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64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50)

엉거주춤하게 엎드린 자세로 착륙한 쿠라토르는 곧 머리 부분이 열리면서 뚜껑처럼 뒤로 젖혀졌다.

그러자 인간형인 쿠라토르의 목 안에 들어 있던 내장 제어 캡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다시 그 제어 캡슐이 열리면서, 마침내 안에 있던 이베리스의 모습이 바깥 공기에 노출되었다.

그녀는 수많은 크리스탈룸 섬유가 연결된 제어용 슈트를 입고 있었다. 캡슐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일단 그 거추장스러운 슈트부터 벗어야 했다.

이베리스는 비좁은 캡슐 내부 공간에서 고생고생 하면서 문제의 제어용 슈트를 간신히 벗은 다음, 가벼운 관리국 제복 차림으로 지면을 향해 뛰어 내렸다.

엎드린 자세로 착륙해 있는 쿠라토르의 목 언저리에서 지면까지는 제법 높이가 높았다.

하지만 이베리스도 코어가 6개나 되는지라 신체 능력이 우월하여 그 정도 높이를 뛰어 내리는 것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관리국 예산도 넉넉하지 않을 텐데, 도대체 이 볼썽 사나운 기계는 뭣 하러 만든 거냐?”

팔짱을 낀 채 그 일련의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이센티스가 마침내 입을 열어서 물었다.

“왜 만들긴? 그걸 몰라서 묻냐? 네가 속한 부왕궁 근위대가 우리 관리국의 쓸만한 전투 병력을 자꾸 빼앗아 가니까 비상용으로 만들어 거다.

바로 이런 긴급 상황을 대비한 무기로 말이야.”

지면으로 뛰어내린 이베리스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녀는 여전히 이센티스가 자신의 곁을 떠나 부왕궁 근위대 소속이 된 것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빼앗아 가다니? 부왕궁이든 관리국이든, 결국 고귀한 성녀의 뜻에 따라 이 땅을 지키고 관리하는 조직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어.

그런데 겨우 전투 병력 차출 문제가 한 집안 식구끼리 이토록 오래 원한을 품을 일이란 말이야? 난 정말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센티스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베리스는 여전히 쌀쌀 맞게 대꾸했다.

“한 집안 식구끼리도 네 것 내 것 소유권은 확실히 해야지. 하물며 부왕궁과 관리국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만큼 떨어져 있잖아?”

“네 것 내 것이라니? 그게 무슨 망언이냐? 관리국 요원들도 부왕궁 근위대와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부왕 전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다.

다만, 관리국 요원들은 국장인 네가, 부왕궁 근위대는 총사령관 각하께서 일시적으로 권한을 위임 받아 실질적인 지휘를 맡고 있을 뿐이지.

그러므로 관리국 전투 요원들이 부왕궁 근위대로 옮긴다는 건, 그저 같은 조직 내에서 부서가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아.”

이센티스가 나름대로 이치를 들어 설득하려 했지만, 이베리스는 평소의 논리적인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그저 계속 빈정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바람에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모양이었다.

“아, 그래? 그럼, 왜 그 부서 이동이 일방 통행인 거지? 부왕궁 근위대에서 관리국으로 쓸 만한 전투 병력이 보내지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이건 결국 부왕궁이 날 견제하기 위해 내 손발을 다 자르려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 선봉에는 바로 한때 내가 믿고 의지하던 동지였던 네가 있고 말이야. 이런 배신자 같으니.”

“부왕궁이 널 견제한다고? 내가 널 견제하는 일에 앞장서는 배신자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한번 잘 생각해 봐라. 부왕 전하와 재상 각하께서는 예전에 네가 이스카엘과 대립했을 때 어떻게 하셨지?

이스카엘이 아니라 네 편을 들어주셨어. 덕분에 넌 공동 국장이 아니라 단독 국장이 될 수 있지 않았나?

그 다음에 급진파 숙청 문제로 일루리아와 네가 대립했을 때에도, 그 분들은 결국 네 편을 들어주셨다.

그래서 넌 지금까지 강력한 권력을 지닌 관리국 국장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거야. 이게 어딜 봐서 부왕궁이 널 견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냐?

이센티스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지만, 이베리스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 너도 이젠 완전히 부왕궁의 앞잡이가 다 되었구나.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부왕궁 재상 그로스테페, 그 교활한 인간은 겉으로는 내 편을 들어주는 척했지만, 여차하면 날 견제하는데 써먹으려고 이스카엘과 일루리아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살려둔 거야.

그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아까부터 왜 자꾸 날 부왕궁의 앞잡이 취급하는 거지? 그리고 넌 부왕궁 재상 그로스테페 각하의 인품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어.

그 분도 물론 완벽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부왕 전하와 이 대륙을 위해 밤낮 없이 고생하시는 분이란 말이다.

형편이 어려운 본국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지원을 받아내려고, 황궁의 대신들에게 온갖 싫은 소리를 들어가면서 끈질기게 협상을 하시는 분이야.

보아하니, 넌 너 혼자만 힘든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지는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같구나.”

“웃기는군. 그 교활한 인간이 밤낮 없이 고생한다면, 다른 일 때문이 아니라 날 몰아낼 방법을 궁리하느라 고생하는 거겠지.”

“답답한 소리 하지 마라. 지금 대책 없이 널 몰아내면 도대체 누굴 국장 자리에 앉힌단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도 쉽게 널 대신할 수가 없어.

네 국장 자리는 그야말로 반석과도 같지. 그런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냐?”

이센티스는 자기 나름으로는 이베리스를 안심시키려고 한 말인 듯했다. 하지만 이베리스의 귀에는 영 달갑지 않게 들릴 뿐이었다.

“그래, 그게 바로 그로스테페와 부왕궁 사람들이 날 어떻게든 몰아내고 싶어도 지금 당장 몰아내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야.

만약 그 자들이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신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 즉시 눈엣가시 같은 날 몰아내려고 할 거다.”

이센티스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베리스, 네가 많이 변했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지만, 오늘 만나 보니 정말 변해도 보통 변한 게 아니로구나.

예전의 자상한 성격은 물론이고, 특유의 영민함도 다 사라졌어.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냐?”

“만약 내가 정말 변했다면,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이스카엘, 일루리아, 그리고 너겠지. 아, 됐다. 더 이상 너의 그 교활한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여기 온 용건이나 얼른 말해라. 네 얼굴 오래 보고 싶지 않으니 빨리 일 끝내고 꺼지란 말이다.”

이베리스가 재촉하자, 이센티스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고 다시 진지한 태도로 돌아가서 용건을 말했다.

“나는 부왕 전하, 재상 각하, 총사령관 각하, 세 분의 일치된 뜻을 받들어 범죄자 일루리아를 부왕궁으로 연행해 가기 위해 왔다.

일루리아는 멋대로 부왕 전하께서 지정한 연금 장소를 이탈한 혐의에 대해, 부왕궁의 법정에서 엄격한 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베리스는 어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재판과 처벌? 재판과 처벌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내가 이미 일루리아에게 즉결 처형 판결을 내려서 집행하려던 참이었다.

이대로 그냥 내가 판결을 집행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나?”

이베리스는 어차피 안 된다고 할 게 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산으로 이렇게 말했다. 예상대로 이센티스는 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누구 마음대로 즉결 처형을 한다는 거야? 일루리아는 어디까지나 부왕 전하의 명령으로 연금된 사람이다.

따라서 부왕 전하께서 직접 판결을 내리시기 전에는 함부로 처형할 수 없어. 네가 그 만한 이치도 모른단 말이냐?”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베리스의 입장에서는 일루리아를 그냥 넘겨준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일루리아를 즉결 처형하려는 건 단순히 연금 장소 이탈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일루리아와 이스카엘은 제국의 적인 텍스툼 일당과 내통한 일급 반역자들이야.

그 뿐만이 아니라, 일루리아는 이스카엘과 함께 급진파의 잔당을 규합하여 관리국과 부왕궁, 더 나아가 신성 에클레시아 제국에 맞서려고 했지.

나는 관리국 국장으로서, 이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텍스툼 일당과 내통하고 급진파 잔당을 규합하여 반역을 도모한 역적을 즉결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내가 지닌 즉결 처형 권한은 바로 이런 긴급 사태에서 쓰라고 부왕 전하께서 부여해 주신 것 아닌가?”

이센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관리국 예산도 그렇고, 네 권한도 그렇고, 그건 전부 다 이 땅과 그곳에 사는 거주민들을 지키기 위해서 쓰여야 한다.

그런데 넌 그 예산과 권한을 네 권력을 다지기 위해서 남용하고 있어. 그건 절대로 부왕 전하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이 아니다.”

“예산과 권한을 남용했다니, 내가 도대체 뭘 어쨌는데?”

“내가 아무 것도 모를 줄 아나? 대표적으로, 이 이상한 기계를 제작하는데 귀중한 관리국 예산이 도대체 얼마나 많이 들어갔지?

어제 오늘 이 암초에서 격변 현상이 일어나 클라데스가 만들어져서 하마터면 대륙이 멸망할 뻔했다.

만약 네가 예산을 제대로 사용한 거라면, 진작 이 기계를 사용해서 그 사태를 빠르게 수습 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넌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 이유는 바로 제대로 서서 걷지도 못하는 이 거대한 기계가,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일루리아를 제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말도 안돼! 제대로 서서 걷지 못하는 건 어디까지나 아직 미완성이기 때문이야.

조만간 추가적인 개량을 통해 더 완벽해질 거고, 그러면 자비의 대륙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본래의 제작 의도를 충실하게 수행할 거야.”

이베리스가 지지 않고 항변했지만, 이센티스는 듣지 않고 좀더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했다.

“애당초 넌 일루리아가 이 작은 암초에서 대륙을 구하기 위해 결전을 벌이는 동안 도대체 뭘 했나? 이 기계가 미완성이라면 다른 방법을 궁리했어야지!

가만히 앉아서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다가, 일루리아가 사태를 수습하고 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옛 동지를 즉결 처형하려고 들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나도 구경만 한 게 아니라, 어제 오늘, 이 대륙을 구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런 다음, 어디까지나 이 대륙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텍스툼과 내동하여 반역자가 되어버린 옛 동지를 피눈물을 머금고 제거하려 했을 뿐이지.

이건 전부 성녀와 성녀가 남긴 이 대륙을 위해 사적인 감정을 억누르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거다. 그런데 뭐? 내가 사람이냐고?

그러는 너야말로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부왕궁의 편을 들어서 훌쩍 떠나 버렸잖아? 내가 사람이 아니면, 넌 괴물이나 악마냐?”

이베리스가 대놓고 감정적으로 나오자, 이센티스는 더 이상 논쟁하기 싫다는 듯 다소 고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긴 말은 됐다. 이베리스, 네가 싫든 좋든 일루리아는 내가 데려 가겠다. 불만이 있으면 부왕궁 재상 그로스테페 각하께 항의하도록 해라.

아니, 어차피 조만간 너도 재판을 받기 위해 부왕궁 법정에 출석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뭐라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이베리스가 발끈하면서 따져 물었다.

이센티스는 그 질문에 얼른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뒤를 따라서 스마트 판테라 바이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 부하들에게 지시부터 내렸다.

“의무병은 어서 응급 의료 키트를 가져와서 일루리아를 치료하도록 해라. 응급 치료를 마친 다음에는 의료 캡슐에 넣어서 내 바이크 뒤쪽에 싣도록.

나머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일루리아의 무기를 회수해서 마찬가지로 내 바이크에 실어라.”

이센티스는 부하들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야, 이베리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베리스 국장, 너는 현재 3가지 혐의를 받고 있다. 우선, 첫째, 아까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관리국의 예산을 함부로 전용한 혐의지.

다시 말해,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너의 정적인 일루리아를 제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이런 거대한 기계를 만든 혐의를 받고 있단 말이다."

“말도 안돼. 이 기계는 아직 미완성일 뿐, 어디까지나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만든 거야. 관리국 예산은 바로 그런 목적으로 쓰라고 있는 것 아닌가? 인정할 수 없어!”

“나한테 변명해 봐야 소용없다. 그런 말은 나중에 부왕궁에서 재판을 받을 때 하도록.

그리고 둘째, 자신의 병력을 아끼기 위해, 부왕 전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연금된 일루리아를 멋대로 풀어주어 제 10요새로 가서 클라데스를 제압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

“그것도 역시 인정할 수 없어.

일루리아를 멋대로 풀어준 건 내가 아니야. 자신이 친자매처럼 생각하는 이레니아를 구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행동한 일레시아라는 관리국 요원이 멋대로 저지른 짓이지.

그리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일루리아 자신도 공범이라고 할 수 있어. 난 배후에서 조종한 적이 없으니 그 일과는 무관해.”

이베리스가 시치미를 떼면서 항변했다. 하지만 이센티스는 여전히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나중에 재판에서 하란 말이다.

다만, 그런 식으로 변명했다간 재상 각하께서 자신을 바보 취급했다고 크게 화를 내실 테니, 나중에 더 좋은 변명을 생각해 두는 편이 좋을 거다.

그리고 셋째, 정적인 이스카엘과 일루리아를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 텍스툼 일당과 내통했다고 모함한 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