덴은 그것마저도 거부했다.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어서 이런 곳에서 풀어줘 봤자, 그 플로젠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차피 우리 왕국의 북쪽 영토를 가로 질러 한참 걸어가야만 하지 않느냐?
십중팔구는 그러다 죽게 될 게 뻔하다. 그렇다고 전쟁 중에 사람을 시켜서 이 여자를 안전하게 집까지 호송해줄 수도 없는 노릇.
차라리 마을 촌장의 시녀 노릇이나 하게끔 내버려두는 게 더 낫다. 그럼,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플린트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카르스덴은 단호하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고 더 이상의 반론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넌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얘기를 했을 뿐이니 나무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더는 말하지 마라.
나중에 이 전쟁이 아군의 승리로 끝나고, 플로젠 놈들이 우리 케르비오 왕국의 건국과 독립을 인정한다면, 그때 비로소 왕국 전역에 잡혀와 있는 플로젠 민간인들의 실태를 조사해서 몸값을 넉넉히 받고 인정을 베풀어 가족들에게 돌려보내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좋은 시절이 오기 전까지, 이런 사소한 문제는 잠시 그냥 내버려두도록 하자.”
카르스덴은 즉시 말에 박차를 가하여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플린트는 이건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마지 못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는 동안, 쿠스크는 카르스덴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카르스덴의 기병대가 북쪽 멀리 사라지고 나자, 갑자기 쿠스크의 짐마차 안에서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스크가 얼른 짐마차로 다가가서 살펴보니, 손발이 묶이고 입이 틀어 막힌 채 짐짝처럼 실려 있던 플로젠 여자가 발로 마차 바닥을 찍어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클라티나 아가씨. 금방 풀어드리겠습니다.”
쿠스크는 송구스러워하면서 재빨리 그 여자를 풀어주었다. 그녀는 아픈 손과 입을 어루만지면서 땅바닥으로 내려서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어휴, 답답하고 숨 막혀서 죽을 뻔했다. 이거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고역이라니까.
카르스덴, 저 놈이 멍청해서 빨리 떠났으니 망정이지, 시간을 끌고 이것저것 캐물었으면 정말 힘들 뻔했어.”
클라티나가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면서 쿠스크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가씨, 여기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나와 계셔도 괜찮겠습니까? 카르스덴이 멀리 떠나는 척 하면서 사람을 시켜서 우리를 몰래 감시하면 어쩝니까?”
클라티나가 헝클어진 자신의 붉은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안심해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그렇게 꼼꼼하고 주도면밀한 놈이었다면 애초부터 날 풀어주고 몇 마디 물어보기라도 했겠지.
그 바람에 놈이 이것저것 물어보면 잘 대답하려고 머릿속으로 각본을 쓰고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게 다 무용지물이 되었지 뭐냐?
저렇게 멍청한 작자가 우두머리이니 야만족의 반란 따위는 금방 태자 전하의 손에 의해 진압되고 말 거다.”
클라티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문득 옷자락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봉투가 무사한지 힐끗 확인했다.
“물론 이 철군 명령서가 태자 전하에게 전달된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쿠스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권했다.
“카르스덴이 감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기서 쓸데없이 오래 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지요.
페레이즈 태자의 진영은 파로크 성채 북동쪽 언덕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서두르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충분히 도착해서 그 명령서를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클라티나는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나더러 계속 밧줄에 묶여서 팔려가는 여자 행세를 하라고?”
“가는 길에 또 누굴 만날지 모르니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게 제일 안전합니다. 가능한 한 수시로 쉬어가도록 할 것이니 고생스럽더라도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아가씨는 지금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원해서 명령서를 전하러 가시는 게 아닙니까?”
클라티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손과 발을 묶고 입을 틀어막는데 동의했다.
쿠스크는 그녀를 묶어서 다시 짐마차에 실은 다음 말에 채찍질을 가하여 부지런히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파로크 성채 북동쪽 진영에서는 페레이즈 태자가 정찰병들의 추가 보고를 받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찰병들은 아까 페르구스와 카르스덴이 이끄는 기병들이 출진했다는 사실을 보고한 데 이어서, 방금 전에는 중부 산악지대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는 수천 명의 궁수들이 성채에 지원군으로 도착했다는 사실도 태자에게 보고했다.
페레이즈 태자는 정찰병들이 임무를 잘 수행한 것을 칭찬하면서 그들을 막사 밖으로 내보낸 다음 어이 없다는 듯 살짝 웃었다.
“거참, 오늘 전투가 여러 가지 변수가 많은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수천 명의 궁수들이 지원군으로 도착할 줄이야. 이러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그러자 페레이즈 태자의 막사 안에 함께 있던 카시우트가 신중하게 말했다.
“태자 전하, 궁수들이 지원군으로 도착했다고 해서 딱히 상황이 달라질 건 없지 않습니까?
설마 멀리 산악지대에서 강행군을 해서 달려온 궁수들을 제대로 쉴 틈도 주지 않고 당장 아군 진영을 공격하는 것 같은 중요한 전투에 투입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현재 파드무스와 프레데일은 모두 연락관 일행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태자는 카시우트를 불러서 진영 방어에 대한 의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니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판단한다고 가정하는 건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야만족들 가운데 이제 수천 명의 정예 궁수가 있으니 잘 하면 정말로 아군 진영을 점령하고 날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먼 길을 달려온 궁수들을 다그쳐 싸움터로 내보내는 지휘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지나치게 상식적으로만 생각하다가는 바로 그런 비상식적인 적장에게 허를 찔릴 수도 있는 법이다.”
페레이즈 태자의 말에 지극히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카시우트도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시우트, 넌 진영 공사를 담당했으니 잘 알겠지? 만약 수천 명의 궁수들이 화살을 퍼붓는다면 아군 진영과 병사들이 오래 버틸 수 있겠느냐?”
태자의 질문에 카시우트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만약 정말로 수천 명의 정예 궁수들이 모조리 전투에 투입되어 아군 진영에 집중적으로 화살을 퍼붓는다면, 아무래도 좀 위험할 것 같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가 적 궁수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진영 곳곳에 병사들이 몸을 피할 수 있는 지붕과 방호벽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수천 명이 쏘아대는 화살 세례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영 자신이 없습니다.
놈들이 화살을 딱 한 발씩만 쏘고 철수할 리는 없고, 적어도 수만 발의 화살이 날아올 테니까요.”
페레이즈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한 두발만 쏘고 물러갈 리는 없겠지.
먼 길을 달려온 수천 명의 지원군을 쉴 틈도 없이 다그쳐서 전투에 투입할 만한 지휘관이라면, 반드시 내 심장에 화살을 박아 넣고야 말겠다는 듯 아주 집요하게 화살을 쏘아 댈 가능성이 높다.
아군도 마땅히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만 한다.”
카시우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태자 전하께서는 당초 계획을 수정하여, 좀더 적극적으로 적 궁수들을 공격할 생각은 아니십니까?”
“잘 보았다. 수천 명의 정예 궁수들이 수만 발의 화살을 쏘아댄다면, 얌전히 아군 진영에 틀어박혀 수비만 하면서 그걸 그냥 다 맞아주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반드시 적 궁수들을 어떤 식으로든 괴롭혀야 한다.”
“야만족 정예 궁수들을 괴롭히려면, 아군 석궁병은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을 테고, 결국 기병이나 보병을 써야 하겠군요.
하지만 야만족도 바보가 아니니 궁수들을 호위하기 위해 틀림 없이 몇 천명 정도의 보병을 딸려 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보병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아군도 최소한 1천 명 이상의 보병을 언덕 아래로 내려 보내야 할 겁니다.”
“내 생각으로는 보병 보다 기병을 보내는 게 좋을 듯하다.
1천 명 이상의 보병을 언덕 아래로 내려 보냈다가 무슨 돌발 사태라도 생긴다면 신속하게 물러나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건 그렇습니다. 공격할 때에는 언덕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니 편합니다만, 갑자기 후퇴할 일이 생기면 거꾸로 언덕 아래에서 위로 올라와야 하니 힘들고 위험할 테니까요.”
“그래. 거기다 오늘 전투는 어디까지나 연락관 일행을 구출하는 것이 주된 작전이고, 이곳 진영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그에 따른 부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지나치게 큰 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다. 소수 정예의 기병을 보내서 적 궁수들이 마음 놓고 아군 진영에 화살을 퍼붓지 못하도록 치고 빠지면 충분하다.”
“소수 정예의 기병을 보내신다면, 태자 전하께서 직접 지휘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이지. 내가 진영에 남아 있는 기병 가운데 200명을 선발하여 언덕 북쪽에 있는 숲 속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야만족 궁수들이 아군 진영 서쪽에 포진하고 화살을 날리기 시작하면 즉시 놈들을 공격하겠다.
적 보병대가 당연히 막으려고 하겠지만, 아군 기병대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야만족 보병들의 방해를 피해서 궁수들을 괴롭힐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배치는 당초 계획에서 변동이 없는 것입니까?”
“변동 없다. 카시우트, 너는 당초 계획대로 망원경을 가지고 망루 위에 올라가 석궁병을 지휘하는 한편 전황을 살피는 역할을 맡도록 해라.
유사시에는 지난번처럼 내가 신호를 보낼 테니, 네가 진영에 남아 있는 대대장들에게 필요한 사항을 전달하면 된다.
예를 들어, 돌발 사태가 일어나 내가 이끄는 200명의 기병이 위험에 빠질 경우, 내가 신호를 보내면 진영에 남아 있던 대대장 가운데 한 명이 보병 병력을 이끌고 언덕 아래로 내려와서 기병을 지원해 주도록 신속하게 조처해라.
물론 가능하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나야 하겠지만 말이다.”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고독한별입니다.
사전에 예고한 바와 같이, 2023년 10월 18일부터 26일까지 휴재합니다.
다음편은 10월 27일 오후 8시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잠시 쉬고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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