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70화: 아들들의 전쟁 (01)
[현자력 182년 7월, 자비의 대륙 동쪽에 자리잡은 플로젠 왕국의 남부 국경 지대에서 케르비오 족이 약 반년 만에 다시 한번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 반란의 주동자는 케르비오 왕국의 국왕을 자처하다가 1월에 페레이즈 태자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사한 카라미르의 아들 카르스덴 왕자로,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페레이즈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면서 부족들을 이끌고 있었다.
반란으로 인해 플로젠 왕국의 1개 대대가 전멸 당하자, 페레이즈 태자도 이를 좌시할 수 없어 케르비오 족의 영토로 진군했으며, 그 결과 양국에서 만만치 않은 전사로 손꼽히는 두 왕자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한편, 페레이즈를 대신하여 자신의 어린 아들을 국왕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는 플로젠의 섭정 왕비 또한 멀리 떨어진 왕궁에서 이 싸움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자비의 대륙 연대기 중에서>
현자력 182년 7월 16일 밤, 플로젠 왕국 남부 변경에 있는 중간 규모의 도시 페살리스.
페살리스는 비록 정규 군단이 주둔하는 대도시는 아니지만, 가까운 남쪽에는 야만족의 땅이, 서쪽에는 강력한 네필린 공화국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요충지였다.
따라서 플로젠 왕국 남부 국경을 지키는 제 15군단 군단장이자 상급 기사이며, 대도시 칼리도르의 성주인 페레이즈 태자도 종종 이곳에 와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플로젠 왕국 최고의 전사로 손꼽히는 페레이즈 태자는, 현재 병석에 누워 있는 플로젠 국왕의 유일무이한 법적 후계자였다.
비록 젊은 섭정 왕비가 그녀의 어린 아들을 국왕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하긴 하지만, 현재의 법에 따르면 그 어린 아들에게는 아직 왕족으로서의 법적 권리가 전혀 없었고, 따라서 후계자가 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선왕이 만들어 놓은 법에 따라, 플로젠에서는 왕족이라고 해도 전쟁터에 나가서 공을 세워 상급기사 작위를 받지 못하면 아무런 법적인 권리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왕족 가운데 그 조건을 만족시킨 사람은 실질적으로 페레이즈 태자 딱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그가 흔히 '태자'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날 밤, 페레이즈 태자는 페살리스의 연병장에서 피리를 불고 있었다.
일전에 서부 전선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고모 피넬리아 장공주가, 몇 년 전에 사랑하는 조카를 위한 생일 선물이라면서 소디아인 행상인에게서 사준 악기였다.
워낙 낯선 악기라서 익숙해지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존경하는 고모를 추억하면서 슬프고 아름다운 음률을 연주할 정도로 솜씨가 능숙해진 상태였다.
섭정 왕비의 견제와 그에 따른 병든 아버지의 의심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태자는 종종 자신을 무척 아끼고 귀여워해준 고모가 그리워지곤 했다.
페레이즈 태자가 피리를 불고 있는 앞쪽에서는, 그의 절친한 벗이자 플로젠 왕국 남부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자랑하는 기사 파드무스가 땀을 흘리면서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플로젠 왕국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이 풍경이 굉장히 이상해 보일 터였다.
그들이 지닌 통념에 따르면 거칠고 용감한 전사인 페레이즈 태자가 밤새 땀을 흘려서 검술을 연습하고, 잘 생기고 교양이 뛰어난 기사 파드무스는 그걸 지켜보면서 우아하게 악기를 연습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사실 페레이즈 태자는 뛰어난 전사이면서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교양인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걸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젊은 왕비는 종종 이런 통념을, 태자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기 위해 적절하게 이용하곤 했다.
“태자 전하! 태자 전하!”
페레이즈 태자의 구슬픈 피리 연주는 오래 지나지 않아서 끊어졌다. 페살리스의 성주이자 상급기사인 파리아스가 허둥지둥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파드무스는 역전의 용사인 자기 아버지가 사색이 되어 급하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무척 이상하게 여기면서 검술 연습을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아저씨가 그렇게 허둥지둥하는 건 일전에 야만족과 결전을 치렀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페레이즈 태자가 이상하다는 듯 피리를 품에 집어 넣으면서 물었다.
비록 의전 서열은 태자가 더 높았지만, 파리아스는 젊었을 때부터 아버지인 국왕을 따라서 전쟁터를 누빈 역전의 용사였기 때문에, 그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마치 친척 아저씨를 대하듯이 예의를 갖추곤 했다.
“태자 전하, 큰일 났습니다. 카시우트가 여기 왔습니다.”
카시우트는 얼마 전에 정식 기사 서임을 받고 제 16군단 제 3대대장에 임명된 젊은이로, 제 16군단의 군단장인 카드펠드의 아들이었다.
거기다 태자의 약혼녀인 코렐리아의 남동생이기도 했다.
“그 친구가 왜요? 또 코렐리아 아가씨가 보낸 선물이라도 가지고 온 겁니까?”
페레이즈 태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코렐리아가 이전에도 종종 자기 동생을 시켜서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은 목도리, 손수건, 망토 따위를 선물로 보내온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살뜰한 정성이 고맙긴 해도, 태자의 입장에서는 은근히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 맨발에 속옷 차림으로 달려왔습니다.”
파리아스의 말을 듣자, 태자는 물론, 가까이 다가온 파드무스도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버지, 그 친구가 속옷 바람으로 달려왔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빚쟁이한테 쫓겨서 도망오기라도 했답니까?”
“모르는 소리 마라!
그 친구는 자기 대대 병력을 이끌고 야만족 땅 깊숙이 들어갔다가, 파로크 성채 근처의 들판에서 기습을 당해서 병력이 모두 전멸 당하고, 혼자만 속옷 바람으로 도망쳐 왔단 말이다.
며칠 동안 밤낮 없이 죽기 살기로 내달려서 여기까지 온 다음에 성문 앞에서 기절했다고 한다. 온몸이 멍 투성이이기도 해서, 지금은 군의관이 보살피고 있다.”
페레이즈 태자와 파드무스는 실로 어이가 없었다.
“아니, 아저씨, 전임 족장이 죽은 뒤로, 아직 저놈들이 본격적으로 새로운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닌데, 아군 대대 병력이 왜 함부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전멸 당했단 말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페레이즈가 묻자, 파리아스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저도 안 믿어집니다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카시우트가 속옷 바람으로 달려온 직후, 제 16군단으로부터 제 3대대의 전멸 사실을 알리는 공문이 도착했으니까요.
군단의 근위 기병대장인 프레데일이 직접 공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현재 제 집무실에 앉아서 목을 축이면서 태자 전하를 만나 뵙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리아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페레이즈 태자에게 문제의 공문을 내밀었다. 태자는 그 공문을 받아 들고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가서 프레데일을 만나 봅시다. 파드무스, 자네는 군의관한테 가서 한시라도 빨리 카시우트를 깨워서 나한테 보내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파드무스가 명령을 받고 떠나자, 태자는 파리아스와 함께 성큼성큼 성주 집무실로 향했다.
제 16군단의 공문에 따르면, 문제의 대대 병력 전멸 사건은 7월 11일 밤에 벌어졌다고 했다.
원래 카시우트란 젊은이는 플로젠 왕국 남부 영토를 통틀어 매우 유능하고 촉망 받는 인재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아버지인 카드펠드와 누나인 코렐리아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것은 물론이고, 훗날 처남 매부 사이가 될 페레이즈 태자로부터도 여러 차례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중요한 돌발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군단장인 카드펠드가 그 사태를 수습하고 공을 세우는 중요한 역할을 자신의 아들에게 맡겼다고 하여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을 터였다.
페레이즈 태자의 입장에서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이었다.
약 반년 전인 현자력 182년 1월, 페레이즈 태자는 통칭 케르비오라고 불리는 야만족의 왕 카라미르와 한바탕 격전을 치른 바 있었다.
그 힘세고 위풍당당한 50대 초반의 남자는 오랜 세월 동안 분열되어 있던 케르비오 족의 여러 부족을 2/3 정도 통합하여, 소위 케르비오 국왕을 자처한 인물이었다.
그는 험한 산악 지대에 있는 요새 도시 카르몬에 수도를 정하고, 자신의 장녀인 카란드라를 조상신을 섬기는 샤먼으로, 장남인 카르스덴을 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나름대로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까지 했다.
남쪽 국경지대를 항상 어지럽히는 야만족 케르비오가, 플로젠 왕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완전히 하나의 국가 체제를 갖추고 통합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사방에 적을 두고 있는 왕국으로서는 또 하나의 만만찮은 강적이 생기는 셈이었다.
왕국 남부 국경지대에 머물면서 그곳을 안정시키기 위해 케르비오 족과 격전을 치르고 있던 페레이즈 태자는, 당연히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태자가 선택한 작전은, 제 15군단의 전 병력과 제 16군단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보급 부대 없이 야만족의 땅 깊숙이 과감하게 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신생 케르비오 왕국의 기반이 다져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페레이즈 태자가 기민하게 케르비오 족의 땅 깊숙이 침입하여, 투항하는 부족은 살려주고, 저항하는 부족은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자, 새로 즉위한 카라미르 국왕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입지가 든든하지 못한데, 이대로 태자의 초토화 작전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부족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릴 위험이 매우 컸던 것이다.
카라미르 국왕은 당장 수도 주변에서 최대한 끌어 모은 병력을 이끌고 페레이즈를 저지하기 위해 국경에서 가까운 성채 파로크로 진군하는 한편, 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장남 카르스덴에게는 더 많은 지원군을 모아서 자신이 페레이즈와 싸우는 틈에 배후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카라미르와 카르스덴 모두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으므로, 케르비오 족의 병력 동원과 반격 또한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카라미르 국왕이 직접 이끄는 자칭 케르비오 왕국의 3만 병력과 페레이즈가 이끄는 플로젠 왕국의 1만 2천 병력은 파로크 성채에서 무려 닷새 동안 밤낮 없는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양군 모두 정예 병력이고, 지휘관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승부는 쉽게 갈리지 않았다.
그런데 단 한 명의 병력이 아쉬운 상황에서 페레이즈는 기민한 승부수를 던졌다. 프레데일이 이끄는 제 16군단 기병대를 신생 케르비오 왕국의 수도인 카르몬으로 진군시켰던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1천명 정도의 기병대가 험한 산악 지대에 있는 요새 도시 카르몬으로 진군해 봤자, 그게 그렇게 큰 위험이 될 턱이 없었다.
하지만 과감한 기습에 놀란 상황에서 적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카르스덴의 지원군 3만 병력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일시적으로 행군을 멈추고 카르몬을 방어하기 위해 상황을 살피고 말았다.
이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 틈에 프레데일은 태자의 사전 지시에 따라 진군을 멈추고 병력을 돌려 카라미르가 이끄는 케르비오 왕국의 병력을 후방에서 기습했다.
카라미르의 입장에서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장남의 지원군은 오지 않고, 그 대신 예상하지 못했던 플로젠의 정예 기병대한테 허를 찔린 셈이었다.
결국 케르비오의 3만 병력은 앞뒤에서 난타 당하여 전열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 틈을 노려 페레이즈 태자는 소수의 기병과 함께 적의 본진으로 돌파해 들어가 직접 케르비오 국왕을 자처한 카라미르의 목을 베는데 성공했다.
전열이 붕괴된 상태에서 국왕까지 전사하자, 살아 남은 병력은 당연히 전의를 상실하고 모조리 도주해 버렸다.
케르비오 국왕을 자처하는 카라미르의 목을 베고, 야만족의 정예 병력을 1만명 넘게 살해하는 큰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페레이즈 태자는 적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병사들이 많이 지쳤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깊이 진군하지 않았다.
일부 참모들은 승세를 몰아 곧장 카르몬으로 진군할 것을 주장했지만, 태자는 단호히 거부했다.
카르몬이 워낙 방어하기 좋은 요새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아직 그 주변에는 카르스덴이 이끄는 3만 병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태자는 뜻밖에도 파리아스와 파드무스를 파견하여 평화 협상을 먼저 제안했다.
죽은 왕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카르스덴은 누나인 카란드라 및 동생인 카를로만과 신중하게 의논한 끝에, 페레이즈 태자의 평화 협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결과 카르스덴과 페레이즈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협정이 체결되었다.
1. 케르비오 족은 독립 왕국의 건국 선언을 철회하고, 플로젠 왕국에 다시금 충성을 맹세한다.
2.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케르비오 족의 위대한 족장 카라미르의 목을 정중하게 반환한다.
3. 플로젠 왕국은 모든 군단이 케르비오 족의 영토에서 철수하고, 대신 평화적인 교역을 위한 상인을 파견한다.
4. 카르스덴은 두 번 다시 플로젠 왕국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
5. 서약의 증표로 동생인 카를로만과 유력 인사의 자제 100명을 즉시 인질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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